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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론 (The Doctrine of Humanity)

한스킴 2018. 8. 9. 19:28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박영돈

Ⅰ. 서론

Christianity for true humanity.

기독교는 참된 인간됨(true humanity)을 추구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참된 인간됨(true humanity)을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 참된 인간됨을 회복하고, 복귀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인간됨이 회복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인간됨(true humanity)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참된 인간됨을 모든 인간이 소유하게 하려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참된 인간됨을 이루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참된 인간됨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의 변화는 특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멋진 인간,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목회 사역도 참된 인간을 만드는 사역이다. 전도 사역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간, 참된 인간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해무 교수님이 자주 말씀하시듯이 “목사가 되기 전에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진정한 은혜로 말미암아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사역이다.

1. 신론-인간론의 관계

Justification for theological Anthropology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의 핵심적인 주제, 정당한 주제(proper subject of theology)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닌 인간의 지식을 다루는 것을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시는 분이 아니고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교제하시는 하나님, 관계성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신학을 할 때 성경 계시에 근거한 신학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룰 때 형이상학적인 하나님 자체만의 본질적인 지식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하나님을 피조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인간을 위하시고, 인간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에 대한 지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안에는 인간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가 포착하고 연구할 때는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에 관한 지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론,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지식을 중요한 주제로 다룰 수 있는 정당성(justification for theological Anthropology)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알 필요가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서두에 이렇게 말한다.

The knowledge of God is intimately connected with the knowledge of self. "Tell me what kind of God you have, then I'll tell you what kind of humanity you have."(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신관에 대해서 말해 보라. 그러면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에 대해서 네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무한한 관심의 대상인 인간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전할 수 있다. 신학을 바로 정립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바른 지식을 정립하는 것이다.

신학의 중심적이고 정당한 주제는 하나님이다. '신론'.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제, 곧 인간을 신학의 주제로 다룰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지식도 하나님과 관련 있기 때문에 다룰 수 있다. 바로 신학적 인간론이다. 신론에 인간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 것처럼, 인간론에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다.

신론

인간론

God for man, with man

Man for God, with God

형이상학에서는 God himself

형이상학에서는 Man in himself


2. 인간론-기독론-구원론의 관계

인간론 다음에 전개되는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우리가 인간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지는가에 따라서 기독론, 구원론의 특성이 달라진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기독론이 달라진다. 인간의 근본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기독론에 따른 처방책이 달라진다. 인간론에서는 인간의 근본 문제(problem)가 무엇인가를 다룬다. 기독론에서는 이에 대한 처방책(solution)이 제시된다.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메시아가 필요한가를 알게 된다.

인간에 대해서 아주 낙관적인 자유주의적 견해에 동의한다면 어떤 기독론적 견해를 가지겠는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믿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 안에는 선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종교적, 도덕적으로 모델이 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메시아를 이렇게 이해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이 모델, 모본(example)을 따라가는 것이다.

정반대로 칼빈주의적인 인간 이해를 가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인간 안에 선(善)이 없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보면, 메시아는 단순한 모범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죄의 문제에서 건져줄 구속자(savior)이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할 분이 필요한 것이다. 그분은 죄가 없는 완전한 의인인 것이다. 그분의 공로로,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성의 완전한 변혁, 갱신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예수의 모범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우리의 기독론도 달라진다.


3. 인간론이 미치는 영향

1) 개인 신앙과 목회 사역에의 영향

예를 들어서 펠라기우스적인 인간 이해를 한다고 하자. 알미니우스는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다고 본다. 이런 식의 인간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전도자는 메시지가 다르다. 찰스 피니는 알미니우스적인 인간론을 가지고 있었다. 피니의 메시지를 보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근거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적인 인간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는다. 우리 안에는 자유의지마저도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로 선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마냥 “은혜를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칼빈주의를 오해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여러분이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올 수 없으면, 회개하기 위해 먼저 주님께 나오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의 노력으로 회개하고 그 대가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나와서 십자가의 은혜로 회개를 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책임을 강조하되, 그 책임을 은혜의 바탕 가운데 이야기해야 한다.

또 인간론은 개인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우리는 천성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인간이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자기의 의로움과 선함을 전제하고 살아가기가 쉽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자라는 것을 잊기 쉽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천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인간이해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회개의 필요성,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의 비췸을 받고 나서야 자신의 곤고함, 부패성을 깨닫는 인간 이해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도 우리의 육신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주의적 인간 전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정말 우리가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대로 우리가 부패하고, 무능력하다는 것을 실감한다면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유주의적인 전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힘을 의지해서 살아간다. 육신의 힘을 쫙 빼라. 그러면 성령의 힘이 나를 몰아가고, 우리 삶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2) 사회, 문화에 미치는 영향

인간에 대한 이해는 개인 신앙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에서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막스주의는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이 사회의 부조리, 착취, 불평등한 분배... 이런 사회적인 부조리라고 생각한다. 이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제도를 만들면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물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본다.

니체의 인간론은 기독교의 인간론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인간이해는 인간의 발전을 저해시키는 것이라면서 비판하였다. 그는 인간은 권력을 지향하는 자신의 욕구를 발전시켜서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윤리관은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와 정반대 되는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감추라, 부인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민족우월주의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이 사회의 교육, 문화, 사상 저변에는 세속적인 인간 이해가 깔려 있다. 모든 문화에는 종교적인 뿌리(religious root)가 저변에 깔려 있다. 이 종교적인 뿌리와 문화적인 욕구의 근저에는 이러한 세속적인 인간 이해가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인간론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Ⅱ.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의 한계와 문제점

1.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의 특징

1) 신학적 인간론을 거부하는 인간 중심적, 인문주의적 인간론

anthropocentric, humanistic view of human

중세 서구 사회에서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근본 관계 속에서 이해해왔다. 그러나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발달한 세속주의 인간론은 중세의 기독교적, 신학적 인간 이해를 거부한다.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만의 독립된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으로 인간을 이해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척도가 되지 못한다. 절대 준거의 틀이 되지 못한다. 막스 쉘러(Max Scheler)는 “인간은 우주의 중심적인 존재다.”(homo absconditus)라고 말했다. 즉 인간은 만물의 배후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물의 궁극적인 배후가 아니라, 인간이 모든 만물의 배후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2) 폐쇄된 세계관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세속적, 자연주의적, 결정론적 인간관

폐쇄된 세계관이라는 것은 영적인 세계,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해서 열려 있지 않은, 닫혀진 세계관이다. closed wolrdview. 그래서 보이는 현상적인 세계가 모든 것이다. 세속주의(secularism)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이고 현상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세계, 영적인 세계는 인정하지 않는 닫힌 세계관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이후에 널리 퍼지게 된 세속적인 인간관이다.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 인간의 사회적 모습, 행태를 분석함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이해한 것처럼 생각한다. 이러한 인간 이해를 secular anthropology라고 한다. 세속적, 자연주의적, 결정적인 인간론(secular, natural, deterministic anthropology)이라고 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면, 초월적인 면, 영적인 면을 인정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론을 거부한다.

3) 계시 의존적인 사고를 철저히 거부하고, 인간의 자율적 이성의 판단과 경험론적 입증에 근거하여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성경은 인간이 어떤 상황 속에서 태어났다고 계시하고 있는데, 이런 계시를 거부하면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autonomous reason(ing). 자율적 이성을 지지한다. 즉 우리들의 사고는 하나님의 계시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주의적(empirical) 이성, 자율주의적 이성을 받아들인다.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은 중세 서구사회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항상 성경을 의존해야 하는 종교적, 신학적으로 억압하는 사고를 거부한다. 객관적인 탐구에 의해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자연방법론을 통해서 인간을 탐구하는 인간론인 것이다.

이러한 세속주의적인 사상의 특징이 계몽주의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칸트에서 출발해서 - 실증주의(positivism, Conte, Bentham, Mill, Spencer. 경험에 의해서 입증된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 - 다윈주의 - 실존주의 - 맑시즘 - 니체, 프로이드 - 분석철학(Bertrand Russell, Rudolf Carnap) - 생물학적, 유전학적 인간 이해 속에서 이러한 세속주의적인 인간론이 나타난다.


2.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의 근본 문제점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은 인간에 대한 사회학적인, 정신분석학적인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기여했다. 인간의 발전과 안녕에 크게 기여한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 게놈 프로젝트 등과 같은 것을 통해서 인간의 품종 개량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초인(Übermensch)의 출현이 과학적인 단계까지 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가 더 좋아졌다고 해서 더 행복한 사회가 되겠는가? 아니다. 더 경쟁이 치열해지고 범죄가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의 지능이 높지 못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인격의 변화와 개선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더 발달한 지능으로 더 나쁜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이다. 더 머리가 좋고, 더 능력이 있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은 인간을 사회학, 생물학,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그렇게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것, 더 근본적인 것, 인간의 영적이고 초월적인 측면은 전혀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지성으로 말미암아 고도의 과학 기계 문명을 만들었고, 자신과 우주에 대한 많은 비밀을 캐내었지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는 전혀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강영안 교수가 “현대에 와서 인간에 대한 연구는 복잡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무지해지고 있다. 인간의 영적인, 초월적인 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라고 말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속과 점성술 등은 더 만연해 지고 있는데, 현대 사회와 문화와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이성주의(rationalism)와 비이성주의(irrationalism)의 극단이 아이러니컬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인간의 현상적인 면, 이 세계 속에 나타나는 현상적인 면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세밀하게 분석하고 연구를 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초월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초월적인 면은 아주 무지한 영역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미신과 신령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딜레마에 적중하는 말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22) 인간은 자신이 너무도 유식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무식하다. 이것이 인간이 안고 있는 딜레마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다. 인간의 sprituality, eternity, supernatural... 이런 것이 인간에게 더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폐쇄된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면 인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지식을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이 현대 세속적 인간론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3. 현대 사상 안에 나타나는 신학적 인간론에 대한 회의주의

1) David Hume

회의주의(skepticism). 대륙 경험론의 마지막 주자. ?인간 정신에의 연구?를 저술. 그는 경험주의 철학의 기본적인 노선을 따라서 인간은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한계 역시 지적했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경험 배후에 있는 원인에 대한 탐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온다면, 경험한 것만 우리가 안다면 정말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순간적으로 경험한 것밖에 알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단편적인 경험 배후에 있는 경험의 원인은 추적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지식의 근본 바탕은 인과율의 법칙(cause and effect)에 근거한다.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자가 있다는 것이다. 현상 배후에 있는 원인자를 추적해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흄은 이것이 우리의 사고의 습관일 뿐이라고 말했다. 인과율의 법칙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의 습관일 뿐이다. 인과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 경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원인, 근본적인 것들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인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현상적인 지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경험을 통해서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질 수가 있다. “아, 지금 강의가 따분하다, 지루하다”는 등의 단편적인 면밖에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self, God, thing in itself(Ding an sich, 물자체)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흄은 신학적인 인간 이해에 대해 분명한 회의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갖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는 우리 인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선, 의로움, 지혜와 같은 속성을 무한히 연장시켜서 갖게 된, 상상적인 산물이지, 하나님에 관한 본질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주의가 도달하는 종착역은 결국 회의주의이다.

2) Immanuel Kant

칸트는 흄의 이론에서 많은 도전을 받았다. 계몽주의 철학 자체에 비판을 가하고, 한계를 설정하고 계몽주의 철학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김용옥씨도 TV에서 강의를 하면서 칸트를 많이 이야기했다. 대중들의 지식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우리도 어느 정도 칸트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칸트가 현대 문화와 현대 신학에 미친 영향이 크다.

칸트의 가장 큰 공헌은 무엇인가? 칸트의 주된 관심은 과학과 철학의 관심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상 체계를 구축하고 계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당시 근대 과학의 경이로운 발전에 아주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철학이 과학과 대립되거나 상충되지 아니하고, 서로 조화되어서 병행되어서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다. 철학이 과학을 지원할 수 있는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과학과 철학이 서로 분리되어서 상충되면서 발전되고 있는 양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굉장히 이것을 갈등하고 고민하였다. 어떻게 해서 과학과 철학을 조화시키고, 철학이 과학을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계몽주의 철학의 두 부류, 대륙의 합리주의(Idealism: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는 사물의 배후에 너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과학을 지원해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 존 로크, 버클리, 흄)는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만 온다면 경험밖에 있는 혹은 경험 배후에 있는 지식은 얻을 수가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험주의의 극단은 결국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과학에 파괴적인 것이다. 그래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모두가 과학에 대해 파괴적이다. 동시에 종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영적인 세계를 경험과 이성을 바탕으로 관찰하려고 하니까 과학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칸트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횡포로부터 과학과 종교를 구해내려고 하는 사명감으로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을 살리려는 시도에 있어서 종교와 과학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을 새로이 개발했다.

본질세계 noumenal world - 종교

현상세계 phenomenal world - 과학

현상세계(phenomenal world)와 본질세계(noumenal world)로 분리해서 현상세계에 과학을, 본질세계에 종교를 배치하였다. 경험주의를 따른다면 경험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것들은 알 수가 없으므로 회의주의에 빠진다. 어떤 사물에 대한 피상적인 것만 알고 본질적, 종합적, 총체적인 것들을 알 수 없다면 과학은 불구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칸트의 과제였다. 칸트는 물론 지식은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도 사물에 대한 종합적, 총체적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 안에 그런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단편적인 경험 배후에 있는 원인까지도 통일해서 이해할 수 있는 정신 기능이 인간 안에 갖춰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적인 기능은 단순히 수동적이지 않다고 했다. 과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회의주의를 극복하면서도 과학적, 종합적, 총체적인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을 수가 있지만, 경험을 의존하지 아니하고도 종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정신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꼭 경험하지 않았어도 종합적인, 총체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지식의 구조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편적인 경험 배후에 있는 원인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것을 정리해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적인 기능은 단순히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으로부터 ‘인상’(impression)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 기능은 인상과 감각만을 받는 수동적인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받는 인상과 감각을 수집해서 봉지에 집어넣어서 분류하고 종합하고 통일성 있게 이해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칸트 전까지의 철학계에서는 subject―object의 관계에 있어서 주체가 수동적인 역할을 했는데, 칸트는 우리 주체인 정신이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에 맞추어서 지식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 주체가 수동적인 역할만을 한다면 선험적인 지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반대로 대상이 나의 정신적인 구조에 맞추어서 인식된다면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종합적인 지식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지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 쓴 책이 ?순수이성비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험의 세계 속에서 과학적 지식은 가능하다. 종합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이 가능하다. 순수이성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이성, 이론적 이성을 통해서 경험적 영역의 사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을 넘어선 물자체에 대해서는 순수이성이 알 수가 없다. 이 세계는 순수이성은 논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실천이성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론적인 이성과는 다른 것이다. 실천이성은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윤리적인 의식이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범주적인 윤리를 끄집어내야 한다. 실천이성은 모든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의식이다. 실천이성으로 가능한 종교는 윤리적, 도덕적 종교이다.

그는 과학이 들어갈 자리와 종교가 들어갈 자리를 따로 마련하였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에 대항해서 칸트는 이성으로 경험할 수 없다고 해서 본질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수이성으로는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납득되도록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순수이성으로는 본질세계의 어떤 것도 간파할 수 없다. 그러므로 두 영역을 설정함으로 종교가 머물 수 있는 영역을 마련해 줌으로 말미암아 종교를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부터 구원해 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칸트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평가를 일축하고, 당시 독일의 성직자들은 칸트에 반발했다고 한다. 칸트의 선한 의도는 무시할 수 없다. 교회에는 안 나갔지만, 기독교를 믿었다고 한다. 경건주의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칸트가 현대신학에 미친 영향

1) 칸트는 과학과 종교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였다. 이것은 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의미한다. 현대 과학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과학이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과학이 완전히 세속화되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중세에는 어떠했는가? 중세에는 기독교와 과학이 완전히 연결되어 있던 세계였다. 기독교가 세상을 통합하는 학문방법론이 가능했던 세계였다. 아퀴나스를 보라. 그러나 칸트에 의해서 이런 유기적 연결은 완전히 단절되게 되었다. 과학과 세상의 언어와 종교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다. 과학과 세상의 언어는 순수이성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지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순수이성으로 말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순수이성으로 부인할 수도 없다. 신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 안에 도덕적인 의식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필요하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요청된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 독생자 예수를 믿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분석하고 조직화하는 시도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정통 신학이 그런 오류를 범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좋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객관적으로 증명,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신학적 지식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보았다. 인간에 관한 신학적 지식도 부정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인지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전통 신학에서 넌센스를 범하고 있다라고 보았다.

3) 그러므로 믿음과 이성은 조화될 수 없다. 믿음은 종교의 영역에서, 이성은 과학의 영역에서 통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교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반지식주의, 반교리주의, 반신학의 문제가 여기에서 대두되는 것이다. 칸트 이후에 새롭게 신학을 발전시키려던 사람들은 더 이상 이성에 근거해서 종교와 신,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하려는 시도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칸트 이후의 신학자들은 이성에 의한 전통적 방법으로 신학하기를 포기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흐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근거해서, 리츨은 도덕에 의지해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를 했다. 감성과 체험에 의존한 신학, 즉 경건신학의 뿌리는 사실 이런 초기 현대신학자들을 넘어서 칸트에게 닿아 있다.

