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사상의 기원과 역사_ 황대우 교수
강의안 | |
개혁주의 사상의 기원과 역사 | |
║황대우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
I. 서문: 개혁주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개혁주의 사상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를 의미하는 “soli Deo gloria”라는 문구가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용어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로 이해한다. 물론 이렇게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위의 문장에서 라틴어 “gloria”라는 용어는 목적어가 아닌 주어이다. “영광을”과 “영광이” 사이에는 개혁주의를 오해하느냐, 바르게 이해하느냐라는 중요한 문제가 놓여 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라 번역하면 그 주체는 우리 인간이 되지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고 번역하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된다. 즉 전자의 번역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 개개인의 자세와 행동에 달려 있고, 후자의 번역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태도가 마치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양 가르치고 있다. 우선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그 내용이 대부분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태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의 대부분의 프로그램도 이와 같은 원리에서 만들어지고 구동된다. 한마디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긍정의 심리학이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의 심리학을 통해 교회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도를 통한 교회의 부흥일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교회의 부흥을 진심으로 갈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원하고 원해야 하는 교회의 부흥이란 실로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소원의 동기와 목적이 정말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만 속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필요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인가? 우리 모두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 즉 우리의 부족과 필요를 채우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 부흥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가져야할 마음 자세는 교회 부흥의 동기와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부흥을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구호를 단순히 교회 부흥의 대의명분이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 부흥의 유일한 내용과 목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부흥의 목적이 아닌 대의명분과 수단으로 전락할 때 우리는 결과제일주의와 결과만능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과만 중시하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성공주의의 전형이다. 이러한 성공주의가 교회에 침투하게 된 것은 “soli Deo gloria”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로 이해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할뿐만 아니라 교회도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가르친다. 이것은 세상이 인정하고 알아주는 것이 곧 성공이며, 이 성공이야 말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정말 그런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이란 세상이 인정하는 “잘 됨”이요 “성공”인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 돈을 잘 버는 사람 등등 소위 세상에서 인정받는 성공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인공들인가? 과정이야 어떠하든 상관없이 결과만 좋으면 되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착각한다. 성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성공 지향적인 심리를 포장하고 숨기며 정당화한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허울 좋은 대의명분과 수단에 불과하며 가장 유의미한 목적은 자신이 원하는 성공일 뿐이다. 이 성공은 반드시 부귀영화로 귀결된다. 그는 성공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거짓과 속임수, 위선, 악평과 비방도 유익한 수단이 될 것이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성공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정직과 성실이란 성공하지 못해서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의 자기변명의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수억, 수십억, 수백억을 들여 지은 교회 건물 가운데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준법정신에 따라 세워진 것이 몇 개나 될까? 법대로 하면 건물 짓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 공공연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대부분의 교회 신축 건물들은 불법, 탈법에 연루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오늘날 교회가 바르고 정직한 것, 성실한 것보다는 잘 되는 것 즉 성공을 지향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성공을 원하시고 인정하실까? 교회에 만연해 있는 성공제일주의는 “soli Deo gloria”란 문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공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성공은 죄악이라고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공하는 그리스도인보다는 겸손히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성공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정직과 성실을 실천하는 것, 즉 올바른 성공이며, 일의 내용과 과정이 정직과 성실로 채워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참된 성공은 인위적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이요 선물이다. 그 보상과 선물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주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감사의 마음과 겸손의 자세 없으면 결코 받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손에 달린 것도, 우리의 행동에 의해 좌우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영광의 주체이시며 동시에 그 영광의 대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심지어 사탄의 악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되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받으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가운데 특히 인간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이며 수단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으며 우리를 통해 영광 받기를 즐거워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할까지 스스로 정하고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때를 쓸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 나는 주연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주연이 아니라면 당장 당신의 영광의 극장에서 사라져버리겠습니다.’라는 식의 태도로 하나님을 조를 것이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무슨 주문이든 들어주는 알라딘의 마술램프로 착각한다. 자신이 주연이고 하나님을 조연이다. 램프의 거인처럼 조연인 하나님은 자신의 막강한 능력을 유능한 주연의 요구와 지시에 따라 사용한다.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해내느냐 하는 것은 오직 주연의 능력여하에 달려 있다. 주연은 자신의 든든한 부하장수인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고 요구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제 남은 것은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을 추진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성공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라는 말이 난무하겠지만 결국 그것은 여지없이 “인간 높이기”라는 생산할 수밖에 없다. “인간 높이기”의 결과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특정 인물이 나누어 갖거나 통째로 빼앗아버리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 높이기”는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대신 앉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불신앙적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구호는 하나님 중심 사상을 대변하기 때문에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모든 형태의 인간주체사상을 거부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하나님 주권사상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수동적인 자세로만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만 내가 그 빛과 소금의 주체가 아니라, 통로와 도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영광의 한 터럭도 탈취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지만 “우리를 통해”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그 영광의 통로이며 동시에 동참자이다. 우리가 그 영광의 도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모양으로 사용하시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던 바울 사도와 같이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이 세상에서 작은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적 사랑을 만 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성령의 사람, 능력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코람데오(coram Deo) 정신의 진수요,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 즉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아닐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II. “개혁(reformata = Reformed)”라는 용어의 기원
“개신교(Protestantism)”라는 명칭의 기원은 황제 칼 5세(Karl V)가 1529년에 소집한 2차 슈파이어(Speyer) 제국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항변 사건이다. 황제는 1526년 6월 25일에서 8월 27일까지 슈파이어에서 제국회의를 개최하여 보름스 칙령을 철회하고 종교의 모든 자유를 각 지역의 군주들에게 허용한다고 선언하게 되었는데, 스트라쓰부르크의 종교개혁 연구가인 앙리 스트롤(Henri Strohl)은 바로 이 결정을 “종교는 그 지역의 소유주에게 속한 것(cuius regio, eius religio)”이라는 원리의 최초 선포로 간주했다. 그러나 황제의 이와 같은 종교관용정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가 교황과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François I)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직후인 1529년 4월에 소집한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보름스 칙령을 적용할 것과 종교개혁 확장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개혁운동을 지지하던 소수의 군주들(작센의 선제후 요한과 헷세의 백작 필립을 포함한 5명의 군주)과 독일 남부의 고지대에 있는 도시들(Straßburg, Nuremberg, Ulm, Constanz, Lindau, Memingen 등 14개 도시들)은 이러한 결정에 항의했는데, 이들에게 “항거자들(protestantes)”이라는 명칭이 붙여졌고, 여기서 개신교(protestantism)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개신교도들은 루터의 추종자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는 “Lutheranus, Luthericus, lutherisch” 등의 용어로 지칭되었다.
