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역사신학이야기

도르트 대회의 역사적 배경과 개혁주의 신조

한스킴 2018. 9. 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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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대회의 역사적 배경과 개혁주의 신조

칼빈신학교 홍 석 숭


목     차


제 1 장  서  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제 2 장  도르트대회 이전의 유사한 교리논쟁 

  1. 어거스틴(Augustine)과 펠라기우스(Pelagius)의 논쟁

  2. 반펠라기안 주의(Semi-Pelagianism)

  3. 루터(Luther) 에라스무스(Erasmus)의 논쟁

제 3 장 도르트대회 이전의 개혁주의 신조 

  1. 제 1 헬베틱 신앙고백 (1536)

  2. 제네바 신조 (1552)

  3. 제 2 헬베틱 신앙고백 (1566)

  4.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

  5. 벨직신앙고백 (1561)

  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563)

제 4 장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 알미니우스의 생애

   2. 알미니우스의 사상

제 5 장  도르트대회(Synod of Dort)

  1. 항론파(Remonstrants)와 대항론파(Contra-Remonstrants)

  2. 도르트대회(Synod of Dort)의 소집

  3. 도르트신조(The Canon of Dort)

  4. 도르트대회의 의의

  6. 알미니우스의 5대 교리와 칼빈주의 5대 교리 비교

제 6 장  도르트대회 이 후의 신앙규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제 7 장 결  론 


    참고문헌

    부록 :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상호비교




제 1 장  서  론


  1. 연구의 목적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성경 역시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계속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선택과 예정의 교리가 증거되고 있다. 이러한 구원의 교리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논쟁과 수정을 통하여 형성되어져 왔다. 그러나 언제나 긍정적인 면으로만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부정적인 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신앙고백과 비교할 때 다른 주장들, 혹은 이단적인 주장들로 구분되어지는 교리적 주장- 들도 끊임없이 나타나서 정통신앙을 위협하곤 하였다. 많은 이단들 가운데서 인간편의 공적과 인간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이 성취된다는 주장들이 대두되어서 기독교계 내에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오곤 하였다.

  사실 초대교회의 교부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구원’이라는 근본적 개념에 있어서는 대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베른하드 로제에 의하면 펠라기우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베풀어 주신 구속을 설명할 때는 가장 공경스런 언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1) 즉, 실제적인 논점은 구원의 방편과 그 순서에 있어서의 견해차이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교리적 논쟁을 살펴봄에 있어서 도르트대회 이전의 유사한 신학적 논쟁과 도르트대회의 논쟁을 개혁교회의 입장에서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성경적인 구원교리를 이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이 논문은 도르트대회의 배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형성에 대한 것으로 제 2 장에서는 도르트대회 이전의 유사한 교리논쟁에 대해 특히 그 성격이 비슷한 어거스틴(Augustine)과 펠라기우스(Pelagius)의 논쟁, 반펠라기안 주의(Semi-Pelagianism) 그리고 루터(Luther)와 에라스무스(Erasmus)의 논쟁에 대해서 언급을 할 것이다. 제 3 장에서는 도르트대회 이전의 개혁주의 신조들에 대해 알아보고 제 4 장에서는 도르트대회의 원인 제공자인 알미니우스(Jacous Arminius)와 그의 사상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제 5 장에서는 도르트대회(Synod of Dort)의 배경과 진행을 알아보고 도르트대회의 의의와 도르트대회(Synod of Dort)에서 정리된 칼빈주의(Calvinism)의 5대교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제 6 장에서는 도르트대회(Synod of Dort) 이 후의 신앙규범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에 대해 논할 것이며 제 7 장은 이 논문의 결론이다.




제 2 장  도르트대회 이전의 유사한 교리논쟁


  1. 어거스틴(Augustine)과 펠라기우스(Pelagius)의 논쟁

  도르트대회에서 논의된 구원관에 대한 이견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논쟁의 한 주제로서 주목을 받고 있던 교리이다. 그것은 주후 400년경, 로마 전역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던 어거스틴의 참회록으로부터  발단이 된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소유할 수 없으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바를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께서 의지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소서”2) 라는 기도를 하게되는데 이것이 펠라기우스(Pelagius)를 자극시키는 동기가 된다. 펠라기우스(Pelagius)는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며 이 자유의지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며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의 「은혜론」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또 나의 소책자 중에서 어느 것이 “참회록”보다 더 널리 호평을 받았습니까? 펠라기우스 이단설이 나타나기 전에 발표한 그 책에서 나는 여러 번 하나님에게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며,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옵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참회록 ix : 40, 45, 60). 나의 형제인 어떤 동료 감독이 로마에서 나의 이 말을 언급했을 때에, 그 석상에 있던 펠라기우스는 이 말을 참아 들을 수 없었고, 다소 지나치게 격분해서 반대하다가 내 형제와 거의 싸울 뻔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또 중요하게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명령하시는 것을 주옵소서"라고 올바로 구하면, 하나님은 이 믿음을 친히 주십니다. 

  같은 책에 내가 회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심히 너절한 말을 미친 듯이 지껄이면서 믿음에 반대했건만, 하나님이  나를 돌이키신 이야기를 할 때에, 우리 어머니가 매일 눈물로 드리는 믿음의 기도에 응답이 있어서 내가 멸망하지 않도록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밝힌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는 믿음을 싫어할 뿐 아니라 반대까지 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하나님이 진정한 믿음 쪽으로 돌이키신다고 확언했습니다. 또 내가 견인하여 자라도록 하나님께 어떻게 간구했는지를 여러분은 아십니다. 원하시면 그 글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책에서 구했거나 찬양한 하나님의 은사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가 주시리란 것을 예지하셨고, 또 누구에게 주리란 것도 모르셨을 리가 없다는 것을, 누가 감히 부정하겠느냐고 묻기보다, 누가 감히 의심인들 할 수 있느냐고 나는 묻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대한 명백하고 확실한 예정입니다. 그 후에 나는 펠라기우스파에 반대했을 때에, 부득이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이 예정을 옹호하게 된 것입니다. 이단설들은 각각 독특한 문제를 교회에 끌어들인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개개의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몰라도. 생겼기 때문에, 거기 대항해서 성경을 더 조심스럽게 옹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파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에 대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나는 부득이 예정을 찬양하는 성경 말씀들을 많이 또 분명하게 옹호하는 글을 썼습니다. 펠라기우스 사상은 은혜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3)


  이렇게 펠라기우스 논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헤그룬트(Bengt Hägglunt)에 의하면 펠라기우스(Pelagius)는 본래 아일랜드(Ireland)태생으로서, 주후 400년이 채 되기 전에 로마에 나타났을 때에는, 회개 문제에 관하여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설교가로서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사상 체계에서는 당시 이전의 전통에서보다도 자유의지에 대하여 더 큰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으며, 그는 이 자유가 단순히 어떤 일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대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혹 여러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황하에서도 악한 길이든 선한 길이든 스스로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는 것까지도 의미한다고 보았다.4)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교훈 가운데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인간에게 선이든 악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믿지 못 한다면, 그는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는 향상을 위한 변화를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로 여겨졌다.5)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널리 수용되기도 했지만 어거스틴은 그를 반박하기 위하여 「펠라기우스 작품논박」이라는 저술을 하기에 이른다.

  초대교회의 신학에서 의지의 자유에 관한 사상은 누구에게나 기본적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이 자유의지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가 불거짐으로 이것은 구원 자체의 문제 즉, 죄와 은혜의 문제에 관한 주요 논제가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는 선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은혜에 대한 언급은 했지만, 그 내용이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헤그룬트의 견해를 보자.


   펠라기우스에 대한 어거스틴의 반대는 그의 예정 교리 가운데 가장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의지이며, 이 은혜는 전능성(全能性)을 가진다. 이 은혜의 전능성은 바로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作定)에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특정의 인간들을 선택하시고, 이틀을 타락한 무리로부터 빼어내셔서, 구원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은혜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숨겨진 작정을 적시에 집행하시는 그런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결론을 로마서 8 : 30절의 말씀에 근거하였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인간 구원의 결정적인 근거는 인간들의 공로나 자유 의지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의지 속에 있는 것이다.6)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들에 대해서는 418년 카르타고 대회에서 펠라기우스를 정죄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죄와 은총에 대한 교리는 완전히 확정되지는 못했다. 이것은 새로운 쟁점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펠라기우스를 거절하면서도 어거스틴의 과감한 사상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신학적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을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semi-Pelagians)이라고 부르게 된다.7)

 