3) Existentialism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적인 사상은 무엇인가? existence prior to essence.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인간은 nothing의 세상에 떨어진, 내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용감하게 자기의 삶의 살아내는 용기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실존주의를 대중화시킨 두 사람은 카뮈(Albert Camus)와 사르트르(Sartre)이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불안(Angst)이 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그저 이 세상에 덩그렇게 내던져져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통해서 자기의 인생의 의미를 선택해야 한다. 저주받아 버려진 존재이지만 자유를 위해서 버림받은 존재이다. 아무 의미 없는 세상에 던져졌지만 자기의 의미를 자기가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 이건 완전히 자유주의적 사상이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한 창조주 역할을 하려 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멋진 사람이다. 지성인들을 매료시켰다. 독일 전차 군병의 망토 같은 것을 입고 다방에 앉아서 사색에 빠져서 묵상하고 은혜 받고 그렇게 했다. 그 유명한 책 ?구토?를 통해서 노벨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거절했다. 어떤 사람은 그 상을 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그는 그 상을 거부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더러운 오물과 같은 존재가 버티고 서 있다. 이 오물 같은 존재를 떨쳐 버리려고 하나 계속 거기 서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자기의 삶을 책임지는 용감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적인 의미를 만들어 가야 한다. 창조주가 할 수 있는 일을 유한한 피조물이 하려고 하니까 그런 책임감 앞에 무거운 불안을 느낀다. 엄중한 책임의 중압감에 짓눌려서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용감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인생의 멋진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의 유명한 ?구토?에 보면 하루 아침에 해변가를 걷다가 물기가 묻은 자갈을 손에 든다. 물기가 젖어 있는 차가운 촉감이 전해 오면서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새롭게 느끼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실존의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 세계에 떨어진 존재이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야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중압감에 눌려서 구토가 일어난다. 그래서 구토이다. 왜 그 소설이 유명한가? 사상이 기저에 있기 때문이다. 카뮈의 ?이방인?도 이상하게 시작한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심상치 않게 소설을 시작하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아주 슬퍼하는 아들의 역할인데, 소설에 묘사한 것을 보면 슬퍼하는 아들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실제 자신의 모습(실존)과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간의 괴리... 그래서 생기는 괴로움... 그래서 제목이 “이방인”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 실존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인간은 무의미한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기존 사회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부과하는 가치관, 의미, 중요성, 이런 것에 얽매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세상 사람들이 노벨상이 가치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일관되게 행동하였다. 모든 사상과 가치관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얽매이고 따라 다니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항정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독립적인 세계와 의미를 찾아가는 실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실존주의 사상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하는 그러한 발로를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 의미와 목적과 가치관을 우리가 따라 살기를 거부한다. 사형 언도를 받기 전에 신부가 와서 귀화시키려고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주인공이 신부에게 멱살을 잡고 대항한다. 기존의 종교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까지도 부인한다. 신이 주는 의미를 받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내가 자유로운 실존으로서 나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이런 실존주의 사상에서 보면 신학적인 인간론에 분명한 회의주의가 나타난다.

현대인들의 커다란 문제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지식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굉장히 방황하고 있다. 영화 「자이언트」에 출연했던 미국의 유명한 영화배우 제임스 딘(James Dean)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방황을 했다. 어떤 배역을 맡으면 그 캐릭터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 배역을 맡을 때마다 자기의 정체성을 찾느라고 수없이 방황하였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수많은 역할을 하는데 그 속에서 본질적인 나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하다 보면 ‘이 목사의 배역을 한 것이 나인가?......’ 하는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배역의 배후에 있는 참된 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가장 잘 알아야 하는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나를 찾아서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분석 방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는 아이러니.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지 아니하면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의 실상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만, 하나님의 계시의 거울 앞에서만 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도 아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판단하기가 힘들 때가 많다. 내가 다른 사람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어떤 사람은 자유롭게 생겼다. 그러나 아무리 거울을 쳐다봐도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든 것이 자기 자신의 얼굴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잘 생기고, 어떻게 보면 아주 못 생긴 것 같은 것이 자신의 모습이다. 결론은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엇갈리는 견해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은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현대 세속주의 인간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상적 측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지식을 제공해 준 측면이 있지만,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적 부분에는 회의적이다.

1) 이성주의(Rationalism) - Human Nature

서구의 대표적 입장. 이성주의에 의하면, 인간본성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Reason이라는 것. ‘참 인간은 이성적인 인간이다’. 인간의 이성이 인간 안의 비이성적인 부분들을 주관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① Plato

Idea, Form

원형, 원천(unchangeable, true original, source)

현상세계

copy

플라톤은 인간을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이해하였다. 인간의 영혼은 본래 이데아의 영역에 속했다. 영혼은 선재(先在)하면서 불변한다. 이것은 오르페우스(Orpheus)교에서 유래된 사상이다. 영혼 안에는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다. 영혼 안에 있는 비이성적인 부분이 죄와 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영혼이 육체 안에 거하게 됨으로써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육체 안에 거함으로써 비이성적인 부분이 죄에 치우치게 된다. ?공화국?(Republic)에서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reason(이성), spirit(기개, 의지), appetites(욕망). 이성은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고 접할 수 있는 부분. 그리고 기개와 의지는 선하지만 중립적이다. 욕망은 육체에 의해서 자극을 받기 때문에 죄에 치우치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또 그의 저서 ?파이드론?(Phaedrus)에서는 우리 인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성에 있다고 말했다. 마부가 두 말을 잘 통제해서 가야 하는 것처럼 이성은 나머지 두 부분을 잘 통제해야 한다. 마부가 선한 말과 악한 말을 잘 통제해야 하는 것처럼, 특별히 악한 말을 채찍으로 다스리듯이 욕망은 금욕과 고행을 통해서 제어하고 거부해야 한다. 사회의 지도자는 가장 이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플라톤은 군주는 철인(哲人, 철학자)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플라톤의 견해가 헬라 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으로 “기독교가 가장 이상적이고 철학적인 종교다”라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Justin Martyr는 기독교는 최고의 철학이라고 주장.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도 로고스를 통해서 진리를 소유하게 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주장. 교회사에서는 기독교와 세상 철학을 융화시키려고 한 철학적 입장(Synthesis: Justin Martyr, Aquinas, Schleiermacher)과 기독교와 철학이 완전히 대립적이라는 입장(Antithesis: What does Athens have to do with Jerusalem? - Tertullian, Karl Barth)의 두 흐름이 있어 왔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도 이런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육체에 관한 두 가지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다. 하나는 금욕주의이고, 하나는 쾌락주의였다. 플라톤 사상의 잔재가 기독교 사상 안에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성속의 이원론. 영혼에 관련된 것은 아주 귀하고 육체에 관련된 것은 세속적이고 천한 것으로 보는 것. 그러나 기독교적 견해는 육체를 근본적으로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육체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육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라는 사실을 바울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구로 육체를 보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전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아덴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들은 다음에 특별히 육체의 부활에 대해 듣고 나서 기롱했다고 쓰고 있다. 왜 기롱했을까? 헬라 사상에 의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부터 벗어나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염원하는 것은 육체를 벗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부활해서 육체를 다시 입는다고 하니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 철학적인 배경을 알아야 한다.

② Kant

칸트는 이성이 인간됨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그래서 "rational man is an essential man." 이성적인 인간이 가장 본질적인 인간이라고 보았다.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육적인 충동과 욕망에 매이지 아니하고 거기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초월의 능력(이성적인 능력, rational power for transcendence, self-control)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을 practical reason이라고 했는데, 실천 이성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득적인 도덕 의식(innate moral consciousness)-경험적으로 습득하고 배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닌-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 안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이 윤리적인 의식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정언적인 명령을 추출해 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언적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한다면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는 그런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거짓말, 살인, 간음 등. 이런 것처럼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명령을 우리는 설정해야 한다. 이런 도덕적인 의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보편적인 도덕적인 원리를 따라서 살 것을 요청 받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이런 도덕적인 원리를 따라서 살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원리, 도덕이 우리에게 명령되고, 요청되고 있다. 그래서 종교는 이 도덕 의식, 실천 이성에 근거한 것이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과학은 순수이성에 근거해서 가능하고, 종교는 실천이성에 근거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이 실천 이성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윤리 의식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다.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청된 하나님이다.

<요청되어진 하나님에 대한 부연 설명>

작업가설로서의 하나님. 왜 하나님을 가정할 필요가 있느냐? rational being은 virtue와 happiness가 완전히 결합될 때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행복보다는 선한 삶을 사는, 덕 자체를 위해서 그러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이 목적이 되어서 덕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supreme good은 우리 삶 속에 덕과 함께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최고의 선은 덕과 행복이 완전히 결합된 것이다. 선한 삶을 살아도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끊임없이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되 최고의 선이 주어질 것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윤리적인 추구에 있어서 자극이 된다. 최고의 선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전능자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삶을 살다보면 최고의 선을 덕과 함께 누리게 해주실 전능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우리의 윤리적인 삶에 계속적인 소망과 자극과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의지와 자연계와 물질계가 하모니(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의지에 맞게 자연계와 물질계를 움직이게 한다. 그 셋이 하모니가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행복이 도래할 수 있다. 윤리적인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는 가의 여부가 객관적, 이론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 그러한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 ok,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믿는 것 ok, 그러나 그것을 순수이성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수이성은 본질적인 세계에 속한 사물을 진단하고 이해하는 기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본질

실천이성(도덕적 의식에 근거해서 종교이해)

현상

이론이성

③ Hegel

헤겔도 칸트의 바탕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라고 본다. 인간을 주관하는 것은 물질, 환경, 육적 요소가 아니고 이성이다. "All reality is rational, therefore is accessible." 이 헤겔의 사상을 완전히 전환시킨 사상이 누구인가? 막스이다. 헤겔은 모든 실제는 이성적이다라고 말했는데, 막스는 모든 실제는 사물이다(All reality is material!)고 주장했다. 헤겔은 이성이 우리 개인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계를 주관한다고 했다. 세계 역사는 절대정신(Geist)의 산물인 것이다. 어찌 보면 신이라고 할 수 있는. 헤겔에 의하면 이 세계가 이성에 의해서 조절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세계 역사는 절대 정신(Geist)의 자기 인식의 발전 과정이다라는 것이다. 역사의 시작 포인트는 Geist가 가장 희미하게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던 순간이다. minimal step of consciousness. 정신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인식함에 따라 역사의 끝에서는 완전한 인식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정신의 발전단계가 변증법적 운동(dialectical movement)에 의해서 진행된다. thesis, antithesis, synthesis(정, 반, 합)이라는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단계 absolute idea 완전한 자기 이식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또 이 헤겔의 사상에 있어서는 knowing과 being의 발전이 중요하다. thesis는 being이다. antithesis는 non-being이 자리 잡는다. 이 둘을 중재하는 합은 becoming이다. 이 이론은 신학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칸트 사상이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처럼, 헤겔의 사상도 신학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Geist는 하나의 신이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becoming이 된다. 하나님의 being이 becoming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성숙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이 어떤 신학에 영향을 미쳤는가? 바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경의 계시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본질 안에 변화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성육신을 통해 삼위 하나님 안에는 인간성(humanity)이 첨가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하나님은 절대 being이다

칸트는 과학과 종교가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을 따로 설정했다. 본질 세계와 현상 세계를 분리하였다. 그런데 칸트의 반작용으로 헤겔의 사상은 칸트가 갈라 나오는 것을 모두 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객관과 주관, 경험하는 대상과 인식하는 정신. 주관 안에 객관은 포함되어 있다. 칸트가 갈라놓은 본질세계에 속한 실재와 현상세계의 실재를 융화시키려고 노력. 또한 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결시키려고. 또 우리가 인식하는 사유와 우리 밖의 사유의 실체를 이원론적 분리에서 구출. 객관과 주관을 융합. 유한과 무한을 통합하려는 야심찬 사상. 헤겔 사상의 반작용으로 그 다음 철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철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는데...

2)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 - Romanticism(인간의 감성적 측면 강조), Volitionalism(주의주의. 이것도 로맨티시즘에 포함되기도 함)

사람에 따라 정리하는 것이 다름.

인간 본성에 있어서 이성보다 더 다이나믹한 활력소는 비이성적(irrational, subrational)인 부분이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성보다도 본능적, 감성적인 것이다. 육체적 충동이기 때문에 이것을 physical impulse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에서 이성주의 입장에 대항해서 이런 견해를 취한 대표적 3인의 사상을 보자. 왜 이 3인을 함께 다루나? 공통점은,

∙이성주의적 인간 이해를 신랄하게 비판. 이들의 사상이 인간 이해에 있어서 현대사상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기존의 철학학파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 관점에서 이해. 현대 사상사에 지대한 공헌.

∙인간의 행동의 비밀을 캐내는 것. 이들의 관심은 ‘인간이 늘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배후의 요인, 행동의 비밀을 캐서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를 파악함으로 인간을 개조시켜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구체적 목표를 가진 혁명적 이론의 전도사들. 사명감에 불탐. 이들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우리는 더 불타는 사명감으로 재무장해야겠다.

∙모두가 철저한 무신론자들. 무신론적 입장에서 인간 이해. 기존의 신을 믿는 태도는 인간의 나약함, 우유부단, 맹신적 복종심이 누적되어 나타나는 사회병리적 현상. 유신론, 특히 기독교의 허구를 밝히고, 기독교를 대체하는 자구책으로 무신론을 제시함으로 인간을 유신론에서 해방시키려는 사명감.

역사는 self-development이다.

minimum self-consciousness

maximum self-

① Friedrich Nietzsche(1854-1900) : "Wille zur Macht"

신학적 인간론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적 인간이해가 먼저 필요하기에 이런 철학을 배운다. 니체는 루터란 목사의 아들이었다. 대대로 목사가 있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인간성 이해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Schopenhauer는 헤겔의 사상에 대항해서 인간 본성에서 가장 큰 활력소가 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이성 배후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의욕, 욕망, 의지라고 함. 욕망을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생의 의지. will to live. Wille zum Leben이라고 함. 그런데 니체는 욕망은 분명한 대상이 있는데, 권력을 향해서 나아가는 권력에의 의지다. Will to power. Wille zur Macht. 스스로 강해지려는 욕구다. 이 의지는 인간 안에서 솟아오르는 활력, 생명력, 생장, 정복, 창조하는 힘이다. 이 욕망 때문에 인간의 삶은 비극이 아니라 넘치는 충만이다. 인간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다. 권력에의 의지, 욕망을 한껏 고조시킴으로 초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Superman Ubermensch. 초인은 약자를 지배하고 정복하는 사람이다. 개인 안에 자기 발전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의 열심을 자극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개인 안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 세계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약화시키는 사상이나 종교는 악, 거짓, 허위이다. 그 대표 종교사상이 기독교. 기독교적 윤리와 사상의 영향으로 서구의 전통적 윤리는 솔직하지 못하다. 허위가 가득하다. 기독교는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의 중요성, 이성보다 더 큰 우위성이 있음을 인정, 파악하지 못했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이성보다 훨씬 인간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은 쉽게 이를 억제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성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써. 예를 들면 중세 교회는 교권을 신장하기 위해서. 교권도 종교라는 허울 속에 감춰진 인간 안의 욕망. 스콜라주의라는 이성적 도구를 최대한 활용했다. 이성주의와 결탁한 중세교호를 신랄하게 비판. 이런 권력에의 의지와 욕망은 우리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목사의 열심을 자극하는 동인은 무엇인가? 영적, 종교적으로 교묘하게 포장된 권력의 욕망 아닌가? 유명한 목사, 잘 나가는 목사가 되기 위한 권력에의 욕망이 우리를 이끌어 나가는 경우가 많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동기도 이런 권력의 욕망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종교적인 슈퍼스타가 되려고. 이런 욕망이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의 요소를 잘 지적했다고 본다.

니체는 참된 윤리를 강조. 권력에의 욕망을 부인,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욕망의 영향을 인식함으로 욕망을 인정, 긍정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욕망에 근거한 윤리만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 대해서 가장 솔직한 윤리가 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높아지고, 강해지고, 남보다 낫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토대에서 윤리관을 정립해야 한다. 기독교는 정반대로 이런 자연적인 본성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자연적인 본성에 가장 솔직하지 못한 위선적인 윤리관을 형성했다. “원수를 사랑하라” 기독교는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것만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잘난 맛에 사는데, “낮아지고 겸손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욕망을 버리라”고 강조하는 기독교는 문제를 안고 있는 사상이다. 기독교의 윤리관은 특별히 권력에의 욕망을 부인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위한 최대의 원동력을 우리 안에서 말살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자기발전과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노예윤리, 약자의 윤리, 지푸라기 같은 윤리다. 아주 나약한 의지의 사람들의 윤리. 거세된 윤리다. 남성적 욕망과 가치기준을 완전히 앗아가는 윤리관이다. 여성화된 윤리라고.

기존의 도덕을 넘어서 무신론적인 도덕으로 나가기 원했다. 신이 설정해준 도덕적인 기준을 다 허물고 새로운 바탕 위에서 초인의 새로운 윤리 체계를 정립하기 원했다. 초인은 신이 설정해준 선악의 기준을 뛰어넘어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 토대 위해서 세워지는 윤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견해. ‘Anti-Christ’ 기독교 윤리는 자연적인 것을 부정하고 억누른다. 인간의 열정을 억누름으로 생명의 근원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정죄한다.

