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비유(01) 아버지의 은혜. 눅15:11-32
예수님의비유(01) 동백두레교회/주일예배
은혜로운 아버지의 비유 2015.05.31. 한스킴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제가 요즘 학기말 과제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과목 중에 "기독교상담학"이라는 과목이 있는데요. 상담학 과제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부분이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 드릴 겁니다. 제 아버지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 더 빠르게 제가 체험할 수 없는 세상을 간접체험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3년에 ‘짐케리’가 주연한 "브루스 올마이티"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모건프리먼’이 현대식 창조주로 출연했던 영화인데요. 창조주가 지쳐서, 1주일간 휴가를 가기로 했다는 내용을 모티브로 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오래된 영화여서 케이블TV에서 검색하시면 무료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찾아서 한번 보시면 감동이 있을 겁니다. 짐케리는 앵커자리를 노리는 리포터 역할로 나옵니다. 창조주가 일주일 동안 휴가를 떠나면서, 짐케리에게 일주일 시한부로 창조주의 권한을 위임해 줍니다. (우리도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영화에서 짐 케리가, 일주일 동안 창조주가 된 것처럼 만일 여러분이 창조주가 되었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영화에서 짐 캐리는 재미있는 일을 합니다. 여자친구에게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달에 로프를 던져 당겨 오기도 합니다. 그날 저녁 뉴스에는 곳곳에서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난리가 난 소식이 전해집니다. 또 라이벌 앵커가 생방송 중 혀가 꼬여서 헛소리를 하게도 만들었습니다. 그 방송 실수로 라이벌은 메인 앵커에서 제외가 됩니다. 음식점에서 '수프'가 나오자 홍해를 가르듯이 '수프'를 둘로 갈라지게도 만듭니다.
여러분은 그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가 일주일 동안 창조주의 일을 대신 하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할 것 같습니까? 먼저, 몸이 불편한 여러분들은 천사 같은 몸이 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당장 심판을 행 할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을 빨리 지옥에 던져버리겠습니다. 탕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금 당장 심판 받게 하여서, 나쁜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잘사는 것을 빨리 멈추게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저는 인간입니다. 저는 하나님처럼 오래 참고 기다리지 못합니다. 탕자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지 못합니다. 제가 지난 3월에 요나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요나는 사흘 길을 걸어야 하는 니느웨를 단 하루만 걸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만 니느웨가 심판 받을 것이라고 외치고는, 성읍 동쪽에 앉아 니느웨를 바라봅니다. 원수가 망하는 꼴을 보겠다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집 나간 아들을 오랫동안 동네 밖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린 아버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 아들을 우리는 오랫동안 탕자라고 불렀고,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바람대로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발견하고는 달려가서 안아주고 입을 맞추어 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매우 길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상당한 부자인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한테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유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됩니다. '이제 죽게 되었구나'하고 밑바닥 죽음의 나락에 떨어져서야, 아버지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와 맏아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본문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비유에 관한 설교를 들거나, 혼자서 비유 부분이 있는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루는 것이 비유라는 것입니다. 비유라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진 가르침 입니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정작 본질을 놓치고 맙니다.
성경은 누구에게 집중하고 있을까?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편의 단편 영화라고 하면 누가 주연배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예화가 '탕자의 비유'라고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지금까지 그렇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탕자에게 집중하여 성경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주연배우가 탕자일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을 읽으면 3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순서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등장인물(1) 둘째 아들 (탕자역할입니다). 등장인물(2) 아버지입니다. 등장인물(3) 큰아들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 옆을 지킨 성실한 아들 역할입니다. 자 등장인물이 모두 소개 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주연은 누구 일까요?
우리에게 주연을 선택 하라고 하면, 선이 굵은 인생을 연기한 탕자역할의 둘째 아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그를 주연 배우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맏아들은 전문용어로 '밥맛'입니다. 부모 된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고,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르는 샌님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아버지 역할에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맞이 하는 그 은혜의 드라마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막내 아들이 경험한 험난하고 드라마 같은 인생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베푼 은혜를 탕자의 이야기로 슬며시 집어넣어서 이 드라마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탕자의 회개에 열광을 합니다. 다음의 성경을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 구절을 읽어보면 탕자가 자기 죄에 대해서 두 가지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 관찰이 됩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인식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방탕한 생활로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또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버지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그렇게 고백하고,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회개는 자기가 행하였던 잘 못된 길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이렇게 탕자가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그의 결단이 사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의 이런 행동은 은혜가 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설교에는 적합 합니다. 탕자는 죄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도 전도 폭발 훈련을 하는데요. 교육내용 중에 죄인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훈련이 매우 유익한데요, 다음 2기 때 많은 분들이 교육에 참여해서 훈련을 같이 받으시면 본인의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할 것 입니다.
