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괜찮다괜찮다

'나이'라는 함정에서 빠져 나오십시오.

한스킴 2016. 7. 27. 00:04




  저는 영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둔한 사람입니다. 덕분에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나는 왜 다른 사람보다 영리하지 못하고, 뛰어나지도 못하고, 한 박자 늦게 깨 닳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 다음 행동이 내 모습은 부인하고 내 진가를 모르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서 빠져나와 홀로 있으면 그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경쟁에 내 몰려서 어디론가 쫓기듯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부지런히 스펙을 쌓는 시대가 그들을 내몰고 있는 겁니다. 해서 항상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만 쳐다봅니다. 그런 세상이 주는 잣대에만 함몰되어 진정한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항상 ‘하나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떻게 나한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하고 하나님을 향한 불평을 쏟아 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은 나를 만사형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존재로 한정짓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내 잘못으로, 내 미련함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내 기도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저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단코 변하지 않고 이루어 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40년 광야 생활처럼 지체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통하여 이루실 큰 그림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실패하는 것은 결단코 좋은 일입니다. 나에게 닥치는 고난 역시 결단코 좋은 징조입니다. 내가 부족하여 겸손하게 만든 것은 기쁜 일입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제자, 사도들은 모두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치열하게 젊은 날 고민을 하면서 남을 원망하는, 불평하는 시간이 당연한 시기를 지나 불혹이 넘어서야 어느 정도 감사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른 나이에 출세하는 것을 부러워하던 것을 멈추었을 때 나도 어느덧 그들과 같은 수준의 지위에 있었고,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인정하고 칭찬할 때 필요한 것이 채워졌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불평을 없애면서 찾아온 변화입니다. 부족한 것은 불편합니다. 때론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걸 쿨하게 인정하고 다른 것으로 채워 놓으면 내공이 생깁니다. 내가 맞다드렸던 실패는 유익이었습니다. 한 살씩 먹어가는 나이가 초조함에서 여유로 바뀝니다.


우리가 잘하는 하는 말 중에 자신을 합리화 하거나, 벌어진 현실에 대하여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말이 있습니다. “만약 ... 했더라면”입니다. 기억해 볼까요. 그 사람이 좋다고 고백했을 때 거절 했더라면, 그 연대보증을 거절 했더라면.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저축을 했더라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일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했더라면’이라는 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성경에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이 나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을 살아오면서 마지막 기적을 일으킨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세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이며, 예수의 친구였던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이 마지막 기적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기적을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 하십니다. 친구인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에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먼저 달려가 맞이하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말하였습니다. 곧 이어 마리아가 나타나 통렬하게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같이 한말은 무슨 뜻일까요?  마르다와 마리아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던 여호와 하나님을 고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라면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백부장의 죽게 된 종을 고쳐 주셨을 때처럼, 그 소식을 듣는 자리에서 ‘나사로가 나았다’ 하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소처럼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즉각적으로 반응하셨던 예수님이 일부러 지체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실마리는 요한복음 11절 41-42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안내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주검이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도 어쩔 수 없구나, 그래서 슬퍼서 우는 구나하고 모여든 모든 사람이 생각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여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기도는 마치 배우가 청중들을 바라보면서 대사를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대중을 의식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펼쳐집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들으신 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서 있는 이 사람들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들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님은 그가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순간 마지막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심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의 택한 백성에게만 향합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하고는 상관없는 기적이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이 글을 기록한 요한은 이 기적 이후의 모순적인 사항을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했다’ 53절.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에게는 구세주 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원수입니다. 이 부활이 마지막 기적이었습니다. 이 기적이후로는 모든 표적과 이적이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에 사람들이 흥분하고 몰려들지만 그 기적이 사람의 삶을 변화시켜 믿음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고 계셨습니다.


내 인생에 ‘....했더라면’ 하는 일이 일어나면 나사로를 기억 하십시오. 그리고, 아 이 일은 일어나기로 작정된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필히 일어나도록 나흘을 지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 이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지를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더 쉽다는 것을 아시죠?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내 모습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 일이 안된다고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에 자꾸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인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입니다. ‘얘야 내 이야기를 들어보렴, 네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줄 터이니 나에게 집중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실패하였다면, 지금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염려 없이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걱정해야 할 때는 하나님의 신호 없이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려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왜 하나님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제한하고 멈추게 하고 따라 오라고 말합니다. 좁은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잘 될 때는 하나님을 나와는 멀리 분리시켜 기억에서도 지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유익합니다. 급수가 올라가듯이 고난이 쌓이면 점점 하나님이 완성하고자 하는 나와 근접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을 받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경우, 할 수 있는 적당한 나이란 없습니다. 그런 한계는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고자 하는 땅의 사람들 전략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습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 계획하고 있음을 믿는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도하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행하고자 하는 바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를 온전히 맡기면 됩니다. 사사기를 읽어보면 기드온을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 사사로서의 사명으로 부를 때 자신의 처지를 볼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표징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일군을 부르는데 대부분이 낮고 천한 자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내 모습 내 모양 그대로를 들어서 쓰시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하십니다. 기드온처럼 극히 약하고 작은 자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많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들을 귀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이 먼저 택한 백성을 찾아와 믿어주고 우리는 그 하나님이 은혜로 우릴 믿어주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해요? 하고 물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명확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또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연극을 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다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기도할 때마다 쇼를 일삼는다! 하나님께서 극장 객석에 앉아 계시다는 말이냐?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하나님 앞에서 연극하고 싶은 유혹이 들지 않도록,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라.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고 솔직하게 그 자리에 있어라. 그러면 초점이 너희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그분의 은혜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에는 이른바 자칭 기도의 용사들이 가득하고, 그들은 온갖 비결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얻어내는 방법들을 퍼트릴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 하십니다. ‘그 허튼 소리에 속지마라’

네가 상대하는 것은 너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 보다 더 잘 아신다고 하십니다. 위로가 되지 않으시나요? 나의 필요를 나 보다 먼저 아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길게 미사여구를 붙여서 중언부언 기도를 하여 시간의 분량을 채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의 부모님이 계십니다. 지금 외출하기 위해서 약간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외출하는데 돈이 필요 합니다’하거나, ‘저 지금 외출할 거예요’ 하면 벌써 알고 준비하였던 것을 주실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삼십분 동안 연극을 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기도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몫을 다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을 스스로 막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들의 꽃을 정성스럽게 키우시듯이, 나를 돌보시면서 자랑스러워하시며,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그 일을 시작하시면서, 나로 기도하게 하고, 행하게 하여 그 공을 나에게 돌리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백성을 들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압니다. 나에게 닥치는 고난과 불행 속에서도 그것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삶에 온전히 거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흠뻑 빠져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서 살게 된다면, 무엇인가를 놓칠까 봐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을 채워 넣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아주 명확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자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이 때문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겁니다. 내일 어떤 일이 있을까 미리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 내게 몰려온다고 해도 그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라는 숫자에 지지 마십시오. 나를 제한하는 ‘나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스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