 2.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반-펠라기우스주의(Seme-Pelagianism)는 어거스틴의 은총과 자유의지 교리와 펠라기우스의 주장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동조할 수 없는 사상적 분파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이 동등하게 작용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사상은 후에 도르트대회의 도화선이 된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의 사상적 전거가 되므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에 신학에서 파생되어 나온 분파가 아니라 오히려 펠라기우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어거스틴의 신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던 자들이며 그 사상의 기원을 동방에 있었던 어거스틴 이전의 전통 가운데 두고 있었다.8) 이들은 특별히 고울(Gaul)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들은 어거스틴 예정 교리를 운명론으로 해석하여 그것에 대해 그를 논박하였다. 또한 인간의 의지가 믿음과 일반적 의미의 선행에 대하여 무능하다는 사상 역시 반-펠라기우스 주의자들에게는 용납되지 알았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공격에 대해 그들은 이단이 아니고 단순히 오류에 빠진 형제들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책 「은혜론」에서 자신이 펠라기우스파에 대해 가진 견해를 들어 그들의 사상을 우회적으로 논박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이 견해를-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저 주시는 여러 가지 혜택을 부정하는 이 견해를 부숴 버리기 위해서, 나는 성경 말씀을 여러 가지 인용해서 믿음의 시초와 동시에 끝까지 계속하는 견인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우리 자신이 믿음을 시작하며, 그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은사들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라면, 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에 대해 주신다고 결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정통 신앙은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펠라기우스 자신도 자신이 정죄를 면하려고 이 생각을 정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견인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도 그 끝과 같이 우리의 힘으로 얻는 것이라고 대답하며, 완성은 시작보다 훨씬 더 위대하므로 믿음의 계속보다 믿음의 시초는 훨씬 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에 대해서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들을 자기가 주시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예지하셨다면 누가 이 점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예정은 가르쳐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바꿔 말하면 우리의 공로에 대해 주시는 것이 아닌 그 은혜- 주장해서, 도저히 범할 수 없도록 옹호해야 합니다. 9)


  반-펠라기우스파의 주요 인물로는 요한 카씨아누스(John Cassianus)와 파우스투스(Faustus of Rhegium)를 꼽을 수 있는데 그 중 요한 카씨아누스(John Cassianus)는 마르세이유(Marseilles)에 있는 성빅터(st. Victor)수도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펠라기우스와는 반대로 아담으로부터 오는 인류의 보편적 부패를 시인할 정도로 어거스틴의 은혜의 교리를 용납하였으나 그러나 자유의지와 사람의 자기 생활에 대한 자기 결정력을 부인하는 학설은 전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나중에 은혜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은 모든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하였다.10)

  430년 어거스틴이 죽고난 후 레린의 빈센트(Vicent of Lerins)는 어거스틴이 예정교리를 말한 그 의도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목회적인 관심에 초점을 두고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를 반박하게 된다. 그리하여 반-펠라기우스논쟁은 다음 세기로 넘어가게 된다.

  논의가 진행되는 얼마동안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성공한 듯 보였다. 또한 이들의 주장은 주후 473년에 개최된 아를르(Arles)의 회의에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들은 고울지방의 신학적 논쟁을 원치 않기에 어거스틴의 입장을 지원하였다. 이 무렵 아를르의 케이사리우스(Caesarius of Aries, 542년 사망)는 고울지방에서 어거스틴주의의 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반대의 벽에 부딪혀 그의 신학은 발렌치아(Valencia)의 지방 회의에서 배척되고 말았다. 그러나 케이사리우스는 그후 일차적으로 교황의 관심을 얻어내, 마침내는 오렌지종교회의(the Synod of Orange, 529)에서 원죄와, 은혜, 그리고 예정의 문제들을 다룬 신앙고백을 채택시키는 일에까지 성공하였다. 물론 이 신앙고백에서는 반-펠라기우스적 입장이 배격된 반면. 어거스틴의 은혜 교리의 조건들은 받아들여졌다. 이 결정은 그 다음 해 교황 보니페이스2세(Pope BonifaceⅡ)에 의해서 인정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거의 신앙규범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사실은 반-펠라기우스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수정된 어거스틴주의가 예정 교리에 관한 문제들에 있어서 그 규범(norm)으로 인정받았음을 암시하였다.11)

  오렌지 회의는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켰지만 이 회의가 그 간에 있었던 제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다시 거론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아르미니우스주의(Abminianism)자들과 칼빈주의(Calvinism)자들의 논쟁인 것이다.


  3. 루터(Luther)와 에라스무스(Erasmus)와의 논쟁

  오렌지회의 이후 중세로 들어서면서 세계는 로마의 분열과 게르만 민족의 패권장악 등으로 복잡해지면서 신학적 논쟁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어거스틴주의는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 마침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혼합이 되게 된다.12) 이러한 속에서 유명론(Nominalism)과 실재론(Realism)을 주된 논점으로 하는 스콜라신학의 전성기를 맞게 되고, 그 후 오캄(William of Occam)을 중심으로하는 오캄주의(Occamism)를 특징으로하는 후기 스콜라신학시대로 전이 되게 된다. 이 당시의 중요한 논점은 보편(Universalia)에 관한 것들이어서 실제 신학적인 발전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었으며 이러한 틈을 타 수도원을 중심으로 중세의 신비주의(Mysticism)가 발흥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종교개혁의 여명이 밝아오게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초기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분위기는 토마스주의에 치우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어거스틴주의는 루터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 해 다시 살아나게 되어 칼빈에 와서 부흥을 이루게 된다. 이 당시 루터와 대 논쟁을 벌이게 된 에라스무스(Erasmus Desiderius, 1466-1536)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르네상스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인문주의자이다. 그는 성경이나 교부들의 사상을 그리스 고전사상과 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기에 그 자신은 개혁을 지지하지만 교황이나 교회와는 대립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루터와의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13) 그들의 논제는 구원에 대한 자유의지의 문제였다. 즉,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변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설전은 참으로 대 논쟁이라고 할 만하였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단도직입적으로 들고나선 것을 칭찬하였다. 사실 루터와는 개혁에 대한 생각 중 많은 부분을 같이하고는 있었지만 일찍이 여타 논쟁에 있어서는 무관심하게 방관하던 에라스무스는 이제야 말로 싸움의 정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구라파의 일치에 대한 그의 꿈은 보름즈 의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프랑스와 제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이 때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에라스무스는 중재인의 역할을 원했지만 한사코 그가 존경하는 유명 인사들, 곧 왕들. 추기경들 그리고 그의 옛 친구인 교황 하드리아누스에게 떠밀려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과 어느 면에서 루터와 다른가를 드러내기로 동의했다. 그것은 면죄가 아니었다. 미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론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하나의 책을 펴냈는데 그 제목은 「의지의 자유」(On the Freedom of the Will)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이것을 토론의 주제로 삼은걸 고마워했다. 14)


    에라스무스는 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둘러싼 루터와의 논쟁에서 인간의 의지는 조건부로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의식적으로 행한 윤리적 행위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공로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15) 또한 만약 인간 내부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행을 요구한 계명들은 무의미할 것이라 하였다. 에라스무스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앞에 이르는 길은 은혜(grace)와 선행 (good work)이 서로 함께 조합된 성격을 띤 것으로, 이 두 가지를 통하여 인간들은 “육신에서 영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율법에서 신비로, 감각적인 차원에서 이성적인 차원으로, 복잡다단한 곳에서 단순명료한 곳으로" 마치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듯이 올라가야 한다고 믿었다.16)

    이에 대하여 루터는 그의 ”De servo arbitrio“(On the Bondage of the Will, 의지의 굴레에 관하여) 에서 ”인간의 구원이나 영원한 축복과 관련된 문제에 관하여, 인간에게는 전혀 자유의지가 없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성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속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했다.17) 루터는 인간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적극 강조하였다. 또한 인간들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었다. 한편 루터 역시 인간 이성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며, 세속적 성격을 띤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18)


    “아무리 의롭고 성자다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온 우주 줌 어느 누구에게 하나님이자 사람이요, 우리의 죄를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분을 믿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던가. 어느 철학자가 이것을 간파했겠는가? 선지자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랬던가?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치욕거리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의 우스개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저주하신다 해서 그의 자비와 선하심을 믿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의 헤아림으로 정당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령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참되고 혼자인 만큼 그는 인간 이성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분의 정의 역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19)


    이 대 논쟁은 결국 인문주의자들과 개혁가들을 결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간의 논쟁은 그 성격상 어거스틴 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의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사상의 도전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차 후 살펴볼 알미니우스 논쟁 역시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이루어 진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4. 소씨니안주의(Socinianism)

  우리는 여기서 도르트대회의 주요 쟁점이 된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논쟁의 배후에 펠라기우스의 사상과 어거스틴의 사상이 집요하게 충돌해 왔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에서 패한 펠라기우스주의는 시대마다 색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곤 했다.