아 버 지
‘죄인’ 이라는 단어에서 전설적인 이야기가 생각나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전도 했습니다. 사실, 전도를 하였다기 보다는 아버지의 결단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따라서 교회를 가시겠다는 겁니다. 저희 집이 종가입니다. 아버지가 종손이고, 저도 종손입니다. 제사가 열네 개 정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 다닌다는 것은 그 제사를 더 이상 드리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그건 지금까지 제가 겪었던 아버지를 생각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회에 가시겠다는 그날 아침에, 아버지가 잠깐 밖에 나갔다 오시더니 술이 잔뜩 취해서 들어오셨습니다. 이 상태로 모시고 교회에 가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그때 청년회장 이었고, 결혼을 하고 신혼을 부모님과 같이 지낼 때였는데요. 전문용어로 "쪽 팔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왠지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고민 끝에 그냥 모시고 나갔습니다.
그날 난리가 났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으시는 데요. 지금 사모님 앉은 자리쯤에 앉아 있었습니다. 술이 취했으니 얼마나 졸리겠습니까? 졸다가 깨다가 하면서 "목사님 그 말은 틀렸습니다." "아, 그 말은 맞습니다." 하면서 예배를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저는 성가대석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예배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버지가 어찌어찌 학습을 받았고, 세례를 받기 위한 교육까지 모두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는 날 문답이 진행됩니다. 아시겠지만, 문답에 아멘! 하고 대답하면 됩니다. 첫 번째 질문에 아멘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목사님이 읽었습니다.
둘째, 그대는 죄악 중에 잉태되었고 태어나서 본성적으로 진노의 자녀이며,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고,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이 있어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서 주님의 계명을 자주 어긴다고 고백하며, 이러한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회개하십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갸우뚱 하시더니 '아멘'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걸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주저주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불안해졌습니다. 목사님이 세 번째 질문을 합니다.
셋째, 그대는 자신의 죄인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줄을 알고, 따라서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구원을 받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줄 아십니까?
아버지가 갑자기 안절부절 하면서 대답이 없다가 '목사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쫌 당황했습니다. "김선생님, 선생님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목사님, 내가 죄가 없는데 죄인이라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말합니까?"
제 아버지가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무척 고지식하고, 고집도 쎄시고, 좀처럼 자신의 의지한 바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들인데 제 아버지를 모르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일주일에 6일 동안 술을 마셨고요. 매일 술주정도 하였고, 밤새도록 소리지르고, 집안 집기들 다 던져서 부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남에게 싫은 소리도 안 했고, 나쁜 짓도 안 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도박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같이 명절에 화투도 한번도 안하셨구요. 남에게 싫은 소리, 부탁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술을 안 드셨을 때만 그러셨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그날 세례문답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하나님 만나실 때까지 절대로 그런 신기한 장면은 보실 수 없을 겁니다. 그날 우리교회는 정말 신기한 장면을 보았고, 교회가 생긴 이래 처음이었습니다. 그 후 교회에서 그 같은 일이 다시는 없었습니다.
정말 드라마 같지 않습니까? 작은 교회였지만 아버지는 여러모로 스타였습니다. 이래서 탕자가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버지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면 세례를 받지 못할뿐더러, 하나님이 달려 나와 탕자의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입술을 맞추지도 않습니다.
