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역사신학이야기

루터와 종교개혁_황대우 교수

한스킴 2018. 8. 27. 22:09

강의안

루터와 종교개혁

║황대우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1.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은 중세말기에 서구 유럽이 유일한 종교래 인식하고 있던 기독교의 개혁을 의미한다. 즉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개혁이다. 그것은 분명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개혁이었으나, 교회만 개혁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세계 전체가 개혁의 대상이었다.

과연 이 종교개혁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누가 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인가? 이 질문에 누군가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할지 모른다. “교황의 전횡과 당시 로마교의 타락에 비분강개한 루터가 용감하게 일어나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의 면죄부 반박문을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城) 교회 정문에 붙인 사건이 곧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루터가 일으킨 것이다.” 이 대답은 종교개혁을 의로운 일,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틀린 대답이다.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 조항을 내 걸었을 때 그는 “개혁(reformatio)”이라는 것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95개 조항의 게재 사건 즉 루터의 행동은 단순히 당시의 관행을 따른 것일 뿐이었다. 당시 교수라면 누구나 자신이 성경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말씀이 있을 경우 그것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것을 토론에 붙일 수 있었는데, 루터는 바로 이 관행에 따랐을 뿐이다. 루터는 당시 1502년에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면죄부 교리와 면죄부 판매가 성경 어디에도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자신의 발견이 참인지 아닌지를 검증하기 위해 면죄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95개 조항을 작성하여 공개적인 장소에 붙인 것이 바로 1517년 10월의 마지막 날에 일어난 95개 조항 게재 사건이다.


1517년 10월 마지막 날은 흔히 만성절 즉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인 11월 1일 하루 전이다. 11월 1일은 만성절이기도 하지만 당시 대학의 개학일이기도 했다. 루터는 토론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그 토론문을 게재할 당시만 해도 개혁에 대한 의도라고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이 보다 더 성경적이라는 루터의 확신에서 비롯된 평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사건, 세계 역사의 페러다임(paradigm)을 바꾼 사건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루터를 통해 일어난 사건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네덜란드 출신의 헤이코 오버르만(Heiko Oberman)은 루터와 루터의 종교개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루터는 자신이 개혁가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으며, 그의 운동을 종교개혁이라 부른 적도 없었다. 개혁이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하지 않았으며 할 수도 없었다.” 오버르만은 “종교개혁”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으로 정의한다. 즉 종교개혁이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이다. 마르틴 루터 자신도 개혁에 대해 이렇게 설파했다. “교회는 개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개혁은 한 사람, 즉 교황의 일이 아니다. 또 많은 사람들, 즉 추기경들의 일도 아니다... 반대로 개혁은 기독교 세계 전체의 일이다. 그렇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이다.”

종교개혁가 루터 자신의 말이나, 중세 말기와 종교개혁 연구의 대가인 오버르만의 평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회의 개혁, 신앙의 개혁, 나아가 기독교 세계 전체의 개혁인 종교개혁은 한 위대한 인간이나 뛰어난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자신이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그분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 하나님의 계획에 루터는 첫 단추를 끼는 일을 잘 감당했고 다른 개혁가들은 나머지 단추를 끼는 작업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들이요 동역자들이었다.



2.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마르틴 루터(Martinus Luther)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번(Eisleben)에서 한스 루더(Hans Luder)와 마가레트 린더만(Margaret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나, 성 마르틴(St. Martin)의 날인 11월 11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루터의 부모는 1484년에 만스펠트(Mansfeld)에 정착하였는데, 거기서 광부와 농부였던 아버지 한스는 대장간 주인으로 일했다. 1497-98년 사이에 잠시 막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공동생활형제단(de broeders des Gemenen Levens = Brethren of the Common Life) 소속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1498-1501 사이에는 아이제나흐(Eisenach) 도시의 시립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여기서 루터는 프란체스코적 영성을 반영하는 두 귀족 가문인 샬버(Schalbe) 가문과 코타(Cotta) 가문 집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이 친구들 가운데 몇 몇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후에도 계속 친분을 유지한 평생지기들이 되었다.