“개신교”라는 용어가 발생한 1529년에 말부르크(Marburg)에서 독일북부의 개혁가들과 독일남부 및 스위스 지역의 개혁가들이 함께 모여 종교개혁의 교리적 일치를 논의했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대 최초의 연합운동인 말부르크 종교회의이다. 그곳에 모인 개혁가들은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에 대해 의견 일치를 확인했지만, 15개 조항 가운데 마지막 조항인 성찬론에 대한 양측의 상반된 견해는 좁혀지지 않았고 유보되었다. 이 때 독일북부 개혁가들의 대표였던 루터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독일남부와 스위스 지역에 속한 개혁가들을 “다른 영”을 가진 자들이라 불렀다. 이 사건은 결국 대륙의 개신교 운동을 처음부터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로 양분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성찬론 논쟁이 일기 시작하면서부터 쯔빙글리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는 Zwinglianus, 부써의 입장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Buceranus, 칼빈의 사상을 수용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Calvinianus 등의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루터파 내부에서는 루터가 1546년에 죽자 철저하게 루터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과 루터의 후계자인 필립 멜랑흐톤(Philiph Melanchthon)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대두되면서 멜랑흐톤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는 Philiphianus라는 용어도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의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운동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기를 소원했던 개혁가들은 1546년 루터의 죽음과 1547년 쉬말칼트(Schmalkalden) 전쟁에서 개신교 연합군이 제국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절망적인 국면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548년에는 로마교적인 입장에서 작성된 아욱스부르크 임시안(Augsburg Interim)을 받아들이도록 모든 개신교 영지와 도시들에 강요했다. 그러나 이것이 황제의 완전한 승리, 혹은 모든 개신교 영주들과 도시들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지속적인 저항의 결과로 개신교 영주들과 도시들은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처럼 종교적인 평화를 선언한 1555년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즉 이 자유는 “주인이 한 사람인 곳에서는 종교도 하나다(ubi unus dominus, ibi una sit religio)”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종교적인 평화는 1557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이 아욱스부르크 평화는 칼 대제(=샤를마뉴 황제)처럼 유럽 전역의 실권자가 되려던 황제 칼 5세의 야망을 접게 했다. 결국 싸움에 지친 황제는 1556년에 모든 세속 권력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황제의 자리는 동생에게, 스페인과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라는 용어는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로마교에 반대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의 정신을 수용한 모든 개신교를 의미했는데, 심지어 루터파는 자신들의 공식적인 문서인 일치신조(Formula Concordiae. 1577년에 작성되었고 1580년 5월 25일에 출판된 루터파 신조집에 수록되었으며,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51명의 귀족들과 35개 자유 제국 도시들, 그리고 8천여 명의 신학자들이 서명하고 공인한 문서)를 작성할 때까지도 자신들을 가리켜 “개혁교회(Unsere reformirten Kirchen)”로 불렀고, 17세기 초중반에도 루터파 신학자들은 자신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개혁된 교회이다(wir sind neue, soudern eine reformirte Kirche). 루터파 일치운동의 반작용으로 칼빈주의 지도자들이 주도한 유럽 개혁파는 개혁파 “일치신조(Fromula Concordiae)”를 작성하기 위해 1577년에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모임을 가졌다. 개혁파 일치신조의 작성 임무를 맡은 잔키우스(Zanchius)는 다양한 견해들을 폭넓게 수용한 개혁파 신앙고백을 작성했다(De religione christiana fides(Neustadt, 1586)). 그러나 이것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살나르드(Salnard)가 “신앙고백들의 조화(Harmonia Confessionum)”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적인 연합의 징표로서 1581년에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이 신앙고백적인 발전들과 더불어 개혁교회는 자신을 칼빈주의라는 특별한 성격을 지닌 운동으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개혁교회들은 1580년에 출판된 루터파 일치신조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통해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가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서에 서명하지 않은 지역 교회들에는 한 사람 루터가 아닌,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공통된 가르침과 정신을 따른다는 의미를 지닌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 = d'Eglise Réformée = die reformirte Kirche = the Reformed Church = de hervormde( 혹은 gereformeerde) kerk)”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개혁교회는 프랑스,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전역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
III. 16-17세기 유럽 개혁교회의 역사
개혁교회는 종교개혁의 유산이다. 이 종교개혁은 그 기원을 몇 가지 형태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유익하다. 첫 번째로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난 독일 종교개혁인데, 이 개혁은 독일과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루터교회의 기원이 된다. 두 번째로는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스위스 종교개혁이다. 특히 스위스 쮜리히와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에 걸쳐 폭넓게 정착하게 된 개혁교회의 기초와 모델이 되었다. 세 번째로는 성공회인데, 헨리 8세(Henry VIII)가 왕인 자신이 영국 교회의 머리임을 선언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발표함으로써 영국 성공회(Ecclesia anglicana = Anglican Church)가 생겨나게 되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비록 내용적으로는 개혁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 동기가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대륙의 종교개혁과 구분된다. 네 번째로는 재세례파 종교개혁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상적인 순수한 교회를 재건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로마교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당시의 정교유착이 비성경적 교회관이라 확신하여 철저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종교개혁의 마지막 형태는 로마교의 종교개혁인데, 흔히 이것은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불린다. 로마교는 트렌트(Trente) 공회를 통해 당시 공격받던 로마교리를 재정비하고 확정했는데 이것은 오늘까지도 로마교의 확고한 교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로마교의 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로욜라(Loyola)를 중심으로 설립된 예수회(Jesuit)이다.
이런 종교개혁의 형태 가운데 서로 유사한 것이 많은 것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이다.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에는 유사성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가장 두드러진 유사점은 두 교회 모두 국가와 교회가 서로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철저한 분리보다는 서로 협력해야하는 관계로 본다. 즉 철저한 정교분리론보다는 오히려 정교유착론에 가깝다. 차이점은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그 명칭에서 차이점이 발견 된다. 루터교회는 그 이름에서부터 위대한 종교개혁가 루터라는 개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반면에, 개혁교회는 개인의 이름 아래 결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교회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그리고 루터의 독일종교개혁의 출발점이 개인의 구원과 관련한 기독교 교리의 개혁이라면, 쯔빙글리를 비롯한 스위스종교개혁의 시발점은 윤리적, 제도적 개혁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당시 에라스무스(Erasmus)를 대표로하는 성경적 인문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반면에, 쯔빙글리를 비롯한 스위스 종교개혁가들은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교리가 루터교를 대변한다면 개혁파를 대변하는 교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soli deo gloria)라는 구호일 것이다.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구호는 로마교의 종교개혁과 성공회를 제외한 나머지 세 형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 구호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와 재세례파에게 각각 달리 적용되고 해석된다. 개혁교회의 해석 원리는 “성경 전체(tota scriptura)”이다. 이 원리는 개혁교회보다 더 철저하게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동등한 권위를 강조한 교회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스위스 개혁교회
스위스는 쮜리히(Zürich)의 쯔빙글리(Zwingli)를 필두로 많은 도시들이 1520-30년대에 개혁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쮜리히 시는 1523년의 1, 2차 종교논쟁에서 쯔빙글리의 승리로 인해 1524년에 성상을 철폐하고 수도원 재산을 빈민구제를 위해 분배하고 1525년에 미사를 철폐하고 대신에 간단한 예배의식으로 대체했으며 성찬을 년 4회 거행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스위스 지역에서 최초의 개혁 도시가 되었다. 이 개혁은 1526년의 바덴(Baden) 종교논쟁과 1528년의 베른(Bern) 종교논쟁을 통해 많은 스위스 독립 도시들에서 승인되었다. 비록 바덴 논쟁에서는 개혁 측에서 바젤(Basel)의 개혁가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와 베른의 할러(Haller)가 참여하여 능숙한 로마교 논객 에크(Eck)에게 패했지만, 1528년의 베른 논쟁에서는 개혁 측의 유능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이류급 인사들을 파견한 로마교에 대항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논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역시 쯔빙글리였다. 이 승리의 결과로 1528년에는 베른과 성 갈렌(Gallen)이, 1529년에는 바젤이 각각 공식적으로 개혁을 승인하고 도입하게 되었고 뒤이어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이 개혁 측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진행은 곧 스위스 연맹에 가담한 도시와 지방 가운데 개혁 측을 지지하는 입장과 로마교를 지지하는 입장 사이에 갈등과 분쟁을 야기했다.
1531년 한 해에 초기 스위스 종교개혁을 주도하던 쯔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 개혁은 쮜리히에서는 하인리히 불링어(Heinrich Bullinger)의 손에, 그리고 제네바(Geneva = 줘네버(Genéve))에서는 프랑스 사람 쟝 깔뱅(Jean Calvin = 존 칼빈)의 손에 넘어갔다.