탕자가 회개하지 않고 먼 나라에 그대로 있었다면,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잔치에서 새 신과 제일 좋을 옷을 입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아들의 지위가 회복되는 반지도 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많은 가르침을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 하셨을 까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설명하였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마태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믿는 성도에게는)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여기에서 너희라고 말하는 대상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즉 지금의 교회를 말합니다. 비유를 알아 듣지 못하는 그들이란, 마태복음을 기준으로 보면 ‘많은 무리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보고자 나온 ‘구경꾼’들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고, 세상을 의미 합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위해서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인가 아닌가는 믿어서 성경을 읽는 것과 믿지 않음으로 읽지 않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고 있으시죠? 네,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표시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식으로 성경을 읽기도 하는데, 믿는 자녀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 자녀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셔야 '있는 자가 되어, 받아 넉넉하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하나님을 오해하시면 천국을 빼앗기게 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아직 3명의 주인공 중에서 주연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주연배우가 누구인지 잠시 후 우리 손으로 뽑을 겁니다. 다수결로 정하겠습니다.
결정적인 주연배우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왜 말씀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 이 비유가 15장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의 성경을 읽겠습니다.
누가15: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는 가운데 비유로 말씀합니다. 15장에서는 3가지 비유를 말씀 하셨습니다. 첫 번째, "잃어 버린 한 마리의 양" 이야기를 하시고, 두 번째로 "잃어버린 은전(드라크마)을 찾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설교의 본문인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가 위치 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3절을 방금 읽었는데요. 여기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세리와 죄인들" 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과 예수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 전부를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상황을 현대식으로 재구성 하면 이런 상황입니다. 이건 우리 아버지에게 써야 하는 것인데요. 아까 저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이 바리새인 같았습니다. 고집이 세고, 좀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직접 말하면 역효과만 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는(제가 방금 뭐라고 말했죠? 아버지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우회적으로 이야기를 몇 번 하여야, 본인의 행동을 고치십니다. 주로 영리했던 저랑 같은 이불을 덮었던 누나가 그렇게 하였는데요. 이렇게 합니다. 저를 마구 혼내는 겁니다. 아버지가 한 것을 나한테 덮어 씌우고 저를 마구 혼내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여러분 중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 있으실 텐데? 안 하시나요? 하실 텐데......
예수님 앞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세리와 죄인들" 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인 서기관"입니다.
자,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힌트는 저랑 같이 살았던 누나의 행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결국 누가 듣기를 바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으러 나온 세리와 죄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고 있지만, 그 옆에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듣고 깨달으라고 비유로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는 말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강의라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씀 드리는데 설교는 한 번뿐이 기회가 없습니다. 비유는 말이죠...... 예수님이 선택한 대상에게만 들리는 메시지 입니다.
우리는 첫 번째 무리인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둘째 아들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는 것 중에서 둘째 아들에 몰입하기 쉽습니다. 아버지가 베풀어 주는 잔치와 내 위치가 회복되는 것에 감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 속에 결단을 촉구하는 장치를 숨겨 놓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같이 바리새인, 율법학자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비유를 통하여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에게 결단을 촉구 합니다. "얘야, 너도 이 잔치에 기쁘게 참여하여라.
맏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맏아들이 돌아와서 한 행동들이 있습니다. 화를 내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께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과 존경을 표하지 않고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맏아들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의와 공의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비에 대해서, 아버지의 은혜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맏아들은 아버지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 이시라는 사실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본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맏아들을 어떤 사람과 같다고 했죠? 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 같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연 배우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제가 쉽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15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 비유는 예수님이 세리 그리고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이유를 묻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답변으로 들려주고 있는 비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할 겁니다.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보는 것은 우리가 비유를 잘못 보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은혜로우신 아버지의 비유”이고, 강조점은 아버지와 맏아들이 대면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주연배우는 아버지 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관심은 맏아들이 변화되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탕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며, 은혜로우신 분 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 그들에게 불경한 행동 이듯이, 예수님이 하는 구원의 사역을 비난하는 그들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태도를 바꾸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31절과 32절을 읽어보면 아버지가 맏아들을 타이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동생의 잔치에 참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흠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거만하게 처신하는 자들을 멸시 하십니다. 그러나, 겸손히 자신의 죄를 감추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를 찾는 탕자들, 간음한 자들과 세리들은 의롭다고 칭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사악하고 마음 깊숙한 죄에까지 하나님은 자비와 용서의 손길을 펼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께 돌아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여기 동백 두레교회에 있는 분들은 모두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탕자가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점점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지 않은지 살피셔야 합니다. 우리가 맏아들의 마음처럼 변하지 않는지 살피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지금 시대의 맏아들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용서가 가장 중요합니다. 용서를 하겠다고 결단하지 않으면 구원의 새 언약을 입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대상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에게는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이 내 존재의 이유가 된다면, 그 인생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 용서하지 않는 마음속에 사탄이 또아리를 틀고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용서가 일어나면, 당신은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때,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솔직해지십시오.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성경적 원리가 용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나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용서가 가장 큰 능력입니다. 용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다음 성경을 읽고 말씀을 끝낼 것인데요. 세례 받지 못했던 저의 아버지 뒷 이야기가 궁금 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그 후 세례를 받았고, 그 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되셨습니다.
