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교회론이야기

교회개혁의 환경과 과제

한스킴 2018. 9. 7. 12:16

교회개혁의 환경과 과제



1. 들어가는 말


1) 배경설명

1996년 1월18일 크리스챤 아카데미 공동체 성서 연구원 초청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을 논의하기 위한 작은 대화 모임이 이루어졌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참가자 모두의 지혜와 뜻을 모으면서, 실천할 수 있는 결론을 끌어내는 연대 작업을 위해서였다. 이를 위하여 그동안 5차에 걸친 모임이 이루어졌으며, 교회개혁 논의의 추진 방향을 다양한 관점에서 토의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인 교파주의와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시대의 변화와 도전에 응답 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새로운 양식으로서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망이자 세계 교회의 흐름이기도 한 "연합교회"(The Unitying Church)운동을 '민주화'를 바탕으로 전개하자는 교회개혁 추진의 방향이 가시화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엽합교회'라는 명칭의 사용문제 여부는 좀 더 논의 되어져야 한다는 유보 조건이 있다.- 아울러 효과적인 모임운용을 위하여 참가자의 활동영역과 관심에 따라 4개분과(기획, 신학, 실행, 특활(홍보))로 나누며, 서로 상보적으로 운영하기로 한다는 데에도 뜻이 모아졌다. 이러한 시점에서 그간 논의해 온 것을 일차 마무리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향후 교회개혁모임의 논의와 활동의 전제와 목표가 되는 영역에 대한 신학적 조명일 수 있으며, 동시에 가까운 장래에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내야 할, 교회개혁모임이 추구하고 있는 교회개혁의 의지와 비젼의 내용을 담을 Statement를 위한 기초 자료들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교회개혁 ;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

예수는 부패했던 종교적 현실과 맞서 싸우며, 당시 죄인이라 불리울 수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편에서 인간성을 소외시키며 인간 위에 종교적 제도를 두려 하였던 위선적인 것들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당시 타락한 예배행위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했다는 기사가 마가복음 11장 15 - 18절에 나왔다. 당시 종교지도자라는 이들이 성전을 이동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들을 보고 "너희들이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 "이런 성전은 헐어 버려야 한다"라고 소리치는 분노하는 예수의 모습이다. 교회개혁을, 예배개혁을 요구하는 예수의 모습이다. 1517년 10월31일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비텐베르그 성당 게시판에 '95개의 논제'(Die 95 Thesen)를 '면죄부의 효력에 대한 해명을 위하여(Zur klaerung der kraft der Ablaesse)라는 부제와 함께 부쳤다.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러한 진리를 향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 루터는 예수의 참모습과 복음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권위주의, 교권의 남용 등을 폭로하며, 부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외침은 마침내 중세의 암흑을 깨뜨리고 복음의 회복과 인간성 회복을 향한 역사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종교개혁이라 부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 동안 교회개혁 모임을 통해 진지한 자기 반성과 함께 자유롭게 개진된 우리의 신앙현실로서 전혀 따로 노는 잘못된 신앙행태, 오히려 교회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버린 목회자, 기복신앙의 자리로, 세상 위에 군림하는 교회,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교회의 모습을 방관하는 신학적 실천의 변모, 업적주의와 물량주의로 흘러 버린 선교, 교회의 가부장적 성차별문화 등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은 예수 당시 유대지방의 종료적 상황과 루터 당시 기독교 상황과 고대와 중세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빗나간 신앙의 모습이라는 관점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별로 다를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맡기어진 중대한 과제가 있다면 만연된 교회의 부패를 추방하기위하여,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진지한 자기 반성적 비판과 함께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 시켜 가는 교회개혁운동에 연대하며 기도로 후원하는 투철한 신앙적 노력일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에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숙청 사건이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항상 현재적인 것으로써 특히 종교개혁의 정신은 우리 기독교인의 정신을 정화시킴은 물론 오늘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을 위한 비젼을 가슴에 품도록 해주며, 이러한 우리의 비젼이 성서적인 요청이자 동시에 교회사적 요청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 개혁은 지금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종교개혁의 차원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로써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Let Church be Church)라는 시대적 요청아래 불러세우고 있는 것이다.



