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조직신학이야기

내 세 (The Future Life)

한스킴 2018. 8. 10. 09:15

                 

1. 구약의 가르침


내세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에 관하여 연구해 보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생 과 사에 관련하여 크게 효력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게 얻게 하려 함이로라"(딤후1:10) 그리스도는 내세에 관한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중간 상태에 있는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하셨다. 이와 같은 구원은 저들을 위한 축복의 증가의 결과로서 생기게 되었다.


비록 사후의 내세에 대하여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만큼 완벽한 언급이 없지만 분명히 내세에 관한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영원 불멸의 교리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갖기에 적당하며 또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동물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곧 인간은 시간을 초월하여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시간을 초월하여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죽음을 맛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생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되어 인간의 운명은 좌절되고 말았다.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죽음은 영혼과 육체와의 격리를 뜻한다. 죽음이란 영혼이 소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은 비록 인간이 육적으로 죽을찌라도 그의 개성만은 살아 남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의 육체가 무덤 속에 묻혀 있는 동안에 영혼은 시올(Sheol)속에 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시올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시올을 음부라고 번역된 곳도 있다. 시올이 하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이 곳을 가리켜 아래 있다든가(잠15:24) 또는 아래로 내려간다든가(겔32:21). 지하라고 한 것 등을(겔32:18) 보아서 알 수 잇다. 또 다음과 같은 표현등을 보아 이곳이 축복 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사함이 없는 곳(시18:5) 잔혹한 곳(아8:6) 고통을 당하는 곳(욥24:19) 슬픔을 당하는 곳(시18:5)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 (욥7:9).

시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어둡고 침울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어린이들이 어두운 방에 들어가기 싫어 뒤로 물러 나오는 것과 같이 구약의 성도들은 시올을 싫어 했던 것이다. 시88편과 사 38장을 그 실례로서 찾아 보라. 시울에는 의로운 사람의 영혼이 거하였고(욥14:13,시88:3,창37:34,35) 또한 악한 사람의 영혼도 거하였다. (잠5:3-5,7:27,욥24:19.시31:17)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볼 것 같으면 시올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악인을 위한 고통의 장소가 그 일부분이요(눅16:23,24) 나머지 다른 부분은 의인을 위한 위안과 안식의 장소이다. (눅16:25).


그러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전혀 소망을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메시야가 시올에 내려가 하나님의 백성을 그곳으로부터 구원하시리라는 소망이 있었던 것이다. (시16:10,49:15). 이와 같은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있는 곳에 내려가 시대의 성도들을 시올로 부터 구원하여 낙원에 이르게 함으로써 성취 되었다. (마12:40,눅23:42,43,엡4:9,10,8) 엡4:9,10,8 을 볼 것 같으면 영계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듯이 보인다. 즉 의인들이 저들의 부활을 기다리던 것이 지금은 하늘로 그 위치를 옳겼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엡4:8,고후 12:2) 이로부터 의인의 영은 영광을 받기 위하여 위로 올라오게 되었고 악인의 영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계20:13,14)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내세에 대한 가르침의 다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과 모세와 아론과 다윗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써 "너의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죽음 후에 의식적 존재 (Conscious Existence)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왜 그러냐하면 저들이 저들의 조상이 매장된 곳에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에녹과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한 사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축복된 내세를 누릴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3) 마태복음 22장 32절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유대인의 신앙을 강력히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죽은자의 부활에 관한 교리가 구약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욥19:26,단12:1,2)

(5)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창37:35) 고 말하였을 때에 분명히 그는 무덤에 내려갈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잡혀 먹힌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신약의 가르침


신약은 새롭고 보다 나은 조건 하에서 영적 생명이 지속될 수 있는 사후의 내세를 시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영원한 영적 생명에 들아가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다.(막9:43)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신자들은 이 영생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즉 사망으로 부터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요3:36) 그러나 이것은 다만 시작에 불과한 것이요 그 충만한 상태는 또 다른 영역은 "생명의 부활"로 시작된다.(요5:29) 내생이 있는데 (딤전4:8) 그것은 지금 감추어져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실 때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골3:4)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실 것이다. (약1:12)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들은 비록 죽을지라도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좋게 되는 것이다. (빌 1:21)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 받게 될 유업과 약속의 땅과 충만한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롬8:17,갈4:7).


육체적 죽음이 주님과 기독교인의 교제를 단절시킬 수는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써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저들의 오라비가 아주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희들의 오라비를 사랑했으며 또한 친밀한 교제를 가졌노라 내가 어떤 사람인 줄을 알고 또한 나의 능력을 기억한다면 잠시나마 내가 우리들의 사이를 친밀하게 맺어 주던 교제를 죽음으로 하여금 단절케 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느냐?"


 영원불멸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영원불멸이란 우리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있다는 지식 즉 논리 이상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다년간 친밀한 교제를 가져오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왔고 또한 그의 임재를 느껴온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임종 시에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지금껏 친밀한 교제를 맺어왔으나 지금 우리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살전4:14-17) 사망이나 생명이 그리스도로부터 격리시켜 놓을 수는 없다.(롬8:38)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어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격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메인 사람들이 허무 속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사로이거나 어느 누구이거나 나를 믿고 의지하고 나와 하나로 연합되기만 하면 그의 생명 속에 나의 능력이 역사하게 된다. 너희 형제들도 사랑과 믿음으로 나와 하나로 연합 되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나와 연합된 자 속에 반드시 능력이 역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