쯔빙글리의 후계자 불링어는 1565년에 팔츠(Pfalz)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다른 독일 지역의 영주들이 인정한 루터파 일치신조를 수용하지 않고, 1563년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받아들임으로써 개혁파 노선을 선택한 인물.)가 그에게 개혁파 입장을 변호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구하자 바로 자신이 1562년에 개인용으로 작성해 둔 신앙고백서의 필사본을 보내었는데, 팔츠의 프리드리히는 이것을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출판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불링어는 이 신앙고백을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가 개최되기 직전인 1566년 3월 12일에 쮜리히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로 출판했으며, 이것을 가지고 팔츠의 선제후는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 석상에서 자신의 개혁파 입장의 신앙을 대담하게 변호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Confessio Helvetica Posterior)이다. 불링어 자신이 번역한 독어판과 1566년에 베자가 번역한 불어판 이후 영어, 네덜란드어, 마자르어, 이태리어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랍어, 터키어로도 번역되어 스위스 도시와 지역, 독일 남부의 팔츠 지역 외에도 눼샤뗄(Neufchatel. 1568년), 바젤, 프랑스(1571년의 라 로쉐여(La Rochelle) 총회에서), 헝가리(1571년의 Debreczin 총회에서), 폴란드(1571년과 1578년),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 있는 개혁교회들에서도 인정됨으로써 가장 권위 있는 개혁파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칼빈이 주도한 제네바 개혁은 개혁교회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 개혁교회의 시편찬송과 예배뿐만 아니라, 개혁교회 정치 형태와 교회직분과 신학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네바의 예배의식은 거의 모든 유럽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예식서의 모범이 되었다. 그가 프랑스에서 핍박받던 개신교 동포를 변호하기 위해 쓴 [기독교강요]는 1536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1559년 최종판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정보 되었는데, 개혁교회의 교리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는 개혁주의의 확장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1537넌에 제네바 정부에 제출한 [제네바의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glise et du clute a Genéve)]에서 파렐(Farel)과 칼빈은 교회치리와 교회치리법의 제정이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주장했다. 제네바 당국은 이 제안을 수락하는 것 보다 파렐과 칼빈을 추방하는 것을 선택했다. 파렐과 칼빈은 1538년에 제네바를 떠나야 했고, 파렐은 뇌샤뗄(Neuchatel)에 칼빈은 부써에 의해 강요된 초청으로 스트라쓰부르크에 각각 정착하게 되었다. 추방 사건 후 3년만인 1541년에 제네바 당국은 치리회(consistoire = 당회) 설립을 인준하는 [교회법(Ordonnances ecclésiastique)]을 통과시킨다. 이 치리회의 설립 동기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당시 정치적으로 베른 (Bern)의 영향 아래 있었던 제네바가 1540년에 베른으로부터 영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치리회 설립을 강요당하게 되는데, 이것을 치리회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이 가장 유력한 이론이다. 그때 제네바는 자신의 도시가 작다는 핑계로 그런 기구가 불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해 뒤에 치리회는 설립되었다. 제네바는 1540년에 칼빈에게 제네바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칼빈은 부써와 함께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요청에 즉각 부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 목사들의 충고에 따라 제네바 정부에 삐에르 비레(Pierre Viret)를 초청하도록 권면했고, 제네바 정부는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비레는 1541년 1월 중순경에 제네바에 도착했고, 그의 주도아래 동년 4월 5일에 치리회의 초안이 작성되었으나, 인준은 즉각 이루어지지 않고 연기되어,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한(9월 13일에 도착) 이후인 11월 20일에야 인준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제네바 치리회는 명칭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미 존재했던 이웃 도시들인 베른(쮜리히의 예를 따라 1528년 설립)이나 쮜리히(1525년에 설립)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베른과 쮜리히의 치리회(명칭: Chorgericht = Ehegericht = Consistorium)는 모두 6명, 즉 소의회에서 2명, 대의회에서 2명, 그리고 목사 2명으로 구성된 반면에, 제네바의 치리회원은 약 25명으로써, 해마다 선출되는 12명의 장로(소의회에서 2명+60인회에서 4명+200인회에서 6명)와 제네바시의 모든 목사(시대별로 9명에서 25명까지)들로 구성된다. 베른과 쮜리히 치리회는 정부 주도적인 시민 법정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제네바 치리회는 사회-도덕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목회적 성향을 지닌 교회 법정이었다. 이러한 목회적 치리회의 성격은 스트라스부르크의 치리회(Kirchenpfleger. 7개의 교구에서 각 3명씩 모두 21명으로 구성)와 비슷하다. 제네바 치리회의 목회적 성격은 칼빈이 장로의 자격으로써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적인 지혜를 지닌(sur tout craignans dieu et ayans bonne prudence spirituelle)’ 사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1561년의 [제네바 교회의 교회법(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de l'Eglis de Geneve)]에는 당시 제네바 주위 도시들의 치리회(Consistorium)와 구분되는 ‘교회치리회(Consistoire Ecclesiastique)’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제네바 치리회의 이런 교회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 치리회를 오늘날 개교회의 당회와 비교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성형태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당회와는 달리 당시 제네바 치리회는 제네바 시에 있는 모든 교회를 감독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그 일은 교회만의 일이 아니라, 시정부와의 공동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이성에 대한 고려 없이 칼빈 시대의 제네바 치리회를 오늘날 당회의 실제적인 기원으로 생각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네바 치리회를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야 한다면 당회 보다는 오히려 치리권을 가진 시찰회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541년과 1561년의 [교회법]외에 칼빈의 [기독교강요] 4권 11장에서도 치리회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모든 사법권은 도덕적 권징에 속하는 것이며(Tota autem Ecclesiae iurisdictio pertinet ad morum disciplinam, ...)’, 따라서, ‘교회에 세워진 치리회는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징계를 다루는(constituta in Ecclesiis iudicia quae censuram de moribus agerent)’ 곳이다. 칼빈은 이러한 교회의 사법권의 근거를 마태복음 18장의 묶고 푸는 열쇠권능(potestas clavium)에서 찾는다. 그는 이 열쇠권능을 마 16장과 요 20장에 근거한 말씀선포로서의 열쇠권능과 구별한다. 그리고 교회의 영적 치리권이 시민적인 강제권과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며, 교회가 그와 같은 자신의 영적 권세(spiritualis potestas)를 행사하지 않고는 바르게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의 영적 치리권은 기독교 정부나 기독교 국가에서도 폐지될 수 없는 교회의 고유한 영구적인 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이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기독교 국가와 정부에서 교회의 치리권은 국가와 정부에 귀속된다고 주장한 에라스투스에게서 유래됨)의 지지자가 아님을 밝힌다. 칼빈은 교회의 치리권이 한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장로회(=당회. consessus Seniorum)’에 맡겨진 것으로 보면서, 이 장로회를 시의회(Senatus)에 비교한다. 4권 12장 7절에서 칼빈은 군주든 평민이든 이 교회의 권징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장로회에 의한 치리권 행사가 소수독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회전체가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내가 다만 여기에 추가하는 것은 사람을 출교시킴에 있어서 이것이 바울이 증거하는 합법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장로들만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시 그 내막을 알고 승인함으로써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명한 것은 다수의 평민이 직접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소수의 욕망에 따라 처리되지 않도록 증인과 감시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민적 처벌과 구분되는 교회의 영적 치리권의 독립성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후대의 칼빈적 개혁교회가 영적 치리권의 독립성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근거와 계기가 된다.