  16세기 당시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프로테스탄트 망명자중에 렐리오 소씨니(Lelio Sozini)와 그의 조카 파우스투스 소씨니(Faustus Sozini)라는 두 명의 평신도 신학자가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중 렐리오는 칼빈이나 멜랑톤 그리고 불링거와 신학에 대해 논의를 하곤 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그의 질문의 경향에 대해 영적인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그는 정통적인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의 개방적인 것과 질문방법은 개혁가들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한 편 그의 조카 파우스투스는 독학으로 공부한 익명의 다작자였다. 당시 주목을 끌진 못했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정통학설과 멀리 있다는 것을 알게해 준다. 그는 1562년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고 1563년경에는 영혼의 불사성에 대해 거부를 하기에 이른다. 또한 1594년 까지는 출판되지 않고있던 De jesu Christo Servatore 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성품을 강조한 그리스도의 인간과 사역을 극적으로 재해석하게된다. 그들은 후에 소씨니안주의자들이라고 불리웠는데 그들은 정치적 저항을 거부했다. 그는 삼위일체 반대론에 동의하여 보다 조리있고 사리에 맞는 신학을 주장하게 된다. 그들의 신학은 많은 부분에서 정통기독교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향력은 18세기에 까지 이르게 되는데 특히 계시적 종교보다는 이성적인 탐구로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성경에의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20)  이러한 소씨니안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 루이스 벌콥은 그의 저서 「기독교 교리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씨니안주의(Socinianism)는 종교 개혁의 교리에 반대하였으며, 이 파의 죄와 은혜 교리는 고대 펠라기우스 이단의 재판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급 피조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단순한 주도권일 뿐이요 어떤 도덕적 완전성이나, 성질의 우월성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담은 적극적인 의나 거룩함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의 결과로 그것을 상실한 수가 없었다.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나, 그의 도덕적인 성질은 해를 입지 앓은 채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고, 가사적(可死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죄에 빠지고 유죄라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구원을 얻는데, 구주나 혹은 하나님의 어떤 비상한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적 성질에는 아무런 변화도 요구되지 않으며, 또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도 제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범은 인간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 21)


 이와 같이 16세기로 들어오면서 펠라기안주의는 소씨니안주의라는 또 다른 양태로 나타나게 되어 결국 알미니우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제 3 장 도르트대회 이전의 개혁주의 신조


  칼빈이 오늘날 기독교 전통가운데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유력한  인물이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실 칼빈주의(Calvinism)라는 표현도 16세기 어간에 루터파 반대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말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자들 자신은 자신들을 “개혁파”(Reformer)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개혁파들에게는 공동의 신앙고백이 없는 편이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서로 다른 신앙고백을 마련했는데, 이것은 주로 특정의 개별 국가 또는 일부지역에 한정된 것들이다. 이러한 신조들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로는 쯔빙글리, 불링거(Heinrich Bullinger), 멜랑히톤의 제자 중 스트리겔(Victorinus Strigel)과, 크리스토프 페젤(Christoph Pezel),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맡은 우르시누스(Ursinus) 등과, 칼빈주의 전통을 이어간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그리고 가장 엄격한 형태의 칼빈주의 정통을 이어간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도르트대회 이전까지 형성된 개혁주의 신조들을 필립 샤프의 Creed of Christendom vol.Ⅰ을 중심으로22)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제 1 헬베틱 신앙고백 (1536)

  헬베틱은 지금의 스위스를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제 1 헬베틱 신앙고백 (Confessio Helvetica Prior)은 루터교회와 스위스를 연합시키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그 내용은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개혁자 부쩌(Martin Bucer)와 카피토(Capito)가 초안했던 부분과 총회 소집에 대한 로마교회의 약속 부분으로 되어 있다.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세인트 골, 뮐하우젠, 빌 등의 시장들이 파견한 스위스의 신학자들은 1536년 1월 30일 바젤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회합을 가졌다. 부쩌와 카피토도 참석하였으며  불링거(Bullinger), 미코니우스(Myconius), 그리네우스(Gqnuus), 레오 유다(Leo Judoe), 메간더(Megander) 등은 충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스위스 교회들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도록 위임을 받았다. 1536년 2월 모든 성직자들과 평신도 대의원들은 이 고백서를 심사한 후 서명을 하였고, 라틴어로 출판을 하였다. 그 후 레오 유다는 이것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판은 라틴어판보다 더 자세했다. 두 판 모두 같든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 고백서는 27개 조항으로 되어있으며, 성례와 성찬 교리는 근본적으로 쯔빙글리를 따랐다. 그러나 성례적 표호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적 임재를 강조했다. 불링거와 레오 유다는 이 고백서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늘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지장을 초래케 하는 다른 어떤 고백을 추가하지 못하도록 경고문구를 첨부하기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23)


  2. 제네바 요리문답 (1536과 1541)

  칼빈의 사상은 개혁교회의 주요 신앙고백들과 영국 남부의 람베드 신조, 아일랜드 신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칼빈이 직접 작성했던 신앙고백서는 쯔빙글리의 경우처럼 지역적이고 일시적인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 널리 사용되지를 못했다. 칼빈이 직접 작성한 신조로는 제네바 요리문답(Geneva Catechism), 취리히 신조(Zurich Consensus), 제네바 신조(Geneva Consensus) 등이 있다.  칼빈은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처럼 자기가 신조를 만들었으나 그 신조는 자신의 권위보다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학식을 동원하여 어린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조를 만들어 활용시킬 특권과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칼빈은 일반 교육과 요리문답 교육으로 국가교육의 기틀을 닦았다.24)

  칼빈은 1536년에 프랑스어로 된 요리문답서를 치리서와 함께 작성하여 제네바 시에서 새로 조직된 개혁교회의 교육의 기초로 삼았다. 그것은 그의 『기독교 강요』를 발췌 해 놓은 것이었다. 제네바 요리문답은 5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종교성,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차이점,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의 원시상태, 자유의지, 죄와 죽음, 구원의 방도, 하나님의 율법 , 십계명, 율법의 요약, 율법의 목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선택과 예정, 신앙의 본질, 칭의, 성화, 회개와 중생, 신앙과 선행, 사도신경 해설, 주기도문의 요점, 세례와 성찬, 교회, 인간적인 전통, 출교, 행정관리 등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었다. 그 다음에는 이 요리문답에서 발췌하여 21개 조항으로 짤막하게 요약한 신앙고백서를 추가하여 모든 제네바 시민들이 받아들이도록 했다.25)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돌아온 후, 방대한 규모에 달하는 요리문답서를 다시 작성했다. 문답 형식은 묻는 자가 서두에 잠시 나타나는 정도에 불과하여, 실제로는 학생이나 어린아이들이 스승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답서는 칼빈이 재검토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너무 성급하게 출판되었다. 칼빈은 종종 이 문답서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했으나 그럴만한 시간을 얻지 못했다. 이 요리문답서는 개혁파 교회와 학교에서 매우 오랫 동안 사용되었다.26)


  3. 제 2 헬베틱 신앙고백 (1566)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은, 쯔빙글리의 제자요 친구요 후계자 관계에 있던 헨리 불링거(Henry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작성되었다. 불링거는 학식이 있고, 경건하고, 현명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독일계 스위스 지역의 제 2차 종교개혁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알고우(Aargau)의 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출생하여, 화란과 코로그네(Corogne)에서 교육을 받았다. 또한 교부 신학과 스콜라 신학을 공부했고, 루터의 저작과 멜랑톤의 신학대전(Loci)을 큰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오자 곧 쯔빙글리와 가까워졌고, 그와 함께 베른회의 (1528)에 도 참석했다. 그는 샤펠과 브렘가르텐에 서 몇 해 동안 일한 후, 1531년 12월 9일 취리히의 수석 목사가 되면서부터 쯔빙글리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샤펠에서 대 참사가 일어나자 스위스는 종교개혁 시기 중 가장 암흑기를 맡게 되었다. 불링거는 있어야 할 곳에 바로 서는 옳은 사람이 되려고 힘썼다. 그는 꺼져가는 자기 선임자의 사상을 다시 일으켜 그것을 보존하고 완성시켰다. 그의 모범적인 행위와 저작들은 전 개혁교회에 칼빈과 견줄 만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취리히 교회가 위험에 직면했을 때 교회를 지켜 확고하고 안전한 기반 위에 세워놓은 사람이었다.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은 불링거 한사람이 작성했다. 로마교회가 트렌트회의에서 로마교회의 교리를 작성하자 불링거는 칼빈과 동조하여 30년 동안에 제 2 헬베틱 신조의 완성 을 보았다.

  1566년 3월 12일 새로운 신앙고백서가 공적으로 취리히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로 출판되었다. 이 고백서들은 선거후와 헤세의 필립 (Philip of Hesse)에게 보내졌다. 곧 이어서 베자의 노력으로 제네바에서는 프랑스어판이 나왔다. 같은 달, 선거후 프레데릭은 아우구스부르그 회의 석상에서 자기의 신앙을 고상하고도 담대하게 변호했다. 루터파의 적들까지도 그의 경건함에 놀라움을 금친 못하고 더 이상 그를 이단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은 대륙의 개혁교회 신조들 중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제외하고는 가장 널리 인정을 받아 큰 권위를 부여받았다. 고백서는 불링거와 스위스교회들이 기울인 신조작성 작업의 열매였다. 근본적으로 볼 때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은 제 1 헬베틱 신앙고백의 재 진술이어서 그 주제 나 배열 순서까지 일치하고있다. 그러나 그 내용과 형식은 크게 개선되었다. 이 고백서는 성경적이면서도 초대교회적이며, 현명하면서도 엄격하고, 자세하면서도 정교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명확하여 로마교회의 오류를 용납하지 않으며, 루터파 교회와의 차이점을 완화시키고 있다. 이 고백서는 개혁교회의 신앙이 모든 시대의 진정한 가톨릭 신앙, 특히 고대 희랍과 라틴교회의 사상과 잘 조화가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27)