2. 한국교회가 처한 시대상황과 교회개혁의 과제들


1) 에큐메니칼시대 : 교회일치 / 교회연합

20세기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운동 가운데 하나는 에큐메니칼 운동 (Ecumenical Movement)일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 보편적인 교회 이지만, 오늘날 교회는 현상적인 면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실체가 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구체적 기구를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서 교회는 세계교회의 현실을 매우 급속한 교회성장의 역사와 더불어, 극심한 교회분열의 역사 위에 서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우리는 그래도 교회일치 또는 교회연합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을 끊임없이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다행스러웠다는 생각도 해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종래의 교회일치운동 또는 교회연합운동이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결과 신학적 탐독이나 교회연합사업형태의 일회적 프로그램 수준에 머무름으로써 실천적 차원에 있어서 가시화 작업은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상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인식 아래에서, 에큐메니즘은 근본적인 면에서 재발견 하여야하며, 에큐메니즘의 시각으로 우리의 교회현실을 재조명하여야 한다는 것이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청되는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시대에 있어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지녀야 할 자세는 포용성과 개방성 일 것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정신은 과거와 같이 자신의 교파나 입장을 절대화하고, 다른 교파나 다른 입장들을 배격하는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태도로 하여금 설득력을 잃게 하면서, 더 나아가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인류가 직면해 있는 세계문제들에 대한 종교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며,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하나됨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당위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볼 때에 교회는 더이상 한 지역 교회, 또는 한 교파 교회로만 존재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며, 기독교인 또한 한 지역교회, 또는 한 교파 교회의 교인으로만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개교회주의는 오늘날 현대사회에 있어서 사회조직의 세분화에 따르는 이해관계의 다양화가 초래하는 전체 사회적 차원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교화와 교인들의 신앙적 관심과 접근을 차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을, 교회의 일치를 가로막는 요인으로써 종래의 교리적, 신학적 요인보다도 더 심각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요인에 대한 교회적 대응을,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신앙이지 의식이 아니라는것을 확신하면서, 참된 신앙은 이웃에 대한 관용과 봉사의 실천을 통하여 가장 생생하게, 그리고 틀림없이 표현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학자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20세기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자신의 저서「기독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에서 "신앙이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일 뿐 아니라, 그 삶의 의미와 책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신앙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또한 나치 독일 치하에서 자신의 신앙적 결단을 통하여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여 나치정권에 저항하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한 독일 루터교 목사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에 따르면 신앙이란 세상이라는 현실 영역을 외면하고 종교적 영역으로 도피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서 주어진 각자의 임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으로 알면서 이를 충실히 책임적으로 수행하는 그 생활 자체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의 신앙은 폐쇄적인 (개)교회주의에 매여 있을 수만은 없으며, 오히려 세상을 향해 열려진 우리의 삶 자체가 그대로 하나님에게 속한 생활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재"(Communio sanctorum)로서의 교회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종교개혁의 소중한 영적 유산인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발단을 선교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왜냐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의 초기에 있어서 교회의 일치란 교회적인 합의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라는 교회의 당면과제 앞에서 교파를 뛰어넘는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였기 때문이다. 즉, 선교라는 기독교의 공동 목표에 있어서 교파란 그 의미가 퇴색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그 대신 하나의 교회로서 보편적인 교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선교 신학의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다 등장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선교는 결코 교회성장이나 교세확장의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교회가 선교의 수단이 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전통적인 교회중심의 선교신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선교신학으로의 전환을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는 오로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다하는 데에 그 존재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도구로 하여 여전히 자신들의 생존 또는 성장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있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있다면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식으로 나갈 경우 마치 교회가 "자족적 집단"으로서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져 버림으로써 급기야 교회 그 자체의 권위까지 주장하려 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현실속에 이제 교회일치란 더이상 단순한 교회연합활동을 위한 시한적 프로그램이나, 교리적, 신학적 대화의 틀 속에 가두어둘 수 만은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오늘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올바른 인식 하에 비록 소수이지만 참된 교회를 염원하며 부패한 교회의 권위에 맞서서 끊임없이 진리의 편에 서 있는 우리의 형제들과 연대하며, 모두가 진리의 증인들로서 동참할 수 있는 지속적인 교회개혁운동의 틀에 담아 내야 만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개혁모임은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연합교회(The Unitying Church)운동을 구체적 대안으로 끌어내면서 "교회의 일치를 가시화하고 구체화시키며, 세계교회의 일치에 고리지음을 전제로 하여 일치에 대한 주예수 그리스도의 뜻(요한 17:22)을 체화 시키는데 그 근본 뜻을 두고 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2) 과학기술시대 : "과학신앙"의 극복 /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에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와 신학이 각 시대마다 그 시대가 지녔던 사조나 사상으로부터 어려운 도전을 받아 왔다는 것이며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에는 오늘날대로 새로운 도전 앞에 교회와 신학은 서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달로 인하여 도래된 오늘날의 "과학기술시대"는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과 형태를 급속도로 변화시켜 가고 있는데,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은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과학기술에 세워진 연대문명의 자체 붕괴를 가져올 만한 대재난이 예상되어지기조차 하는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더욱이 과학은 과학으로서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인식은 오늘날 인류 전체의 보편적 사고방식으로까지 되어짐으로써,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적 시대 풍조인 "과학신앙"(Wissenschaftsglaube) 이 깊숙이 자리 잡음으로써 또 하나의 현대판 이데올로기로 우리의 삶 속을 활보하고 있다. 