2. 독일의 개혁교회
독일 남부에서는 종교개혁 초기에 스트라스부르크가 가장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 도시는 세 명의 유명한 개혁파 개혁가 마르틴 부써, 볼프강 카피도(Wolfgang Capito), 카스파르 헤디어(Kaspar Hedio)를 중심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이 도시의 시장 야콥 슈투름(Jakob Sturm)은 1529년 슈파이어 제국회의의 결정에 반대한 항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 해에 개최될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을 위해 부써와 카피토는 스트라스부르크와 콘스탄츠, 메밍언, 린다우가 참여한 4개 도시 신앙고백(Confessio tetrapolotana. 1530)을 작성했다. 이 신앙고백은 최초의 독일 개혁파 신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독일의 루터파 교회들은 멜랑흐톤(Melanchthon)이 작성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준비했다. 쉬말칼트 전쟁에서 개신교 연합군이 패배하고 로마교의 임시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강요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던 부써는 그 도시로부터 추방되는데, 이로써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개혁을 위한 부써의 영향력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여 결국, 헤디오의 후계자요 완고한 루터파 신학자인 요한 마르바흐(Johann Marbach)가 개신교 입장을 재확립했을 때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스트라스부르크는 개혁파 개혁으로 시작하여 루터파 개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파 성향의 개혁은 독일 남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를 중심으로 한 팔츠 지방에서 꽃을 피웠다. 또한 부써의 개혁 정신은 영국과 독일 중부의 헷세(Hesse)와 북부의 브레멘(Bremen), 스위스 제네바, 그리고 독일 남부의 하이델베르크에서 그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을 통해 개혁교회와 신학에 전수되었다.
독일의 헷세 지역은 그 지역의 영주 필립에 의해 종교개혁이 수용되었다. 헷세의 영주 필립은 말부르크 종교회의를 주도하고 성사시킨 정치가였으며, 극단적인 루터파 신학자들보다는 중도 지향적인 멜랑흐톤과 부써의 입장을 선호했다. 특히 그는 부써의 소개로 아비뇽(Avignon) 출신의 프랑스 신학자 프랑수와 랑베르(François Lambert)를 알게 되었는데, 랑베르는 카썰(Kassel) 개혁을 위해 필립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후에 필립이 세운 말부르크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브레멘에서 개혁신앙은 1547년 라스코의 친구요 부써의 제자인 하르던베르크(Hardenberg)의 설교를 통해 소개되었고, 이후 칼빈주의자 페쯜(Pezel)의 주도로 1595년에 강력한 개혁주의 신학을 반영한 [브레멘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이러한 브레멘의 개혁신학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계약신학의 거두 요한 코케이우스(Johann Coccejus = Koch)를 낳았다. 팔츠의 종교개혁은 그곳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이전에는 루터적이었다. 그는 독일 지역의 영주와 제후들이 독일의 루터적 일치신조를 받아들였을 때, 홀로 개혁주의를 선택했다. 멜랑흐톤에게 영향 받은 우르시누스(Ursinus)와 칼빈에게 영향 받은 올레비아누스(Olevianus)를 중심으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작성되었고 팔츠의 제후는 이것을 루터의 교리문답 대신에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지역에 개혁교회와 신학을 심었다. 그러나 개혁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정치적인 수용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정치 지리적 난맥상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독일 북서부의 프리슬란트(Friesland)에서는 개혁파 신학자 존 아 라스코가 교회개혁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폴란드 귀족출신으로 일찍이 1540년에 프리슬란트에 정착하여 1543년에 그곳 교회의 감독(superintendent)이 되었다. 쯔빙글리를 비롯한 스위스 개혁가들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제반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은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었다. 이 모임은 그가 한 때 프리슬란트를 떠나 런던(London)에서 피난민 교회를 목회할 때도 활용했다.
3. 프랑스 개혁교회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쟈끄 르페브로 데따플러(Jacques Lefevre d'Etaples)와 기욤 브리쇼네(Guillaume Briçonnet)와 기욤 뷔데(Guillaume Budé) 등과 같은 인문주의자들로 구성된 모(Meaux) 그룹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을 제네바의 개혁가로 만든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역시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와 프랑수와 1세(François I)가 종교개혁의 도입을 금지했기 때문에 16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1546년에 개신교 교회가 모에 세워졌으나 곧 폐회되었고, 14명의 지도자들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니므(Nimes)에서 교회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이처럼 프랑수와 1세가 살아 있을 동안에 개신교 교회가 존속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를 이어 1547-1559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한 앙리 2세(Henri II) 역시 개신교 박멸정책을 폈다.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비밀 모임을 통해 개혁운동을 유지하고 확산시켜 갔다. 드디어 1555s년 9월에는 빠리(Paris)에 개혁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점차 뿌와띠에르(Poitiers), 부르줘(Bourges), 뚜르(Tours) 등지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1555년에는 5개였던 개혁교회가 1559년에는 거의 백 개나 되었고, 종교전쟁이 시작된 1562년 무렵에는 무려 2150개에 이르렀다.
박해 아래 있던 프랑스 개혁교회의 목회자 다수는 제네바로부터 지원되었다. 1557년에 빠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르의 교회를 방문하여 그곳의 목사들과 함께 개신교 교회의 전국적인 조직을 위해 교회법을 만들었고, 빠리에 돌아온 후 그것을 교회 조직의 표준으로 채택하기 위해 1559년 5월에 빠리에서 비밀 총회를 개최했다. 이 최초의 프랑스 개신교 총회는 50개의 교회 대표들이 참석했다. 장로들과 집사들은 교인들에 의해 선출된 후 치리회(= 당회)에 의해 선임되었다. 프랑스 개혁교회의 장로들은 목사들과 함께 회중을 다스리는 치리회의 일원이었다. 목사와 한 사람의 장로가 시찰회(colloquy. 이것은 성격상 오늘날의 시찰회와 다름)에 참석하여 여러 교회들을 감독했고, 일년에 한두 번 회집되는 지방 노회(provincial synod)에는 목사 일인에 두 명의 장로가 파송되었다. 이 제도는 개혁파 교회 조직을 위해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수용되었고, 오늘날 당회, 시찰회, 노회, 총회의 구조로 되어 있는 개신교 교회들의 모델이 되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흔히 위그노(Huguenots)라 불린다. 루이스 스피츠는 이 명칭이 스위스 “연맹”을 뜻하는 아이게노썬(Eidgenossen)에서 온 것으로 본다. 이 명칭은 후에 제네바 신교도들에게 적용되었는데, 이러한 명칭은 1562년경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1564-1572년 사이에 프랑스 개혁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조직을 장로제도로 할 것인지 아니면 회중제도로 할 것인가를 두고 양편으로 나뉘어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네바의 지휘에 힘입어 놀랄만한 연합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무력저항에 대한 칼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스빠르 드 꼴리니(Gaspard de Coligny) 장군과 꽁데(Condé) 공의 지휘 아래 프랑스 정부의 종교핍박에 대하여 무력으로 항쟁했다. 그 결과 1563년에 앙부와즈(Amboise) 조약을 통해 개혁파 지도자들의 영지에서 개혁파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이 평화조약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구교와 신교 간의 전쟁은 1567년에 재개되었다. 1568년 3월 23일에 다시 새로운 평화조약이 성립되었으나, 두 세력 간의 긴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위그노들은 1570년 8월 8일에 성 제르맹(St.-Germain) 칙령으로 다시 종교의 자유와 예배 장소를 허락받기도 했으나, 1569년 3월에 결국 꽁데가 사로잡혀 처형되는 일을 겪기도 하고, 1572년에는 까뜨린느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의 음모로 수많은 개혁파 개신교도들이 한꺼번에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성 바돌로뮤 밤(Bartholomew's Night)의 대학살 사건도 겪어야 했다. 7만 여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개신교도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16세기 말에 가장 유능한 프랑스 위그노 출신의 철학자 피터 라무스(Peter Ramus = Pierre de la Ramée)도 이 학살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방법론을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대 학살사건에도 불구하고 위그노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다. 투쟁의 결과 마침내 그들은 프랑스 영내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598년 4월 13일에 선포된, 저 유명한 낭뜨(Nantes) 칙령이다. 이 낭뜨 칙령은 1570년과 1576년의 휴전기간 중에 작성된 평화협정의 내용을 문서화한 것이었는데, “개혁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특권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다. 이 신앙의 완전한 자유가 약 200개의 마을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개혁교회는 노회 총회 등의 연합 모임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었다.