‘권력에의 의지’ 지금까지 없었던 숙명적이면서도 유래를 찾지 못할 유혹의 거짓말.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낀다 삶과 세계와 하나님과 살의 목적이라는 큰 주제를 아주 간단한 문제 다루듯이 얘기하는 파렴치한 경솔함을 본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있었던 것 중 가장 숙명적인 과대망상이다. 기독교는 가장 사적인 생존방식으로는 가능하지만 사회발전에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종교이다. [니체는 불신자 마음 속에 보편적으로 깔려있는 기독교, 성경,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아주 날카롭게 분석해서 우리에게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안에 있는 적개심에 대한 통찰력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아닌가? 니체의 이해가 현대 문화와 사회에 깔린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경쟁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뭔가? 권력. 다른 사람보다 앞서고 높아지는 것. 이 삶의 철학에 완전히 사람들이 지배를 당하고 있다. 이런 무신론적 원리. 삶의 철학을 분석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② Sigmund Freud(1856-1939) : sexual impulse "libido"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림. 인간행동은 이성보다 오히려 이성 저변에 깔린 무의식, 잠재의식 안의 어떤 요인에 더 영향을 받고 있다. 인간은 이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다. 인간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지 말라. 인간은 무의식 세계의 내적 요인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정신 세계에서 우리가 느끼고 감각하는 이성적인 영역은 그 영역 저변에 있는 잠재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커다란 잠재의식의 영향을 자의식이 항상 받으며 산다. 이는 수면 시에 잘 나타난다. 잠 잘 때는 이성의 활동이 멈추기 때문에 잠재의식이 잘 포착된다. 잠재의식에 쌓인 것들이 대개는 꿈속에서 표출되는 경우가 있다 꿈의 symbol을 연구하면 인간의 내면 세계 속에 억눌려 있는 욕망, 충동, 내적 요인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의 유명한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에서 꿈을 분석함으로 잠재 의식 속의 억눌린 욕망을 탐구하려 했다. 인간의 정신적 문제, 노이로제의 원인은 유아기적의 원초적 성욕에서 비롯된다. Oedipus complex. - "love for the parent of the opposite sex and jealousy for the parent of the same sex."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욕망과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질투와 경계심... 여자는 정반대. 프로이드는 지적하길, 많은 경우에 이것이 종교적 강박관념과 결부되면, 우리 안에 윤리적인 자책의식이 고조된다. 거기서부터 영적, 정신적 불균형이 야기된다. 그런 유아기 때 가졌던 성적 욕망을 종교적 의식으로 잘못 억압하면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함. 그래서 억눌린 욕망과 그런 충동들이 깔려있는 잠재의식과 자신을 통제하려는 초자아 사이에 불일치가 일어나면 정신적 불안과 불균형 야기. 그래서 이런 종교적 억압을 제거하고 좀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정신적 불균형을 해결해야 한다고 함. 이 견해는 말도 안 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너무 쇼킹한 견해였다. 전통적으로 인간을 고결하게 이해했는데, 인간의 실체를 완전 벌거벗겼다. 원시적인 본능에 의해서, 성욕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인간의 실존을 평가 하락시켰다. 우리 인간 안에 보편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은 아직 하나의 가설이다. 이런 콤플렉스에서부터 오는 죄의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토템 종교가 원시사회에서 발생했고, 기독교는 토템 종교가 세련된 것이다. 그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한 가지, 그는 사상사에 획기적으로, 처음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성적으로 oriented된 동물이라는데 관점의 초점을 맞추었다는 공헌. 그래서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그의 내면 세계, 삶의 열정과 원동력을 자극하는 motive force는 sexual impulse, 곧 libido다라고. 이성주의는 이것을 너무 육적인 욕망으로 부정했다.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했다. 김용옥이 말하길,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여태까지 색을 밝히는 것보다 공부를 더 좋아하는 사람을 못 봤다”고 했다는 것. 이성으로 욕망을 쉽게 억제할 수 없다는 것. 사실 그래. 지성인들이 음란 사이트를 오히려 많이 봐. 공부할수록 제어하지 못해. 옛날에 음흉한 조상들이 많았다. 왕 되면 색을 쫓다가 소진해서 빨리 죽어. 공자 왈 맹자 왈 하다가, 이제 윤리적 굴레가 벗겨지니까 본색이 드러난다. 윤락 업소, 술집이 많다... 프로이드는 어떻게 이성적 연구가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 영향 미치는가를 다 연구하지 못했으나 상당한 통찰력을 주었다. 이런 현상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아프리카 한 종족. 남녀 비율이 125:100. 이 정도면 남자의 기질이 변한다고 한다(^^). 사실 현대 문화에 인간의 성적 욕망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 음란 문화다. 방송, 인터넷, 여자 옷... 문화를 다 무분별하게 수용할 것이 아니다. 남성들은 안목의 정욕!, 여성들은 벗으려는 ‘죽음에 이르는 병’ +.+

프로이드의 지적처럼 인간의 성적 욕구가 인간의 사회활동과 문화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수도 노래나 음악성이 아니라, 섹시한 춤과 얼굴이 더 중요. 영화도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요소가 깃들어 있어야 장사가 된다고 함. 이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또한 장사...

③ Karl Marx(1818-1883) : "impulse to avoid hunger"

막스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배고픔을 면해보려는 욕구’다. 성경도 인정하는 셈. 성경은 세상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로 특정 지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음. 근본적인 생계에 대한 염려에서부터 끊임없이 물질을 모으려는 자극. 인간이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 것은 꼭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만은 아니고, 근본적인 생계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확보해 놓지 않으면 굶을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에. 정부와 사회는 이 인간의 근원적인 염려, 불안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주의제도. 있는 자의 착취를 막는다. 잉여 가치의 존재로 있는 없는 자에 대한 있는 자의 착취를 막고, 불평등한 분배의 구조적인 모순을 없애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막스가 주장하는 유물론적 다이어그램의 마지막. 헤겔의 사상을 뒤바꾼 것이 막스의 사상. 헤겔은 모든 실체는 정신적, 이성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막스는 물질적 세계가 정신적 세계보다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 정신적 세계는 물질적 세계의 하나의 소산이다. The primacy of material world over mental world. 헤겔은 Geist가 dialectical Idealism이라고. 반면, 막스는 dialectical Materialism이라고 함. 세계의 질서는 물질계 사이의 충돌을 통해서 dialectical하게 진행되고 마지막이 사회주의. 원시공동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사회주의 순.

막스의 견해도 현대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현대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물질 제일, 경제 제일주의로 치닫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물질적 욕망 저변에 깔려 있는 동인은 염려다.

세 가지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성주의의 위선과 거짓을 잘 파헤쳤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아주 인간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해 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성경적인 통찰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니체는 권력, 프로이드는 섹스, 막스는 돈.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버둥치며 살고 있다.

3) 이러한 견해들의 문제점

세상 사람들은 이런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이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공부하고 머리 굴리고, 쟁취 후에는 보존 수단으로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우리 이성으로써 이런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쟁취 수단으로 이성을 사용하고 지키기 위해서 이성으로 명분화 한다.

① 세 이론은 각기 상당한 일리가 있다. 인간의 실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준다. 그러나 인간을 너무 단편적인 측면에서만 보고 이해한다. 한 면에서만 이해하려는 단순논리의 치명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다각적이고 총체적인 면을 이해하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

②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근본 욕망의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 이 견해들이 안고 있는 자체 모순은, 이성주의 인간에 대항해 인간에 대한 낙관성을 비판하면서, 결국 자기들도 마지막에는 낙관주의에 빠지고 있다. 니체는 권력에의 욕망을 통해 자기완성, 초인에 도달. 프로이드는 인간의 원초적 성적 충동과 욕망을 합리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낙관, 막스도 근본적 물질에 대한 욕구와 생존에 대한 염려를 사회적 체제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

이런 욕망의 문제성은 같은 사상가 중에서도 신랄하게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들이 말하는 욕망의 문제점은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 “인간은 무한한 우주의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존재이나, 자신을 이 세상의 센터로 삼고 있다. 자신의 존재와 안녕을 최우선으로 두고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 다른 사람의 행복이라도 다 파괴할 수 있다.” 니체의 사상은 실제로 독일의 나치즘, 민족우월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 자신의 권력의 욕망을 위해서 유럽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김일성 안에 있는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인민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이성적으로 그것을 합리화한다 욕망을 정당화하고, 욕망을 쟁취한 것을 보존하려는 수단으로 이성을 사용. 박 대통령도 항상 ‘안보이념’ 내걸었다. 군부독재자들이 권력 잡았을 때, 자신이 그렇다는 것 잘 몰랐을 것. 인간은 원래 자신을 철저하게 속이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속인다. ‘국민을 위해서 내가 총대를 지는데 무슨 소리냐?’ 얼마나 무섭게 작용하는가? 그는 또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게 형편없다. 이런 욕망은 부인해 버려라. 생의 의욕, 욕망이 너무 파괴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denial of will to live 자살이 해결방법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인도와 불교적 사상을 도입해서 해탈의 사상을 말했다. 금욕과 고행을 통해서 이런 파괴적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이 욕망 속에 살면 우리 삶은 항상 고통의 연속이다. 자유하려면 해탈, 무아의 경지, 범신론적으로 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자체 모순이 또 있다. 염세적인데 또 마지막 해결책을 보면 낙관적이다... ^^ 인간 안에는 금욕을 파괴하고 해탈할 능력이 있단 말인가? 해결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해답들이 낙관주의의 오류에 빠져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세속사상에서 나타나는 인간이해는 각자의 이론 안에 서로 상충되는 극단적인 경향성이 나타난다. 인간의 본성을 총체적인 통괄된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단순 논리에 빠져가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이것이 지금까지 사상계에 가장 알려졌지만, 우리가 모순을 본다. James Orr같은 신학자는 “full cycle of secularization" 현대 세속사상은 양극단에서 왔다 갔다 하는 진자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세속주의의 한계를 정하셨다“. 아무리 세속화되어도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속화의 운동에 limit을 정하셨다. 복고운동이 하나님의 비밀스런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 중세 이후의 현대 세속주의는 full cycle로 갔다. 발달할수록 자체 모순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이 너무 지혜롭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무식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낙심할 필요가 없다.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자체 모순이 나타난 속에서 성경적 이해를 바르게 정립하고, 사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바탕을 상실하고 완전히 방황하고 있는 세속 문화가 다시 굳건한 바탕 위에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사회 변화의 사상적 바탕을 제공할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현상적 측면에 대한 인식을 주었다. 우리는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재정립, 재해석, 변형시켜나가야 한다.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가 인간 이해를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그런 관점에서 니체의 의견도 성경적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겠다. 또 그 떠난 인간은 허무해져서 음란해진다. 영적 음란과 육적 음란은 직결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통찰력을 도입. 성경의 지적처럼 하나님을 떠나니까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살아야할 인간이 생존에 대한 염려가 생겼다. 물질에 대한 근본적 욕망. 이렇게 성경적으로 새롭게, 이들보다 다 논리적 일관성 속에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겠다. 또한 단편적 각도만 아니라 이것들이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상호작용함을 알 수 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을수록 사람이 음란해진다. 프로이드도 그런 말을 했다. 야심이 클수록 성욕이 더 많아진다. 성경적으로도 욕심이 많을수록 더 음란해 진다. 목사도 슈퍼스타가 되겠다는 헛된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음란이다. 대개 잘나가던 목사들이 쓰러지면 다 음란 때문. 우리 안에 있는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물질과 권력을 추구한다. 이 세 가지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앞으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5. 신학적, 성경적 인간 이해의 두 관점

1) 삼위일체적 관점

신론 ;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 의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 영원 전에 Trinity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다루는 학문을 본체론적 삼위일체. Trinity for humanity. 하나님은 항상 인간을 위하시는 하나님.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삼위일체도 인간을 위해 존재했다. 사랑의 코이노니아 가운데 존재하셨던 것은 우리를 그 코이노니아로 초대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기독론에서 나타남.

기독론 ; 삼위일체적 코이노니아를 누리던 분의 지상에서의 인간 존재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일치되는 삶을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인간의 형상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

성령론 ;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삼위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 놀라운 존재이다. 그것이 인간의 숭고한 존재양식이다. 바울이 증거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적 삶을 사는 사람. 삶, 기도, 예배가 삼위일체적이어야 한다. 삼위로부터 부여되는 인간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그분이 공급하시는 모든 능력과 소스를 부여받아서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 속에서 존재하는 복 받은 존재다. 하나님 나라 안의 존재다.

2) 구속사적 관점

인간의 이러한 본연의 삶이 와해되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와해. 다시 예수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구현. 창조 - 타락 - 구속.



Ⅲ.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

서론 : 세속주의 인간론이 밝히지 못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해는 신학적인 답변이 제공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우선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창세기 1:27은 밝히고 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理想)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런데 죄의 결과로 비인간화(非人間化)가 일어났다. 폴 틸리히는 인간은 존재의 근본 위기에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인간으로 회복될 수 있다. 참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 인간에게 심각한 상실의 문제가 있으며, 참된 인간성의 회복이 긴급하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메시지는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기독교의 회개의 메시지는 특정한 죄를 지적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죄라는 총체적인 죄성을 밝혀준다. 현재의 모습이 하나님의 의도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를 말하면서 그것이 죄라고 말한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은 죄를 논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인데,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참된 인간성 회복,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돌이킴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받는 대상이어야 한다. 둘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되는 것과 제자가 되는 것도 분리할 수 없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은 둘을 분리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과 생활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역점을 기울여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다. 양적인 부흥이나 팽창보다도 우리 공동체와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있는가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 목회사역을 해야 한다. 교회 사역자들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들이 닮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목회 철학과 목회 패턴, 청사진들이 바뀌어야 한다. 너무 세속적인 관념에 물들어 있다. 성공의 척도가 큰 업적을 이루고 대형 교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힘써야 할 근본적인 면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는 사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목사는 자신이 먼저 주님의 형상을 닮는 모델이 되고, 그 모델을 제시해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닮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한 목회 패턴이다. 행복한 목회자가 되려면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변화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탤런트가 다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다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는 없다. 대형교회가 목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탤런트가 부족하고 학적인 자질이 떨어져도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면 아무리 자질이 부족해도 주의 형상을 닮은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전도와 선교 사역도 비인간화된 세상 속에서 참된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비추는 일이다. 교회가 참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어떤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돌이켜야 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예와 이해가 필요하다.

1. 인간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형상인가?

mirror, represent, reflect.

하나님을 반영한다, 나타낸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을 닮았는가?

우선,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근동신화에는 인간의 육체도 신을 닮았다는 것을 언급한다.

∙인간의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고대종교

Babylon Epic of Gilgamesh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두 발로 꼿꼿이 서서 걸어다니는 것이 아주 당당한 신의 자태라고 생각해 왔다. 침팬지와 원숭이가 인간과 다른 것이 침팬지는 어깨가 축 쳐져 있지만 인간은 어깨가 쫙 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자태라고 주장했다.

성경에서 신인동형적인 어법으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오른 손을 펴신다”, “귀를 기울이신다”는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그러한 표현법에 근거해서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도 고대 근동 신화나 어떤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인동형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처음서부터 율법에서부터 하나님을 어떤 육체적인 형상으로 형상화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금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종교하고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적인 형상을 가진 것으로 형상화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처음서부터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고대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레벨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문학적으로 신인동형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그레샴 메이첸 : 오직 인간의 영만이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칼빈 :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꼭 영혼에만 국한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인간의 육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빛을 반사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중심적인 좌소가 인간의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것들의 능력들 속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육체를 포함한 인간의 그 어떠한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인간이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헤르만 바빙크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육체도 영혼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육체도 인간됨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에 대비해서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된다는 견해를 잘 이해해야 한다. 플라톤적인 인간 이해에 영향을 받아서 육체를 천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육체를 영혼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이해하는 플라톤의 견해는, 최대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인 구원의 길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영혼 구원만을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이다. 우리 구원의 절정은 우리 육체가 부활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인적인 구원은 전인적인 갱신과 성화를 성경은 강조한다.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오셨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으시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같이 부활시에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부활된 육체를 입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영원히 하늘에서 육체를 입은 존재로 우리가 살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는 하나님의 형상의 영원한 구속 요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인이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영혼의 모든 기능과 구조, 영성, 관계성, 도덕성, 지성, 자율성, 자유의지, 심미적 감각, 언어적 기능, 예술적 기능, 통치권과 함께 육체의 모든 구조가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된다. 육체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면 특별히 육체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가장 예민한 표출은 얼굴에 나타난다. 얼굴의 상태가 사진을 찍어도 다르며 예민하게 내적 상태를 반영한다. 초조하고 긴장하면 얼굴에 다 표시가 난다. 화가 났을 때 발가락이 울그락불그락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자주 듣는 얘기 중에 “그리스도인의 인상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얼굴이 은혜스러워져야 한다”는 말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일까?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은혜를 받으면 얼굴이 달라져야 한다. 얼굴이 전도지이다. 성경에 근거가 있는 말인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이 그런 말을 하면 관상을 보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통속적인 관점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전도서 8장에 보면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 8:1)는 말이 있다. 그리고 모세의 얼굴 광채에 대해서 바울 사도가 설명하기를 모세를 통해 주어진 옛 계명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계명의 영광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그런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런 특별한 사례에 근거해서 보편적인 근거를 주장하기는 힘들다. 좀 더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얼굴의 신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 얼굴에 한이 맺혀서 - 가장 확실한 성경의 근거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창조시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이 얼굴에서도 비치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 후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잃어버리고 거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상실했다. 부패성으로 가득찬 마음을 가진 존재로 변하였다. 그러한 부패한 인격을 얼굴이 반영했을 것이다. 내적인 부패성과 죄악성이 얼굴에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한 후에 얼굴의 변화가 있었다고 암시하는 말씀이 있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5).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구속된 사람은 내적인 변화가 얼굴에 반영이 될 것이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다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는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굴이 은혜스러워 진다는 표현의 신학적 근거를 찾을 수가 있다.

예수 믿기 전에 죄악 가운데 살 때와 예수를 믿고 나서 은혜 가운데 살 때 얼굴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굴도 성화가 되어야 한다. 은혜를 받으면 얼굴에 심술주머니가 좀 빠지고, 교만끼가 사라지고, 근육이 재조성 되고, 얼굴에 윤기가 나고, 여성들 미용에 최고의 효과를 가져온다. 성령으로 성형수술을 받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인 미가 얼굴에 반영이 된다. 참 아름다움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다. 자매들 아침에 거울 보고 은혜 받지 말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얼굴에 내적인 미가 반영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저 교수는 자기 인상이 어떤지 잘 모르는 것 같군!” 하면서 이의를 제기할 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힘쓰고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말자. ^_^

미국에 가기 전에 신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우리 집 근처에 기도원에서 집회가 있다고 해서 우리 어머니와 함께 기도원에 갔었다. 기도원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올라갔다. 여전도사를 만났는데 눈인사만 했다. 여전도사가 우리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했다.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했다. “아까 만난 여전도사가 참 용하더라.” “무엇이 용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당신 아들이 신학하려고 하지 않느냐?”고 말하더란다. 그런데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그런데 아직 더 깨져야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참 용하다싶으면서도 기분이 안 좋았다.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이야기를 해보았고, 나를 얼마나 안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완전히 관상쟁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목사가 되기 위해서 은혜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어떤 목사님은 옆에만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경험을 할 수가 있는 분이 계셨다. 지금은 작고하셨다. 나도 가끔씩 집회에 가는데 어려운 것은 강대상에 서기만 해도 은혜를 받고 시작해야 하는데, 나는 강대상에 서기만 하면 교인들이 긴장을 한다. 이것이 참 나를 힘들게 하였다. 하지만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

나를 안수한 목사님이 기도를 하시다가 “하나님 이 종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우리 교인들이 이 종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참 감동적이었다. 이민 교회에 봉사를 했다. 이민 교회에는 참 센 장로님들이 많았다. 그리고 전도사들을 참 우습게 아는 분들도 많았다. 그런데 나는 어떤 장로님도 나에게 해꼬지를 하는 분이 없었다. 인상의 덕을 본 것인가? ^_^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적용을 해야 한다. 우리의 판단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외모로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죄 속에 살면 얼굴이 좀 어두워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드러나는 인상과 다를 수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하면서 은혜로 커버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성령세례?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나타나는 증거 중에 하나가 얼굴의 변화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집회에 갔다가 어떤 교인을 만났는데 표정이 참 어둡고 침울하고 안 되어 보였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고 나니 얼굴이 달라진 것을 보았다. 아주 환해지고 밝아진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즉각적으로 임한 것이다.

오늘 좀 비약을 해서 많이 이야기했지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나 자신이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음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영혼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얼굴도 하나님의 은혜가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다. 목사에게 그런 요소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2.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1) 교회 역사 속의 여러 견해들

① 초대 교부들의 견해

∙이레내우스 : 타락함으로 모양은 잃었으나 형상은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에서 모양과 형상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임.