  4.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

  죤 낙스(John Knox)로 대표되는, 개혁주의 신앙이 꽃피었던 스코틀란드에서는 섭정 여왕이던 기이즈의 메리 (Mary of Guise)가 죽고 영국의 메리 여왕이 도착하기 전이었던 1560년 8횔 1일, 에딘버러에서 모인 스코틀랜드 의회는 이런 변화기를 틈타 새로문 사태에 대한 안정을 꾀하려 했다. 이 모임이 스코틀랜드의 역사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교회 문제에 대해서는 교황제도를 추방하고, 예배와 권징의 순수성을 회복하며, 경건한 목사들을 후원하기 위한 교회의 수입을 마련하는 한 편, 학문을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도록 하자는 청원서 가 나왔다. 이에 대한 첫 대안으로 의회는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에게 신앙고백서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작업은 사전에 준비작업이 있었던 관계로 불과 나흘만에 죤 낙스(John Knox)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급히 진행되었다. 이 신조는 매 조항마다 두 번씩 읽혀진 다음에 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구성된 대표들로부터 1560년 8월 18일에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리"라 는 인정을 받았다. 모든 대표들은 이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로마교회 감독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었으나 침묵을 지켰다. 아돌의 백작(Earl of Athole)과 섬머빌 경 (Lord Somerville)과 보르트윅 (Borthwick)경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대표들이 찬성투표를 했다.28)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채택은 미사제도와 교황의 사법권 행사를 배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개혁교회를 배척하고 로마교회를 지지하면서 만들어진 모든 기존 법령들을 파기하는 운동을 야기시켰다. 파리에 있는 메리 여왕에게는 신속하게 사신을 파견하여 신앙고백의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왕은 이를 별로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여왕의 마음속에는 적당한 시기에 자신의 종교를 회복시키려는 계획이 숨어 있었다.  같은 왜 12월에는 제 1차 총회가 소집되어 공동 저자인 죤 낙스가 작성한 「치리서」(Boek el Discipline)를 승인했다. 이 「치리서」는 국가적인 권위를 부여받기는 하였으나 공식적인 인준은 받지 못했다.29)

  그 후 1567년 의회는 개혁교회가 “이 나라 안에 있는 유일하고 참되고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다. 이 때부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1688년에 일어난 혁명 때까지 스코틀랜드 안에 있는 장로교회와 감독교회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교리적 표준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공화정치가 시행되면서 계약파들은 이 신앙고백을 버리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채택했다.30)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적인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서문과 25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신앙고백은 초대교회의 믿음의 전통을 이어받은 복음적인 교리로 되어 있다.


  5. 벨직신앙고백 (1561)

  찰스 5세로부터 시작된 화란의 개혁교회에 대한 박해는 스페인의 필립2세 때에 극에 달하게 된다. 그 결과 오히려 화란의 많은 지역에서 독립교회와 개혁교회를 설립하게 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 때 순교한 자들의 숫자는 로마제국의 세력 아래서 초대교회가 당한 순교자들의 총합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칼빈주의 사상으로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독재와 맞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화란이 상업이나 문화면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칼빈주의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1)

  이러한 심각한 박해 하에서 화란 개혁교회의 뛰어난 전도자요 순교자인 기이도 드 브레스(Guido de Bres)는 1561년 “개혁신앙의 지지자들은 반역자가 아니고, 자신의 의무를 잘 지키며 거룩한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양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아드리안 드 사라비아(Adrien de Saravia)와 모데투스(H. Modetus)와 윙켄(G. Wingen)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어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이 고백서의 사본은 필림 2세에게도 보내졌는데 그것은 그가 이것을 읽고 관용정책을 베풀어줄 것을 은근히 기대함과 동시에 진정한 순교자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그에게 보여주려 함이었다.32)

  이 고백서를 보낸 탄원자들은 자기들이 반역 행위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십만 명 이상에 달하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또 앞으로 더욱 극심한 핍박이 예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인 것이라면 정부의 모든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해야 할 경우를 만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등가죽이 벗겨지고, 혀가 잘리고, 입에 재갈이 물리며, 온 몸이 불 속에 던져지는 쪽을 택했다. 드 브레스 자신도 후에 프랑스의 프란다스(Flanders) 지역이 함락되자 그는 페레그린 드 라 그랑(Peregrin de la Grande)과 함께 제네바에서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여 브러쉘 법정의 명령불복종 죄와 특히 개혁파 교회 안에 공재설을 퍼뜨렸다는 죄 때문에 1567년5월 31일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33) 그 후 개혁주의 사상이 그의 고향에서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으나, 화란의 인접 국가들과 라인강하류 국가들에서는 크게 흥왕 하게 된다.

  이 벨직신앙고백서가 공적으로 채택된 것은 엔트웦 회의(1566)와 베일 회의(1568)에서였다. 그리고 보다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엠덴 총회(1571), 전국 도르트 총회(1574), 미델부르그 총회 (1581), 1619년 4월 29일의 도르트 총회에서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부분적인 수정을 요구하면서부터 본문에 혼란이 생겨나게 되자, 도르트 총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프랑스어, 라틴어, 화란어 개정판을 내놓았다. 이 때부터 벨직신앙고백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화란과 벨지움 개혁교회의 신조로 인정되어 오고 있다. 벨직신앙고백은 미국 개혁(화란)교회의 교리적표준이기도 하다. 이들은 화란의 모교회보다도 더 벨직신앙고백을 고수하고 있다.34)

  벨직신앙고백은 칼빈주의 교리체제를 매우 잘 진술해놓은 37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삼위일체, 성육신, 교회론, 성례론 에서는 상당히 자세하고 잘 정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563)   

  개혁신앙의 교리서 중 백미로 꼽히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팔쯔(Pfalz) 지역을 다스리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의 지시와 후원에 의하여 1563년 독일의 중․남부 지역에 있는 소도시인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되었다. 프리드리히가 이 책을 만들게 한 이유는 개혁교회 출신의 아내의 연고로 그 자신도 개신교로 개종하게 된데 에도 있지만 그가 팔쯔지역의 영주가 되었을 때에 종교개혁의 사상을 따르는 교회가운데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히 루터파와 칼빈파 교회 사이의 성만찬 이해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이러한 신앙고백에 대한 논쟁의 종식과 교회의 연합을 목적으로 종교개혁의 통일된 교리를 추구하고자하는 의도에서 이 책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35)

  이 요리문답서의 저자는 당시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리학 교수였던 우르지누스(Zacharias Ursinus)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멜랑히톤으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남 독일과 스위스 불란서를 거처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과의 사귐이 있었다. 결국 그는 제네바에까지 가서 칼빈을 사귀게 되었고, 특히 성만찬의 이해에 있어서 칼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미 1561년에 제후 프리드리히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그 곳에서 처음에 설교자를 위한 훈련소 책임자로 있다가 1562년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리학 교수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562년 프리드리히 제후는 모든 지역교회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조치를 취하였고, 교리적 논쟁의 해결과 교회의 연합을 위해 새로운 신앙교육서(Katechlsmus)를 만들어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의 가르침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기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집필하도록 우르지누스에게 위임시켰는데 이 작업은 바로 하이델베르그 지역의 개혁교회의 신앙교육을 위한 위원회로부터 진지한 조언과 자문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바로 이러한 작업에 프리드리히 제후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6)

  이러한 자문위원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올레비아누스(C. 01evianus)이다. 그는 1536년 독일 트리어(Trier)에서 출생하였고, 프랑스의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위그노파 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카톨릭의 고향도시에서 개혁사상에 의한 설교가로 활동했는데, 마침내 대주교의 군사적 힘에 의해 추방당하여 배회하다가 바로 하이델베르그지역 개혁교회의 목사로 환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드는 일에 교회의 대표 자격으로 자문위원이 되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제후와 교회의 자문위원회는 종교개혁 시대에 나타난 여러 요리문답과 특히 루터파의 신앙고백서, 기도문 등을 참조하였으며, 가장 큰 영향으로는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을 들 수 있다. 이 제네바 요리문답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교리 뿐 아니라 교수방법에서도 큰 도움을 주었다.

  완성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63년 1월중에 개혁교회가 총회로 모여 읽혀지고 의논되었으며, 큰 수정 없이 승인되었다. 그 후 이 요리문답서는 1564년에 전 지방교회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팔쯔의 새 교회법에 수용되었다. 이 요리문답서는 주일 정규예배에 읽혀지는 예전의 낭독서가 되었으며, 또한 주일오후 예배에 이 책이 설교를 통하여 가르쳐 졌다. 그리고 특별히 학교에서 가르쳐졌으며, 교회의 유아세례자의 입교 준비교육에 사용함으로써 교회와 교인들이 널리 애독하는 신앙의 책이 되었던 것이다.37)

  반세기가 지난 후 구라파에는 30년 종교전쟁이 일어났고, 팔쯔지역은 다시금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게 되었다. 개혁파교회의 목사들이 그곳에서 쫓겨났고, 어떤 교회는 10년, 혹은 20년 이상 개혁교회의 예배를 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때에 독일의 팔쯔 땅의 많은 지역 주민들이 개혁교회의 신앙을 보존하려고 가정예배를 통하여 이 신앙의 책을 예전서로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루드비히 14세가 새로 팔쯔의 지역을 점령했을 때와 그 후에 연이어 개혁파의 지역교회에 온갖 압력이 가해졌으나 개혁파에 속했던 교회들은 이 요리문답서를 소중히 보존했던 것이다.  이 요리문답서는 비밀리에 다른 개혁파 교회에 전달되었는데, 이미 1568년과 1571년에 화란의 개혁교회와 니더라인(Niederrhein) 지역에 있는 독일교회에 전해졌고, 얼마 후에는 헝가리와 루마니아 그리고 폴란드에까지 전하여 졌다. 이 밖에도 몇 몇의 독일 지역교회와 스위스의 교회들에도 전하여 겼는데, 특히 베른지역에서는 자신들이 쓰던 옛 신앙서를 포기하고 이 요리문답서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과 화란사람들이 이주해 갔거나 선교사로 갔던 북미와 남아프리카 등에서도 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의 책으로 채택하여 사용했던 것이다.3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특징은 첫 문답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 1문은 전체 내용의 중심사상과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사상과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위로가 되며 문체가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그 안에는 기독교가 계율을 부과하거나, 지적인 사색을 요구하거나, 외적 의식체계만을 갖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종교이며,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지에게 평안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종교라는 점이 복음적이고 실제적이며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제 1문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 바로 그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건전한 신학사상에 기초를 둔 종교적 명작이다. 이 요리문답은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기회를 만났기에 논쟁과 억지가 팽배해있던 시대에서 그토록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39)