1633년 이후 개혁교회는 무와즈 아미로(Moise Amyraut = Amyraldus)와 루이 까쁠(Louis Cappel), 요쥬 더 라 플라꺼(Jusue de la Place)와 같은 소무르(Saumur) 학파에 의해 신학적으로 좌경화되었고, 끊임없는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659년에는 프랑스 위그도들의 전국적인 모임인 총회의 개최 자유가 상실되었다. 루이 14세(Louis XIV)는 1665년부터 프랑스 위그노들의 자녀들이 로마교 아래 교육 받도록 했고, 1685년 10월 17일에는 개신교도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구실로 낭뜨 칙령을 철회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3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발생했다. 이 낭뜨 칙령의 철회를 통해 프랑스는 더 이상 개신교를 수용하지 않는 엄격한 로마교 국가로 남게 되었다. 존 맥닉(John T. McNeill)은 이 위그노들의 비극을 프랑스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프랑스는 178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4. 네덜란드 개혁교회
4-1. 네덜란드 종교개혁의 역사
16세기에 17개의 지방으로 구성된 네덜란드(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는 1506년에 그곳에서 태어난 칼 5세에게 상속되었는데, 그가 황제로 등극하여 제위를 동생에게 물려줄 때까지 다스리다가 제위에서 물러나면서 그 땅을 아들인 스페인의 왕 필립 2세(Philiph II)에게 상속했다. 필립의 즉위식은 1555년 10월 25일에 브루셀 궁정의 대강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처음 2년간은 네덜란드에 있었다. 그는 많은 점에서 아버지를 닮았지만 한 가지 면에서는 달랐는데, 그것은 그가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는 점이다. 1559년 8월 26일에 필립은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그를 대신하여 파르마의 마가렛(Margaret of Parma)이 섭정으로 다스렸다.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는 1561년에 화란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개혁파 신도들을 위해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1562년에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출판했는데, 그것을 필립 2세에게 보내었다. 이 신앙고백은 1566년에 개최된 안트베르뻔(Antwerpen) 노회에서 채택되었다. 개혁파 교인들은 대도시의 외곽이나 교외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이 때 그들은 끌레망 마로(Clement Marot)나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가 불어로 번역한 시편이든지 아니면 피터 다테누스(Peter Dathenus)가 번역한 네덜란드어 시편을 노래했다. 때론 이들 가운데 일단의 무리들은 폭도로 변해 무장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성당에 몰려가 기물을 파괴하는 등 소란을 피우기도 했는데, 1566년에 과격한 개신교도들이 안트베르뻔 대성당 내부를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련의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의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1565년경에 필립은 네덜란드 전역에 트렌트 공회의 결정사항을 인쇄하여 배포하고 여기에 불복하는 모든 자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네덜란드 17 지방의 통치자들로부터 반발을 야기했다. 급기야 1566년에는 필립의 통치에 대항하는 조직적인 반대를 위한 연합이 결성되었다. 이로 인해 1566년부터 1578년까지 전쟁을 겪어야 했다.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 연합군의 수장은 황제 칼 5세의 신임 받는 자문이었던 빌름 판 오랑여(Willem van Orangje = William the Silent)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형편없는 거지들(Slijkgeusen. 진창 + 거지들)”이란 용어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용어는 먼저 스페인의 필립과 싸우기 위해 1566년 개신교 연합 동맹에 가담한 귀족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립 2세를 대적하는 자들의 무리와 반항변파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당시 네덜란드 개혁파 교인들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필립은 알바(Alva) 공작을 보내어 네덜란드를 진압하기로 결단했다. 알바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는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처형했다. 한꺼번에 1500명 혹은 800명을 체포하여 처형시키는 일도 있었다. 1567-1573년 사이에 알바의 독재는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568년 오랑여의 빌름은 동포를 처참한 박해로부터 구하기 위해 군사를 준비하여 전쟁에 나섰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1572년에 다시 혁명을 주도했고 그 결과 1575년에 홀란트(Holland)와 제일란트((Zeeland)가 빌름의 지휘아래 연합되었다. 1576년 10월 28일에는 비록 신앙의 차이(북쪽 지방 즉 지금의 네덜란드는 개신교가, 남쪽 지방 즉 지금의 벨기에는 천주교가 주도적이었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개 도시의 대표자들이 모두 남쪽 도시 헨트(Ghent)에 모여 빌름을 중심으로 필립을 반대하기로 합의하는 헨트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남쪽 지역의 대표자들이 1579년 1월 5일에 아라스(Arras)에 모여 이 협정으로 필립과 화해를 시도하자, 북쪽 지역의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Utrecht), 헬더를란트(Gelderland), 그리고 쥬트펀(Zutphen) 등의 대표자들도 1579년 1월 29일 위트레흐트에 모여 스페인 왕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 제후를 반대한다는 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화란의 독립 선언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남부의 브라반트(Brabant), 플란더른(Vlaanderen)도 북부의 위트레흐트, 헬더를란트, 홀란트, 제일란트 등과 더불어 스페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새로운 독립 공화국을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네덜란드가 겪게 될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 기간 중에 오랑여의 빌름은 수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다가 마침내 1584년 7월 10일에 암살되고 말았다. 빌름 사후에 연합군은 그의 둘째 아들인 마우리츠(Maurits = Maurice)가 지휘하게 되었다. 마우리츠는 탁월한 전쟁 능력으로 드디어 1609년에 스페인과의 12년에 걸친 휴전을 성사시켰다. 그것은 실로 네덜란드 독립 공화국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신교와 구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으로 발생한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Westfälischer Friede)에 의해서 이다.
4-2.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형성과 교회정치
네덜란드는 공동생활형제단(Fratres communi vita = 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 = Broeders des Gemenen Levens))의 발원지이며 16세기 최고의 성경적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태어난 곳이요, 수많은 재세례파의 지도자들 즉 멜키오를 호프만(Melchior Hoffman), 얀 마떼이스(Jan Matthysz), 얀 뵈끌스존(Jan Beuckelszon), 다빗 요리스(David Joris),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등을 배출한 지역이다. 네덜란드 종교개혁은 16세기 초에는 인문주의와 루터의 추종자들이, 1530-1540년 사이에는 재세례파가 강세였으나 16세기 중후부터는 부써와 칼빈, 불링어, 존 아 라스코 등의 영향으로 개혁파 교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로마교도인 황제 칼 5세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개혁 운동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최초의 총회는 1568년에 네덜란드 지역 밖인 베이즐(Wesel)에서 개최되었다. 두 번째 총회 장소도 역시 국외로서 1571년에 동 프리슬란트에 위치한 엠던(Emden)이었다. 이 엠던 총회를 통해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 엠던 총회에서 우리는 이미 목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 당회(kerkeraad)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모임을 가져야 하며, 3개월 혹은 6개월 마다 시찰회(classis)를, 매년 1회의 지방노회(provinciale synode)를, 2년 마다 총회(= 총노회. generale synode)를 개최해야 한다는 조항을 수용했다. 그리고 이 엠던 총회에서 네덜란드 신앙고백 즉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채택했다.