형상 image 첼렘(םלצ), εικων

모양 likeness 데무트(תומד), ‘ομοιωσις

70인역과 벌게이트에서는 두 단어 사이에 접속사를 삽입시켰다. 그래서 이 두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두 단어 사이에 접속사가 없다. 두 단어는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② 중세교회의 입장

모양과 형상을 분리해서 이해. 모양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상실했지만 형상은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 모양과 형상의 두 표현의 차이를 부각시키지 않았다. 이런 견해를 따르지 않았다. 좀 더 다른 논리적인 틀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했다.

은총 grace

초자연적인 은사, 우리에게 부수적으로 주어진 것, 우리에게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 nature

human nature까지 포함. 은혜를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불완전해졌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 안에 죄성을 자제하기가 어려워졌다. 색욕에 치우칠 가능성이 많아졌다.

개혁주의에서 볼 때 은혜는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은혜를 상실함으로 인해서 불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이성, 자유의지가 완전히 부패해지고 무능해진 것이 아니고, 불완전해졌을 뿐이고, 약화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두 단계 신학을 그들은 주장한다. 은혜에 의존하지 않는 자연신학을 그들은 시도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온전한 신학은 은혜(계시)로 가능한 계시신학인 것이다. 구원과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는 오직 계시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이성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점이 우리 개혁주의와 다르다.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적인 틀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으로 보았다. 인간의 이성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한 인간 안에도 아직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성이 흐려졌기 때문에 이성을 활용하는데 게으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둡고 희미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이성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불완전해져 버렸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신학의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③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마틴 루터 : 모양과 형상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를 배격. 자연과 은총을 구분하는 것을 배격. 이성은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했다. 인간은 이성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혀 획득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 간의 자유의지 논쟁이 아주 유명하다.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였고, 루터는 타락 이후의 자유의지란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노예 의지라고 말했다. 죄에 대해서만 자유하다고 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주장처럼 이성이나 자유의지라는 기능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마귀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존 칼빈 : 루터보다 온건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 골 3:10, 엡 4:24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본래 형상은 의로움과 거룩함과 참된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타락한 후에 본래 형상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다고 해도, 남아 있는 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형물 밖에는 없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죄인 안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의 잔해, 잔재물이 남아 있다고 말을 한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칼빈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의 형상, 협의의 형상으로 나누고 있다.

∙협의의 형상 - 의로움과 거룩함과 참된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타락함으로 인해 협의의 형상은 상실했다.

∙광의의 형상 -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다.

④ 현대신학자들의 견해

∙칼 바르트 :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안에 어떤 자질이나 특성이나 본질에서 찾기를 거부하였다. 인간 안에 어떤 본질이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인간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구별성fundamental distinction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과 완전히 다르다. total otherness. 전적인 타자.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을 강조했다. 인간의 어떤 자질이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자유주의의 오류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자질을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의 접촉점이 되지 못한다. 인간 안에 어떤 부분이 하나님과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안테나의 역할을 하는 point of contact가 없다라는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올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절대적인 은혜로 찾아와서 관계를 수립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와 다른 것은 지금까지는 인간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과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던 반면에 바르트는 인간의 자질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power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은 그러한 역량, 자기 초월의 역량을 상실했다고 본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기능을 하는 역량은 인간 안에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권적으로 은혜로 관계를 수립할 때만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은혜의 종교를 강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바로 관계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것이다. 바르트의 견해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지속적인 회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관계를 맺어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위기적인 사건과 관계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신다.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 안에 그분을 닮은 것이 있어서 은혜를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실 뿐이다.

그래서 마치 탄젠트가 원을 접하듯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립된다. 그것을 우리는 전혀 어쩔 수 있는 여지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 일시적인 것이다. 바르트는 성령의 내재를 거부한다. 지속적인 성령의 내재를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찾아오셨다가 떠나신다고 보는 것이다. 찾아오실 때만 하나님을 알 수가 있고, 그분을 섬길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과 끊이지 않는 지속적인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는 교회론, 성화론 등에 있어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어떤 본질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면에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하다.

∙에밀 브루너 : 바르트와 함께 신정통주의 신학자의 두 대표. 코끼리와 고래라는 비유. 바르트의 그늘에 가려 잘 알려지지 못한 신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학자. 그는 바르트와 여러 가지를 공유하면서도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을 극복하려 했다. 실질적인 형상과 형식적인 형상으로 구분. 하나님과 사랑으로 바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상실했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본적인 구조는 인간에게 남아 있다. 비록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은 상실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본 구조는 남아 있다고 본 것이다.

2)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①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콥 : 아르바함 카이퍼의 후계자 헤르만 바빙크. 미국 칼빈 신학교의 초대 교장 루이스 벌콥. 이들은 칼빈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전수된 입장을 따르고 있다. 광의의 형상과 협의의 형상을 나누어서 이해한다.

칼빈은 이런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논리적으로 형상을 구별을 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칼빈은 한 편으로는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고 말하고,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협의의 형상 : 의로움과 거룩함과 참된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의의 형상 : 타락한 인간도 소유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도덕적이고 영적 존재이다.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광의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② 클라스 스킬더, G. C. 베르카워, 유해무 : 이들은 첫 번째 견해(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한다. 반대하는 이유는 그런 논리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은 어떤 것이 광의의 형상이고, 어떤 것이 협의의 형상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혼동을 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보통 창세기 9:6, 약 3:9을 인용해서 타락한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예외적인 경우는 창조 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과거의 사실을 돌아보고, 미래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지 타락한 인간의 현재의 실제적인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과거 본연의 모습을 반추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라본 것이지, 지금 현재 실질적인 형상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인해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③ 코넬리우스 반 틸, 칼 헨리 : 웨스트민스터 조직신학자인 반 틸,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중 유명한 칼 헨리. 칼 헨리가 반 틸을 언급하기를 “변증학에 있어서 홍해를 가른 모세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반틸의 입장은 칼 헨리의 입장과 유사하다.

그는 변증학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신지식과의 관계에 초점을 기울였다. 그는 바빙크의 견해, 즉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하면서도 두 번째의 견해를 따르지도 않는다. 스킬더나 베르카워도 따르지 않는다. 첫 번째 구분을 배격하면서도 스킬더의 견해를 따르지도 않는다. 타락한 인간을 신지식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해하기를 원한다. 롬 1:19-21의 말씀에 근거해서 인간 안에는 보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있음이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인간 안에는 보편적으로 - 불신자 안에도 -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편적으로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했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19-21).

그렇다면 왜 타락한 인간, 불신자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실제적으로 아는 동시에 그 지식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실체적이지만 동시에 억눌려진 지식이라는 것이다. actual and suppressed.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분명한 증거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증거를 접하면서도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 원망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필사적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를 보는 즉시 영적인 눈을 감아버린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부패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문제에 기인한다.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왜곡하고, 부인해 버린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억누르고 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있다면 죄책감을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철저히 자신을 속이고 있다.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지적인 문제는 영적인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성을 통해서 자연인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효과가 없다. 증거가 불충분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더 많은 증거로 그들을 입증시켜도, 원수된 마음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전통적인 변증학은 아주 방어적인데 참된 변증학은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변증을 해야 한다. 마음이 변화되어야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에 치유를 받고, 하나님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서 인식론적, 지적 문제가 해결된다. 선포적인(케리그마적) 변증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스펄전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개종한 사람은 보아도, 버틀러의 변증학 책을 읽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직 못봤다고 말했다.

④ 안토니 후크마 : 칼빈신학교의 루이스 벌콥의 후계자. 나는 안토니 후크마의 마지막 제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칼빈에 갔을 때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성령론에 대해서 논문을 쓴다고 하자 후크마가 자청해서 논문 지도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박수) ?개혁주의 인간론?을 최초로 읽은 사람이 나일 것이다. 나는 출판이 되기 전에 읽었으니까. *^^*

이 책은 너무 잘 쓴 좋은 책이다. 그런데 당시 이 책을 평가할 때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의 공헌에 대해서는 짤막하게 발표를 하고,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 이 발표를 후크마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들었다. 그런데 그날 나중에 보니 불쌍하게 노인네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신랄한 비판 때문인지 몰라도 처량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내가 논문을 썼을 때 가장 나에게 칭찬을 많이 해준 분이 바로 이 분이었다. 너무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었고, 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구조적 형상

∙기능적 형상

타락한 인간도 구조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능적인 형상을 상실했다고 본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반역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안토니 후크마를 비판한 것은 이런 면이다.

“어떻게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면을 구분할 수 있는가? 왜 기능적인 면에 문제가 생겼는데 구조적인 면에는 영향이 없는가? 구조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에게 어떻게 기능적인 문제가 생겼는데 구조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 인간을 전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의 장점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를 이해할 수 있다.

※ 위의 네 가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평가

‘이들이 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들은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자신의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주장해야 한다. unity in diversity. 신학적인 의견의 차이를 가질 수 있다. 유교수님과 나는 여러 면에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지엽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있다. 강의 스타일에 있어서도 다르다. 유교수님은 조직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조직을 강조한다. 유교수님이 비판하는 조직은 “너무 무리하게 조직의 틀 속에 꿰어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나도 그런 의미에서의 조직은 비판한다. 그러나 “질서 있게 우리가 사고한 논리를 정돈한다는 테크닉의 측면에서의 조직”을 지지한다. 너저분하게 널어놓은 개념은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사고와 논리가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야 한다. 목회사역에 있어서 정돈된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가? 설교의 내용도 논리적인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이 있고 감화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직을 강조한다. 질서와 통일성, 체계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 나는 성경 자체가 조직적이다. 나의 연구실에 가면 조직적이다.

유교수님

박교수님

조직 비판

조직 지지

곱슬머리

2:8 가르마

대지가 없는 자유로운 강의

1, 2, 3 체계를 가진 강의

자유로운 사투리

조직적인 서울말

한복, 양복 등 자유로운 복장

일관성 있는 정장 차림

흐트러지고 자유로운 서재

깔끔하게 정리된 서재

일치점 :

① 대표적인 신학자들은 기본적인 동일한 전제, 곧 인간의 전적인 타락성을 강조한다. 광의적 혹은 구조적 의미에서의 형상을 인정하기 원하는 신학자라 할지라도 이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② 이들은 모두 타락한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자연신학의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로마 카톨릭,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것 반대.

차이점 : 이런 근본적인 일치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는 것은,

① 먼저,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단순하게 쉽게 이해하기 곤란할 정도로 복잡해졌다. 죄의 업보다. 죄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것을 공부해야 한다.

② 또한 이들의 관심과 강조점이 다르다. 구조적 형상, 광의적 형상이 남아있다고 주장하기 원하는 이들의 관심은 비인간화 현상이 팽배되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부각시키는데 있다. 관심이 다르다. 미국, 영국, 독일의 신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기 원한다. 보수주의 학자들도. 벌코프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구조적 형상이나 광의의 형상을 원하는 이들의 주된 관심은 비인간화가 팽배한 사회에서 인간성에 대한 강조에 대한 관심이 있다. 독일 등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타락한 인간도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기를 원하고 있는 신학적 추세이다. 그러므로 베르카워나 스킬더의 견해는 극히 소수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3) 결론적 고찰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은 결론적으로 무엇인가? 가장 원만한 견해는... 이런 견해들의 장단점을 보완해서...

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 증거

1) 간헐적으로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살인을 금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약 3:9. 하나님의 형상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몇 구절을 제외하고 성경은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예외적 구절은 성경 전체의 빛 속에서 설명하고 보충해야 한다. 실제적이고 내용적인 면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 그렇기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는 첫째 그들의 창조의 본연의 모습을 반추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지금은 타락해서도 원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지금 타락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미래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현재의 실제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 창조의 모습에 근거해서 미래 회복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2)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예외적인 구절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대부분 첫 사람과 둘 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스도인에 제한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둘째 사람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골 1:25 롬 8:29. 이런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서 우리는 결론을 맺자.

② 결론(매우 중요함) ★★★

∙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 그러나 형식적인 면에서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는가?

i) 근거 : 예외적인 성경구절에 근거해서... 창조의 본연의 모습, 미래의 회복의 가능성에 근거.

ii) 어떤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는가? : ① 인간의 전적 타락성이 조금이라도 약화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② 하나님의 형상이 신지식(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iii) 이런 견해의 장점 : 비인간화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새롭게 고취시킬 수 있는 장점. 인간이 본래 어떤 모습에서부터 타락했으며,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해준다.



Ⅳ.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내용적 이해

1. 하나님의 형상의 이해의 기본 맥락

1) 구속사의 맥락 속에서(후크마가 지적한 것처럼)

창조/타락/구속/종말

The Original Image(본래적인 형상) - 첫 사람이 가졌던 순결한 상태, 순전한 상태(stage of integrity), 완전을 향해서 발전 도상에 있는 형상이다.

The perverted Image(변질된 형상) - 타락함으로 형상 상실. 그러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져 버렸다.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The renewed Image(새롭게 된 형상) - 날로 성화의 과정을 겪는 형상

The Perfected Image(완전해진 형상) -

2) 삼중적인 관계성 속에서(in the three-fold relationships) - 후크마 지적

하나님, 이웃, 자연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어떤 이는 자기(self)와의 관계를 첨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자기와의 관계는 자기를 주체와 객체로 이원화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질 위험에 있기 때문에 다루지 않는 것이 좋다.

3) 기독론적, 성령론적 이해

예수,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 - 고후 4:4(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히 1:3(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χαρακτηρ της υποστασεως정확한 닮은꼴>이라), 골 1:5(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안에 새사람, 성령의 사람 - 하나님의 형상 - 골 3:10, 엡 4:24, 롬 8:29, 빌 3:21, 요일 3:2, 고전 15:49, 고후 3:18

4) 본질적 인간+관계적 인간, 구조적 인간+기능적 인간 - 전인적 관점에서

전통적으로는 본질론적으로 보았다. 이성, 영성, 도덕성 등으로. 이런 전통적 이해에 대응해서 관계적인 측면에서 역동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이해를 시도한 사람이 Barth. 우리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형상의 내용을 이해하기 원한다.


2.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인 내용

지금부터는 좀 더 실제적인 면을 다루려고 한다. 앞으로의 설교 사역에 밑거름이 되는 자료가 될 것이다. 인간론을 구원론과 기독론과 성령론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고찰하고,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A. 하나님과의 관계

1) God-centered Being(하나님 중심적인 존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중심적인 존재이다. 세속주의 인간론의 특색을 한 마디로 homo Absconditus라고 압축해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대변하는 말이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해서 우주 안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 자신의 의미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려고 한다. 우주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인간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인간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인간 자신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니체의 예를 들어보자. 그의 인간 이해가 그러하다. “신은 죽었다.” 기존의 의미는 모두 무너져 버렸다고 주장한다. 무의 세계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의미를 초월한 초인의 윤리를 세워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의 주장을 더 발전시켰다. “인간의 존재는 아무 의미 없는 세계 속에 던져진 버림받은 존재이다. 자유하기 위해 버림받았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인 의미에 메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니고,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실존의 의미를 창출해 나가야 한다. 전통적으로는 본질이 실존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고 말한다. 실존이 본질을 만들어 간다고 말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의미를 부여받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그것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모든 의미를 부인하고 용감한 실존, 새롭게 무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실존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고 세워 나가는 용감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숙한 인간이 될 때 인류에게 참 희망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무신론도 발전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의 무신론은 굉장히 순진하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극구 부인하려고 한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도다.” 그러나 무신론이 발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현대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그것은 입증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과거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입증하고 증명한다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는 토대 위에서 어떤 의미를 세워 나가야 하는가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무신론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하는 시도 속에는 그래도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는 반대급부에 대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말의 의식이 있다. 그러나 현대의 극단적인 무신론은 일말의 가능성까지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다. homo absconditus의 관점과 달리 성경은 인간이 분명히 본질적인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인 증거는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지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제1문답에 잘 요약되어 있는 것처럼 개혁교회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첫 문답을 보았을 때 받는 느낌이 어떠했는가? 기억이 나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얼마나 장엄한가?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느꼈는가? 느낀 것 없는가? 나는 이 문답을 보았을 때 신경질이 났다. 우리는 힘든 인생 만들어 놓고 하나님만 영광을 받겠다니...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신 것은 참된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찬란한 영광이 그 안에 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인 요소인 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하나님이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속성이 있다. 궁극적으로 성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만, 성부 하나님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고, 성령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주 중요한 속성을 닮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엣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고, 영화의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칭의를 받을 때 영화의 은혜도 받았다. 칭의-성화-영화. 이미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물론 아직 완전한 영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미와 아직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영광을 위한 존재로 만드셨다. destined for glory.

인간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서 참된 영광의 길을 버리고, 죄의 길을 따라 가고 있다. 그것은 마귀의 영광을 따라가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때 그것은 무한한 수치이다. 세상 속에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고,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추해 보이는가?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마귀의 속성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자리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 욕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fundamental sin이다. 모든 죄는 이 근본적인 죄악에서부터 비롯된다. 모든 죄악의 저변에는 이 죄악의 독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영광의 저변에는 이 죄악성이 깔려 있다. 인간도 선행을 할 수 있다.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선하지 못한 이유는 선한 행위 저변에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죄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로운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영광을 돌린다. 인간의 모든 의로움과 행위 저변에 독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욕망, 막스가 말한 물질에의 욕망의 근저에는 “자신이 강해지고 성공하고 부해지기 원하는 것 저변에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죄성이 있다.” 이런 인간의 죄악이 특별히 종교인들 안에서 가장 무섭고 교활한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죄악이 이런 것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유대인의 죄악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을 사랑한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목회에 성공하기 원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이 자기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추구할 때 큰 위험이 생겨난다. 목회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유명세를 타게 될 때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한 동기에서 사역하고 있지 않은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보기가 아주 어렵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 영광을 구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인지 아주 보기 어렵다.

내가 전도사일 때 한 번 설교를 아주 잘했는지 권사님, 집사님들이 오셔서 “담임 목사님보다 설교 잘한다. 50년 생애 최고의 설교를 들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 때 나는 일주일 동안 너무 기분이 좋아서 살았다. 완전히 뿅 갔다. 그런데 그 다음에 설교를 다시 하는 데 완전히 죽을 쒔다. 그리고 나서 나 자신이 설교를 하고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나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고 한 측면이 있음을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때로는 실패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문제는 제도적인 개혁보다는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어야 한다. 세속적인 욕망이 변화되어야 한다. 심령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가능하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심령을 개혁하실 수 있다. 새롭게 하실 수 있다. 세속화된 우리의 욕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씻어주셔야 한다. 헛된 욕망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기 안의 헛된 욕망과 처절하게 싸운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고 하는 헛된 부패성과 처절하게 싸워서 그것을 극복했을 때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사용해 주신다.

