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8) 죽어야 사는 사람들 요12:19-26
요한복음(28) 동백두레교회/찬양예배.
요한복음 12:19-26 19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20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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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베다니 나사로 집에서 있었던 마리아 사건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이튿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마지막 날이 이제 4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고작 3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사이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예수와 더불어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하였습니다.
(1) 본문주해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매년 270만 정도의 유대인이 예루살렘 지역에 집결했다고 합니다. 서울인구가 천만입니다. 서울 인구의 약 1/4 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고 알고 있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고, 수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게 들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오자 모든 백성이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옷을 벗어서 길바닥에 깔았습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 구원자로 환영했습니다.
사실 이런 환영의 모습은 예수님을 군사적 왕으로 환영한 것인데요.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환영에 답을 합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겁니다. 나귀는 말처럼 빨리 달릴 수도, 무장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나귀를 탓 다는 것은 힘도 세력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귀를 타는 것은 낮음, 가난, 겸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직접 목격하면서 절망하는 기득권 층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말합니다. “이제 예수를 죽이기는 틀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봐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이제 예수를 제거하기 틀렸다고 체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것이라는 것을 그때까지도 몰랐습니다.
그날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판단 할 때 사람 보기에 좋아 보이는 빌립에게 찾아옵니다. 성경은 빌립이 ‘벳새다’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깡촌의 어부라는 뜻입니다.
그 어부출신인 빌립에게 그리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개역성경은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번역하였는데요. 매우 극존칭입니다. 촌 동네 어부가 이제 선생님으로 격이 급 상습 한 겁니다. 그리스 사람의 눈에 보여지는 제자는 그들의 주님입니다. 능히 자신들에게 뭔가 세상의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으로 인정하는 존칭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릴 분이므로 직접 찾아갈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이 부탁은 예수님을 높여드리는 행동 입니다.
빌립은 너무 흥분되어서 자기 친구인 안드레에게 그리스 사람들을 데리고 갑니다. 안드레가 흥분한 빌립을 진정시키고 그리스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갑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와 빌립이 데려온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말했습니다. 그리스인이 예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듣고 의미 심장한 말을 합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다”
예수님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나혼인 잔치에서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아직 나의 때가 아닙니다.’ 가나혼인 잔치에서 말하였던 그 때, 그 때가 왔다고 예수님이 그리스사람들의 방문 소식을 듣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전 까지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델 수 없었습니다.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외국인들이 예수님을 뵙겠다고 요청한 사실을 제자에게 듣고 나서는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때, 그 영광을 얻는 순간의 시작은 ‘십자가’로부터 시작이 되는데요. 예수님은 자신이 죽는 것을 밀알이라는 씨앗에 비유를 합니다.
여러분, 밀알 하나를 쟁반 위에 올려두면 두 개, 열 개로 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세월이 지나도 그냥 하나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밀알이 죽으면, 땅에 묻히면 그 죽음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밀알의 비유를 말씀 하시고 나서 죽어야 열매를 맺는 밀알과 같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열매를 맺는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사람, 자기가 죽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희생하여 열매를 기꺼이 맺으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만이 지금 예수님이 계신 천국, 그 하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서 인생을 살다가 온 그 누구, 그 어떤 민족.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이방인 그리스사람일 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높여주신다고 말을 맺으십니다.
(2) 죽어야 사는 방법
오늘 예수님이 우리가 이해하기에 매우 쉬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자기를 부인하는 인생을 살라는 이야기 구나.” 이렇게 쉽게 정리를 하시고 이해를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를 부인하는 인생'이라는 그 말이 저는 더 이해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예수님이 말씀 하신 대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반대쪽은 자연스럽게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자신만을 아름답게 하고, 부요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겁니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내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 생명을 사랑하고, 내 젊음을 사랑하고, 내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가장 소중하고, 나만 편안하면 됩니다.
그런데요. 그것이 영원할까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내 목숨이 소중해서 그렇게 열심히 자기 목숨을 위해 평생을 살았는데 그것이 영원하냐는 겁니다. 나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내 몸과 목숨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사랑하지만 점점 늙어져서 그 생명이 죽어갑니다. 나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점점 늙어가고요. 내 이웃을 속이고 죽이고 짓밟아서 부를 쌓았습니다. 내 것 내 것 하고 모아 놓지만 그 돈과 재물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나만 편안하자 평안하자 하고 편안함을 원하지만 몸의 기능은 점점 쇠하여져서 편안함을 점점 잃어갑니다.