1541년과 1561년의 제네바 [교회법]은 교회직분을 네 가지, 즉 목사(pastors = pasteurs)와 교사(=교수. doctors = docteurs)와 장로(anciens)와 집사(diacres)로 제시한다. 거기서 목사의 임무는 설교와 성찬집행과 치리시행에 있고, 교사의 임무는 무지나 악한 교리들로부터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을 참된 교리로 교육하는데 있으며, 장로의 임무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감독하는데 있으며, 집사는 두 종류로서 구제와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와 병자, 가난한 자, 과부, 노약자들을 돌보는 집사로 구분된다.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네 직분 가운데 목사와 장로만이 제네바 치리회를 구성한다. 155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과 1561년의 [벨직 신앙고백] 모두 교회의 직분을 세 종류, 즉 목사(Pasteurs)와 감독(Surveillans)과 집사(Diacres)로 분류한다.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에서는 이 세 직분이 교회치리회(=당회. Senat de l'Eglise)를 구성한다. 1574년의 도르트레흐트(Dordrecht) 총회는 엠던 총회의 당회구성에 대한 조항을 해설함에 있어서, 각기 그 목적에 따라 목사와 장로의 모임과 집사들의 모임이 각각 따로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장로가 부족한 곳에서 집사는 당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목사와 장로의 위치와 집사의 위치를 구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581년 미덜뷰르흐(Middelburg) 총회에서는 장로가 적은 교회에서는 집사가 당회원이 될 수 있다는 예외규정을 인정했지만, 집사들로 구성되는 집사모임에 관한 조항을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에 관한 조항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다룸으로써 당회는 실제로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명시했다. 그리고 이 총회에서 처음으로 교회직분에 교수직을 포함시킴으로써 네 가지 직분의 기원이 되었다. 1586년의 스흐라펀하허('s-Gravenhage) 총회와 1618-1619년의 도르트레흐트 총회에서는 한 두 명의 정부인사도 당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만들었다. 당시 교회와 정부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어서 각 지방 노회는 자신의 형편에 따라 도르트레흐트 총회의 이와 같은 결정을 수정하거나 거부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정부인사의 당회 참여는 화란개혁주의 전통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신학을 위한 대학이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설립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네덜란드 대학인 레이든(Leiden) 대학이 1575년에 설립된 이래로 1585년에는 프라넥꺼르(Franecker) 대학이, 1612년에는 흐로닝언(Gronningen) 대학이, 1636년에는 위트레흐트 대학이, 1648년에는 하르더르베이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됨으로써 개혁교회와 신학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갔다.
4-3. 아르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총회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 Jacob Harmensz. 1560-1609)는 1576년에 레이든 대학생으로 등록하여, 그곳에서 한 교수를 통해 이미 피터 라무스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아 외국에서 장학생으로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582년에 그는 제네바로 가서 베자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위텐보하르트를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아드리아누스 유니우스(Adrianus Junius)의 후원으로 1586년에 그는 7개월 정도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잠시나마 파두아(Padua)에서 야코부스 자바렐라(Jacobus Zabarella)의 철학 강의를 듣기도 했다. 1602년에 두 명의 레이든 신학 교수 루카스 트렐카티우스(Lucas Trelcatius)와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가 동시에 페스트에 걸려 죽고 Franciscus Gomarus만 교수로 남았을 때, 아르미니우스가 유니우스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다. 처음부터 고마루스는 그를 교수로 채용하는 일에 반대했지만, 아르미니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를 버렸다고 확증하자 가장 큰 반대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아르미니우스는 1603년 7월 10일에 고마루스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둘 사이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604년 2월 7일에 아르미니우스가 예정에 대해 논하자 그 해 10월 31일에 고마루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이 신학적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홀란트와 서 프리슬란트 정부에 정치적 개입을 호소했다. 결국 1609년 8월 12일 요한 판 올던바르너펠트(Johan van Oldenbarnevelt)의 주도로 홀란트와 서 프리슬란트 국회가 소집되어 칭의와 예정, 그리고 그와 연관된 교리들을 논의했다. 여기서 아르미니우스는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통해 믿고 신자로 받아들여질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불신자들 대해서는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이 은혜를 사람들이 자유의지와 분노로 거절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에 있었던 자유의지의 논쟁에서 에라스무스의 견해였고, 네덜란드 시인이요 신학자인 디륵 폴꺼르츠존 꼬른헤르트(Dirck Volckertszoon Coornhert)에 의해 아르미니우스에게 전수된 사상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이 논쟁이 시작 된지 한 달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아르미니우스에 의해 신학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 사이의 긴장도 고조되어 갔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뒤 그의 추종자들은 얀 우텐보가르트(Jan Uytenbogaert)를 중심으로 1610년 모임을 갖고 홀란트 정부에 그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항변서(,Remonstrantie)]를 제출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통상 “항변파(remonstranten)”로 불린다. 항변파는 자신들의 신학적인 입장을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근거하여 5가지로 요약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집단을 선택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 선물은 거부될 수 있고, 따라서 성도는 견인되는 것이 아니다. 항변파 논쟁은 온 네덜란드를 교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큰 대립을 야기했다. 빌름을 도와 네덜란드 독립을 위해 싸웠고 빌름이 죽은 후에는 마우리츠와 더불어 네덜란드 정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올던바르너펠트가 항변파를 지지한 반면에 종교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중립을 지키던 마우리츠가 반항변파의 편에 섬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분열과 싸움을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올던바르터펠트가 1618년 8월 29일에 체포됨으로써 승리는 마우리츠에게 돌아갔다. 항변파와 예정론자들인 반항변파(Contra-remonstranten) 사이에 신학적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마우리츠는 정부를 통해 전국적인 교회회의를 1618년 11월 13일에 남쪽 도시 도르트레흐트(Dordrecht)에서 소집했다. 1619년 5월 28일에 폐회하기까지 154번 회의를 열었다. 국제법으로 유명한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도 항변파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네덜란드 밖의 교회대표들도 초청했다. 이 총회는 전국적인 규모의 개혁교회 회의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국제적인 개혁교회 총회였다. 네덜란드 전국의 각 지방 노회들이 파견한 대표자들과 네덜란드 신학교수들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팔츠, 헷세, 스위스(바젤과 베른과 샤프하우젠, 쮜리히의 대표자들), 제네바, 브레멘, 엠던, 나소(Nassau) 등지의 대표자들도 참석했다. 국외에서 파견된 모든 대표들에게도 정식회원 자격을 부여했으며, 이들 가운데 26명의 신학자들은 단지 참관인에 그치지 않고 도르트 총회의 공식문서 작성에도 동참했다. 프랑스 개혁교회도 초청을 받아 1617년 비트레(Vitré) 총회에서 대표자들을 지명했으나, 그들은 프랑스 왕의 출국 금지 명령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도 초청장을 보내었으나 불참했다. 영국에서는 주교도 파견했으나, 스코틀랜드에서는 아무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이한 일이었다. 리디우스(Lydius) 목사의 짧은 개회 연설과 진지한 기도 후 헬더를란트의 의회 대표인 마르티누스 그레고리이(Martinus Gregorii)의 개회 선언으로 총회가 시작되었다. 회의 진행을 맡은 의장은 하이델베르크, 제네바, 쮜리히, 로잔느(Lausanne), 옥스퍼드(Oxford), 캠브리지(Cambridge) 등지에서 공부한 유능한 목사요 반항변파에 속한 보허르만(Bogerman)이었다. 항변파의 대표는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였다.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만장일치로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을 반대했다. 물론 총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신학적 쟁점들이 한 가지로 통일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예정론에서 타락전예정설(Supralapsarism)과 타락후예정설(Inpralapsarism)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었고, 구원의 범위에 관한 문제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인 TULIP(Total Depravity-전적 부패;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제한된 구속;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은 이 도르트 총회에서 항변파가 제출한 문서에 반대하여 결정한 개혁교회 교리를 5가지로 요약한 것이다.
