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례미야주해서: 구원과 회복의 드라마 / 장성길 / 이레서원
[1]“예레미아야,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저는 살구나무דקש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네가 바로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보고דקש 있다.”
이 장면은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주고받는 이야기로 똑같은 문자로 뜻을 달리하여 말씀하는 것이다. 똑 같은 알파벳을 사용한 하나님의 워드플레이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한다. דקש는 첫 번째는 ‘샤케드’라고 발음되어 “살구나무”가 된다. 두 번째는 ‘샤카드’라고 발음되고 “지켜보다”는 의미가 된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는 이때는 유다에 심판이 임박한 시기였고 이때 수많은 선지자가 소명을 받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이사야,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소명을 주시지만 예레미야 와는 대화를 하신다. 아마도 예레미야가 40년의 긴 세월 동안 사명을 감당해야 하므로 그 긴 기간 동안 소명을 잘 감당하도록 위로를 주시기 위한 장치라고 이해를 한다. 원문의 뜻을 살펴보며,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하고 말할 때, 살구나무가 매년 봄에 싹트는 것을 인지하면서 대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개나리가 피면 봄이고 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 예레미야의 답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네 말이 맞다, 너는 매년 봄에 살구나무 가지에 싹이 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처럼 내가 항상 내가 한 말이 (너에게 준 소명의 완성까지)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꺼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40년간의 긴 사역 동안 지치고 힘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구체적으로 워드플레이까지 보여주시면서 자신의 약속을 확정하신다.
예레미야서의 전체적인 구조는 4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있다.
1. 서론, 소명을 받는 예레미야(1:1 - 1:19)
2. 유다의 죄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2:1 -25:38)
2:1 - 6:30 이스라엘 불신앙과 하나님 심판 (시)
7:1 -10:25 참 예배와 언약백성들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 (산문7:1-8:4, 시8:5-10:25)
11:1-20:18 상징행위, 신뢰의 고백과 개인적 타원 그리고 신탁의 말씀들 (산문)
21:1-24:10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산문, 시23:9-12)
25:1-25:38 열방 나라들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3. 심판을 통한 구원과 회복, 하나님의 신탁(26:1-51:64)
26:1 -29:32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산문)
30:1 -33:26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주권적 회복 (시30:1-31:40, 산문32:1-33:26)
34:1 -36:32 거룩함과 도덕적 신실함이 없는 백성에 대한 심판선언. (산문)
37:1 -45: 5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이후 (산문)
46:1 -51:64 열방을 향한 신탁 (시)
4. 후기, 역사부록;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속에 비추어진 희망(52:1-52:31)
제1부. 서론, 유다의 죄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1:1 – 25:38)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소박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에 대한 참 예배와 그들이 지키겠다고 한 언약에 대한 자발적 순종이었다.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성전에 올라가 절기만을 지키는 위선적인 예배 행위를 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도리를 다 하였다고 자위한다. 언약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지적에 대하여도 가정단위로 우상숭배가 깊숙하게 침투하였으나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였고 생활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의 상징인 성전이 예루살렘 성안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자신들은 세상의 어떤 재앙으로부터 보호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때마다 절기를 지켜주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의 생활은 하늘여왕을 위하여 떡을 만들어 받치고, 성전 옆에 위치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이라는 산당을 쌓아놓고 그곳에서 자신의 어린 아들과 딸을 불살라 제물로 받쳤다. 그리고는 뻔뻔하게 그것이 여호와의 명령인 것처럼 우상을 섬겨 여호와께서 진노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의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 끊임없이 권면하기도 하고, 예레미야로 하여금 백성을 위하여 중재하지 말라 하고 심판을 확정하신다.
우리도 지금 유다의 백성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유다 백성이 해와 달과 별을 섬겼듯이 우리도 세상문화와 물질과 돈과 명예와 을 사랑하여 그리로 달려가고 있지 않을까? 그것을 사랑하고, 섬기고, 뒤쫓아 다니고, 어떻게 그것을 얻을까 물어보고 찾아 다니고, 그것을 갖기 위해 숭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레미야가 악한자의 형통함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여호와께 질문을 한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 동안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예레미야의 이 질문에 대하여 인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시선을 돌려 선지자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것을 주문하신다. 여호와가 얼마나 예레미야를 사랑하시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돌이킴이 없다. 거짓 선지자들의 평안하다는 말을 기뻐하였고, 여전히 바알에게 예배를 드렸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을 위하여 중재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선지자의 사명이 중재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준다.