즉 과학만이 믿을 만한 지식을 가져다주며, 과학만이 우리 인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소위 "과학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오늘날 팽배해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무비판적 시각과 본질에 있어서 물질주의적인 과학기술의 초래하는 지구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는 과학기술의 힘과 그 책임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물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 과학과 기술의 위력 앞에서 쉽게 굴복하며, 맹신함으로써 급기야는 인간 스스로가 과학 기술에 의하여 조정당하고, 지배당함으로써 인간성 상실을 초래하는 현실은,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는 현실로까지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우리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에 기독교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경우를 보면, 대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우상이던지 그것을 신격화시킴으로써 거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며, 믿고 살아가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이 이 시대를 위한 사명을 감당하며, 신학이 이 시대적 상황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신학적 해답을 모색하며, 더 나아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신학적 성찰과 전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신학이 갖고 있는 인습의 틀을 넘어서야 하며 극복하여야만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학은 신학적 주제에 대하여 변화된 이해 상황을 인정하면서 오늘날의 사고의 기준 또는 표준으로서의 현대인의 이해지평을 진지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신학과 과학이 대화의 가능성을 상호 모색 있는데, 두 학문 영역 사이의 대화 노력은 오늘날 과학기술문명 아래에서 인류가 직면해 있는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이 중요한 동기가 되어 있으며, 특히 오늘날 이미 드러나 있는 과학기술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지배 모습과, 이러한 과학기술이 결국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모든 생명들이 생존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 상황 속에 "과학의 책임성"이라는 윤리적 관점은 두 학문간의 대화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과학이 신학의 대화 대상이자, 신학적 주제로서 부각되어 있는 배경에는 과학에 대한 소박한 낙관적 신뢰감이 상실이 있다는 것과 오늘날 과학기술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초래하며 제기하는 절박하고도 중대한 윤리적 문제를 과학과 신학이 함께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과학기술의 발전은 "성장"이라는 사회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줄곧 자연을 파괴하는데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최근에는 Gentechnik 또는 Biotechnologie라는 유전공학분야의 기술개발로 인하여 생명체 안에 있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은 물론, 심지어는 인간의 기술로 단백질 합성을 시도하면서, 생명형성 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인 간섭을 간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피조물인 인간 스스로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핵물리학 분야의 기술개발은 곧 바로 무기제조기술(Waffentechnik)로 이어져, 원자탄, 수소폭탄, 중성자탄 등 순식간에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갖는 대량 살상용 무기를 등장시켰다. 이와 같이 엄청난 생태학적 재난에 예고되어지는 오늘날의 현실상황은 지난날의 과학기술에 대한 소박한 낙관적 시각이나 맹신적 시각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 수정을 요청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한계와 책임"의 문제가 지구적 차원의 문제로서 윤리적 관점에서 신학과 과학을 비롯한 광범위한 제학문 영역들로 하여금 학문간의 대화로 불러내고 있다. 더욱이 과학기술의 진보가 수반하는 생명 파괴적 또는 반생명적 현실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생명의 거대한 연관성"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고 있으며, 아울러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전환할 것과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의 모습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Juergen Moltmann은 생태학적 위기를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해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한 총체적 개념으로 규정지으며, 소위 "생태학적 창조론"이란 자신의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이웃사랑의 지평을 확대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대를 넘어선,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와도 같은 피조물로서 같은 생명적 차원에의 연대를 이루는 소위 "창조의 사귐"(Schoepfungsgeme-inschaft)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Hans Kueng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윤리로서 "Welrerhos"(세계윤리)를 제시하면서 과거에 ]있어서 "발전"이라고 불려지며 나타났던 것들이란 본질적으로는 "가치파괴"(Wertezerfall)였다고 규정지으며, 앞으로의 개혁이나 성장이나 발전은 "가치파괴"가 아닌 "가치전환"(Wertewandel)을 지향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전환"이란 우리 자신들의 "의식전환"(Bewu tseinswandel)을 전제로 할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며, 결국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총체적 인간사회의 변화 또는 성숙을 가져올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식의 전환"없는 발전이나 성장은 결국 우리 인간 사회를 대재난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오늘날 생존을 위하여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성장이 자기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조정되는 일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 신앙은 과학기술의 힘과 책임에 대하여 진지하게 물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신앙현실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책임성은 물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책임성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질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과학기술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현대문명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거세어져 가는 도전에 직면하여, 기독교 신앙이 담고있는 종교적 가치들을 과학이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는 논리와 언어로 변증하여 더 나아가 그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남북 분단상황 : 통일을 준비하는 공동체


