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학이야기

나의 우리의학 순례의 길1

한스킴 2004. 2. 12. 22:05

 

이 글을 쓰는 목적

생명누리공동체 생명학교라는 이름으로 혹은 한민족생활의학강좌 때로는 우리의학교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학에 대한 소개를 시작한지 어느덧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 일이 본업이 아니었기에 농사를 하는 틈틈이 요청하는 단체나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만 시간을 내어 특강도 하고 생명학교라는 형태의 집단교육도 실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우리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서서히 알게 되었고 점차 우리조상들의 중요한 민족적 자산을 계승 발전시켜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지금은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학을 보급하는 일에 나서고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만 제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학과 관련되어 걸어온 길을 살펴봄으로써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이 저를 이해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학의 바른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힘들게 보낸 청소년기

저는 지금 제가 사는 곳에서 약 20km 쯤 떨어진 경남 합천군 율곡면 항곡리에서 농사하는 집의 1녀 4남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고갯마루 하나를 넘어 율곡초등학교를 다녔고, 8km를 걸어 읍내에 있는 합천중학교를 다니다 2학년 때 집팔고 논팔아서 온가족이 서울로 이농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1966년도이니 우리나라에 산업화과정이 시작된 초기에 이농을 한 셈입니다. 당시 서울 변두리(모래내)에 정착한 우리가족은 남가좌동 응암동 일대의 집터고르기 공사현장에 나가 흙파서 나르는 작업이나 돌담쌓기 작업을 무던히 했고 모래내시장에서 야채장사나 군밤장사 등 다양한 장사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 큰형님께서 난지도 주변 하천부지를 괭이와 삽으로 일구어 농사를 짓자고 하시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농사가 싫어 이농을 했는데 다시 농사짓는다고 하니 진덜머리가 나서 이제부터는 집으로부터 독립하여 제 길은 제가 알아서 찾아볼테니 그리 아시라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 때부터 신문배달도 하고 잡지도 팔고 때로는 외판원생활도 해가며 몇 년을 보냈습니다. 그 때의 제 잠자리는 주로 사무실 책상위였으며 밥 또한 넉넉히 먹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학교를 다닌 적도 더러 있긴 하지만 대체로 67년부터 72년까지 거의 6년간을 밑바닥 생활을 하며 겨우겨우 중졸 고졸자격검정고시를 치루고 대학에 시험볼 자격을 얻었습니다. 학생이 아닌 때가 많았던 저로서는 교복을 입고다니던 학생들이 너무도 부러워 꼭 대학만큼은 다니고 싶어서 좋은 대학 응시했다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간 곳이 한신대학이었는데 그래도 다녀보면서는 내가 참 훌륭한 좋은 학교에 다니는구나싶어 정말 만족스럽게 다녔습니다.

 

 

요가와의 접촉

그런데 대학시절부터 서서히 제 몸에서 이상증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젊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만성 피로가 따라다니고 곳곳에 신경통도 있고 약간의 관절염 증세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뒷머리로 피가 잘 전달되지 못해 멍하게 보내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아마도 몇 년간을 사무실 책상위 찬 바닥에 웅크리고 떨며 지낸 것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하면 진통제라도 먹고 버티는 생활이 계속되다 3학년 때(75년) 요가지도자를 만나 요가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요가뿐만 아니라 요가의 철학을 비롯하여 호흡과 명상법 그리고 단식과 식사법 등을 배웠습니다. 요가는 참으로 세상과 자연과 우리 몸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좋은 건강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가지도자의 지도에 따라 7일간의 단식을 처음으로 해내고 제 몸은 참으로 좋아졌습니다. 만성 위염과 만성피로도 사라지고 신경통도 많은 부분 없어졌습니다.
그 뒤로 요가를 열심히 했더라면 아마도 지속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군사독재로 인해 나라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던 터라 학교는 항상 민주화운동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중심 학년으로서 저도 민주화운동에서 예외가 될 수 없어 열심히 논의 속에 참여하다보니 건강을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대학 4학년 초 군대갈 때까지 다시 건강은 말이 아니게 나빠졌습니다.

 

 

군대에서 얻게 된 관절염과 안경

언제나 먹고사는 문제나 학비를 대는 일을 스스로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저로서는 군대가 참 좋았습니다. 열심히 훈련만 받으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따뜻한 잠자리도 제공해주고 한 달에 한 번씩 용돈도 주니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군대생활에 임했습니다. 한 주에 한 번 있는 10km 완전군장구보도 열외 없이 참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양이 부실했던 제 몸에 그러한 구보가 무리가 되었나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며 명사수였던 제게 사격타켓이 잘 안보이기 시작해 할 수 없이 안경을 끼기 시작했고 나아가 관절염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대하고 나가서 다시 요가도 하고 단식을 하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니시건강법과의 접촉

제대하고 다시 학교에 복학한 뒤로 몇차례의 단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지도하거나 감독하는 이 없이 스스로 혼자 하는 단식이었기에 주위에는 항상 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혼자서 그것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밥과 음식을 끊고 오로지 생수만 마시면서 단식을 해보면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에 주로 건강법과 관련된 책들을 관심있게 보게 되는데 그 때 접하게 된 것이 일본사람이 쓴 니시(서식)건강법이란 책이었습니다. 그 책도 제게 건강법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간단한 운동과 음식을 끊는 단식과 바르게 먹는 방법과 관련되어있는 니시건강법은 어쩌면 요가의 일본식 변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니시건강법의 도움을 받으며 몇차례 단식을 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방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한 이후의 제 식욕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식욕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무기력할 수 있는지 참으로 제자신이 나약해보였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의 실패에는 별 부담없이 다음에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5-7일간의 단식을 무려 5차례나 실패하고 난 뒤로는 단식이 좋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감히 다시 시도해보거나 남들에게 권유할 엄두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단식 실패로 인해 제 건강은 별로 호전되지 못하고 항상 지병처럼 관절염과 위장병과 혈액순환장애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우리의학과의 만남

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원을 다니다 휴학하고 마산에서 2년간 개척교회 목회를 하기도 했고 다시 복학하여 연세대학원을 마치고 한신대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들에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책과 씨름해야하는 시간은 많아지는데 제 몸은 한 주에 3일을 강의와 세미나로 버티면 4일은 누워서 겨우 책을 보아야할 만큼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입안은 늘 헐어있어서 말하기가 힘이들거나 아예 싫어지고 매운 것이라도 먹으면 눈물이 나곤 했습니다. 항상 신경은 곤두서있어서 신경질을 잘 내게 되고 인내력은 극도로 떨어져버렸습니다. 관절염은 점점 더 심해져서 류마티스성으로 발전하여 오른쪽 무릎으로 시작하여 왼무릎 양발목 팔꿈치 손목 손가락 마디까지 마디마디가 다 아파왔습니다. 차만 타면 앉을 자리를 두리번거리며 찾아야했습니다.
도저히 이래서는 더 이상 공부나 강의를 할 수도 없겠다싶어 먼저 몸을 고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갖가지 자료도 찾아보고 세브란스병원의 진료실과 물리치료실도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침술사를 찾아 침도 맞고 뜸도 뜨게 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 그래도 우리의학의 하나인 침과 뜸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언젠가 기회가 오면 우리의학을 체계적으로 배워보리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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