1501년 3월에는 1392년에 설립된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하여 1502년에 baccalaureus(학사)가 되었고 1505년에는 교양과정(artes)을 마치고 교사 자격증(magister artium. 오늘날의 문학석사 정도)을 취득했다. 거기서 루터는 문법과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윤리학과 형이상학을 공부했으며, 중세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의 새 길(via moderna) 즉 유명론의 대가인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의 수정 오캄주의(Ockhamism)를 배웠다. 당시 유행하고 있던 인문주의와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1505년에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이 법학 공부는 같은 해 7월 2일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에 쉬토테른하임(Stotternheim)에서 일어난 천둥번개 사건으로 갑자기 수도사가 됨으로써 영원히 중단되고 말았다. 엄격한 금욕적 생활을 위해 1505년 7월 17일에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Augustinian) 수도원에 들어갔다. 1507년 2월 27일 에르푸르트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는데, 사제가 된 이후에도 계속 공부하여 1509년 3월에 신학학사(baccalaureus theologiae 혹은 성경학사 baccalaureus biblicus) 학위를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신학부로부터 받았다. 1508년 10월에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의 부원장인 Staupitz의 부름으로 비텐베르크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겼다. 거기서 루터는 신학학사 학위를 받기 전인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양과정의 도덕철학 강의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쿠스 윤리학]을 가르쳤다. 에르푸르트와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회의 대표 자격으로 어거스틴 수도원의 재통합을 위해 1510년 11월에 로마로 여행을 떠나 그 다음 해에 돌아왔다. 루터는 1512년에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 18일에 신학박사 (doctor theologiae)가 되었고, 동시에 성경 강의를 위한 성경 교수로 임명받았다. 1513-15년 사이에는 시편 강의 (dictata super Psalterium)를, 1515-16년에는 로마서 강의를, 1516-17년 사이에는 갈라디아서 강의를, 1517-18년 사이에는 히브리서 강의를 했다.


성경을 강의하면서 루터는 중세의 펠라기우적(Pelagian) 경향을 지닌 스콜라 신학을 거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1517년 9월 4일 [스콜라 신학 논박 (Disput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다음 달인 10월 31일 당시 면죄부의 관행을 비판한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에 붙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 사건이 되었지만, 루터가 그 사건으로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1518년 4월 Heidelberg에서 어거시틴 수도원 종단회의의 공개토론이 벌어졌고, 루터는 그 자리에서 로마교의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 (theologia gloriae)”으로 규정한 반면에, 자기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 (theologia crucis)”으로 규정하여 두 신학을 극명하게 대조시켰다.


Sachsen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Friedrich)는 1518년 8월에 개최된 아욱스부르크(Augsburg) 제국의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그는 교황의 특사로 제국회의에 참석한 추기경 Cajetan으로부터 루터가 아욱스부르크로 출두해야 한다는 명령을 전달받았다. 출두 명령을 받은 루터는 아욱스부르크로 오는 도중 바이마르(Weimar)에서 작센의 선제후를 만나 안전통행권과 여러 추천장, 그리고 여행비를 받아 10월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루터는 카예탄 앞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는데, 교황의 특사는 루터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고 그 잘못된 가르침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일개 수도사 루터가 교황의 권위를 가지고 심문하고 있는 추기경 앞에서 그의 명령을 거절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터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는 철회합니다”를 의미하는 대답 “레보코(revoco)”라는 여섯 철자로 된 라틴어 한 단어를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치적인 역학관계 때문이었다. 즉 당시 황제였던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가 늙어 죽음 직전에 있었는데, 그가 죽으면 그의 뒤를 이을 황제를 선출해야 했고 누가 황제가 되느냐하는 것은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교황은 힘없는 종이호랑이 같은 사람이 황제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 대상으로 그는 작센의 선제후를 지목했다. 특히 교황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두 사람 즉 스페인의 왕 칼 1세(Karl I = 황제 칼 5세)와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 1세(François I)가 차기 황제로 선출되는 일을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했다. 그래서 교황은 루터의 문제로 작센 선제후가 원하는 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를 특사로 급파했다. 카예탄은 심문의 결과로 선제후에게 루터를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명령하는 서신을 보내었지만, 선제후는 밀티cm의 도착으로 카예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게 되었다.