다음의 성경을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결단하게 하십시오. 나의 본질이 변하게 하십시오. 내 마음속의 미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었던 그 은혜를 생각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살리셨는데, 정작 나는 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은, 내 자존심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도 나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나의 백성들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우리의 지식이 바리새인이 되고 율법학자가 되어 남을 판단하려는 행동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본질이 변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존재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고문헌:
1. John Nolland 『WBC 성경주석 누가복음』 (서울:솔로몬 2004)
2. 복음서의 비유해석, 김선욱, 학습노트
설교자 연구노트: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잃어버린 아들(탕자의 비유) 혹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본문을 연구하고 과연 이러한 제목으로 성경의 텍스트를 설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진짜 의도를 찾아본다.
1. 구조분석
15:11-21 둘째 아들의 부정적 모습 - 먼 나라에서 재산을 다 없앤 후 돌아온다.
15:22-24 아버지의 긍정적 모습 - 아버지의 환대와 아들 지위가 회복된다.
15:25-30 맏 아들의 부정적 모습 - 맏아들의 불만과 아버지에 대한 비난의 모습
15:31-32 아버지의 긍정적인 모습 -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환대하는 정당성과 맏아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2. 구조분석에 따른 구절 별 설명.
i) 둘째 아들의 부정적 모습 15:11-21
(1) 유산 분배 요구. 둘째 아들이 먼저 나서서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원칙적으로 둘째 아들의 행동은 곧 결혼을 하기 위해서라든지 또는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이민을 가기 위하여 그런 식의 요청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본문 속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고, 설명하고 있지 않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결코 긍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중에 이 아들에 관하여 "죽은” 그리고 “잃어버린”이라는 표현들을 사용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둘째 아들이 유산의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한 것을 아주 짤막하게 다루고 있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아주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부터 떠나가게 되면 둘째 아들은 점점 더 나빠지게 될 것이다.
(2) 부모 공경에 대한 율법을 어기고 있다. 흉년이 든 경제적인 상황 속에서 겨우 연명할 정도의 품삯을 받았던 둘째 아들은 결국 점차 굶어 죽어 가는 현실에 봉착하게 되었다. 둘째 아들은 죽기 직전의 상태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아버지를 부양해야 할 수단이 되는 재물을 탕진했다. 이것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율법을 범한 것이고, 나중에 그가 고백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15장18, 21절)라고 말한 데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3) 부정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다. 에이스 코란 마크란(εἰς χώραν μακρὰν "먼나라에") 은 19:12 에서도 발견된다. 아소토스 (ἀσώτως "허랑방탕하여")와 동일 어원에서 나온 명사로 잠언에서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과 연관되고 있다. 떠나는 모습은 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 속에서 처음에 유산을 요구한 것과는 별개의 단계로 취급된다. 허랑방탕한 생활 속에서 재산을 허비한 것은 또 다른 단계로 나온다. 이런 식으로 청자는 오직 점진적으로만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거슬러서 의도한 "범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유대인들이 돼지를 혐오한 것에 대해서는 레위기11:7, 신명기14:8에 나타난다. 이방인에게 빌붙어 살았다는 것은 이미 유대인으로서의 신분과 관련된 것을 타협하고 자신의 신앙을 저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ii) 아버지의 긍정적인 모습 15:12, 22-24
(1)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15:12) 아버지는 탕자의 요구를 거절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오히려 그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2) 돌아온 아들에게 기대 이상의 환대를 하는 아버지. (15:22-24) 아버지는 기대 이상으로 탕자를 환대하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품위나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달려가 포옹하고 입맞추고 둘째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연다. 좋은 옷, 반지, 신발을 주어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iii) 맏아들의 부정적 모습 15:25-30절
(1) 맏아들은 아버지란 호칭 사용하지 않았다. 15:29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면서도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를 모욕했다.