자 이 사람에게 결국에 남은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오로지 자기 목숨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나만을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웃이 없습니다. 인생이란 오로지 이 땅에서의 생명으로만 이해를 하였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알지를 못합니다. 결국 이 땅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한 사람은 그 목숨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목숨마저 잃어버리면, 모두 잃어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반대편에 있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서 사는 것에 대한 의미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살면 되는 거죠. 내 목숨을 미워하는 인생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함께 사는 겁니다.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교회의 역사에도 천국을 온전히 경험하면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기 것을 팔아 교회 앞에 두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당시에 물질은 자기 목숨을 보호해주는 겁니다. 그런 집과 땅을 팔아 교회에 두어 모두가 나누게 하였습니다. 함께 살았습니다. 자기만 아름답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아름답게 인간답게 살도록 도와주고, 나만 잘 먹고 살지 않고 이웃을 도와주면서 살고, 모두 불편하지 않게 더불어서 사는 인생을 산다. 그것이 자기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 사는 방법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그래서 제가 정리해서 설명해 보면 인생이란 이런 겁니다. 어려울 수 있는데,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생이란 양손에 떡을 쥐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단지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입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왼손에는 개떡을 쥘 수 있습니다. 무한정 쥘 수 있습니다. 크기도 두께도 개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한정 떡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오른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가능합니다.
반면에 오른손에는 맛있는 떡이 딱 하나씩 생겨납니다. 오른손의 떡이 맛있다는 것을 사람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른손의 떡은 아주 작은 떡으로 시작합니다. 그 작은 떡을 먹으면 한 동안 생겨나지 않아 배가 고픕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참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 작은 떡이 오븐에서처럼 작은 상태에서 점점 불어나 딱 먹기 좋은 크기까지 불어납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되기까지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른손이 자유로워지면 왼손이 개떡을 무한정 가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른손의 떡이 작다는 이유로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른 손의 작은 떡을 버리고 왼손을 돕는 기능으로 오른 손을 사용합니다.
저는 왼손의 사람을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직도 오른손의 떡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왼손의 사람은 더 많은 떡을 쥐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떡을 빼앗기도 하고요. 점점 큰 개떡을 차지하고는 그 떡을 무기처럼 휘둘러서 자기 떡을 빼앗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개 떡을 빼앗는데 사용합니다. 그 큰 떡을 휘두르는데 오른 손이 절대적 힘으로 작용합니다.
왼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자비가 없습니다. 그들이 베푸는 자비는 오직 자기에게만 해당됩니다. 자기 목숨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위해서는 폭력적인 세상을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반면 오른손의 사람은 양손에 떡을 쥐고 있기 때문에 왼손에 개 떡을 많이 쥘 수 없습니다. 개 떡을 몇 개 더 집으려고 하면 오른손의 떡을 버린 사람에게 후려 맞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왼손에는 먹을 만큼의 개 떡만 쥐고 있고, 어쩌다 손에 쥘 수 없을 만큼의 개떡이 모이면 이웃사람에게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나눠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른손에도 떡을 쥐고 있기 때문에 사실 많이 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른손의 사람에게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른손의 떡이 오븐에서 알맞게 커지면 그 떡을 먹을 수 있는데 그 맛이 개 떡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오른 손의 사람은 그 오른 손의 떡을 가끔씩 먹으면서 배고픔과 욕심을 잊어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왼손의 사람과 오른손의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왼손의 사람은 개떡에 배불러서 뚱뚱한 몸에 왼손에 쥐고 있는 개떡이 무거워서 질질 끌고 죽음으로 갑니다. 험악한 악인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의 사람은 오른손에 있는 질 좋고, 맛있고, 영양가까지 풍부한 빵을 먹어서 인지 천사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누가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겠습니까? 누가 죽음의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으로 데려갈 사람입니까? 자기욕심대로 살면서 세상에서 권력을 누리고 부귀를 누린 왼손의 사람입니까? 나누면서 함께 살고자 했던 오른손의 사람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만 아름답게, 나만 부요하게, 나만 편안하게 살고자 하면 왼손의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는 왼손과 오른손으로 이웃을 향하여 주먹을 흔들고, 부수는 행동을 저지르며 부끄러운지 모르고 폭력적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아가시겠다고 결심하는 시간이 갖도록 하겠습니다. 성령님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잠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 톰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2부』 (서울: IVP 2011) pp52-6
2. 이필찬, 『나는선한목자라.요한복음』 (서울:엔크리스토 2011) pp293-305
3. 브르스밀른, 『BST주석, 요한복음』 (서울:한국기독학생출판 2009) pp243-8
4. 목회와신학편집, 『요한복음,어떻게설교할것인가』 (서울:두란노서원 2009) pp226-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