이중표 목사의 책을 보니 “나는 신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 못했다. 하지만 신학을 성령님께 직접 배웠는데 그것이 바로 별세의 신학이다”라고 말하더라. 신학 공부를 잘 못했지만 그런 훈련을 쌓게 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해 주시는 것 같다. 여러분은 이런 훈련을 하고 있는가? 나는 미국 신학교에서 학위도 몇 개 땄지만 가장 힘든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우리 사역자들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최대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이름을 내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이 이렇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가? 총회장, 노회장 자리를 탐내지 말아야 한다. 나한테 배운 사람 중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내가 가서 아구통을 돌릴 것이다. 너무 교수되려고 그러지도 말아라. 유학 가는 것은 좋지만,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지만 유학 다 갔다 온다고 교수되는 것도 아니고, 박사학위 따와야 실업자만 늘어날 형편이다. 교수 들어가려면 누가 죽어서 나가야 하는데... ^_^ 이렇게 멀쩡하고 쌩쌩한데 언제 자리 나겠는가? 어떤 사람은 허영심에 빠져서 목사되고 박사되고 교수되겠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영광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신다. 이름 없이 복음을 위해서 고난받으십시오. 목회자가 가장 영광 받는 자리이다. 제 아내가 얼마 전에 이런 기도를 하더라. 오랫동안 갈등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질그릇으로 질그릇 되게 해주고,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더라. 깜짝 놀랐다. 완전 칼 바르트다. 칼 바르트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조직적인 메시지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비조직계에서 조직이 어떻게 나왔는가 싶었다. 은혜가 주어지니까 아주 조직적이고 은혜스러운 메시지가 나오더라. ^^;;

이성주의 인간 이해에 대비해서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이나믹이라고 하였는가? 바로 욕망이라고 하였다. 섹스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사실적으로 욕망은 인간의 많은 부분을 컨트롤한다. 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삶의 전체를 컨트롤한다. 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설교단까지 컨트롤한다. 설교를 작성할 때 그 욕망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까? 어떻게 하면 반짝반짝하는 설교를 할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역을 하면 교인들을 나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하게 된다.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보게 된다. 동역자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동역자가 잘 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동역자가 잘하는 것을 칭찬해 줄 수 없다. 거기에서부터 시기와 분쟁이 생겨난다. 교회의 문제점이 다 여기에서 생겨난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나에게 가장 큰 원수는 나 자신이다. 어거스틴은 이 악한 자 나로부터 나를 구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칼빈도 그가 강조한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self-denial은 한 짝을 이루고 있다. 둘은 분리할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self-denial 위에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친다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박윤선 목사님이 막된 말을 안 하시는 분이신데, 설교 중에 욕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속에서 욕을 해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삶 속에서 거짓된 나 자신에게 ‘개새끼’라고 욕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 설교에 참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개혁주의 전통에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말하자면 self-denial이다. 개혁주의 후예들은 선진들의 강조점을 잘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이 self-denial이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부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독교의 self-denial과 쇼펜하우어의 self-denial이 다른 점은 기독교의, 칼빈의 self-denial은 그렇게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독교적인 self-denial은 self-negation이 아니다. 오히려 self-denial을 통해서 참 자기가 완성된다. self-extention이다. 자기가 부인되면 자기 뜻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평행이 되면서 자기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확장되고, 충만하게 된다. 이것은 쇼펜하우어의 self-denial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욕망은 고행과 금욕과 수양을 통해서 불교식의 자기 해탈의 방법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욕망을 극복하는 self-denial의 방법은 고행과 금욕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도무지 할 수 없는 그것은 예수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심령’을 변화시키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해야 우리 마음 속에 깊숙히 도사리고 있는 헛된 욕망을 찔러 쪼개어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욕망, 거룩한 욕망을 우리 안에 부활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self-denial함으로 말미암아 이기적인 욕망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진공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가 너무 자기 부인을 한다고 비판하였다. 욕망이 있어야 자기 발전을 하는데, 자기 발전의 중요한 요소를 말살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이기적인 욕망이 있을 때에는 열심을 내다가 이런 욕망이 없어지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인간은 무엇이든 욕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부인해 버리니까 삶의 추진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헛된 욕망을 대체하는 더 큰 욕망에 사로잡혀야 한다. self-denial 이후에 우리는 더 적극적인 욕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은혜로 나쁜 욕망을 죽여버리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룩한 욕망을 충만케 해야 한다. 새로운 욕망을 충만하게 해야 한다. 거룩함에 대한 욕망,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욕망, 사랑에 대한 욕망이 있어야 한다.

세속 사람들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 큰 욕망에 사로잡혀야 한다. 육신의 욕망이 성령의 소욕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세속 사람들에게 있어서 권력과 물질에 대한 욕망이 인간 본성의 다이나믹이라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욕망이 다이나믹이 되어야 한다. 이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며, 기도를 열심히 하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장된 은혜이다.

2) God-dependant Being(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

인간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인 증거 중 하나는 인간은 창조된 후에도 계속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Deism의 주장과는 반대이다. 시계를 만든 후 시계공이 혼자 돌아가도록 내버려둔 것처럼 하나님도 그랬다는 것. 그러나 인간은 창조 후에는 스스로 자기 존재를 지탱할 능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을 힘입어서 그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실존으로 지음을 받았다. 온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은 이런 의존적인 삶을 사셨다. 참된 인간의 삶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였다. 오직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사역을 감당하셨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의존.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흐(Schleiermacher)는 특별히 예수님 안에 종교적인 경험과 의식을 분석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독특성이 무엇인지 규명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예수님에게는 특별한 종교적 경험과 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절대적 의존감(sense of absolute/total dependence)이었다. 틸리히는 이를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사신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셨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산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이셨다. 다른 사람보다 탁월해서 신적 존재로 인정받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그 의식이 독특하게 만들었다. 그는 “죄란 이런 절대적 의존감이 약화된 것을 의미한다.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 볼 수 있는 온전한 의존감이 우리 안에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일면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다. 배울 것은 있다. 바르트에게도 배울 것이 많다.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싸잡아서 이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학적으로 발전되고 성숙되면서 좀 더 원만하고 정당한 신학적 비판을 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흐의 지적처럼, 죄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의식이 약화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그 안에 역사했던 그 성령이 우리 안에도 역사하심으로, 우리도 절대적 의존감을 갖고 살아간다. 이것을 구원이라고도 하겠지. 그래서 의존하는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믿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은혜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 것은, 어린아이처럼 의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에서 계속 터득해야 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나는 nothing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하다. 자신의 약함을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한다. 은혜로 강해진다. 경건의 기본원리는 약해지면서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약함이 아니라, 약함을 알아야할 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우리 자신 안에는 자신을 인정하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있다. 자신의 노력, 선함, 의를 의지하는 영적, 종교적 교만이 도사리고 있어서 우리의 구원을 굉장히 어렵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원을 굉장히 쉽게 받게 해 주셨는데, 교만 때문에 가장 어려운 것으로 우리가 만들어버렸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굉장히 편하고 쉽게 만드셨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으로 돌아감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나를 막다른 길,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시는 것은, 바로 그 곳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의존감을 갖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훈련되었다. 우리 역시 광야에서 훈련받고 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내가 거의 좌절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때부터 역사하신다. 이런 절대적 의존감이 없으니까 코피 터지는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비판하기를, “기독교는 인간을 너무 하나님을 의존하게 해서 나약하게 만든다. 인간 성숙과 완성과 발전에 저해되는 종교다”고 했다. 남성적인 욕망과 힘을 모두 거세해버린 거세된 윤리, 나약한 윤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성숙하면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다른 인간인 피조물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품을 떠나서 자기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때부터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숙하면서 인간으로부터는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께는 의존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삶이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 부모 품안에 어린아이가 시름없이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의 나래 안에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을 의존함으로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숙과 완성에 이를 수 있다. 인간 성숙에 필요한 자유의 능력, 원동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심으로, 우리가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게 하지만,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 나약하고 타율적인 인간으로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다하는 강하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하나님을 닮은, 완성된, 종말론적인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존재로 성숙하게 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속 사상을 우리가 반박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떠나서는 참된 인간 성숙과 완성이 있을 수 없다. 니체는 독립적으로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었지만, 12년 동안 정신병자가 되어서 살다가 폐인이 되어 죽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 안식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Sabbath라는 개념은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하다. 원래 인간의 삶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창조의 바탕에서 출발하는 삶이다. 그 축제에 참여하는 삶. 다 준비해 놓으신 창조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다. 죄의 결과는 안식을 상실한 것이다. 구원은 안식의 회복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히 3:11, 4:4-10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이신 구원의 역사는 예수 안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그의 백성을 그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 예표이다. 구약에서도 이미 안식일의 개념이 점차 창조에 근거한 안식일에서 구원에 근거한 개념으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출 20:11에서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도록 했지만, 신 5:15에서는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기념하여 지키도록 말씀하셨다. 또한 구원은 재창조다. 구약의 안식일은 첫 창조가 끝난 다음날에 시작되었다. 둘째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신약의 안식은 예수의 구속 사역, 즉 재창조가 부활, 즉 주일 새벽에 끝나기 때문에 주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안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다시 안식을 누리는 삶이다. 우리의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원래의 삶이 창조의 바탕에서 새워졌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루신 재창조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삶이다.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서 세워졌다. accomplished work 위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구원 뿐만 아니라, 성령 안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삶이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안식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축복이지만, 성령은 이것을 현재화해서 우리가 이것을 지금 누리게 하신다. 영적 은혜, 종말적 은혜, 하늘의 영역에 속한 은혜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열린 하늘’ 밑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 밖에 존재하는 이방인들처럼 생계를 위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 위에는 하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 안에 우리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전달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원래 하나님 안에 안식하는 삶인데, 죄로 상실했다. 예수 안에서 이를 회복했으니 주일을 성수하면서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속, 재창조로 말미암아 안식의 축복이 다시 우리에게 회복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일의 부요한 의미를 인식하고 전파해야 한다. 율법적으로 인식하지 말고, 인간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복음의 핵심이 들어있다. 안식의 축복,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이다. 주일의 개념을 강단에서 온전히 가르치고 실제적으로 누리게 해 주어야 한다.

교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주일의 예배에서 은혜를 받으면 한 주간의 삶이 힘차다고 한다. 그것은 성경적인 말

이다. 우리에게는 첫 날, 주일이 중요하다. 안식의 은혜로 시작해야 한다. 삶의 성패가 주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안식의 은혜로 충만해서 주간을 시작하면 복이 흘러내린다. 따라서 강단의 말씀 전파자의 삶이 매우 중요하다. 주일 예배를 살려야 한다. 우리는 주일날 첫 날부터 주님 안에서 놀고, 또 계속 노는 것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안식의 축복이 이미 주어졌다. 사단의 결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한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 때문에 세상과 달리, 우리는 안식하며 산다. 이런 것이 첫 날, 주일을 통해 시작한다. 부활의 주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주님께 완전히 사로잡히게 해서 살게 해 주어야할 설교자들의 책임을 생각하라. 우리의 삶이 곤고한 것은 정욕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자유하면 편해진다. 하나님께서 항상 도와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 밤잠을 못 자면서 코피 터지며 일해도 IMF 되니 무너져. 김우중처럼 피곤한 삶을 살며 ‘할 일은 많다’고 했는데, 이젠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기독교 문화는 인간의 삶에 안식이 얼마나 반영되었나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가장 안식의 개념과 문화가 정착하지 못한 곳이 한국이다. ‘빨리 빨리’ 교육을 보라. 고등학교까지는 아이들이 마음껏 놀면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경제제일주의, 성공제일주의도 안식이 반영되지 않은 사회형편. 교회도 사회를 따라가고 있다. 성공지향주의. 신학교 교육도 너무 안식이 없다. 교회일과 공부에 쫓기는 안식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교회가 바로 서야 한다. 교회가 할 일이 많다.

그러나 already not yet에서 살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세상 제도와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우리.......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불의한 환경 탓만 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이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의 은혜가 함께 하면 안식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삶을 신학 훈련하면서 practice해야 한다.

3) Being with responsibility and freedom(책임과 자율을 가진 존재)

Being free to be what we ought to be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으로 될 수 있는 자유, 원하시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

Being free to do what we ought to do

(마땅히 행해야 할 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내적 자유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마음으로 나도 원하고 사랑한다. 때문에 그 책임을 우리가 행하는 것은 전혀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고, 참된 기쁨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는 것은 자유의 은혜와 능력을 만끽하는 길이다. 어거스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대로 행하라.”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치고 방종하라는 말로 오해하지 말라. 우리에게 주어진 내적 자유를 강조하는 말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사랑한다. 내 맘대로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참된 경건이란 이런 내적 자유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연스럽다. 은혜는 우리를 자유케 함으로 자연스럽게 만든다. 참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저 자연스럽게 행하는데,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다. 우리의 이런 내적 자유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보이는 경건의 모습은 뭔가 어색하고 경직되고 자유가 없다. 목사로 설 때는 우리의 표정과 목소리를 변화시켜야한다는 인위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자유하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역사하면 설교할 때도 제스처 등등을 연습할 필요가 없다.

칸트, “참된 선은 어떤 의무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선은 나의 의무와 내가 원하는 것이 일치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바로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다. 자원해서 선을 구할 때 최고의 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 김용옥도 비슷한 말(효과적 의미전달), “참된 선이란, 군자란 자기가 꼴리는 대로 행하는 데 항상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내적 자유와 의지적으로 실천할 능력이 주어졌다. 책임과 자유의 아름다운 하모니. 죄악으로 그 하모니가 깨졌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유를 상실한 것. 그러나 여전히 책임은 부과되고 있다. 타락 후에 이 책임은 율법이라는 개념으로 부과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에 있어서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과의 논쟁에서 “모든 인간에게 율법이 요구되는 것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 현재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그런 의견. 칸트도 “인간에게 마땅히 해야할 도덕의식이 있다는 것도 우리 안에 자유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

러나 그게 아니고, 죄로 말미암아 영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죄인 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외적 율례를 주셔서 우리의 부패한 모습을 보게 하시기 위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율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참된 모습을 밝혀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인간의 모습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율법, 책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내적 자유를 상실한 인간에게는 곤혹스러운 것이다. 자유의 능력을 만끽하게 하는 율법이 아니고, 억압, 정죄, 위협하는 율법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내적 자유를 상실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원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졌고, 하나님의 뜻을 극도로 싫어하는 육신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극도로 증오하고 싫어하는 육신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오히려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는 인간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다.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다. 더 이상 지킬 수 없다.

구원이라는 것은 이 책임과 자유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책임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심령의 자유가 우리 안에 회복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변형시킨다. ‘너희가 심령으로 변화를 받아(transformed)', 자원하는 것을 의지적으로 실천할 외적인 능력 willingness를 주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법이 내 마음에 있다. 외부적인 율례, 법이 없어도 산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내적 자유가 있기 때문에 새롭게 된 심령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살면, 율법에서 자유한 삶을 산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율법을 따라 사는 것과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참된 의미를 구현시키는 삶이다. 롬 8:4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율법이 요구하는 참된 의미는 성령을 따라 살 때 온전히 이루어진다. 자유와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할 때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적 관점에서 여러 가지를 관통하는 시각을 갖게 된다.

신자들에게 아직도 율법의 유효성이 있다. 신자들에게는 내적 자유의 은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부패성이 남아 있기도 하다. 항상 자동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이 솟구치는 것이 아니다. 육신 가운데 살 때는 율법이 제 역할을 한다. 책망, 정죄한다. 물론 성령이 율법을 사용하시지만....

그런데 신앙생활의 문제는 항상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나뉜다. 두 마음을 갖는다. 참회록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기도는 “제게 성결한 삶을 주십시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육신을 따르는 마음. 키에르케고르, “Purity of heart is to will one thing.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경건이란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인간이 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경험이다. 피조물에 대해서도. ‘미치도록 사랑해서 결혼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 만든 신화이다. 이런 신화를 믿고 있으면 노처녀, 노총각 된다. 잠시 눈에 뭐가 씌어서 결혼하는 것이다. 부패한 우리는 온 맘을 다해 사랑하는 게 힘든데, 예수를 믿으면 그것을 요구받는다. 그게 문제. 굉장히 무딘 사람들... 잘 미치지 못하는데, 예수를 믿으면 ‘온 맘을 다해 미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완전히 역사하셔야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사랑, 위대하심에 매료되고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그분께 몰입되어서 사랑하게 하신다.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하는 참인간으로 만드신다. 우리는 너무 비정상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완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광신자로 여기는 세상.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저주스런 일인가를 모른다.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이요, 위대하신 분에게 사랑이 끌리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최대의 저주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 이미 저주를 받고 있다는 진리를 천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역자들은 교인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음 주에 워치만 니의 ‘자아가 죽을 때’를 읽고 와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10개조로 나누어서 준비해 주기 바란다. 다음 질문을 생각하면서 읽고 준비해 와라.

내가 이 책을 읽고 받은 은혜와 도전은 무엇인가?

워치만 니의 가르침의 논리적 모순은 무엇인가?

워치만 니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 포인트를 좀 더 성경적으로 바꾸어서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B. 이웃과의 관계

1) Being for others(타자를 위한 존재)

참된 인간 예수님이 이웃을 위한 존재로 사셨다. 예수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과 같은 삶의 패턴을 따라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인간도 섬기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은사와 달란트는 섬기는 수단으로 주어졌다. 더 많은 책임이 주어졌음을 알고 겸손해져야 한다.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도구로 주어졌다. 칼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할 때 그 관계 속에서 참 자기를 발견한다.” 이런 말에 첨가를 한다면, “이웃과 바른 관계를 회복할 때(참 사랑할 때) 참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나의 존재의 의미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 보람, 삶의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요 1:11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서 참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죄의 결과는 이웃을 이용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사르트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관계밖에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을 it으로 대하던가, 다른 사람이 나를 it으로 보든가.” C. S. 루이스, “나는 다른 모든 self를 내 안으로 모두 삼키려는 지옥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 쇼펜하우어, “인간은 자기의 행복과 안녕과 유익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사람의 것을 파괴할 정도로 egoist다.”

사랑의 기본 원리는 I-down 인격적 관계. 교인들을 내가 목숨 바쳐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이용할 가치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목회적 성공을 인정받는 욕망의 수단 수단으로 교인들 대하기...