(2) 아버지의 편애를 비난하였다. 15:29-30 그는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를 비난했다.
(3) '당신의 아들'이라고 비하하는 용어 사용하였다. 15:30 그는 자기 친구를 가리켜 “내 벗”(29절) 이라고 말하면서도 자기 동생을 가리켜 “당신의 아들”(30절)이라고 말하여 자신의 동생이 아니고, 자신 역시 마치 이 집 식구가 아닌 것처럼 칭하고 있다.
(4) 아버지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 집에 남은 재물이 모두 큰 아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아버지가 말하고 있지만, 그가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것을 불평했다면, 그도 역시 아버지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그가 육체적으로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고, 아버지의 명을 잘 지켰더라도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아버지의 명을 잘 따르지 않았던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iv) 아버지의 긍정적인 모습 15:31-32절
(1)맏아들을 품어주는 아버지. 맏아들의 불평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에게로 나아가서 (28) ‘아들’이라고 부르면서(31) ‘내 것이 다 네것’이라고 말하여 준다.
(2) 둘째 아들을 환대하는 정당성을 말하여 준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고 말한다.
(3) 맏아들의 결단을 촉구 한다. 전반부에서 탕자를 영접한 아버지가 여기 후반부에서는 투덜대는 아들을 위로한다. 그리고 맏아들이 결단할 것을 촉구한다. 둘째의 잔치에 참여함이 마땅하고 그것이 맏아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3. 신학적 의도와 목적
대 단락 15:1-32은 긴 비유로 끝난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등 앞서의 비유들 속에 나오는 하늘에서의 기쁨이라는 이야기는 15:11-32절에 나오는 아버지를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생각하게 함과 아울러 “찾음, 회개, 함께 나누는 기쁨” 이라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세가지 비유에 접근하게 만드는 복선 역할을 한다. 이 비유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사역 속에서 예수에게 다가온 죄인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저 주시는 너그러운 사랑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을 보도록 도와준다. 여기에서 신실한 자들은 잃어버린 형제들을 되찾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형제들이 되돌아온 것을 환영하고 축하해야 마땅하다.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이 비유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 모두를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신학적 의도와 목적은 본문의 내용을 잘 해설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어 본문을 풀어서 설명을 하고, 본문을 주제로 한 설교를 만들도록 한다.
이 이야기에서 두 아들은 각각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한 번씩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나누어 준 유업 중 자신의 분깃을 어떻게 현금화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처음부터 둘째 아들이 가족의 유대를 주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나타나 있고,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그의 동기들은 모두 악한 것들임이 분명해진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주어서 집을 나가도록 허용하지만,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의 형편은 갈수록 악화될 뿐이다. 유업을 현금화했을 때의 돈은 한동안 흥청거리며 살 만큼 충분한 것이었지만,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돈을 허비했으므로 좋은 시절은 곧 끝나고 만다. 흉년이 든 것은 단지 어리석은 선택들로 인해서 둘째 아들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앞당길 뿐이었다. 이 젊은이는 자유와 방탕을 선택했다.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 곧 은혜는 이내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서 성경의 말씀이 생각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둘째 아들은 천한 직업에 종사해야 했고, 방탕 대신에 서서히 굶어 죽어 가야 할 정도로 궁핍해졌다. 기아선상에서 헤매며 천한 일을 하느라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유대교적 신앙을 실천할 자유나 의지가 없었고 유대인들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해야 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고 싶었으나, 일하는 동안 감시가 너무 심해서 그것마저 훔쳐 먹기가 여의치 않았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이 젊은이는 자기가 예전에 떠나왔던 본향 집에서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닿을 수 있는 다리를 자기가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가족 속에서 자신의 그 어떤 미래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자기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조차 현재의 자신의 처지보다 훨씬 더 낫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계획을 세운다.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죄를 고백하고 가족의 농지에서 품꾼으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해 보자".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제안을 들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둘째 아들은 이제 자신의 곤경과 잘못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이야기는 둘째 아들로부터 옮겨져서 아버지로 향한다. 