지난해 7월 중순, 만 7년 6개월의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인상 깊이 느꼈던 것은 광복 50주년이자 동시에 분단 50년인 작년이 민족 희년의 해로 되기를 온 겨레가 한 마음으로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 이었다.더욱이 나에게는 지난 1990년 10월 3일 0시에 독일인들과 함께 부러운 마음으로 기뻐하며 감격하던 독일 민족의 통일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아직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고국에서 맞이하는 광복 50주년은 나로하여금 남다른 감회에 젖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통일이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통일'이야말로 오늘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 놓여진 엄숙한 과제라는 역사 의식과 함께 반세기 가까운 분단상황을 종식시키며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어내는 데 매우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였던 독일 교회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는바,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는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한 독일의 경우를 통하여, 특히 통일과정에 있어서 독일교회의 역할이 어떠하였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민족구원의 차원에서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는 당면한 신앙적 과제로서 남아 있는 민족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는 면에서 우리 모두에게 좋은 신앙적 귀감과 도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신앙 안에서 '민족 통일의 문제'에 적극 관심하여야 하는 당위의 전제로서,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이 서 있어야 할 현실적 자리로서 과연 "교회란 어떠한 곳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하여 내가 경험한 독일교회 신앙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간략히 서술하겠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부름을 받고 또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구체적 현실로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면서, 역사속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를 통해 훈련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 즉, 영혼의 문제나 개인적 차원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 구조와 자연 현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적 현실의 문제들을 신앙 안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역사 저편이 아니라 역사의 한 복판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사 안에서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활동하시며, 성서가 이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독일교회를 생각할 때면 나는 늘 통일을 향한 기나긴 투쟁과 고난의 현장에 우뚝 서 있었던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 동독 민주화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진 Leibzig의 Nikolai교회의 경우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평화를 위한 기도회(Friedensgebet)"를 개최하였으며, 대부분의 동독 교회들도 자유, 인권, 환경 등의 주제로 기도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기도회를 통하여 동독의 교인들은 신앙 안에서 동독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에 대하여 확고한 문제 의식과 함께 동독 내의 사회적 모순과 억압 구조가 결국은 민족 분단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분단 상황 극복을 향한 대중 투쟁의 현장으로 나서게 되었으며, 침묵하는 다수 동독인들의 통일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2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는 미소 양진영으로 나누어 짐으로써, 항상 고도의 긴장이 감도는 냉전의 국제정치 상황 아래 놓여 있었다. 더욱이 미, 소 양국의 군사력과 국가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던 분단 독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교회들은 신앙적 일체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포애를 서로 나누었다고 한다. 특히 서독교회는 교회 내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분단 상황으로 인한 신앙적 핍박을 막고, 물질적으로 고통받고 있던 동독교회와 물질의 나눔과 더불어 신앙 안에서의 교제를 끊임없이 이어왔던 것인데 이러한 구체적인 신앙적 일체감은 동독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암담한 현실 가운데에서도 민주화 실현을 위한 공산 독재 정권과의 기나긴 투쟁을 인내하며 감당해 낼 수 있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민족 통일을 향한 큰 소망을 늘 간직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하루속히 민족통일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우리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민족 통일을 통한 민족 구원의 약속을 오늘날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갈등 요인들과 구조적 모순들이 결국은 민족 분단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역사인식과 함께 그리스도 사랑의 선포자로서 복음의 빛 가운데 민족 구원의 길인 통일의 길을 준비하여야만 할 것이다.



