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번씩일곱번

일흔번씩일곱번(5) 2010/09/25

한스킴 2013. 5. 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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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몰아치던 장대비가 지나고 난 후 어머니 집에서 추석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나 몰아치던 비가 지나간 하늘은 언제 그런 비를 내렸나는 듯, 한가로운 구름이 푸른 하늘을 간지르면서 흘러가는 한가한 오후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2

어머니 집에 들어섰을때 눈에 한가득 가족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들어서는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봐 주는 가족이라는 존재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면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피로 맺어졌기에 떠난다고, 밉다고 말해도 헤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나 할까. 가족이라는 이름에 베어나는 따뜻함은 큰 평안입니다. 변하지 않기에 그 소중함을잊어 버립니다. 수시로 변하는 연인의 변덕에는 안절부절 하면서 가족에는 소홀한것이 어리석은 우리가 계속 반복하는 오류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그것을 깨닳을 쯤에는 청춘도 가고, 부모는 세상을 달리 하신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여간 서글프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완전하지 못하게 지음을 받은것일까요?

아버지가 더욱 수척해 지셨습니다. 그토록 내 미움의 대상이었던 그분의 청춘도 모두 지나가구 이제는 근육이 비어버린 가죽으로 변한 피부를 보면서 서글퍼 집니다. 그래도 저분의 인생은 나와 가족을 위해서 수많은 세월 일터에서 무릅을 꿇고 분노를 삭히면서 돈을 벌었을 겁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비굴하다 생각 될 정도로 울분을 삭히시면서 번 돈으로 식구들을 부양했습니다. 노동의 힘듬과 그 표현할 수 없는 굴욕과 울분을 술로만 삭히셨던 아버지, 내 아버지는 무식했음에도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오신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만큼 어머니의 눈물은 옆을 지켜본 나에겐 너무나 생생합니다.  아버지의 무지와 술주정을 참아낸 어머니는 기적 그 자체입니다. 아버지의 무지함을 가족 모두와 함께 묵묵히, 때론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뭐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의 인내가 그래도 그 환경에서 빗나가지 않는 인생을 살게한 기준점 이었나 봅니다. 가족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가장 아픈것이 바로 밑의 동생 한경이의 희생입니다. 그때는 아버지 한사람의 노동으로는 먹고 살기도 빠듯했기에 어머니도 하루 노동으로 살림에 보태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한경이는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겠다고, 국민학교 졸업도 포기한체 평화시장의 미싱시다로 들어가 노동을 했습니다. 한경이의 거친 손들 보면 그때의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 여동생의 수고도 나를 위한 고생이었습니다. 나는 빚진자 입니다. 날 기르신 부모님과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겠다고 공부할 때를 포기한 동생에 대하여,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 모두에게 빚진자 입니다. 한경이는 이번 추석에는 집에 오지 못하였습니다.  둘째 여동생 한정이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가정이 평온하여 그나마 우리 형제중에서는 가장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아직 자녀가 없어 그것이 아픔입니다. 조카들과 아이들이 모여 우리가 서로 아직 이땅에 존재 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알려주고 짧은 만남으로 각자의 생활터전으로 돌아갑니다.

 

3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톨스토이의 소설이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살아간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는 인생을 본능적으로 살아내면서 나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치열한 싸움인 보통의 사람들은 온통 걱정뿐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속에서 사람들은 자기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가간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짧은 소설이므로 찾아서 다시한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누구나 인생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나에게 닥친 고난에 의문을 품고, 나에게는 왜 이런 고난이 있는지 고민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더 좋은 조건과 더 좋은 사람을 찾아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사람은 신으로 지음을 받지 않은 피조물 이기에 비난 받을 수 없는 배신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였으며 앞으로도 되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믿을 존재가 아니라 그저 사랑만 해야할 존재라는 것이 그 나약함을 설명하는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나를 둘러싼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추운 겨울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는 지나가는 행인이 던져주는 동전 하나의 사랑에 살아가고, 부모 없는 고아는 그를 불쌍히 여기는 이웃과 사회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4

나를 괴롭히는 많은 고난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면서 살아 왔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한 의문으로 점철된 것일까요?  얼마전 우연히 알게된 조선생님이 자녀 '성민'이의 건강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골수염이 의심되어 진찰을 받았는데 일주일후 결과가 나온다는 겁니다. 위하여 기도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물론 하나님은 죽은자도 살릴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병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여 주고 싶은것일까 하는 울림이었습니다. 병의 치료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통하여 그 부모가 상처가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어제 결과가 나오는 날인데 통화를 못하였습니다. 토요일 오후 전화를 받았는데, 결과는 골수염으로 판정이 되어 수술로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기도하였는데, 골수염으로 판정이나서 저도 낙담이 되었는데 이어지는 조선생님의 말씀 '처음에는 아이때문에 울면서 어쩔줄 몰랐는데, 지금은 참 다행이다 싶다'는 겁니다. 아이가 골수염이 아니라 더 아플 수 있는데 그만하니 감사하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12월에 수술을 하고 3개월을 깊스를 하고 지내야 하지만, 급하게 수술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고려해서 수술날짜까지 조정할 수 있을만큼 긴급을 요하는 병이 아니라서 또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을 의문부호로 살아가면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고 힘겹습니다. 그 의문부호를 느낌표로 바꾸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인생의 의문부호를 없애고 느낌표로 바꾸는 겁니다. 나에게 닥친 고난, 왜 나한테 이런 어려움이 있는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고 문제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서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살아보니 가장 힘든것이 물질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을 의무부호가 아니라, 느낌표로 바꾸었을때 변하였습니다. 내가 물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때, 내게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이 소중해지고, 적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것에 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가 바닥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고백과 그런 어려움에 대한 완전한 느낌이 비밀의 문을 열게 합니다. 의문의 비관적인 생각이 느낌의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때 내 얼굴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내가 변한것을 옆의 사람이 알게됩니다.  거기서부터 하나씩 풀려나가는 것이 느낌의 힘입니다. 인생을 느낌표로 살아가십시오. 그 힘은 물질의 길을 열고, 건강의 길을 열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열어주게 됩니다.

 

이번 추석 가족들을 보면서, 다시금 가족의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나를 사랑해 주십시오!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한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