1519년 6-7월 사이에 에크(Eck)와 칼쉬타트(Karlstadt) 사이의 토론으로 계획된 라이프찌히(Leipzig) 논쟁에서 에크가 주로 루터를 비난했는데, 이 때 루터는 콘스탄쯔(Constanz) 공의회가 정죄한 후스(Huss)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정당한 기독교적 가르침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 공의회의 결정이 무오하다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로마교에 이단성의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것을 근거로 로마교는 1520년 6월 15일에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파문교서를 발부하여 10월 10일에 전달했는데, 이 교서는 60일 내에 루터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루터는 오히려 이 교서와 함께 교회법과 스콜라 신학서적들을 1520년 12월 10일에 불태웠다. 이로 인해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는 최종 출교를 선언하게 되었다. 파문 교서가 발부된 이후 루터는 1520년 한 해에 자신의 3대 종교개혁 논문인 [독일귀족에게 고함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과 [교회의 바벨론 포로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와 [그리스도인의 자유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를 발표했다. 루터는 마지막 논문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했으며, 그것을 장문의 편지와 함께 교황에게 보냄으로써 로마교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새 황제로 등극한 칼 5세가 1521년 1월 27일에 보름스(Worms)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했으며, 3월 6일에는 루터를 소환하여 직접 심문했다. 이 회의는 루터를 정죄하기로 미리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현자 프리드리히를 포함하여 루터를 아끼는 모든 지인들은 한결같이 루터에게 보름스로 가는 일을 만류했다. 하지만 루터는 용감하게 목숨을 걸고 그곳으로 가서 당당하게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카예탄 앞에서처럼 거기서도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의해 사로잡혀 있으며, 저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주장을 철회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런 다음 “나는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 서 있사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Ich kan nicht anderst, hie stehe ich, Gott helff mir. Amen. = Hier steh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 mir, amen. = Hier I stand. I can nothing else. God! Help me. Amen) (Oberman, 216)”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황제는 1521년 5월 26일에 제국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당신이 언급된 마르틴 루터를 당신의 집에 들이지 말며, 정원에도 들이지 말고, 그에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말며, 그를 숨겨주지 말고, 은밀하게든 공적이든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어떠한 도움이나 편당이나 지원이나 후원도 보이지 말 것을 명령한다.” (Oberman, 216-7). 이로써 루터는 교회로부터 출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살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다. 1521년은 루터 생애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기록한 해였다.