타락의 결과 중 하나는, 섬기는 삶을 살면서도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목사, 택시 운전사, 시장에서 장사... 섬기는 일을 하는데도 불평하면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 보람이 있는 것이다. ‘저 놈은 1000원짜리, 2000원짜리’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원리로 살면 세상에서도 돈 잘 번다. 정말 손님을 섬기는 대상으로 생각하면 정성이 들어가고, 사람에게 닿아서 사람이 몰리게 된다. 부수적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최종 목적으로 두고 사는 미친 세상... 섬기는 삶을 돈, 권력, 섹스를 위해 살고 있다. 프로이드, 막스 등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모습은 인간이 자기의 부패한 욕망을 좇아 살고 있으니 삶의 가치관이 전도되어 있는 것이다. 목사도 마찬가지로 세속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섬기는 자체에 보람을 느껴야 한다. 대가에 마음이 가 있으면 안 된다. 열매가 없다고 안절부절 하는 목사는 큰 문제가 있는 것.

2) Being in community(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 communal being이다. 창 1:26-27에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부르고 계신다. 이것을 삼위일체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안의 복수성을 의미함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 안에는 이런 공동체적 특성이 있다는 것. superego가 아니고 세 인격의 공동체 속에 사랑의 코이노니아로 하나가 되신 분이다. 하나님처럼 인간을 공동체로 지으셨다. 사람은 ‘인류’로 번역할 수도 있다. 첫 사람 아담을 인류공동체를 이룰 사람으로 지으셨다고 볼 수 있다. 온전한 공동체를 지향할 머리로 지었다.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첫 사람의 인류공동체에 속한 분으로 오셔서 첫 사람의 모든 죄를 대신하심으로써 둘째 사람(마지막 사람)의 인류공동체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 속한 둘째 공동체에 속한다.

죄는 공동체 파괴다 죄의 집합적 차원이해. 구원은 참된 공동체의 회복을 말한다. 교회는 천국공동체, 성령의 공동체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참된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형상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의 연합은 몸된 교회의 연합을 말한다. 교회 안의 삶을 말한다. 리덜보스(Riderbos)는 “바울에게서 성령 안의 삶이란 교회 안의 삶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했다. 성화는 오직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가 우리가 성화 되는 다이나믹한 변화가 일어나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인들의 변화가 없는 것은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없는 경직된 공동체는 개혁이 필요하다. 교회는 크게 두 가지의 세속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collectivism(헤겔, 우주적인 정신이 모든 것을 통합한다)과 individualism(개인의 존엄성과 자율 강조). 미국 대학생의 필독서, Habit of hearts에서 individualism현상 설명. My way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가지 극단적 경향이 교회 안에도 짙게 나타난다. 거대한 기계적 집단화되고 있다. 참된 인격적 교제가 없는, 거대한 집단(collectivism)이 나타나고 있다.

식사 후 정리 : 구원은 이런 공동체적인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온전한 공동체적인 삶이 구체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천국공동체의 삶이 교회 안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이 땅위에서의 존재의미이다. 목회의 궁극적 goal도 그러하다. 예수 안의 삶이란, 교회 안의 삶, 성령 안의 삶을 말한다.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는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만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존재로서 변화되어 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교회 안의 삶이다. 교회가 이런 다이나믹한 성화가 이루어지고 변화가 가능한 공동체의 모습을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뿔뿔이 흩어지는 개인주의가 교회에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세속주의 경향과는 달리, 개인적인 것과 공동체적인 것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공동체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온전히 함양시킬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성령의 사역의 독특성은 개인적 면이 있는 동시에 집합적인 면이 있다. 성령 사역의 양면성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오순절에도 공동체와 개인이 함께 연결되어 있었고 동시적이었다. 개인의 구원과 성화는 항상 교회론적인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론에서 성화를 다루지 못한 약점이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교의학의 순서는 ‘기독론-교회론-구원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신교는 ‘기독론-구원론-교회론’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약화시켰다. 개인의 신앙이 1차적이고, 개인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차원에서의 교회를 생각한다. 그러나 성화는 오직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성경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기독론 다음에 교회론을 위치시키고, 그 문맥 안에서 개인의 구원과 성화를 같이 다루어야 한다. 성령은 개인적으로 역사하는 동시에 집합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론적 맥락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 개신교의 영성, 경건의 심각한 문제는 egoistic piety였다. 혼자는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기도는 많이 하는데, 개인의 거룩성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 되는 역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개인주의적인 경건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는 가장 심각한 죄로 작용할 수 있다. 가장 근본적인 죄는 공동체의 파괴다. 경건의 구체적인 열매는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고 타자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 경건이다. 성경에서는 성화에 대한 모든 권면이 복수형으로 쓰여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경건은 개인적인 경건이 아니고, 공동체적 경건(communal piety)이다. 그리고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덕목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덕목이다. 다른 사람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앙에 열심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괴로울 때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약간 모자란 듯한 요소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찾고 주위에 몰린다. 너무 완벽하면 교인들이 접근하지 못한다. 말도 약간 못하는 게 좋다. 조금 멍청해지려고 노력하자. 목회하면서 가장 예쁜 교인은 설교에 죽을 쓰고 있을 때 고개를 끄덕여 주는 교인. 무언의 응원을 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은 상당히 공동체적인 경건을 이룬 사람이다.

에밀 브루너, “참된 성화는 isolation에서 벗어날 때 이루어진다” 목사들이 자칫하면 성화가 가장 안 될 수 있다. 항상 교인들과 고립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역자끼리 깊은 인격적인 교제가 정말 필요하다. 그 속에서 진정한 성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동역자가 어떻게 보면 사랑하지 힘들다. 서로 비교, 경쟁이 된다. 갈등의 상황 속에서 참된 경건이 배양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진정으로 동역자의 잘됨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가능하다.

3) Partnership between men and woman(남녀의 파트너십) - 창 5:2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바울 서신 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니라.” 이것은 문맥에서 파악해야 한다. 남자의 머리됨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다른 곳에서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인정,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데에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엡 4:24, 골 4:10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말한다. 여자도 성령의 은사에 참여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후크마,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합쳐져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 바르트는 교의학 책에서 여자와 남자와 관계를 120쪽이나 썼다. 바르트는 “우리는 모두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존재한다. 제3의 성은 없다. 이런 성적 특성을 초월한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남성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여성이라는 전혀 다른 특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본질상 같으면서도 신비롭게 다른 존재로서 공동으로 협력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이런 아름다운 동반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난다. 죄는 이런 조화를 깨뜨린 것이다.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결혼 제도 안에서 이런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엡 5:18 성령 충만을 말하고, 그 안에서 남녀의 아름다운 관계 회복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남녀의 관계가 천국에서도 계속 될 것이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없지만, 구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개성이 더욱 풍성해진다. 천국가면 서로 알아볼 것이다. lady first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곳이 천국이다! ^^* 남자와 여자의 합일체로서 계속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할 것이다. 결혼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후크마,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때는 남녀사이에 가장 부요하고 충만하고 아름다운 의미에서의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땅에서 이성간의 교제는 결혼에 국한되어 있다. 결혼 후에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내 아내만 사랑하라고 했다고 해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여성을 자매로서 사랑해야 한다. 순수하게, 거룩한 가운데 존경하고 기도해 주는 보편적인 사랑을 지속해야 한다. 결혼 후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리의 부패성 때문에 힘들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능할 것이다. 깊은 교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함께 기다리자. 온전한 교제를. 결혼 후에는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조심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순수한 관계에서 이상한 관계로 발전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현대 상황에서 긴급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리차드 마우(R. Mouw) - 여태까지의 인류의 문제는 인종간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싸움이었는데, 20세기 후반에는 색다른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남녀간의 갈등과 분쟁이다. 여러 분야에서 심각하다. 교계, 신학계, 정치계... 남녀의 문제, 여성안수 문제 때문에 CRC도 분열되었다. 이런 현상의 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여권운동이다. feminism. 신학계에는 여성신학이 새롭게 등장. 여태까지는 이상하게 역사에서 여성신학자, 철학자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조금 이성적으로는 열등한 존재라는 편견이 없었다. 철학적, 조직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에 여성신학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분들이 지적하는 것은, 전통신학이 간접적으로 이 사회에 남성우월주의를 조장했다고 비판. 가부장적인 전통 속에서 전통신학이 남성위주로 발전했는데,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칭호, 이미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Father, Son’을 싫어한다. 그냥 ‘God, Jesus'라고 하자. 좀더 급진적으로는 하나님을 Mother라고 하자. 더 급진적으로는 삼위일체에서 남성적인 것은 빼고, 중성적인 Spirit만 남겨. 여권 운동하는 사람 중 저돌적인 사람은 미국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그들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성의 특성은 정복하고 군림하고 분쟁하고 싸우지만, 여성의 특성은 양보, 보살펴주는 어머니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지배하면 이 사회는 온화한 분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안에 그런 것이 있지만, 여성이 더 착하지는 않다. 여성은 남성들 뒤에서 남성을 움직이는 테크닉을 발전시켜 남자를 움직여왔다. 여성은 굉장히 강성이다. 남자가 신체가 건장하게 생겼기 망정이지, 반대였다면 여성의 폭력의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

한가지 생각할 점은, 여성의 혁명,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남성이 이해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전통적인 남성우월주의와 이에 대한 여성주의 두 극단에 대응해서 ‘남자와 여자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해야할 시점에 왔다. 그래야 분쟁의 문제를 해결한다. 본질적으로 동등, 평등하다. 예수님이 남성으로 오신 것은 성에 문제를 두신 것이 아니다. 로마 당시에는 여자를 남성의 부속물로 여겼는데, 일부일처제를 강조하시고.... 이런 것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성경은 다만 기능적, 역할적인 면에서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세상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복종은 열등이나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자도 성부께 복종한다. 복종은 굴욕적이 아니라, 영광스런 복종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서로 복종해야 한다.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명령

은 남편이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바탕 위에서 주신 명령이다. 남편에게 먼저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여성을 먼저 주님처럼 아주 자신을 버릴 정도로 여성을 사랑해서, 사랑으로 매료시켜서 자원해서 여성이 순종하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래 참음의 사랑이 필요하다. 많이 져주어야 한다. 주도권 쟁탈하느라고 싸움하면 안 된다. ‘여자에게 잘 해주면 기어오른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주님이 우리를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여성들의 교회에서의 역할과 위치. 우리의 전통에서는 여성에게 안수를 줄 수 없지만,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의 장을 확대시켜야 한다. 활발하게 전담사역을 할 수 있도록.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해 왔는가? 영광은 남자들이 다 받고... 여성들은 지금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합시다. 하늘에서 큰 상급이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그런 타이틀 때문에 개털모자를 쓸 가능성이 많다.

C. 자연과의 관계

인간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통치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통치권 특권과 함께 피조물을 잘 보살필 의무가 주어졌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잘 보살피고 관리할 의무가 있다. 이 통치권을 권위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행사해서는 안 되는데, 지금까지 개인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 마구 손상시키고 남용해서 자연을 오염시켜왔다. 이런 결과로 현대 사회는 심각한 생태학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예로, 남극 대기권 상공에 오존층 구멍, 기후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고 생태계에 치명적인 상태. 매년 수천만 에이커의 땅이 사막으로 변함. 해양과 대기의 오염이 한계를 벗어났다. 공해, 폐수, 갖가지 오염 물질, 기름유출 등으로 해양생태계에 심각한 문제 야기. 많은 동식물이 떼죽음. 생태학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자멸의 위험을 해결하기 힘들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그대로 나눠도 세상은 망할 것이라고 한다. 선진국 돈 들여 노력. 학계, 신학계의 최대의 관심은 이런 생태학적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패러다임 고안이다. 그래서 창조중심적인 신학, 생태학적 신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런 신학적 연구를 시도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전통 기독교 신학이 너무 인간중심적인 신학으로 발달되어 왔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만. 인간의 통치권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런 자연파괴에 간접적인 요인을 제공했다”고 지적. 자연의 착취에 licence를 제공했다고 비판. 대부분의 현대신학자들은 ‘지구를 살리자’의 슬로건으로, Redemption centered 신학에서 Creation-centered(창조중심적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Anthropocentric → Cosmocentric

Redemption centered → Creation-centered

전통보수신학은 현대상황 속에서 정형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신학이다. 케케묵었다. 이런 도전 앞에 우리의 신학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① 우선,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구원의 과정이다.

② 우리 구원의 우주적인 차원을 강조. 예수님은 우주적 갱신을, 만물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③ 이와 함께 성령사역의 우주적인 관점, 차원을 강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된 열매를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실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과거에는 시간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우주론적으로 임재하신다. 그의 구원의 목적을 실현시켜 가신다. 우주적 갱신 사역의 도구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 하나의 전초기지로서의 교회가 있다. 이런 메시지를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기도해야 한다. 생태학적인 문제가 인간의 노력으로만 해결이 되나? 만물 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야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에 이런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 우주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이 땅위에 나타나소서... 구체적으로 교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은 해야 한다.

D.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존재(Being in the Kingdom of God)

인간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에서 흐른다. 첫 사람은 하나님

나라 안의 존재이다. 이웃과 자연과 하모니를 이루는 존재였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았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인간에게 세 가지 특권(선지자적 직분 - 하나님을 보여주고 뜻을 전한다. 제사장적 직분 -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김. 왕적 직분 -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 있다. 죄로 이런 낙원, 하나님 나라를 상실했다. 동시에 하나님은 회복을 위해 일하셨다 이스라엘에게 세 직분을 부여하셨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다. 그 축복을 회복하게 된다. 통치를 누리며 성령 안에서의 화평한 교제를 누리며,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 창조시의 세 직분을 회복하게 된다. 예수께서 완전한 세 직분자로 오셔서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고,. 또 당신을 믿는 자에게 이 세 가지 직분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다 가지고 있다. 밀턴은 ‘paradise lost’를 썼고, C. S. 루이스는 ‘paradise regained’를 썼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면서 지상에서 sign이다. 동시에 확장의 도구, 전초기지이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 사회, 경제적인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교회에 속한 백성들이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세상 속에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 칼빈주의 문화관. 교회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축복이 세상으로 넘쳐 흘러간다. 부활의 능력이 세상 속으로 흡입되는 통로이다. 교회의 세상 존재 자체가 큰 축복이 된다. 교회는 이 특성을 유지해야만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요약>

인간 안에는 total depravity가 있다. 타락한 존재가 모여 사는 곳에 진정한 의미의 문화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불신자 안에서 general grace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가 또 새롭게 변화될 가능성은 special grace가 세상 속에 들어갈 때 가능하다. 그래야 transforming된다. 세상 속에서는 general+special 상호작용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세상으로 가지 못한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서의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 땅위에 완전한 기독교 문화, 국가를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세 기독교나 청교도들의 과잉열심에서 비롯된 것이 그것이다. 온통 세상을 기독교화 하려 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은, 알곡과 쭉정이가 공존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적 문화를 완전히 박멸할 수 없다. 두 세력이 상호 충돌, 교류하면서 발전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세상이 흘러간다. 염세, 폐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변화의 가능성을 볼 때 희망적, 낙관적임을 알아야 한다. 최후의 승리는 보장되었다. 보수주의는 너무 폐쇄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낙관론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V. 인간의 구조 : 영혼과 육체의 관계

1. 삼분설(Trichonomism)

1) 삼분설의 역사

초대교회에서는 이레니우스가 삼분설을 주장했는데, 그는 불신자는 몸과 혼을 가지고 있고, 신자는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레니우스 외에 클레멘트,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 등이 삼분설을 주장했다.

아폴리네리우스가 기독론 논쟁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하는 중에 삼분설을 도입하여 이단적 교리를 주장한 후 삼분설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아폴리네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신적이고, 혼과 육체는 인적”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절단(切斷)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중세에는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이분설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삼분설은 19세기에 Franz Delitzch에 의해 다시 제기되

다. 최근에는 Watchman Nee(The Release of the Spirit, 「자아가 죽을 때」)와 스코트 주석 성경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2) 삼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혼과 영(Soul과 spirit)을 구분하고 있다. 영은 하나님과 가장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한다. 혼은 대개 인간의 지․정․의로 이루어져 있다.

-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ψυχῇ와 πνεύμα로 구분).

-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혼과 영을 쪼갠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3) 삼분설의 문제점

① 성경은 혼과 영을 엄밀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 대표적인 두 개의 성경구절마저도 삼분설을 확실히 지지하고 있지 않다. 살전 5:23에서는 강조를 위해 동의어를 열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Synonym for emphasis). 본문은 인간의 모든 부분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원한다는, 성화의 총체성에 역점을 둔 표현이다. 보존되기를 원한다는 동사가 단수형으로 쓰여졌다(τηρηθείη). 이런 표현은 마치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는 표현과 비슷한 것이다. 이 구절은 네 마음(카르디아; καρδία)과 목숨(프쉬케; ψυχῇ), 뜻(디아노이아; διανοίᾳ)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동의어적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히 4:12도 심리학적으로 혼과 영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의 주요 관심과 역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침투력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부 세계까지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인간의 속사람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② 삼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믿지 않는 자 안에는 영이 죽어 있고, 중생으로 인해 영이 소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불신자들에게도 영은 분명히 살아있다. 단 5:12에는 느부갓네살의 영이 강퍅해졌다고 한다. 헤스본 왕 시혼의 영을 강퍅케 했다고 신 5:20에 말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영이 신실치 못했다(시78:8)고 한다. 신약에 불신자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영이 소멸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영이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인격적, 영적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영이 하나님께 대해 바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이 살아난다는 것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던 영이 이제부터는 하나님에 대해 바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불신자에게는 그들의 영이 죄에 대해서는 살아있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③ 삼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주 빠지는 심각한 오류는 anti-intellectual tendency(반지성적인 경향성)이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의 영은 우리 안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부분으로, 지․정․의로 구성된 혼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긴밀하게 아는 방법은 우리의 지성[혼(魂)]이 아니라 우리의 영(靈)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을 혼(魂)으로, 지성으로는 바로 알 수 없으며, 오직 영(靈)으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많은 경우 영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상충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 탐구는 영적이지 못한 것, 신령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지적인 것을 대해 평가절하(平價切下)하므로 교리공부나 신학공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신비주의, 주관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2. 이분설(dichonomism)

삼분설에 대항하여 이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인간의 혼(soul, 프쉬케; ψυχῇ, 네페쉬; שׁ??,)과 영(spirit, 프뉴마; πνεύμα, 루아흐; ?וּר)이라는 말을 종종 상호 교체적(inter-changeable)으로 사용한다.