잘못된 선지자의 말을 듣고 따르고, 그 말을 기쁘게 여기는 것이 결국에는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재앙이 되는지를 말하여 준다. 선지자가 거짓을 꾸며 예언하고 그 공동체가 그것을 기뻐하면 결국 공동체는 파멸 당하고 밤낮으로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내 죄가 무엇이냐’고 당당하게 물었다. 예레미야는 탄식한다. 백성들을 구원 할 길이 없다. 선지자로서의 사명은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지,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또한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그런 여호와를 향한 탄식,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에 여호와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신다. 예레미야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냐’ 아니면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할 것이냐’하는 선택이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물으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는데, 백성들은 맘몬의 노예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리더십들이 부패하였고,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은 바알을 의탁하여 예언을 하므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 백성들을 악에서 돌이키도록 이끌어야 할 사명을 가진 선지자들로부터 도리어 악이 나와 이스라엘 온 땅에 퍼지므로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무화과 두 광주리 환상을 보여준다. 광주리 하나에는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고, 다른 하나에는 나빠서 먹을 수조차 없는 나쁜 무화과가 담겨있다. 좋은 무화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쁜 무화과는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과 애굽으로 망명한 유다 백성들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 심판의 날에도 바벨론으로 남은 자들을 보내시고, 결국에는 돌아오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제2부. 심판을 통한 구원과 회복, 하나님의 신탁. 후기.( 26:1-52:32)
26장을 시작하면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설교를 하고 그 때문에 재판에 처하게 된다. 이런 재판 절차를 거쳤던 두 선지자의 극명된 상황을 보여준다. 선지자 우리야가 예레미야와 동일한 관점에서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한 것 때문에 여호야김에 의하여 처형을 당하였다. 반면 예레미야는 재판관들과 장로들에 의하여 구함을 당하는데, 예레미야의 말이 가짜라면 여호와께서 직접 그를 벌하실 것이라는 것과 예레미야를 죽인다면 곧 우리의 생명을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주장에 의하여서다. 이런 예레미야의 극적인 구출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선지자로 부름 받은 예레미야의 거룩한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 때문이다.
관점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아니 내가 그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이었으면 예레미야의 말을 기쁘게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봉신이었거나 동맹을 맺었던 국가들 즉 에돔, 모압, 압몬, 두로와 시돈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복종하여 3대 동안 바벨론의 멍에를 메라고 예언한다.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사람으로 바벨론이 뽑힌 것이다. 이때 백성에게 필요한 위로는 잡혀갔던 포로가 돌아오고, 빼앗아간 예루살렘의 기물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선지자의 위로이다. 그것을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성전에서 외친다. 기쁜 소식이다. 백성들에게는 소망의 메시지다. 이것을 믿지 않았을까? 나도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당신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바람을 고백한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죽는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에게 보낸 편지는 성도의 기도가 왜 필요한가를 가르쳐 준다. 여호와는 바벨론이 3대에 걸쳐 왕국을 유지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곳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3대에 걸쳐 그곳에 있어야 하는 형편에 처하였다. 그 백성들을 향하여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라는 편지를 받는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소망을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그곳에서 번성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녀를 애굽에 넣어서 번성하게 하고 민족을 이루게 하신 장면이 떠 오른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낸 이유는 아마도 당신 바벨론에서 거짓 선지자가 2년 만에 돌아갈 것이라는 헛된 예언을 하고 있고 그것이 백성에게 듣기 좋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70년 동안 고대 근동의 강한 나라 바벨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남은자 들을 보호하시고 키우시는 인큐베이터로 선택한 것이다. 그곳에서 번성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거짓 선지자가 있다. 여호와가 시키지도 않은 거짓을 말한 예언자 아합과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화형에 처함을 당한다.
예레미야는 전체적으로 연대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어서 구분하기 까다롭다. 예루살렘 마지막 리더십 시드기야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는 예레미야를 세 번이나 불러서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을 들었지만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지 못한다. 헌데, 리더십으로서 적국에 항복하는 것이 가능 했을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 말씀을 따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백성과 고관들, 신하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 그것이 더 중요한 시드기야는 항복하지 못한다. 싸울 때 승리를 예상하지 못하면 화친하는 것이 리더십이 판단할 일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행하지 못한 시드기야의 복지부동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왜 선지자를 통한 여호와의 뜻을 거부했을까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열방을 통치하기로 작정하였고, 바벨론의 부상자들 만으로 예루살렘을 쳐도 멸망할 것을 말씀하셨다. 결국 이방인들도 그들의 멸망이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던 이유 때문에 재앙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시드기야만 듣고도 몰랐다. 이 멸망으로 예레미야도 포로로 잡혀가나 바벨론 군대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하여 유다에 남게 된다. 남겨진 자들도 결국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없고, 예레미야 만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로 생각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소수의 애굽을 피하여 도망 나온자 외에는 구원이 없을 것이라는 저주가 선포된다. 여호와를 오해하게 되면, 멸망의 근거가 되었던 우상숭배를, 그것을 멈추어서 멸망하게 되었다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애굽으로 도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한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중재하는 바른 선지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풍요로운 죄악 된 삶을 따라 살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이다. 육신의 멸망과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다.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메섹, 계달과 하솔, 엘람, 바벨론등 열방을 향한 신탁의 선포는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역사의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 바벨론은 3대 동안 열방을 통치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을 뿐이다. 또 그들이 멸망을 당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유다를 침공하였을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가한 행위에 대한 보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구원자 이심을 말하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