돌아오고 있는 사람은 둘째 아들이지만 가족 관계의 회복에서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이는 아버지다. 둘째 아들은 그저 집으로 다가오는 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엇이 가능한지를 깨닫지조차 못한다. 아들을 알아보자 아버지는 세월과 지위에 걸맞은 위엄을 다 내팽개치고 체면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설명의 말이나 죄의 고백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들은 스스로를 입증할 필요조차 없다. 둘째 아들은 돌아왔다. 따라서 그는 즉시 아버지의 넘치는 긍휼하심의 대상이다. 뜨거운 포옹 후에 아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데, 방금 경험한 일로 인해서 이 고백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되었고, 또한 한 가지가 수정된다. 이제 자기를 종으로 써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아들의 지위로 회복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종들에게 내린 지시들 속에서 확인된다. 그의 갈갈이 찢긴 누더기 옷은 제일 좋은 옷으로 바뀌어 입혀진다. 신도 없이 머나먼 길을 걸어왔던 그의 발에는 딱 맞는 신이 신겨진다. 품꾼의 손이 되어 버린 그의 손은 훌륭한 가락지로 장식된다. 마지막으로 그의 수척해진 몸은 모두가 함께 이 기쁜 일을 즐거워할 잔치에서 주 요리로 나올 살진 송아지로 자양분이 공급될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것(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만큼 축하할 만한 일은 없다. 여기에서 생생한 색채로 묘사된 이 아버지의 반응은 물론 모든 아버지의 반응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모로서의 반응이다.
맏아들은 유산 분배가 이루어졌을 때 자신의 분깃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얻지 못했다. 유대 관습에 따라서 아버지는 농지의 소산을 생전에 자신을 위하여 보유하고 있다가 기존의 소유권 이전의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하여 죽을 때 소유권을 넘겼다. 따라서 맏아들은 농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아버지의 권위 하에 농지에서 계속해서 일을 해 왔다. 자기 일에 신경 쓰고 있던 맏아들은 자기가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금씩 알게 된다. 맏아들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종에게 아버지의 행동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맏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을 찬성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들어가기를 청하고, 맏아들은 이때 자신의 서운한 심정을 길게 토로한다. 그는 모범적인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익을 위하여 "종 노릇” 해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탕자가 받고 있는 그러한 인정을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탕자가 그런 떠들썩한 잔치로 환영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탕자는 성대한 잔치로 환영 받고 있지만. 맏아들은 지금까지 벗들과 조출한 파티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이것은 마태복음 20:11 의 재판(再版)이지만. 그 강도는 훨씬 세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했나이다). 맏아들에게는 부끄러워해야 할 자를 존귀하게 대하고 존중 받아야 할 자를 존귀하게 대우하지 않는 처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온유하지만 한결같다. 맏아들이 하는 말들은 어느 정도 옳지만, 자기가 홀대 받아 왔다는 생각은 교정될 필요가 있다. 맏아들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 편에서 볼 때 맏아들의 지위는 언제나 확고했고 가족의 유업에 대한 그의 권리는 이 새로운 상황 전개에 의해서 전혀 침해 받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둘째 아들이 돌아와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얻었듯이 맏아들도 마음을 열고 동생을 다시 얻은 것임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맏아들에 대한 도전은 그러한 가족의 경사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고 집에 들어가서 축하 잔치의 기쁨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이 본문은 예수께서 세리 및 죄인들과 어울리신 것에 대한 해석이다. 이 이야기는 의인들에게 자신의 위엄을 세우며 홀로 고고하게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권리에 몰두하지 말고,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들이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하는 기쁨에 동참하라고 권한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속에서 존경할 만한 지체들에 대한 이 이야기의 관련성을 찾아 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교회에 죄인들과 거지 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 자를 막아서는 경건주의 자들이 들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 맏아들의 처지로 옮겨져 있다. 경건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또는 지식만 가득한 율법학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본문은 '은혜로운 아버지' 비유이며, 아버지는 둘째 아들 보다 맏아들이 결단하기를 촉구하는데 관심이 있다. 즉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옆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를 향하여 말씀하신 비유설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