‘내 마음이 민망하니’에는 프쉬케를 사용하면서 다른 본문에 ‘심령이 민망하니’에는 프뉴마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을 가리킬 때 ‘영’이라고 한다(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또 ‘혼들’이라고 한다(계 6:9 “다섯 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 (ψυχῇ)들이 제단 아래 있어”,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2) 성경은 인간을 “몸과 혼”으로, 또는 “몸과 영”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ψυχῇ)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예수님).

- (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바울).

- 약 2:21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πνεύμα)이 없는 몸과 같다고 하였다.

- 고후7:1은 육과 영(πνεύμα)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 하였다.

3) 성경은 죽을 때 혼이나 영이 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요 19:30에는 예수께서 머리를 숙이시고 프뉴마가 떠나갔다고 하고, 눅 23:46에는 ‘내 영혼’을 할 때 프뉴마를 사용하고 있다.

행 7:51에서 스데반이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할 때 프뉴마가, 눅12:20 “어리석은 자여 네 영혼을 찾으리니”에는 프쉬케가, 사53:12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에는 프쉬케가 사용되고 있다. 왕상 17:21에서 엘리야가 기도를 할 때도 프쉬케가 사용되고 있다.

4) 혼이 죄를 범할 뿐 아니라 영이 죄를 범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영이 혼보다 더 순결하며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그러나 “영혼의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케 하자”(고후7:1)는 말씀은 영이 더러워 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고전 7:34에는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되”라고 말하고 있으며, 시 78:8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이 신실치 못하다”고 하며, 전 7:8에도 “교만한 마음(영)이” 라고 말하고 있다.

5) 혼이 하는 일을 똑같이 영이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고, 그 반대로도 말한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지․정․의 활동은 혼에 속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영도 행동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지․정․의 활동을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영이 민망하여(요 13:21)’, ‘바울의 영이 분하여(행 17:16)’, ‘낙심된 영(잠 17:22)’,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중심(영)에 아시고(막 2:8)’ - 이런 말씀은 분명히 영도 지․정․의 활동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삼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이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혼(영혼)도 똑같이 주님과 밀접한 영적 교제를 누린다고 말한다.

(시 25:1) “내 영혼(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시 146: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눅 1: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결론적으로 영과 혼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분명히 결여되어 있다.


3. 단일론(monism)

1) philosophical monism(철학적 단일론)

현대과학사상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Cartesian Dualism ; Substance Dualism)을 배격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의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은 물질이라는 본질세계 밖에 있으면서 물질적 세계 안에 있는 몸과 상호작용 하는 것으로 본다.

현대 과학적 사상을 가진 학자들은 물리적 세계의 폐쇄성 원칙 때문에 Cartesian Dualism을 거부한다. 단순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Herbert Feigl, J.J.C. Smart의 심신동일론이다(Psychophysical Identity Theory).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정신적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물리적 사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정신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란 사실 대뇌를 구성하고 있는 신경세포들이 물리화학적 반응을 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심신동일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새로 등장한 이론이 Davidson의 무법칙적 일원론(Anomalous monism)이다. 이 견해는 심신동일론이 함축하고 있는 정신적 사건의 물리적 사건에로의 법칙적 환원을 거부한다. 정신적인 것은 물리적 세계 안에 확고한 존재론적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정신적인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로 환원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리 몸의 물리-화학-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나의 행위가 나의 생각과 바람의 산물이 아니라 물리-화학-생물학적 원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건이 된다면 인간에게 자율성이라는 속성이 박탈된다. Davidson은 이런 심신동일론의 문제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율성, 정신적 세계의 자율성을 보장하려 하였다. 그는 유물론적 세계관의 테두리 안에서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2) 성경적 단일론

20세기에 들어와 몇몇 성경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이분설에 대항하여 성경은 인간을 단일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약학자인 윌러 로빈슨(H. Wheeler Robinson)은 구약의 히브리 사상은 인간의 인격체를 이분화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구약의 몸과 영혼을 가리키는 용어 ‘네페쉬’, ‘루아흐’, ‘바사르’ 라는 말들은 인격체 안에 분리된 두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단일인격체를 가리키는 총괄적인 표현이다. 구약 개념에 있어서는 인간은 영육의 단일체, psycho-physical unity, flesh animated by soul이다.

신약학자 죤 로빈슨(John A. T. Robinson)도, 「The Body」라는 책에서 바울 사도가 사용한 ‘σώμα’라는 단어를 분석하면서 바울 사도도 히브리 개념의 맥락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울 사도는 영혼에 대해서는 프쉬케와 프뉴마를, 육체에 대해서는 ‘소마’와 ‘사륵스’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꼭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을 의미하는 유사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히브리 사상의 맥락에서 인간의 전인성을 다양한 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구약 모두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고 있지 않고 전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분설은 비성경적이다.


4. 개혁주의의 입장 : 인간의 전인성과 양면성

비평 : 삼분설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이분설과 일원론의 장단점을 서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분설의 약점은 영육을 구분함으로써 영육간의 긴밀한 연결성을 바로 부각시키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여 간혹 육체를 영혼보다 열등한 것으로 경시하는 경향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다. 육체에 관련된 일은 육적이고, 영혼에 관련된 일

은 영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잘못된 이원론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일원론이 빠질 수 있는 문제점은 인간은 단일적인 존재라는 점에 지나치게 역점을 둠으로써 인간에게 외면적인 측면과 내면적인 측면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다.

1) 우리는 먼저 인간을 전인으로, 단일적인 인격체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여러 측면을 지닌 통일체, 단일체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합일체, 영육의 통일체로 존재한다. 신구약에 영, 혼,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는 인간의 내면세계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인간의 전인성을 가리키는데도 사용되고 있다. 반면 신구약에 몸, 육신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단어도 인간의 외면성, 육체성 뿐 아니라 인간의 전인성을 강조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 여러 가지 표현들은 인간의 단일 인격체 안에 있는 여러 측면들을 부각시켜주는 표현들이다.

2) 인간은 여러 측면을 가진 단일체이다. 그러나 특별히 두 측면, 외면적인 측면과 내면적인 측면, 육체성과 정신성, 영성을 가진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이 두 측면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는 안 되겠지만 편의상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몸과 영혼을 구분하여 말씀하실 필요성이 있으셨다. 구약에 ר??은 인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측면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신약에서도 몸, 육체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전인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특별히 인간의 외적이고 육체적인 면을 부각시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또한 영과 육이 죽음으로 인해 잠정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편의상 구분할 필요성에 대해 인정해야 한다.

3) 영육을 편의상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영육은 단일한 인격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들의 육체와 영혼은 끊임없이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의존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너무도 유기적, 생명적으로 연결되어 교류하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영의 활동이고 육의 활동인지 엄밀하게 잘라 구분하기가 힘들다.

영혼의 상태는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잠언17:22). 마음의 시기는 뼈의 썩음이라고 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밝게 하며, 죄를 토설치 아니할 때 진액이 마른다고 하였다. 위장병, 심장병의 대부분의 요인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한다. 은혜가 충만한 마음은 큰 건강의 비결이다. 성령 충만하면 쓸데없는 잔병치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육체의 상태도 영에 영향을 미친다. 생리적인 불균형이 우리의 심령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육체적인 연약함, 피곤함은 우리의 영혼을 위축케 한다. 육체에 어떠한 이물질이 들어가게 되면(마약, 흥분제, 술) 우리의 정신이 흐려진다. 우리의 정신과 몸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가며 살아야 한다. 술이 우리의 모든 신경조직과 혈액순환과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성령도 우리의 몸과 마음, 육체의 모든 지체에 영향을 미쳐 우리 육체가 영적인 것에 목마르게 한다. 시 63:1에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고 했으며, 68편에는 “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라고 했다.

우리 마음과 함께 몸을 주님께 헌신할 때 온전한 헌신이 이루어진다. 몸을 방탕에 방임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음란의 죄는 자기 몸에 대해서 범죄를 하는 것으로, 성령의 전인 몸을 더럽히고 망가뜨린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면,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성령 또한 우리 육체와 긴밀하게 결합하게 된다. 성령과 결합한 육체를 더럽히

는 죄는 성령의 전을 불결하게 하는 것이며 결국 성령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음란의 죄는 영적인 삶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며 신자를 영적으로 위축시키고 영적인 결박에 사로잡히게 한다.

※ 영혼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L. Berkhof의 「조직신학」 상, 권수경․이상원 역, pp. 406-411를 참조 바람.


워치만 니의 ?Release of the Spirit?을 읽고 토론.

1. 김세훈(4조) : 끝없는 자기 부인을 강조하고 지속적인 성령 충만을 강조한 것이 인상적. 끝없는 자기 부인에 의해서 겉 사람이 부서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 죄의 문제에 있어서 불도저처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장면이 인상적.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갈등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잘 지적.

그의 모순에 대해서는 논리적, 성경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성경의 근거라고 제시한 본문도 해석적으로 약하다. 성경 자체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처음에는 영의 해방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그분의 주도적인 은혜로 가능하다고 이야기 하다가 결말 부분에서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논리적 모순을 보았다. 접근 자체가 개혁주의적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논할 가치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 한 인간을 통전적인 안목, 유기적 인격체로 보아야지 혼, 육, 영이라는 3분설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는 성화적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약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성화적 삶만을 강조. 칭의는 약화되고 성화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둘이 균형 잡히지 못했다. 성령님의 주체적인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서 끝없는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입장.

2. 나해주(2조) : 중복되는 것은 생략. 우리 조는 세 가지 영역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유익한 점은 잘못된 삼분설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선 이 분이 가지고 있는 확고한 자세가 도전적이었다. 보이는 타겟을 명확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영의 해방, 자아의 죽음 등이 성령 충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문제점은 삼분설의 전제를 받아들일 수가 없고, 2차적인 은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한 번 자아가 깨어지면 성령의 인도함을 자연스럽게 받을 수가 있다는 말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아가 바로 죽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죽는 것이라고 이야기.

3. 정섭호(3조) : 영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성화의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강조는 장점.

성경의 용어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고, 그의 정의가 명확하지 못하여 혼란스럽다.

영과 혼과 육을 인간의 본질적인 구분으로 볼 것인가? 타락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그 당시 혼과 육은 어떤 것이었는가? 혼을 본성적인 구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의 자유로운 흘러 넘침이라든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죄의 쓴 뿌리로 보아야 한다. 성령과 영을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이다. 계시를 통해서 혼을 파쇄할 수 있고 영이 흘러 넘친다고 했는데, 자기 모순이다. 왜 영이 도구 안에서 갇혀서 자유할 수 없는가? 한 번의 파쇄로 영원히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이것도 문제이다. 계속 성령 충만을 입어야 한다. 완전 성화가 이 땅에서 가능한가라는 질문까지 제기된다.

4. 류길상( ) : 성화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는 믿음 이후에 계속적인 성화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워치만 니는 신앙 생활을 하는 도중에 파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 영의 해방은 성령의 훈련을 통해서, 자기 노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모순된다. 그는 전체적인 책 자체가 조직적이지 못하고, 자기의 경험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책을 읽는 데 있어서 산만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변화되었을 때에, 파쇄되었을 때에 인상이 부드러워진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온유함으로 영의 해방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동의한다.

5. 강세원(1조) : 도전 받은 것은 학우들이 이 책을 읽고 한 번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특별히 내가 죽여야 할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영적인 삶을 살려고 추구하는 모습에서 도전 받았음. 성령의 훈련 - 자기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자신을 훈련.

삼분설의 오류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워치만 니의 진지하고 깊은 묵상, 고민한 것. 그리고 100만부 이상 이 책이 팔린 것이 인상적.

비판은 무리하게 영, 육, 혼으로 삼분하려고 했던 것. 성경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을 꿰맞춘 것.

워치만 니가 혼이 파쇄할 때 영이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한 원우가 성령께서는 영, 육, 혼이 함께 변화시키셔야 한다고 말함.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끊임없이 싸우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혼이 파쇄되더라도 여전이 우리는 죄인이라는 점을 간과하였다. 워치만 니가 파쇄된 인간의 모습이 완전히 성화된 모습으로 그린 것은 롬 7, 8장의 말씀과 다르다. 혼이 파쇄되어도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싸우는 과정에 있다. 신비주의적인 모습이 표출된다. 영이 흘러나온다. 상대방을 바라볼 때 영적인 직관으로 판단할 수 있다라는 것 등. 이런 것은 주의하여야 한다.

6. 안상렬(7조) : 장점 - 삼분법은 불신자에게 어필하기에 좋다. 법적 연합과 현실적 연합을 이야기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성화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측면에서 좋은 점 시사. 깨져야 한다는 것, 자아가 파쇄되어야 한다는 것, 경건에 도움을 준다는 것. 경건 생활에 전반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서방 전통에 따라 이성이 강조되었는데 이것에 대해서 워치만 니는 도전한다. 야곱을 가장 이상형으로 본다는 것 등.

비판 - 어느 한 부분만 파쇄된다는 것을 동의할 수 없다. 파쇄보다는 변화가 낫지 않는가? 단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너무 도식적이고 물질적이다. 영은 마치 타락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이론이 강하고 지나치게 경건주의적이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다.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혼을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유기체적인 존재이다. 혼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다. 자아가 죽을 때라는 말부터 잘못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인간적 노력을 강조해서 성화하려는 듯한 인상. 중생한 자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구분되지 못하는 것은 오시안더처럼 하나님의 의가 직접적으로 주입된다는 의견과 비슷하다.

7. 임대웅(6조) : 칭의와 성화 부분에서 워치만 니는 지나치게 성화만을 강조하다보니 칭의를 소홀히 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책을 통해서 성화에 대한 우리의 약점 내지 결핍을 보충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영, 혼, 육으로 삼분하고 있고 육같은 경우는 겉의 옷처럼 불과하다고 치부. 워치만 니는 우리의 전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8. 백희권(9조) : 워치만 니의 영향을 받은 위트니스 리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워치만 니의 주장 자체는 문제가 있고, 접근법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아직도 유효하며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고 생각한다. 신학생으로서 확실한 신학적 논리에 대해서도 비중을 두어야 하겠지만, 너무 쉽게 그의 이론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경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신앙의 실제에 있어서는 힌트와 도움을 준다.


Watchman Nee, "Release of the Spirit"

작년에 발표 한 사람은 나와서 한 마디로 이 책을 요약하기를 “아주 은혜스럽지만 아주 비조직적이다”라고 말했다. 비조직적이면서 은혜로운 것이 조직적이면서도 은혜가 없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조직적이면서 은혜로운 것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말한 logic on fire를 추구해야 한다.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은혜스러운 두 가지를 다 겸비

한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워치만 니가 우리와 같이 신학 공부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 더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장점은 우리에게 큰 도전과 은혜를 준다는 것이다. 사역자에게 꼭 필요한 진리, 방해가 되는 것이 나의 옛 사람이라는 것, 이것이 은혜를 방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체험을 하지 못한다. 사역자는 다른 사람을 바꾸기 전에 자기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상당한 영적 통찰력이 있다. 특이한 것은 서양 신학자에게서 볼 수 없는 동양인 특유의 내적인 분석과 성찰, 섬세함이 있다. 이 책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우리가 신학 공부를 할 때에는 이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없었다. 안토니 후크마도 워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영에 속한 사람? 등의 책을 읽었고 그의 공헌도를 인정했다. 박영선 목사님도 이 책을 추천했다.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장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민하게 느낀 사람은 저자가 신체적으로 성령이 자기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다. 자기 말대로 자기 안에서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고 주장하는 것을 경험한 것에서 나오는 책이다. 아쉬운 것은 우리들처럼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논리로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삼분설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 위해서 자기 주장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삼분설의 오류에 대해서 전에 말했다. 강의안을 보라. 우선적으로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그리고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가 불신자 안에는 영이 죽어 있고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영이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불신자도 영이 살아 있고 하나님께서는 영이 신실하지 못하다, 강퍅하다...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으로 그들은 반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다. 불신자 안에는 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의 영이 하나님께 바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관계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했던 영, 반기능적으로 역사했던 영이 올바로 기능하게 되고 단절이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대개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혼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한다. 지적인 것은 혼에서 나온 것이기에 영적인 것이 못하다고 생각한다. 지적인 탐구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교리 공부나 신학 공부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지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은 전인적인 것이다. 전인 안에는 지, 정, 의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영적인 것을 지적인 것과 대립, 상충되는 것으로 본다면 영적인 것 안에는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것 밖에 남지 않는다. 지적인 요소를 무시해 버리게 되면 영적인 것은 감정적, 체험적인 것으로밖에 흐르지 않는다. 영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모두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워치만 니의 사상은 많은 논리적은 오류를 안고 있고, 개념상의 혼란으로 인해서 이 책의 좋은 메시지가 호소력과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 책의 진가가 그것으로 인해서 떨어졌다. 만약 신학생인 우리가 이 책을 좀 더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개념과 논리로 워치만 니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전환시켜서 설명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_^)

그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성령 충만한 삶일 것이다. 영이 풀어진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거침없이 자유롭게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삼분설의 관점에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돈을 야기하고 있다.

성경은 성령을 쫓아 사는 삶(새사람)과 육신을 쫓아 사는 삶(옛사람)을 구분한다. 성령을 쫓아 사는 삶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자유와 책임을 누리는 삶이고, 육신을 쫓아 사는 삶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삶이다. 워치만 니가 “완고한 겉사람이 깨져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성령을 쫓아서 살아야 하는데,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닌데, 완전한 새사람은 아니다. 옛사람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을 받아서 옛사람의 잔재를 매일같이 제어하면서 십자가에 못박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현대 교인들의 문제는 성령의 사람이기에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육신의 소욕에 굴복해서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삶의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습관적으로 인격에 굳어져 버렸다. 워치만 니가 겉사람을 파쇄한다는 것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사는 그 완고함, 고집 그것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육신을 쫓아 사는 삶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사람을 쫓아서 사는 삶을 청산하고 포기하는 것이 성령의 훈련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에 일리가 있는가? 우리가 성령을 계속 쫓아서 살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쫓아서 살지 아니하고 옛사람을 쫓아서 살게 되면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심령을 인도하실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육신을 쫓아서 사는 삶을 꺾으시고, 이러한 삶에서 돌이키게 하신다. 우리가 성령을 쫓아서 살 때에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을 인도하시는데, 말씀으로 인도하실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것을 워치만 니는 “성령의 훈련”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환경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실 수 없을 때,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말로 안 들으면 매를 드시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어떤 교인에게는 설교 100편 보다 매 1대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라고 했다. 워치만 니는 우리의 완고함을 깨뜨리는 것을 “겉사람을 파쇄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는다. 효과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어떤 사건을 통해서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우리를 훈련, 파쇄할 때에만 효과가 있다. 말씀과 기도로 겉사람이 처리되지 않을 때에는 성령의 훈련이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가장 우위를 점유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심령이 완고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그런 사람은 얻어 터져야 한다. 이런 성령의 훈련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성령의 훈련에서 우리는 아주 피동적이다. 수동적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피동적으로 수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도 일리가 있다. 곤욕스러운 방법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옛사람을 청산시키실 때 우리는 얻어터지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얻어터지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얻어터지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능동적인 면이 있다. 하나님의 징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고 나의 삶을 고치고 개혁하는 그런 능동적인 하나님의 훈련에 대한 인도하심에 대한 반응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 빨리 깨닫고 돌이킬수록 하나님의 파쇄의 파괴력은 금방 종료가 될 수 있다.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을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 아래에서 빨리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징계가 오래간다.