현자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서 1521-22 동안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 번역은 바로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완성되어, 1522년에 출판되었다. 이 기간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칼쉬타트가 개혁을 주도했는데, 그의 과격한 개혁은 급진적인 변화를 원치 않는 루터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두 비텐베르크 개혁가는 결별하게 되었다. 이 일로 루터는 다시 비텐베르크에 돌아왔다. 또한 루터는 1524년 5월부터 1526년 7월에 걸쳐 토마스 뮌쩌(Thomas Müntzer)와 같은 혁명적 그룹에 의해 중남부 독일에서 발생한 농민들의 반란에 정부가 강력하게 대처해야 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변혁을 원했던 급진적인 종교개혁가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1524-25년 사이에는 “자유 의지(liberum arbitrium)”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대표적인 성경적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결별하였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고 주장한 에라스무스의 견해와 대립되는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을 주장했다. 루터의 결별은 1524년부터 전개된 독일 남부와 스위스 신학자들을 상대로 벌인 성만찬 논쟁사건을 통해서도 발생하였다. 이 성만찬 논쟁은 헷세(Hesse)의 필립(Philiph) 공과 쉬트라스부르크(Straßburg)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써(Martin Bucer)의 중재 노력의 열매인 1529년 말부르크(Marburg) 종교회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신교를 양분시키는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에 근거하여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의 몸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동시 다발적으로 임재할 수 있기 때문에, 성찬에 그리스도의 부활체가 육신적으로 성찬의 빵에 함께 할 수 있다고 보았고, 반면에 쯔빙글리(Zwingli)는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공간적 제한을 받으며 재림 시까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제로 임재하시는 일은 불가능하며, 이런 점에서 성찬이란 단지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감사드리는 행사로 보았다. 부써는 이 두 사람의 성찬론의 차이가 실제적이기보다는 언어사용의 차이에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두 개혁가의 성찬론을 수용하고 보완한 영적 임재설로 지칭될 견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1525년 5월 5일 자신의 후견인 현자 프리드리히가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약 한달 후인 6월 13일에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552.12.20)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귀족 출신이며, 수녀원 출신이었고 루터보다 15세나 어렸다. 농민 반란이 진압되자 게오르크 폰 작센(Georg von Sachsen)은 이와 같은 반란을 방지하고 진압하기 위해 독일의 중북부 지역의 로마교 군주들과 더불어 데소(Dessau) 동맹을 체결했는데, 1526년에 이 동맹에 맞서 당시 개혁적 군주의 대표인 헷세의 필립 공과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작센의 요한(Johann)이 주체가 되어 개신교 영주들의 연합인 토르가우(Torgau 또는 고타(Gotha))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1525년까지 자생적 민중 운동이었던 종교개혁이 점차 영지의 지배자인 군주와 자유도시를 다스리는 정부에 의해 주도되는 계기가 되었다. 황제는 이 토르가우 동맹이 못마땅했으나, 1526년에 프랑수와 1세가 황제를 대적하기 위해 교황 클레멘티우스 7세(Clementius VII)와 제휴하였을 뿐만 아니라, 터키인들의 위협으로 그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제는 1526년 6월 25일에서 8월 27일까지 쉬파이엘(Speyer)에서 제국회의를 개최하여 보름스 칙령을 철회하고 종교의 모든 자유를 각 지역의 군주들에게 허용한다고 선언하게 되었는데, 스트라쓰부르크의 종교개혁 연구가인 앙리 스트롤(Henri Strohl)은 바로 이 결정을 “종교는 땅의 소유주에게 속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리의 최초 선포로 간주했다(스토페르, 39). 그러나 황제의 이와 같은 종교관용정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 칼 5세가 교황과 프랑스 왕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직후인 1529년 4월에 2차 쉬파이엘 국회를 소집하여 보름스 칙령을 적용과 종교개혁 확장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개혁운동을 지지하던 소수의 군주들 (작센의 선제후 요한과 헷세의 백작 필립을 포함한 5명의 군주)과 독일 남부의 고지대에 있는 도시들(Strassburg, Nuremberg, Ulm, Constanz, Lindau, Memingen 등 14개 도시들)은 이러한 결정에 항의했는데, 이들에게 “항명자들” 즉 “프로테스탄테스(protestantes)”라는 명칭이 붙여졌고, “개신교(Protestantism)”라는 용어는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최초의 개신교 에큐메니칼 회담인 1529년 말부르크 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인 1530년에 황제는 아욱스부르크 국회를 소집하여 자신의 영토 내의 종교문제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이 때 루터파는 멜랑흐톤에 의해 작성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제출했고, 독일 남부 지역의 도시들인 스트라쓰부르크, 콘스탄스, 린다우, 메밍엔은 부써와 Capito에 의해 작성된 [4개 도시 신앙고백서(Confessio tetrapolitana)]를 제출했다. 로마교 신학자들은 국회에 제출된 이러한 개혁 측의 신앙고백서에 맞서 [카톨릭의 논박(Confutatio catholica)]로 응수했다. 황제는 1530 11월 19일 국회를 종료하면서, 개신교도들에게 1531년 4월 15일 이전까지 로마에 굴복하라고 경고했다. 이것을 계기로 개혁 운동에 가담한 군주들과 도시들은 필립 백작과 요한 선제후를 중심으로 1531년에 Schmalkanden 동맹을 맺었다. 황제는 터키인들의 공격으로 이들과 1532년 7월 23일에 누렘베르크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재세례파인 멜키오르파가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실현되리라고 선포했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뮌스터(Münster)를 대신 지목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레이든(Leiden)의 요한(Johan = 뵈껄스존(Beukelszoon))을 중심으로 상인 베른트 낍뻐르돌링(Bernd Kipperdolling)과 설교자 베르나르트 로트만(Bernard Rothmann)이 가세하여 뮌스터를 정복하여 재세례파의 지상왕국을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식 신정정치를 실시했으나, 1535년 6월 24일에 주교와 군주의 연합군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이 사건은 로마교와 황제로부터 개신교가 폭력적이라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였으므로 루터는 개혁운동이 이들 재세례파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천명하였다.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독일 북부와 스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독일 남부 사이의 성찬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부써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536년 루터와 더불어 “비텐베르크 일치”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불링어(Bullinger)가 이끄는 스위스 개혁 도시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1546년에 루터는 황제가 개신교 연합군과 쉬말칼트(Schmalkald)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쉬말칼트 전쟁은 1547년 뮐베르크(Mülberg) 전투에서 작센의 선제후 요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가 잡혀 투옥되고, 곧이어 헷세의 백작 필립이 사로잡힘으로써 제국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황제는 승전 후 아욱스부르크 국회를 소집하여 1548년 6월 30일 아욱스부르크 임시안(Interim)이 선포되어, 패배한 모든 개신교 영지와 도시들에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 독일 개신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아욱스부르크를 점령하고, 인스브루크(Innsbruck) 전투에서 황제 칼 5세를 격파하여 승리를 얻은 후, 황제와 파소(Passau)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종교관용정책이 수용되었으며, 1555년 아욱스부르크 국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와 같은 종교관용정책은 다시 한번 천명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아욱스부르크 평화”라고 부르는데, 이 평화조약을 통해 대부분의 독일의 개신교도들은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표현된 그대로 그들의 신앙을 보존할 자유를 획득했으며, 종교적 영역에서 세속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는 “종교는 그 지역의 통치자에게 속한 것(cuius regio eius religio)”이란 원칙을 다시 수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