4. 맺는 말 : 교회의 사명


오늘 나는 끝으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돌아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우리가 "교회의 사명"이라 할 ㄸ에 "사명"이란 교회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세상 안에서 교회의 존재이유에 관한 것으로서, 달리 말하면 "도대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라는 물음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의 사명을 말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자리"이자 "삶의 현장"인 역사와 사회의 한복판에서 감당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자리"이자 "교회 삶의 자리"인 역사와 사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아래 바라보며, 해석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교회는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본질은 세상에 대한 부정에 있다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비판적 긍정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세상 안에서 교회의 역할"에 관한 주장은 우리들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사회의 필요 불가결한 구성체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맞은 편에 서 있어야 하며, 교회는 사회와 항상 긴장 관계에 있으면서, 세상을 변혁시켜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의 교회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통하여 외양적으로는 비대해졌으나, 그에 비례하여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자주 듣고 있다. 심지어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ㅂ은 이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구별된 모습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 '격리'라는 말이 거론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라는 높은 울타리 속에서 특수한 자기 문화를 추구하며, 형성해 감으로써, 바깥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갖게 되며, 이러한 것은 결국 사회와의 단절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로서의 "공동체 의식"과는 다른 왜곡된 "집단의식"을 갖게 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차츰 보편성을 잃어 갖게 되면서, 내 교회, 우리 교회에 집착하는 극단적인 개교회주의로 흐르게 되며, 교인들도 특정 교파, 특정 교회 안에서 폐쇄적으로 되어 버렸다.

이제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격리되어짐으로써 오히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장(場)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며, 그 결과 교회와 교인 수는 엄청난 증가를 보였으나, 사회의 건전한 발전의 추진력으로서 병든 사회를 개선하며, 치유해야 할 교회의 영향력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교회의 신앙 형태는 극히 개인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이며, 안일함과 타성에 젖어 있을 위험이 항상 있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흘러 버린 신앙은 사회적 관심이 빈약하여 오로지 자기 구원에만 관심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진정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지금의 현실 안주적 의식구조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이 세상에서 힘없고 가난한자, 그리하여 소외된 자들의 힘이 되어 주며, 더 나아가 과학, 예술, 경제, 사회 등 모든 세상영역과 대화하며 세상과 이웃을 섬길 때에 비로소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교회의 모습을 벗어버릴 수 있을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로서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여, 그 기반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에, 비로소 교회는 현실 사회의 수많은 구조적 부조리의 악에 대항하여 싸울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할 것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병든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