17세기의 네덜란드 개혁교회에는 개혁주의 경건주의자로 불리는 빌름 떼일링크(Willem Teelinck)를 비롯한 청교도적 경건주의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피터 라무스와 르네 데까르트(René Decarte)의 철학적 영향으로 스콜라주의가 풍미했다. 이와 같은 경건주의와 스콜라주의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 내의 신학적 갈등과 대립, 분열을 조장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는 국가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통해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과 부를 얻어 작은 나라지만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5. 영국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
영국의 정치적 종교개혁을 성사시킨 사람은 헨리 8세(1509-1547)이다. 그는 헨리 7세의 두 번째 아들로서 한때 루터파를 대항하여 싸웠다는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sor fidei)”라는 명칭을 받기도 했다. 그는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형의 미망인인 아라곤의 캐더린(Catharine of Aragon)을 왕비로 맞이했으나, 대통을 이을 남아를 낳지 못하자 그 결혼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별거하기 시작하면서 6년 여 앤 볼린(Anne Boleyn)과 비밀리에 살았는데, 그동안 그는 교황이 자신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교황은 헨리가 이중결혼을 하는 것까지는 허락할 마음이 있었지만, 케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은 그녀가 황제 칼 5세의 고모라는 사실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헨리는 앤의 임신으로 더 이상 밀애를 계속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1533년 3월 30일에 켄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 임직된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를 통해 케더린과의 이혼과 앤과의 결혼의 적법성을 공포함으로써 1533년 6월에 앤을 여왕으로 맞이했으나, 그 결과 며칠 후 교황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을 받게 되었다. 헨리는 1534년 11월에 “국왕은 지상에서 영국 교회(Anglicana Ecclesia)라고 칭해지는 영국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으로 정당하고 합당하게 간주되고 장래에도 그같이 간주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수장령을 선언함으로써 교황과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다. 이 일로 인해 수장령 서약에 반대한 로체스터(Rochester) 주교 존 피셔(John Fischer)와 [유토피아(Utopia. 사유 재산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저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처형되었고, 신약을 영어로 번역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1536년에 벨기에 부뤼셀(Bruxelles) 근처 필포르더(Vilvorde)에서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헨리는 또한 1539년에 성찬의 실제적 임재를 부인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고 성직자들의 결혼도 금지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6개 조항(Six articles)”을 통과시킴으로써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특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547년 1월 27일에 헨리가 죽자 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쎄이무어(Jane Seymour)에게서 난 아들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1553)가 1547년에 만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하여 단명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두 명의 섭정(루터파적 경향을 지닌 에드워드의 외삼촌인 Duke Somerset과 쯔빙글리파와 칼빈파적 경향을 지닌 Duke Northumberland(=John Dudley))에 의해 각각 3년 씩 통치되면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크랜머를 중심으로 대륙으로부터 온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써(Martin Bucer)와 피터 마터(Peter Martyr), 존 아 라스코(John a Lasco) 등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성공회의 예배모범인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초판이 1549년에 작성되었고 1552년에 개정판이 채택되었다. 개정판에서는 부써의 제안으로 성찬식에서 예배를 희생제사로 간주하는 모든 미사적인 부분이 제거되었고, 떡 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함께 나누어주는 2종배찬의 정당성이 확보되었으며 영적 임재설과 유사한 성찬론이 도입되었다. 1553년에 보다 더 개신교적인 [42개 조항]이 승인되었으나, 에드워드의 죽음과 케더린의 딸이자 철저한 로마교 신자인 메리(Mary Tudor) 여왕의 등극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녀는 1553-1558년까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로마교의 복구 정책과 어머니의 한풀이 때문에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핍박하고 숙청했는데, 당시에 처형된 사람들은, 존 폭스(John Foxe)의 [순교사화 (Book of Martyrs)]에 의하면, 영어 매튜 성경(Matthew's Bible) 편집자인 존 로저스(John Rogers), 엄격한 쯔빙글리파 청교도인 존 후퍼(John Hooper), 부써와 절친했던 라티머(Latimer)와 리들리(Ridley), 대주교 크랜머 등 280여명에 이른다. 이로 인해 그녀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얻었다.
메리가 1558년 11월 17일에 사망하자 헨리의 두 번째 부인 앤 볼린에게서 난 딸 엘리자벳(Elizabeth Tudor)이 왕위를 계승하여 45년(1558-1603)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종교적으로는 로마교와 개신교 사이의 중도정책을 선택했다. 1559년 4월에 그녀는 자신을 영국 교회의 수장(head)으로 부르지 않고 다만 최고 통치자(governor)로 칭하는 수정된 수장령을 발표했다. 또한 1571년에는 [42개 조항(Forty-two Articles)]을 근간으로 작성된 [39개 조항(Thirty-nine Articles)]을 공개적으로 승인하고 공포함으로써 영국 성공회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을 마련했는데, 이것은 내용상 로마교와 루터교적이기 보다는 개혁파적이고 칼빈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39개 조항]의 작성된 1570년에 엘리자벳은, 그녀가 미신적이고 불경건한 칼빈의 사상을 스스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까지 준수하도록 명령했다는 이유로, 로마교황청이 그녀를 파문한 교서를 받았는데, 이로써 그녀와 로마교황청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사실 엘리자벳 여왕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평화를 깨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교도(Puritan)”란 용어는 엘리자벳의 재위 기간인 1564년경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 용어는 영국 교회 내의 모든 교황적 혹은 로마교의 미신적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개신교도들을 지칭한 것이었다. 메리 여왕의 핍박 때문에 유럽 대륙으로 망명길에 올랐던 개신교도들이 다시 귀국하면서 엘리자벳 통치 시절에 청교도의 숫자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 “청교도”라는 용어는 제임스 패커(J.I. Packer)에 의하면 다섯 가지의 중복된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 사용된 것이다. 즉 그 용어는 첫 째로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기도서]에 표현된 의식들과 어구 일부를 수용하지 않는 목회자에게 적용되었고, 두 번째로는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를 지지하고 1572년의 [국회에 드리는 권면]에 나타난 장로교 개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지지자들에게 적용되었으며, 세 번째로는 반드시 비국교도들(non-conformists)은 아니지만 진지한 칼빈주의 경건을 실천했던 목회자와 평신도에게 적용되었다. 네 번째로는 도르트(Dordt = Dordrecht) 총회를 지지하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에게 적용되었는데, 이들은 또한 그 총회를 지지하지 않는 다른 영국 국교도들에 의해 교리적 청교도라고 불린 자들이었다. 다섯 번째로는 하나님의 일들과 영국법과 백성의 권리에 대해 공개적으로 존중을 표시한 하원의원과 치안판사, 그리고 그 밖의 귀족들에게 적용되었다. 청교도는 성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처럼 반대 세력에 의해 부정적이고 조롱 섞인 용어이다. 청교도는 일정한 신학이나 교회제도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는 영국에서 시작된 하나의 운동, 즉 영적 부흥운동이라 간주 할 수 있다. 청교도 영향 아래 영국 교회는 교회 정치상 고 교회(High Church) 즉 국교인 성공회와 저 교회(Low Church)로 구분되었는데, 상호간의 극심한 대립과 반목은 결국 최초의 분리주의자인 캠브릿지(Cambridge)의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에 의해 시작된 교회분리의 단초가 되었다. 질서를 강조하는 영국 성공회와 신앙의 자유를 강조하는 회중교회 사이의 갈등은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572년에 카트라이트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정치제도를 영국 성공회에도 도입하고자 시도가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특별히 목사들과 자격 있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예언회(prophesyings), 혹은 훈련회(exercises) 등 자발적인 성경공부모임이 활성화되었다. 엘리자벳 여왕은 이러한 개혁파 모임을 제한했지만, 영국 내의 장로교 조직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장로교 조직을 위해 1587년에 트레버스-카트라이트 치리서(Travers-Cartwright Discipline)가 배포되기 시작하여 1590년에는 그 문서에 서명한 목사의 수가 500명이나 될 만큼 두드러진 성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 성장은 1603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다스리게 된 제임스 1세의 등극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그는 절대군주제를 원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를 선호하고 지지했다. 제임스 1세가 죽자 다시 장로교 제도를 정착시키려는 시도가 제기되었고, 1643년에는 영국의 감독 제도를 폐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장로교 제도가 영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장로교 제도에 대한 크롬웰(Cromwell)의 적개심 때문이었다. 크롬웰은 장로교도들의 엄격함에 격분하여 그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의 시대인 1650년대는 신학적으로는 이전 시대처럼 여전히 칼빈주의자들의 시대였으나, 교회정치제도 면에서는 독립파의 시대였다.