  1619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도르트대회(Synod of Dort)에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어,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조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모든 개혁교회를 하나로 연결짓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에도 독일의 연합파교회를 연결하는 교회연합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40)



제 4 장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 알미니우스의 생애41)

  야코부스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는 1560년 네덜란드 오우데봐터(Oudewater)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농민계급에 속해 있었으며, 그가 어린 시절 친족들이 독립운동을 한 연고로 스페인 군인들에 의해 집이 타버리고 부모는 살해되었다. 고아가 된 알미니우스는 얼마동안 동네 여관의 사환으로 일하다가 그의 재능이 인정되어, 로마교회 신부였던 아이밀리우스(Theodore Aemilius)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는 우트레흐트 대학(University of Utrecht)에 가서 공부를 하게된다. 1575년 그는 마르부르크 대학(Marbrug)에 갔다가, 그해 늦게 설립된 레이덴 대학(Leyden)으로 전학하였다. 그가 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 유능한 인재라고 하는 것이 알려지게 되자, 암스텔담의 상인협회간부들은 그에게 신학공부를 시켜서 목사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알미니우스가 장차 목사안수를 받은 후 암스텔담 시장의 완전한 동의 없이는 다른 어떤 도시에 가서도 목회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에 동의한 알미니우스는 제네바 대학(Geneva Academi)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대학은 칼빈주의 신학의 요람이요, 학문의 중심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여기서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친구요. 후계자인 그 유명한 베자(Theodore Beza)에게서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42)

  신학수업을 마친 알미니우스는 1588년 암스텔담에서 목사로 일하던 중 1602년 역병이 만연하여 몇몇 라이덴의 교수들이 병사하자, 알미니우스는 후란쯔 유니우스(Franz Junius,1545-1602)의 뒤를 이어  라이덴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임명은 라이덴의 최고참 신학 교수요 엄격한 칼빈주의자였던 프란시스 고마루스 (Francis Gomarus)의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알미니우스는 자기에 대한 비난을 해명하기에 이르렀고, 그는 1603년에 정식 임명을 받아 죽는 날 까지 거기서 가르쳤다.43)

  1589년 알미니우스는 자유주의 사상가 콘헤르트에게 대항하여 타락전선택 설(Supralapsarianism)의 입장을 변호하도록 지명되었다. 콘헤르트는 베자의 신학적 입장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는 “베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만일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사실상 죄의 창작자이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중대한 과오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증은 사람들을 강력하게 감동시켰고, 그 당시 교회와 국가는 콘헤르트의 주장이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이 논쟁은 하나님의 목적의 순서 즉,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시고 나서 그 작정의 수단으로 타락을 허락하셨는가(supra -lapsum : 타락전 선택설), 아니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실 방법으로 선택을 작정하셨는가(infra-lapsum: 타락후 선택설)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알미니우스가 이 문제들을 연구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콘헤르트의 사상에 감염되어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 전체를 의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길로부터 알미니우스는 죄인이 구원을 얻는데 인간의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속죄는 온 인류를 위해서 충분하다. 회개하고 믿고 인내하는 사람은 선택의 작정에 들어있고 완고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는 유기의 작정에 들어있다”고 하였다.44)

  알미니우스는 콘헤르트의 사상을 부정하는 대신 오히려 그의 견해에 동조하였고, 마침내 그는 로마서 7:14 에 관한 설교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자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과 화란교회 신앙고백서에 위배되는 것은 어떠한 것도 가르치지 않겠다고 서약하였고, 이 서약을 근거로 해서 그는 자기 직책에 계속 머물도록 허락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 서약이 거의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왜냐하면 로마서 9장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칼빈과 베자의 사상을 보다 더 대담하게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콘헤르트는 칼빈주의 사상을 공공연히 반대했으나, 알미니우스는 은밀히 반대하였다. 그는 공적으로 주장한 것을 사적으로 파괴하였다. 말하자면 학생들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또는 원고를 비밀리에 돌려 칼빈주의 원리를 손상시키거나 파괴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던 것이다.45)

  이와 같은 이중적인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604년 알미니우스가 제출한 예정론에 관한 논문 때문에 알미니우스와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1) 사이에는 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이 논쟁의 분위기는 화란의 개신교 전체에 번지게 되었다. 고마루스는 1594년이래 레이덴대학의 교수로 일하던 분으로, 강력한 칼빈주의자이며, 당시 가장 유능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두 교수를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로 행하여 졌으나 모두 허사였다. 대중의 압력을 받아 공적인 토론이 마련되었으나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드디어 알미니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그 문제를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 있다고 믿고, 화란정부에 호소하여 「벨직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을 수정하도록 대회소집을 요청하는 대담한 행동을 취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대학과 교회가 다같이 승인하는 칼빈주의 교리들을 구체화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감한 행동은 국가의 종교적 구조를 전복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에 전국적인 경계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 이상 더 방임해 둘 수 없었으며, 국가적 위기로 발전될 이 일을 다루기 위한 즉각적인 행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기 전에 알미니우스는 1609년 10월 19일에 별세하였다.46)


   2. 알미니우스의 사상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에 대한 그의 견해를「소감의선언」(Declaration of Sentimens, 1608년)에 진술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네 가지 ‘작정’을 말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임명하기로 작정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한 모든 자를 용납하시며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그리고 완고한 불신자를 거절하기로 작정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자를 위하여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개인들의 구원을 작정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저들이 끝까지 믿고 참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알미니우스는 어거스틴적, 칼빈주의적의 무조건적 선택의 사상을 거부했다.47)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전적 의존을 강조하는 점에 대해 조심성을 표명했으나, 그는 한 가지 핵심적인 문제에서 어거스틴과 입장을 달리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지만, 그 은혜란 그것에 대한 사람의 수납 여부의 결정에 따라 주어진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할뿐이지 결정적이게 하지는 못한다.  이리하여 구원에 관한 궁극적인 선택이란 사람 자신에 의한 것으로 귀결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개인의 택정은 그분의 주권적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권 안에서 그분의 예지에 있게 되었다.”48) 즉 어거스틴이나 칼빈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택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인 반면, 알미니우스에게는 그 逆이 진리였다.  이런 문제가 사람들을 계속 알미니안주의자(Arminians)와 칼빈주의자(Calvinist)로 나누게 되었다49).

  알미니우스가 죽고 나서도 결코 논쟁을 종식케 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의 많은 추종자들을 남겨 두었으며, 1610년에 알미니안파 목사들이 고우다(Gouda)에 회합하여「항론」(Remonstance)이라는 신앙 고백서를 내놓게 되었다. 이것이 도르트 회의의 원인이 되었다.



 제 5 장  도르트대회(Synod of Dort)


  1. 정치․사회적 배경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고, 개신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때 윌리암(William the Silent)의 영도아래 7주가 독립하였다.  또한 그는 스스로 칼빈주의자임을 자처하였고, 공직에 임명되자 폭군에게는 등을 돌리고 국민의 편에서 싸워 화란독립의 큰 기반이 되었다. 이에 1585년 네덜란드의 북쪽 지방들은 사실상 카톨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칼빈주의가 번영하기 시작했다.  1584년 윌리암이 암살 당한 뒤 두 지도자가 떠올랐는데, 그 중 한사람이 윌리암의 아들로서 국가 원수이자 군사령관이었던 모리스(Maurice)였고, 다른 한사람은 정치가 올덴바르네펠트(Jan van Oldenbarneveldt)였다.  1609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두 사람은 의견차이로 갈라섰다. 모리스는 해방 전쟁을 이끌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좋아하였고,  네덜란드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올덴바르네펠트는 지방자치와 평화를 원하였다. 올덴바르네펠트는 항론파를 지원하였고, 모리스는 반항변파를 지원하였다.  정치적인 갈등이 가열되는 가운데 올덴바르네펠트가 자기 휘하의 지방군대를 일으키자, 모리스는 군대를 보내 그를 체포하였다(후에 올덴바르네펠트는 반란죄로 처형당하였다).  도르트교회 회의는 이러한 상황에서 열렸다.  모리스의 승리는 다른 여러 사실들 중에서도 교회들이 반항론파 대표들을 선출하였음을 뜻하였고, 올덴바르네펠트의 강력한 지원을 기대하던 항론파는 교회회의에서 소수파로 고립되는 상황을 맞았다.50)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이 완전히 보장된 것이라고 볼 수 없었고 네덜란드 내에는 아직도 이전의 압박 자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일부 도시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상인들로 스페인과는 교역을 개선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직자 대부분은 스페인과의 직접접촉으로 교회의 교리적 순수성이 오염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런 교역을 통해서 아무 유익을 기대할 수 없었던 하층계급도 상인들에게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상인들은 알미니우스편의 항론파를, 다른 계층들은 고마루스의 대항론파를 지지하였다.


