일흔번씩일곱번

죽음... 그 금기의 단어를 찾아서.... 일흔번씩일곱번 2004/03/04 18:59

한스킴 2013. 4. 23. 14:01



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아니.. 우리의 육은 죽어도, 영은 영원히 사는 것을 알기에
육도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문제로 
무척이나 고민하던 시간들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저도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릿한 느낌을 알고있으며,
그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두렵기 까지 합니다.

내가 두고 가야 할 
이세상의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으며,

내가 죽어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존재할 이 세상이 섭섭하고, 
내가 하여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은데
내가 죽으면 어떻하나 하구....
울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게 됩니다.
오늘, 거리를 지날때 나를 향해 달려드는 차량에 의해
내가 원하지 않지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받은 건강검진 후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황은 다릅니다.
죽음을 느끼지 못 하구 사고로 죽는 경우와
죽음의 선고를 받고 기다리는 심정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게 됩니다.
이 점은 우리들이 확실히 알 수 있는 몇 가지
진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찾아오는 죽음을 올바르게(?) 기다리다 죽을 수 있을까요?
     
올바르게 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슬픔을 남기지 않고 죽는 것...
우리가 두고 떠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의 생애와 나에 대한 기억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앞으로 남은 시간에 내가 아직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었일까?"
라는 질문이 아니라..
     
"내 다음 세대들을 통하여 나의 생명이 계속하여 남아 있으려면
 나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히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사랑의 영을
친구들에게 보내셨으며...
친구들은 그 성령과 함께 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체 게바라는 그의 삶과 죽음으로 세상의 젊은이 가슴에

혁명이라는 꺼지지 않는 불을 심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죽어
친구들을 떠날 때 
그들에게 사랑의 영을 보낼 수는 없을 지라도

그들의 가슴속에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너무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죽는 것을 준비하기만 한다면,
죽음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지는 못해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 될 수 있는 그러한 죽음,
이것이 언젠가 죽게 될 우리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한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