엘리자벳 여왕이 통치하던 1560년에 제네바에서 출판된 제네바 영어성경은 1540년에 출판되어 영국 국민의 가족성경으로 사랑받던 대 성경(Great Bible)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 제네바 성경은 장과 절로 구분된 최초의 영어 번역 성경이었다. 후에 스튜어트가의 제임스 1세의 명령으로 1610년에 번역 출판된 흠정역(King James Version = Authorized Version)이 제네바 성경의 자리를 대신하기까지는 약 1세기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16세기 말까지 칼빈의 저서들도 15판이나 재판된 [기독교강요]를 포함하여 무려 90여종이나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베자의 [기독교신앙 요약]도 6판을 거듭했지만, 점차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들은 청교도의 저서들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청교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펄킨스(William Perkins)의 저서들이다.
6.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
스코틀랜드 의회의 요청으로 존 낙스가 마지막으로 고국에 돌아온 1559년에 그곳의 통치는 남편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James V)가 사망한 후 어린 딸 메리의 섭정을 맡아온 기즈의 메리(Mary of Guise)의 손에 있었다. 낙스는 그녀를 “실수로 안장을 얹게 된 무법적인 암소”라 불렀는데, 그가 귀국한 다음 해에 그녀가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7월 6일 에딘버러(Edinburgh) 조약에 의해 개신교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이 승리는 단순히 천주교에 대한 개신교의 승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승리에는 개신교도가 된 당시의 국무장관 윌리엄 세실(William Cecil)의 역할이 지대했다. 8월 24일에 의회는 영내에 있는 로마교회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법을 제정했다: “로마교의 주교는 앞으로 이 영토 안에서 관할권을 행사할 수도 없고 권리도 없다.” 이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of Scotland)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교회의 전신이었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첫 번째 총회는 1560년 12월 20일 에딘버러에서 개최되었으며, 목회자 6명을 포함하여 모두 42명이 참여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에서 개혁파 개혁의 성공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를 이어 1560년에 스코틀랜드의 통치자가 된 메리는 이러한 개혁을 다시 로마교로 되돌리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메리와 낙스 사이의 갈등은 그녀가 재위한 1567년까지 지속되었으나 결국 낙스가 승리하였다.
1560년에 25개조로 된 제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개혁파 신앙고백으로는 처음으로 참된 교회의 표지를 세 가지, 즉 말씀선포와 성례집행과 권징시행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29-31절에 근거하여 마을마다 설교 연습회(exercise)라는 성경공부 형식의 모임을 매주 한 번 가졌는데, 여기서 모인 사람들은 자유롭게 성경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후에 지역 노회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낙스의 활약으로 1567년에 모든 스코틀랜드 의회는 앞으로 모든 왕들이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의무화했으며 또한 교회 회집의 자유와 권한을 인정하게 되었다. 낙스는 대륙의 개신교 국가들에서 인정되고 시행되기도 한 감독(superintendent) 제도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교 관구들에 이러한 총감독을 세우도록 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에 장로교 제도가 수립되기 전인 1572년 11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낙스의 후계자 엔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은 낙스와 달리 모든 형태의 감독 제도를 반대하고 장로 제도를 정착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멜빌은 제네바에서 공부한 후 1574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사역하다가 장로 제도를 싫어한 제임스 6세(= 영국의 제임스 1세)에 의해1607년에 추방되었고 1622년 세단(Sedan)에서 사망했다. 멜빌의 노력으로 1581년 총회에서는 제2 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가 채택되었는데, 그 문서에서 감독(bishop), 교구목사(pastor), 목사(minister)와 같은 용어들은 동의어로 정의되었다. 그 문서에 따르면 목사들은 교인들의 적법한 선거와 동의 후에 임명될 수 있다. 1562년과 1564년 총회는 낙스의 예식서가 예배 지침서로 공인되었으나, 1565년에는 총회가 위촉한 존 크레이그(John Craig) 외에 몇 사람이 [제네바 시편집]을 개정한 [구 스코틀랜드 시편집(Old Scottish Psalter)]이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1650년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1643년 7월 1일에 영국에서는 의회에 의해 선임된 151명의 대표들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개최되어 폐회한 1649년 2월 22일까지 1163회에 걸쳐 회의가 열렸다. 그 대표자들 가운데 121명은 “유식하고 경건하며 분별력 있는 신학자들”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상원과 하원의 대표자들이었다. 여기에는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외의 다른 지역이나 국가에서 파견된 대표는 아무도 없었다. [장로교 정부의 형태(Form of Presbyterial Church Goverment)]와 [공예배 지침서(Directory of Public Worship)]는 1644년에, [신앙고백]과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은 1647년 4월, 10월, 11월에 각각 완성되었다. 이 문서들의 영구적인 가치와 영향은 영국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총회는 1645년과 1647년에 조심스럽게 부가된 조건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작성된 문서 모두를 채택했다. 그 조건들은 예배는 스코틀랜드의 관습을 유지하며 세속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교회의 자율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크롬웰이 1649년 1월 29일에 찰스 1세(Charles I)를 처형하고 1651년 9월 3일에는 스코틀랜드 군과의 워세스터(Worcester)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다. 1650년대는 크롬웰과 독립파들의 시대였고 교회는 논쟁과 분파주의로 분열되었다. 영국에서 감독 제도는 왕권 아래 있어 교회와 국가 사이에 아무런 갈등과 대립이 없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감독 제도와 장로 제도가 긴장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1660년의 왕정복고 이후 언약파(Covernanters)로 불린 장로교인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는 이런 관계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두 제도 간의 상충은 결국 멜빌이 주도한 장로교가 승리했다. 이 승리는 1688년 영국 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부활되고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1690년의 일이었다.
7. 동구 유럽의 개혁교회
16세기 후반에 폴란드에서는 칼빈과 서신왕래를 하며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높이 평가한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Sigismund II Augustus)가 즉위하면서 루터파 개혁이 개혁파 개혁으로 전환되는 전기를 마련했다. 또한 폴란드 출신인 존 아 라스코(John à Lasco)가 1557년에 폴란드로 돌아와 그 일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가 개혁파 교리와 교회법에 근거한 개혁교회를 세우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폴란드에서의 개혁파 개혁의 대세는 꺾이기 시작하여, 결국 폴란드의 대세는 17세기에 다시 로마교로 복귀하고 말았다. 헝가리에서의 개혁파 개혁의 상황 역시 폴란드와 비슷하다. 대체로 마자르족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들에서 개혁파 교회들이 득세했다. 특히 맛티아스 베로(Matthias Beró)는 데브레친(Debreczin) 도시를 헝가리의 제네바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개혁파 교회가 폴란드 보다는 헝가리에서 보다 큰 세력을 유지했으나, 헝가리 역시 국민들과 집권층의 대다수가 다시 로마교로 복귀함으로써 그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