 2. 항의서(The Remonstrance)

    1609년에 알미니우스가 죽자 논쟁이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기대와 희망을 뒤엎고 오히려 가속화되어, 전국에 확산되었다. 화란은 이제 칼빈주의 신앙에 확고히 선 파와 알미니우스가 유포한 펠라기우스주의를 옹호하는 파의 두 개의 적대진영으로 분리되었다. 51)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 전술한 바와 같이 상인들의 정치적인 후원까지 얻게된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1610년 대담하게 화란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탄원서를 “항의서” (Remonstrance)라 하였으며, 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것 때문에 뒤에 그들은 항론파(Remon- strants)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 항의서는 주로 모리스왕자(Prince Maurice)의 궁정목사인 위텐보갤트(John Uytembogaert, l577-1644)와 알미니우스의 제자요 후에 레이덴대학의 교수가 된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알미니안파의 이러한 행동을 알게된 칼빈주의자들도 즉시 “반항의서”(Counter Remonstrance)를 작성 제출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반항론파(Contra-Remonstrants)라 불리어 지게 되었다.52)

    알미니안 논쟁 또는 5대 교리 논쟁은 절대 예정교리에 대한 반대로부터 시작하여 인간론과 구뭔론에로 확대되었다. 1610년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화란 귀족 틀에게 제출했던 "항의각서" 속에서 제시된 다섯 항목에는 독특한 사상이 담겨 있다. 항의각서의 내용에는 예정, 속죄의 한계, 신앙의 본질, 은혜에 대한 거부, 성도의 견인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는데 먼저 칼빈주의의 5대 전제를 반대하고 난 다음, 알미니안주의의 5대 전제를 주장하고 있다. 53) 항의각서에 제시된 다섯 가지 요점은 다음과 같다.


  제1항. 조건예정 -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변치않는 작정을 하고 계시다. 이것은 성령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같은 은혜로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하는 자들은 구원을 하고 불신자와 회개치 않는 자들은 정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요3:36). 그러므로 선택과 정죄는 예지를 조건으로 한다. 즉, 예견된 인간의 신앙이나 불신앙이 선택과 정죄의 조건이다.


  제2항. 보편 속죄 -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이시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 하나 하나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은혜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희생은 그것 자체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속하기에 충족한 것이었다. 성부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이 지닌 고유한 효험이 모든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필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인 자들만이 실제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버림을 받은 자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버림을 받는다(요3:16, 요일2:2).


  제3항. 구원하는 믿음 - 타락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진정하고 참된 선을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새롭게 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요15:5).


  제4항. 거절이 가능한 은혜 - 은혜는 우우리의 영적 생활의 시작과 계속과 마침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를 인도하고, 자기와 협력하며 , 자기를 도와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선을 생각하거나 행할 수가 없고 죄를 억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협력의 방법에 관한 한 이 은혜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거스리고 있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거절이 불가능하지 않다(행7장).


  제5항. 인내의 불확실성 - 비록 은혜가 신실한 자들로 하여금 온갖 핍박과 유혹 가운데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기에 충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은혜가 한번 주어진 다음에 또 다시 상실되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은 아직 성경에서 입증되지 않았다.


  항론파들은 이 다섯 항목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으며, 이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충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개혁적인 기독교를 변질시키려 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비난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자기들의 교리에 대한 합법적인 보호와 관용정책을 요구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소씨니안주의를 반대하고 정통신앙의 입장에서 대리적, 또는 속상적 속죄교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통교리를 약화시켜, 속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공의와 신실하심에서 일치하도록 인간들과 새 언약을 맺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이 새 언약 아래서 회개와 신앙을 조건으로 용서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직접적인 결과는, 구원이 아니고 법정적 장애물들의 제거로 얻어진 죄인들의 구원 가능성과 사죄와 화목을 이루기 위한 문을 열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들은 타락 전 예정론의 견해와 관련된 제한 속죄교리를 부인한다. 온건한 칼빈주의자들도 이 교리에 대해서는 알미니안주의와 입장을 같이하고 있지만, 다른 모든 점에서는 알미니안주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도르트대회(Synod of Dort)

  항론파와 반항론파 사이에 많은 논쟁과 여러 차례의 화해를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그 노력이 수포가 되자, 화란 의회는 1617년 11월 여러 가지 까다로운 준비과정을 거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범국가적인 총회를 소집하였다. 논쟁 발생 후 거의 13년. 그리고 알미니우스 사후 8년 동안이나 계속되어왔던 것이었다. 사실 이 일은 개혁교회 모두의 문제였다. 그러기에 다른 여러 나라의 개혁파 교회들을 초청하여 이 대회에 참석시키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보낸 초청장에는 그들의 참석과 권고는 현재 화란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에 관하여 보다 더 주의 깊은 결론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그들의 불안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칼빈주의적 신앙의 원리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 고유한 유산이 가볍게 희생되어서는 안되었다. 이 문제는 화란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교리들을 소중히 여기며 설교하는 세계 모든 교회의 문제였다.54)

  많은 논쟁과 까다로운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화란 국회의 명의로 범국가적인 도르트 총회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1618년 11월 13일에 시작하여 1619년 5월 9일까지 계속되었다. 참석자는 84명의 대표와 18명의 비종교인 대표로 구성되었다. 58명은 화란인이고 나머지는 외국인이었다. 외국 개혁교회들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3~4명씩의 신학자 파송을 요청받았다. 그리하여 영국, 스코틀랜드. 팔라티네이트, 헤스, 스위스, 바젤, 베른, 샤브하우젠, 제네바, 브레멘 등 여러 나라에서 28몀의 박식한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총회는 저명한 신학자 카미어(Chamier)와 듀 뮬린(Du Moulm) 등 4명의 대표를 선택했으나 프랑스 왕이 허락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였다.55)

  총회의 개회와 폐회는 매우 엄숙하였다. 많은 대표들이 참석한 것 외에도 154회에 달하는 공식 회합의 신기록을 남겼다. 모든 경비는 국가가 맡아서 매우 후하게 접대했는데 10만 길더에 달했다. 회의는 공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방청객들로 크게 붐비었다. 로이바르덴의 목사 요한 보겔만(John Bogerman)이 의장으로 선출되고, 라이덴에서 목회를 하던 페스투스 홈미우스(Festus Hommius)가 수석서기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운명은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결정지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마디로 도르트회의의 기본임무는 항론파의 견해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국외로 탈출하지 않은 항론파 지도자들 즉,  에피스코피우스와 그의 동료들(모두 13명)은 이 회의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밝히도록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나 그들은 무조건적인 복종 요구에 항의를 하고 나섰다. 항론파들은 그들의 대변인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scopius)를 통해 회의의 진행을 지연시키고 대표들을 이간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계략을 이용하였다. 한달 이상 그들이 회의를 거부하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교회회의 의장인 요한네스 보겔만(Johannes Bogerman)은 항론파를 해임하고 그들이 쓴 저서를 근거로 결정을 내릴 것을 선언하였다.56) 

  정통 칼빈주의는 완전한 승리를 달성했다. 다섯 조항으로 된 항의각서는 만장일치로 배척되고, 벨직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칼빈주의 5대교리가 채택되었다. 57)  이 회의에서는 칼빈 5대 교리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였다. 네덜란드어로 성경을 번역할 것, 젊은이를 위한 정기적인 요리문답 교육을 교회에서 실시할 것과 정기적으로 예배 때마다 교리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였으며, 식민지의 원주민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신앙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였고, 목사후보생의 신학준비에 철저를 기하며, 신앙에 해로운 책들은 검열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주일성수 문제를 매듭지었으며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권징권을 교회의 고유권한으로 인정하게 되었다.58)

 

4. 도르트신조(The Canon of Dort)

  항의서는 만장일치로 기각 당하였고 회의는 도르트신조라는 한 응답을 작성했다.  항의서의 다섯 가지 견지는 다섯 가지 큰 제목아래  93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긍정적 내용(그 주제에 관한 개혁신앙의 교리 설명)이며  나중에는 부정적인 내용(알미니우스의 과오 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셋째와 넷째 교리는 함께 진술되었다.  그것은 항의서의 셋째 견지가 정통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적인 입장에서는 칼빈주의 체계라고 불리는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매 항목에는 네덜란드와 외국 대표들의 서명이 적혀있다.59)


  1) 본문

  제1교리. (제7조) 거룩한 예정에 관하여 -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의 목적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주권적인 선한 뜻에 따라 단순히 은혜로 선택하신 어느 수의 사람들의 중보자며, 머리며, 또 구원의 토대가 되도록 영원부터 임명하신 그리스도안에서,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본래의 도덕적 상태로부터 타락한 전인류 가운데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 선택된 사람들의 본성이 버림받은 사람들보다 더 선하다거나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은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도록 그에게 넘겨주시고 그들이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그와 교통하도록 이끄시며, 그리고 그들에게 참된 신앙과 의롭다는 성화를 주시고 그의 아들과 그들이 강한 교통을 가지고 드디어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며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풍부함을 찬양하도록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을 결정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힘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이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총을 거저 주셨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총을 찬양하자.”(엡1:4-6)  또 이밖에도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 부르신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베풀어 주셨다.”(롬8:30)


  제2교리. (제8조)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간의 구원 - 그 까닭은 하나님의 아들의 가장귀한 죽음이 가지고 있는 살리며, 구원하는 효력이 의롭게 인정받는 신앙을 주시고 그것으로써 그들을 실패 없이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선택된 모든 사람에게 보급시키는 일이 성부 하나님의 가장 높은 계획이며, 가장 자비로운 뜻과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가 새 계약으로 확인하신 그의 십자가의 피에 의하여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되었고, 또 성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을 모든 민족, 종족, 국민 및 언어가운데서 유효하게 구원해 내신일, 또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음으로써 성령의 다른 모든 구원의 선물과 함께 얻은 신앙을 그들에게 주시고, 신앙이전이나 이후와 상관없이 범한 근본적이거나 현실적인 모든 죄에서 그들을 정결하게 해서 마지막까지 그들을 충실히 보존하여 드디어 그들을 모든 오점과 과오에서 해방시켜서 그분 앞에서 영원히 영광을 누리도록 인도하신 일이 하나님의 뜻이다.        


  제3,4교리.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에게로 향한 인간의 회심 및 그 방법 - (제3조)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서 잉태되어 본래 진노의 자식들이며, 구원을 받을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이 악으로 기울어져 죄에서 죽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성령이 주시는 신생의 은혜 없이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거나 그들의 성질의 부패를 개선하거나 그들 자신을 개혁에 맡길 수도 없으며 그런 일을 원하지도 않는다.

(제11조)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욕구가 선택된 사람들에게서 달성되며 혹은 그들이 참된 회심을 하게 하실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바로 이해하고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다만 복음을 외면적으로만 그들에게 설명하게 하실 뿐만이 아니라 동일한 신생의 영의 능력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미치게 하신다. 그는 닫힌 마음 문을 여시고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 받지 못한 자 들에게 할례를 베푸시고 이전에는 말라죽었던 의지에 새 자질을 주입하여 살아나게 하시며 사악, 불순종, 완고의 상태에서 선량, 순종, 온순으로 변하여 선한 나무처럼 그것이 선한 열매를 맺게 활기를 주며 힘을 주신다.


  제5교리. (제3조) 성도의 견인에 관하여 - 내재하는 남은 죄와 이세상의 유혹 때문에, 회심한 사람들도 자기 자신의 힘에 맡겨 놓으신 은혜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성실하시며 그들을 은혜 안에 깊이 머물게 해서 마지막까지 강력하게 붙들어 보존하실 것이다.


    2) 칼빈주의 5대 교리

  위의 발췌된 견지들은「칼빈주의 5대교리」로 알려지게 된 것들이다. 이를 기억하기 쉽게 영어로 TULIP이라고 한다.


① 전적 부패( T / Total depravity) : 이는 모든 사람이 더 이상 부패될 수 없다는 이상을 받게 하는 부적당한 표현이다.  분명히 표현상 부적합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입장은 도르트 신경에 의해 명백하게 거부된다. 전적 부패라는 표현은 사람의 모든 면이 타락으로 인해 영향받았으며,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향하게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② 무조건적 선택( U / Unconditionnal election)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택한다.  이는 어거스틴적 칼빈주의적 전통과 알미니우스와의 쟁점에서 근본적 분수령이다.

③ 제한 속죄( L / Limited atonement)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한데 반하여 그 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오직 택한 자를 구원하는데 있다.

④ 불가항력적 은혜( I / Irresistible grace) :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 자들이 그것에 응답하려는 보증이 되는 그런 면에서 그들 안에서 역사 한다, 은혜의 효과는 의지 분쇄에 있지 않고 기꺼이 응답하게 하도록 고무시키려는데 있다.

⑤ 성도의 견인( P / Persevernce of the saints) : 진실로 회개한 자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참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하시기 때문이다. 


5. 도르트신조의 성격 및 평가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회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준 세계교회 총회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도르트회의의 평가는 교리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 한쪽은 학식이나 경건함에 있어서 사도시대 이후 어떤 회의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한 반면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항론파들은 도르트 총회가 칼빈주위 일색이었고 지나치게 편협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르트신조가 칼빈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일치신조가 루터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비슷하다. 두 신조는 모두 신학적 능력과 관심에서 매우 고차원적인 질서를 보이고 있다. 두 신조는 모두 일관성이 있으며 교회에 강력한 보수적 영향을 남겼고 스콜라 철학을 대치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였다.  또한 형식과 분파로 말미암아 앙상한 뼈만 남아있던 교회에 살아있는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으며, 정통주의를 택하고 자유주의를 배격하였으며 제한된 신앙고백주의를 인정하였다.  이 신조는 그 가지를 넓게 뻗쳐 종교개혁의 대 지류를 형성케 하였다.60) 도르트신조는 한마디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또한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만큼 인간의 어떤 조건을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다. 라고 천명하였다. 

    도르트대회는 바로 “칼빈주의”를 세상에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도르트대회의 결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 6 장 도르트대회 이후의 칼빈주의적 신앙규범


1.웨스트민스터 총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세기의 영국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도르트대회 이후에 가장 칼빈주의적인 개혁교회의 신조라 할 수 있으며 이 회의가 만들어 내놓은 결정들의 범위나 능력에서 보든지 또는 후대에 끼친 영향면에서 보든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회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개의 종교회의가 그러했듯이 이 회의도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이루어 진 것임을 볼 수 있다.

  106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면서 그의 감독정치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가능한 한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하자 이에 실망한 청교도들은 설교운동을 통해 개혁의 불씨를 키워갔다. 당시 청교도들은 케임브릿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을 통해 많은 설교자를 배출했으며 그로 인해 영국 교회의 개혁이 가속화되었고, 장로교 운동은 널리 확산되었다. 절대 왕조를 지탱시켜 주던 성공회의 감독 정치가 청교도 운동에 의해 공격받자 제임스의 아들 찰스 1세(CharlesⅠ, 1625-1549)는 청교도 박해 정책을 더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그는 성공회 정책에 반대하던 이들을 고등종교법원에 소환하여 무시무시한 고문을 행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청교도가 생명의 위협을 당하였다.61)

  찰스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장로주의자를 박해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찰스의 종교 정책은 영국인들의 반발과 스코틀랜드인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1638년 스코틀랜드인 들은, 감독정치가 적그리스도적이며 성공회 정책은 진리의 가면을 쓴 마귀의 술책이라고 주장하면서, 찰스의 종교정책에 반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찰스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에 필요한 재정을 얻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청교도가 다수를 차지하였으므로, 의회는 찰스의 정책을 비판하고,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영국 국교회의 주교 제도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찰스는 의회를 해산한 후,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선거에서는 더 많은 청교도들이 의회에 진출하였다. 결국, 찰스는 4번이나 의회를 소집한 후, 다시 해산하였으며, 의회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하자, 의회가 찰스에 대항하여 자위대를 구성하면서, 영국은 내전 가운데 빠졌다.62)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의회 지도자들은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과 예배와 교회 행정 체제를 로마 천주교회의 잔재와 완전히 결별하므로 성경적인 교리, 성경적인 예배, 성경적인 교회 정부 형태를 회복하기 위해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총회는 영국 전역에서 목사들을 초청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열리게 되었다. 총회에는 의회가 파송한 상원과 하원의원 각각15명과 전국에서 모인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어, 1643년 7월 1일 개회하여 1649년 2월 33일까지 1163번의 회의를 가졌으며, 매번 평균 잡아60여명이 참석하였다. 1643년에서 1644년 사이 총회는 예배와 교회 정부 형태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예배에 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교회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그러나 총회는 오랜 논의 끝에 개혁주의적 장로교 신앙의 정수라고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ter Confession of Faith), 장년교육을 위하여 작성한 「대요리문답」(The Larger Catechism), 자녀 교육을 위한 지침서로 만든 「소요리문답」(The Shorter Catechism), 예배의 원리를 제시한 「예배모범서」(Directory of Public Worship)와 교회 정치문제를 다룬 「교회 정부 형태」(Form of Chrch Govement) 등의 표준문서를 만들어 냈다. 「예배모범서」와 「교회 정부 형태」는 1644년 12월 「교회 행정을 위한 지침서」(A Directory for Chrch Gavernment, Church Censures, and Ordination of Minister)는 다음 해 7월 4일 완성되었다. 1645년 1월 의회는 「예배 모범서」를 영국교회가 따라야할 기준으로 채택하였고, 1648년 「교회 행정을 위한 지침서」를 영국 교회의 정치 원리로 승인하였다.63)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화란에서 알미니안주의와 날카로운 대립을 거친 이후의 칼빈주의체계를 매우 성숙한 학문적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현학적 칼빈주의(scholastic Calvinism)라고도 한다.64) 특히 주일문제를 제외한 주요 사상들은 이미 대륙에서 성숙된 것이었으나 그 형식은 전적으로 영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65)

  도르트대회와 알미니안 논쟁은 수 년 동안 영국에서 최대의 관심사였으며 영국교회는 도르트 총회에 대표를 파견했었다. 이런 연고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몇몇 대표들은 찰스Ⅰ세의 핍박을 피해 화란으로 건너가 얼마 동안 지내면서 화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로부터 매우 극진한 환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대륙의 신학에서 큰 영향을 받아 알미니안 논쟁의 결론을 구체화시켜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신앙고백서에서는 그 모델을 취하지 않았다. 총회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대표들을 참석시켜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도, 초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서도 그 모델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애초에 개정하려고 했었던 영국교회의 신조를 모델로 취하면서 영국교회의 신조차 근본적인 일치를 보이고 있다. 알미니안 논쟁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시작되었던 신조의 개정작업은 람베드신조(Lambeth Articles: 1595)의 제정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웃서 감독이 제정한 아일랜드신조(Irish Articles: 1615)에서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 목적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내포하고 있는 39개조신조의 교리체계를 보다 철저한 칼빈주의 체계와 세밀한 논리로 표현하려는데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 신학적인 역량과 풍성함에서 다른 모든 신조들을 능가하고 있다.66)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도르트대회 이전의 배경과 신학적인 논쟁들과 칼빈주의 신학의 5대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개혁파 신학(Reformed Theology)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도르트대회에 대한 고찰이 단순히 신학적인 고찰로서만 끝나서는 안될 것이며 오늘의 목회와 설교와 전도에도 적용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제7장 결  론

  오늘날 개혁교회의 변천사는 교리의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초대교회 이후의 성경의 해석을 둘러싼 많은 이단적인 가르침과 수많은 종교적, 정치적 분규들, 그리고 교회에 대한 무서운 탄압 등, 내적, 외적 어려움이 끊임없이 발생되어왔다. 이러한 충격들에 대해서 신자를 보호하고 올바른 성경해석으로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는데는 올바른 가르침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에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바로 그런 신앙 교육적인 의의를 가지고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가 믿는 신앙의 진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만큼 교리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본 이러한 개혁교회의 신조의 교육적이며, 신학적인 의의를 살펴볼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에 근거한 신앙적인 삶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분명한 도움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경교육이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하여 세계를 이해하는데 눈을 뜨게 하며, 그 성경적인 세계관의 틀 속에서 신앙의 가치를 드러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조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 가운데서도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이해하게 해 주며 이러한 기본적인 신앙의 체계 안에서 성경의 본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칼빈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도르트대회는 우리가 오늘날 지향하고있는 칼빈주의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틀 위에 개혁신학은 더욱 든든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 질 것이다.

  우리는 오늘 낱까지 전해 내려오는 개혁교회의 신조들의 배경과 그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참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또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이기적이며 나태한 우리의 신앙을 돌이켜 보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때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라는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여 신앙에도, 삶에도 열심을 다하는 최선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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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록.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상호비교67)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비록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영향을 밭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시고 믿게도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신다.

  죄인은 각각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는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그의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그의 죄된 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각자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 도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된 죄인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믿기 전에 성령에 의하여 중생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고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일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구원 얻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전적 무능력 혹은 전적 부패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해졌다.

  죄인은 하나님의 일들에 관해서는 죽었고, 눈이 멀었으며 듣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그것은 그의 악한 본성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택하지 않으며, 사실은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결국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성령의 다시 샅게 하심과 새로운 본성을 주시는 사역에 의해 죄인은 중생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믿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물은 아닌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에 이르는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신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택하여 믿음을 가질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또 제약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으시는 믿음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지의 결과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선택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틀을 미리 아시고 그특을 택하셨다. 결국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은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특정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결코 죄인이 가지는 믿음이나 회개 등과 같은 미리 알 수 있는(예지할 수 있는)반응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의 순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가 선택하신 각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덕이나 예지할 수 있는 행위에 근거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에 있다.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5대 교리

보편 구속 혹은 일반 속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각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 죽으심 죄인 틀을 용서하는 일에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믿는다는 구원의 조건이 있으므로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물리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그와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자들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죄인이 응답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거부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고 방해받을 수도 있으며, 또한 종종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 구속 혹은 제한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피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들만의 구원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틀을 대신해서 당하신 형벌로써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 것과 더불어 자신에게 그들을 연합시키시는 일은 물론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보장한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모든 사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게 확증된다.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을 항상 회개로 초대 한다. 이런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구원을 적용시키심에 있어서 결코 인간의 의지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구원의 성공에 있어서도 결단코 인간과 협동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은혜로 택함받은 죄인을 협력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자유롭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은혜가 미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이루어진다.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은혜로부터의 타락

 

  믿고 진실로 구윈을 얼는 자들도 믿음과 그 이외의 것을 지키는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점에 대해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신자 틀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죄인이 한번 거듭나게 되면 그는 결코 유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밭게 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그의 구원에 대한 준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므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를 결정하게된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아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효과 있게 만드셨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복음에 기꺼이 순종하게 하셨다.

  모든 과정(선택, 구속, 중생)은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밭을 자를 결성하신다.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5대 교리

        도르트총회에서 거부됨 :

 

  (비록 원래 이러한 순서로 나열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항론"(Remonstrance)에 남겨진 사상의 체계이다. 알미니안주의자 틀은 이것을 1610년 네덜란드 교회에 제출하였고, 이것은 1619년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도르트총회에서 거부되었다.

 

        도르트 총회에서 재확인됨

 

  이 신학체계는 1619년 도르트총회에서 성경에 담긴 구원의 교리로 재확인되었다.

  이 체계는 당시에 "5대 교리"(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출한 5대 교리에 상응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로 형성되었고, 이때 이후로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1) 베른하드 로제, 「기독교 교리의 역사」, 차종순 역 (서울: 목양사, 1993), p. 149.

2) Aurelius Augustinus, 「참회록」, 김종웅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Ⅹ.ⅹⅹⅸ.40.

3) 어거스틴, 「은혜론」, 김종흡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0), pp.320-321.

4) 벵트 헤그룬트, 「신학사」, 박희석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5), p.182.

5) ibid.

6) ibid. p. 191.

7) 이러한 명칭은 루터파의 협화신조(fomula of concord : 1577)에서 처음 사용되어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베른하드 로제, p.179.

8) op. cit., p. 196. 

9)  어거스틴, 「은혜론」, p.322.

10) 이장식, 「기독교 사상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p. 231.

11) 벵트 헤그룬트, p. 199.

12)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실상 어거스틴주의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쪽에 가까웠다.

    벵트 헤그룬트,「신학사」, p.248.

13) 「철학 대사전」, 1994년, “에라스무스”

14) 롤란드 베인톤, 「마틴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2.), P. 270.

15) 루이스 W. 스피츠, 「종교개혁사」, 서영일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88.

16) Ibid.,

17) 벵트 헤그룬트, p. 321.

18) 루이스 W. 스피츠, p. 89.

19) 롤란드 베인톤, pp. 272-273.

 20) N.D.T., "Socinianism"

 21) 루이스 벌콥, 「기독교 교리사」, 신복윤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4), pp. 173-174.

22) 여기에서는 박일민 편역 「신조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을 참조하였음.

23) 필립샤프, 「신조학」, 박일민 편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p. 124-126.

24) Ibid., p. 161.

25) Ibid., p. 162.

26) Ibid., pp. 161-163.

27)  Ibid., pp. 126-161.

28) Ibid.., pp.224-225.

29) Ibid., p. 226.

30) Ibid.

31) Ibid., pp. 168-169.

32) Ibid., pp. 170-171.

33) Ibid.., p. 170.

34) Ibid., p. 171.

35) 정일웅,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신앙교육적 의의”, 「신학지남」, (서울: 신학지남사,1997),       pp. 35-38.

36) Ibid., p. 35.

37) Ibid., p. 36.

38) Ibid., p. 37.

39) 필립 샤프, pp. 200-201.

40) op. cit., p. 38.

41) 본 장의 “알미니우스의 생애”에서는 한국 칼빈대학교 강정진 박사의 소논문       (article) “깔뱅주의 5대교리의 역사와 배경” 중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편에 기록된 것을 대부분 인용하였다.

42) 강정진, “깔뱅주의 5대교리의 역사적 배경”, (칼빈대학교, n.d.) pp. 2-3.

43) Ibid.

44) Ibid.

45) Ibid.

46) Ibid.

47) 토니 레인,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사상사」, 김응국 역 (나침반사, 1987), p. 297.

48) Ibid.

49) Ibid., p. 297.

50) 「교회사 대사전」. 1994년, “도르트교회회의”.

51) 강정진, p. 4.

52) Ibid.

53) 필립 샤프, pp. 182-183.

54) 강정진, p. 5.

55) 필립 샤프, PP. 176-179.

56). Ibid,. p. 126.

57) 필립 샤프, p. 179.

58). 오덕교, 장로교회사. (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p. 105.

59). 필립 샤프, p. 186.

60).  필립 샤프, p. 181.

61) 오덕교, p. 146.

62) Ibid., pp. 145-146.

63) Ibid.

64) N.D.T., "Confessions of Faith".

65) 필립 샤프, p. 257.

66) 필립 샤프, pp. 257-258.

67) D. 스틸, C. 토머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이상화 역 (서울: 엠마오, 1996),

     pp. 21-27.


도르트 대회의 역사적 배경과 개혁주의 신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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