또 하나의 문제는 워치만 니에 의하면 성령의 훈련, 옛사람을 깨뜨리는 파쇄를 통해서만 우리의 옛사람이 처리될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 옛사람이 파쇄되려면 반드시 얻어터져야만 하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이 반드시 우리의 옛사람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고난을 많이 받아도 옛사람이 처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옛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처리될 수 있다. 워치만 니는 은혜의 측면( indicative)이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옛사람이 꺾였다, 이미 굴복했다는 점을 간과했다. indicative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indicative의 측면에서 imperative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책에서는 indicative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indicative가 좀 더 확실하게 밝혀지고 나서 옛사람의 처리를 주장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겉사람이 깨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사역이 그런 은혜를 받게 되면 완전히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이 상당히 매력적인 포인트이기는 하다. 워치만 니가 홀리니스와 케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차 은혜를 강조하는 점이다. 롬 7장의 삶에서 롬 8장의 삶으로, 광야의 삶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삶으로 옮겨진다라고 가르친다. 오순절의 메시지가 바로 2차적인 획기적인 은혜를 받으면 신앙이 완전히 획기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에게 확~ 바뀐다고 하면 그것

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영적 횡재와 비슷하다. 신앙생활에도 일확천금의 경향이 있다. 상당히 위험한 요소가 있다. 2차적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교회에 이런 식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획기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오늘날 적용성이 있고 호소력이 있고 효력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전통주의에서는 성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웨슬리는 말했다. 영적 정체성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많이 상실된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었기 때문에 이런 영적 침체 속에서 살다가 갑자가 회개와 각성을 통해서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획기적으로 바뀌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웨슬리, 케직, 워치만 니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 그러나 문제는 획기적인 은혜 체험을 해서 전에 육신을 쫓아서 살던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완전한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니다. crisis->growth. 한 번 성령의 역사를 계속 방해하는 그런 옛사람과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도살당하고 처리된 역사가 있는 다음에 성령이 우리 안에 자유롭게 역사한다는 주장에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패턴은 아니다. 정상적인 패턴은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기 때문에 이런 은혜가 필요하기는 하다. 워치만 니가 growth는 강조하지 않고 crisis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모든 사람이 2차적으로 획기적인 은혜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해야한다고 획일적으로 강조할 수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소수의 사람이지만 예수 믿을 때부터 점진적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아주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마다 체험의 다양성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 한 번 은혜를 받아서 옛사람이 처리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가 굉장히 쉬워진다.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그 은혜의 맛을 보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한 번 은혜의 세계에 돌입하게 되면 왠만해서는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지속적인 성령 충만을 받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죽을 때, 깨질 때라는 표현은 건전한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혼돈을 야기시킬 수 있다. 자아는 ‘나’인데, 내가 깨져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옛사람의 잔재를 성령의 은혜로 쳐죽일 때 참 자아가 산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성령 충만에 대해서 연구해 보니까, 성령 충만을 경험한 위대한 사역자들이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면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게 된다. 나의 전인이, 나에게 풍기는 인상, 모습이 은혜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역을 잘하는 것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의 전인이 은혜스러운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은혜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은혜를 쉽게 받고 은혜를 쉽게 전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유익이다. 설교단에 올라가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 인위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온유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이 “온유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는가”라고 말을 하는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에 있어서는 수동적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이후로는 사람의 능동적인 반응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풍성히 역사할 때, 내가 내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살게 될 때,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경건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된다. 인위적으로 경건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온유함이 드러난다. 이 양반 온유함만 강조하는데,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에게는 강인함, 담대함이 주어진다. 우리는 온유함과 함께 담대함이 조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 온유함만 일방적으로 강조를 해서는 안 된다. 성령 충만하면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묵상할 때, 예배할 때 하나님을 조금 느끼는데,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아도 세상 일에 분주할 때에도 하나님의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다. 많은 경우에 일상의 스트레스가 쌓이는 상황 속에서도 - 브라더 로렌스처럼 식당에서 오물을 치우면서도 - 항상 끊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평안을 누린다. 다른 수도승들은 맨날 묵상하고 기도를 하는데도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도전을 받아야 한다.


참고자료: <삼분설과 이분설 토론>-2002-1학기 강의에서

사회자 : 배준완

발제자 : 워치만 니의 입장(강찬영), 이분법 정리하고 삼분설 비판(김광석),

전인이라는 폭넓은 입장에서 성경적 견해(손대영)

배준완 : 난상 토론을 피하기 위해서, 팀을 설정해서 발제를 하기로 하였음. 발제에 대해서 질문을 거친 후, 토론을 하기로. 마지막에 교수님께서 정리해 주시는 순서로 진행하겠음. 같이 문제 의식을 느꼈으면 하는 것은 워치만 니의 ‘자아가 죽을 때’의 책에 대한 막연한 토론이 아니라, 워치만 니의 저서가 가지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그 입장에서 전반적인 인간론의 입장에서 발제하고 토론하기로 함. 따라서 세 부류의 발제자를 선정하였음. 단순하게 반대를 위한 반대, 문제제기를 위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한 입장이 가지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방법을 취했으면 함.

<각각 발제함>

(질문) 이상돈 :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는 배우가 그 완전히 그 입장에 서서 연기하기 때문이다. 강찬영은 이분론에서 강조하는 것을 삼분설에서 설명하고 있지 않나? 거기에 대해서 얘기해 주시오. 삼분론의 약점에 대해서 보강해 달라. 전인적 입장의 약점인 죽음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

(질문) 고려 : 손대영 발표에서 2번 아래 부분 ‘그러나 성경은 영과 혼을 구분하고 있지 않고, 날카로운 대립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이는 삼분론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인데, 바울 서신에 입각하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명백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시오.

(질문) 김기동 : 세 분에게 질문. 인간 구성에 대한 논쟁이 전체 인간론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시오.

(질문) 박영돈 교수 : 내가 여기서 원하는 것은 워치만 니의 책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분석해서 긍정적, 부정적인 것이 무엇인가? 워치만 니의 입장을 우리의 입장에서 성경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바꾸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내용들을 토론해 주었으면 한다.

(답변) 강찬영 : 설명 없이 해서 죄송. ‘자아가 죽을 때’ 105쪽.

(답변) 손대영 : 사후의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은 죽음에 의한 일시적인 분리. 잠정적이고 불안한 상태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으로 창조하셨다. 육체와 영혼을 구분해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혼합된 존재로 만드셨고, 종말론적으로 우리가 바라야 할 모습이다. 종말의 완전한 부활을 기다리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림.

(질문) 배준완 :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그 후 타락을 했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부활과 구원받은 이후의 긴장된 상태의 관계가 상정되지만, 선한 창조를 말하면 그 대립은 해소되는 듯 한데, 그것은 이분법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답변) 김광석 : 속성에서는 변화가 있었지만, 구조적인 부분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답변) 강찬영 : 성경말씀에 근거한 얘기를 말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교의학적, 사변적으로 흐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폴로나리우스에 의해 배격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우리의 전통교리였다. 장로교에서 평가받은 교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초기의 교리였음을 기억하라.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당시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바울이 그렇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원론도 철학적 전통의 아리스토틀과 매우 비슷하다. 왜 이런 식으로 철학적 비판을 가하는가? 철학적 사조를 보았을 때 플라톤, 데카르트 전통에 이어서 인간을 일원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철학적 사조가 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말씀에 근거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토론]

(교수님의 강의)

워치만 니의 책을 읽고 받은 도전이나 영적인 유익이 무엇인가?

(학생들의 답) 성령의 훈련, 끊임없는 자기 부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학생들의 답) 성경해석, 동양적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본다. 중국 사람들에게 선교하기 위해서 서양사상을 들여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삼분법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인격적인 관계를 물리적으로 설명한 듯 하다.

[hand out]

워치만 니의 책의 원 제목은 ‘release of spirit'인데, 제목 자체가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아가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되나? 그러나 이 제목이 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본다. 70년대 기독교 서적 중에서 베스트셀러였다. 신학생들과 젊은 크리스천은 다 이 책을 읽고 신선한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도 잘 알려졌고, 후크마도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중국이름은 니토쉥. 중국의 전도자로서 능력 있는 사람이며 많은 경건 서적을 씀. ‘영에 속한 사람 123권’ 등. 그의 경건 서적에서 나온 것과 같이 분명히 자신이 말한 듯, 영이 풀리는 체험을 한 것은 분명한 듯.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체험을 우리에게 문서로 전달하는데 신학적 훈련을 받지 못해서 많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상당히 은혜스러운데, 상당히 비조직적이다. 과거 경건 운동을 한다든가 큰 부흥운동을 일으킨 분들이 큰 은혜를 누렸지만, 체계적인 신학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혼동을 안겨주고 있다. 그들이 아마 신학적 훈련을 했더라면 칼빈처럼 매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신학훈련의 필요성을 다시 느낀다. 은혜가 있고, 비신학적이고 비조직적인 것이, 조직적이고 은혜가 없는 것보다는 낮다. 그러나 은혜가 있으면서도 조직적이면 더 좋다. 그게 공부하는 이유이다. 성령께서도 그런 사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 우리는 선생으로서 은혜를 우리 자신만 간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호소력 있게,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은혜를 성격적, 논리적,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비조직적 책을 조직적으로 분석하자.

이 책에는 동양과 서양적 영성의 특성이 배합되어 있다. 동양적 면은 신앙의 주관적인 면이 깊이. 내적이 면은 섬세하게 통찰하는 예민한 직관은 동양적 영성의 특성이다. 서구신앙은 신앙의 객관성만 강조한 나머지 신앙의 면을 탐구하는 것이 부족. 칼빈 이후에 객관주의, 교리주의로 흐르는 경향.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건주의, 자유주의,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니의 책에서는 서구신학에서 발견할 수 없는 내면적인 깊이를 다루는 영적인 통찰력이 깃들어 있는 동양적 영성의 특성이 엿보인다.

서양사상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 T. A. Sparks, 'What is man?'과 Brother Lorense, 'Practice the presence of God'의 영향을 받았다. Sparks의 영향을 받아 삼분설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 그리고 Holiness-Keswick Movement'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는 Second Blessing을 많이 강조했다. 중생 후 영이 풀어지는, 성령이 충만하게 되는 극적인 2차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겉사람이 파쇄될 때, 혼이 죽을 때, 성령에 내가 사로잡힐 때, 그럴 때 로

마서 7장에서 8장으로 전환되며 육적에서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전환된다. 1 step → 2 step으로 가면 우리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극적 은혜만 받으면 내가 앉고 있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인상을 제공한다.

이 책이 주는 도전과 문제는?

challenge : 복음 사역자에게 중요한 것은 옛 자아가 통제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것. 사역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성령의 역할을 혼의 힘으로 하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완고함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함으로써 내가 사역의 방해가 된다. 성공적 사역자라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옛 자아가 온전히 죽어야 한다. 이는 성경적인 경건의 첫 번째 원리이다. 칼빈도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목회성공, 능력의 비결을 소홀히 하고, 오히려 여러 인위적인 것을 통해 목회하려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지적한다.

문제점 :

① 삼분설 - 지성과 감정은 혼에 속했고 영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 지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상충적으로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적, 이지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것은 죽은 문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지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상충된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영적인 것은 전인적인 것이며, 그것 안에는 지적, 감성, 의지적인 것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영적에서 지적인 것을 빼면, 남는 것은 감정과 신비적인 것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혼의, 어떤 사람은 영의 지배를 받는 단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체에 전인적으로 성령을 따르든지, 옛 사람, 옛 자아를 따르든지 두 가지 가능성을 말한다. 사락스는 부패성의 총체를 말한다.

② critical experience - 2차적 은혜를 받아야 한다. Holiness Movement의 영향. 영이 풀리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옛 자아가 완전히 처리되는 순간. 겉사람이 완전 파쇄되어서 영이 충만히 역사해서 나의 삶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 있게 누리면서 살게 된다. 설교, 예배, 은혜스런 일할 때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따분하고 스트레스 많은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을 영위한다. 그런 삶을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런 은혜는 성령의 파쇄 훈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없다. 각 사람이 모른다. 성령의 파쇄 훈련은 하나님께서 조금씩 깨뜨리시다가 대대적으로 깨뜨리신다. 점진적으로 겉사람이 파쇄되어서 영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포인트에 가서 겉사람에 완전히 파쇄되고 영이 풀어지는 극적인 포인트를 말한다. 상당히 매력적이면서, 위험한 가르침이다. 끊임없이 옛사람과 싸우는 수고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속임수가 있는 듯함. 어떤 은혜를 받는다고 옛사람이 완전히 정리가 되겠는냐는 것이다.

③ passivity - 영이 풀어지게 하기 위한 성령의 파쇄 훈련은 우리가 전혀 기여할 수 없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파괴되어야 이 은혜가 주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몇 달만에, 어떤 이는 몇 년, 몇 십년이 걸려도 이 파쇄 훈련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20여 년 전에 읽었는데 아직 깨지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깨뜨리시는 이런 손길에 입맞추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할 일이 없고, 은혜가 주어지면 자연적으로 온유해 지니 인위적으로 하려 하지 말라. 임재를 느끼는 것도 영이 풀어지면 자연적으로 느끼는 것이지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그런데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사는 것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임재 의식 가운데 살아갈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위적으로 온유, 겸손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말과 표정에서 노력해야 한다. 저절로 된다고 기다리기만 하지 말라.)

워치만 니가 말하려는 이런 핵심적 포인트를 성경적으로, 개혁주의적으로 교정해서 다시 이 포인트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영이 풀린다’는 것은 성령 충만을 말한다. 영이 자유롭게 내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은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한다는 것을 말한다. 겉사람이 파쇄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는 완고한 마음, 교만함을 버린다. 우리가 전 존재가 성령의 지배를, 통치를 받는다. 우리 안에서 성령이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역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워치만 니의 가르침의 문제는 이런 성령 충만 은혜를 2차적 은혜로 이해하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성령의 사람이 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령 충만’은 우리를 은혜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성령을 따라 살라는 것은 성령 충만 가운데 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현대 교인들의 문제는 예수 믿는 순간부터 성령 충만의 삶을 살지 않고 육신에게 져서 옛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을 근심시키는 삶이 더 많다. 육신 가운데 방황하며 육신을 좇아.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성령 충만한 삶이 배양된 수 있는 메시지, 훈련, 영적 분위기, 섬김의 삶이 제공되지 않아서 영적으로 방황하는 성도들이 많다.

이런 현대 상황 속에서 HM에서처럼 극적 순간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가져야 할 교인들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교리는 아니다. 대부분이 정도를 떠나서 방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극적 은혜를 받아서 성령 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일 뿐이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완고함을 깨뜨리신다. 겉사람을 파쇄한다는 표현이 아니라, 성령을 거스리는 우리의 완고함을 깨뜨리신다. 결국 항복케 하신다. 사람에 따라서 그 기간은 다르다. 성령 충만으로 회복되는 은혜의 체험을 일률적으로 보편화 해버릴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점진적인 은혜의 과정을 따라서 성령의 훈련과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변화될 수 있다. 이런 성령체험의 다양한 패턴을 인정해야 한다. 2 step pattern을 성경이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도 우리들의 능동적인 반응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치실 때, 우리는 능동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돌아보고 회개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색출해 내어서 성령께서 의도하신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영이 풀어진 다음의 결과를 설명할 때,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를 누린다고 했다. 스트레스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복된 사람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상당히 성경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성령의 부요한 임재 의식 속에서 살 수 있다. 삶의 문제와 따분함을 극복할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내가 은혜를 체험하면 내가 은혜를 쉽게 전달한다. 죽 쑤는 설교에서도 은혜를 받는다. 나의 모습 자체에서도 은혜가 되는 것. 영적인 향기를 몰고 오는 은혜가 함께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로버리 머레이 맥케인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면 그냥 은혜가 되어서 성도들이 눈물을 흘려... 이 은혜를 받게 되면 온유함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의 완고함이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제어되었다는 증거다. 사람이 편안해 진다.


Ⅵ.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의 기원(The Origin of Sin)

‘죄는 어디서부터 기인되었는가? 선하게 지음 받은 인간이 어떻게 죄를 범하게 되었는가?’ 이 죄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신학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이다. 신학과 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대개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해 왔다.

1) 일원론적 관점(monism)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만이 있을 뿐이다. 선악간의 모든 사건은 그 주권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원론적 사고이다. 만약 악은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본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과 대립되는 주권적 영역을 인정하는 이원론적인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악을 하나님과 대립된 어두움의 세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 마니교(manichianism)의 오류이다. 이런 오류를 막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수호하기 위해 신학자들은 대개 일원론적인 관점에서 죄의 기원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여 왔다. 그러나 이 견해는 악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원론적인 입장은 하나님이 악의 직접적 원인자, 창시자가 아님을 변호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일원론은 악은 인간 안의 유한성(finititude)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어떤 필요성(necessity)에

의한 것으로 보는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악은 인간의 유한성(finititude)에서 비롯된다는 견해 : 철학자 Leibnitz의 사상에서 엿볼 수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최선의 작품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죄는 인간의 불완전, 유한성, 피조물 됨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하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죄는 구조적 필연성에서 오는 것으로 인간에서 숙명적인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만들어졌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견해는 죄를 합리화 할 수 있는 편리한 논리로서 세속사상 저변에 짙게 깔려있다. 죄는 인간의 구조적 불완전,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봄으로써 결국 그렇게 만든 하나님께 죄의 책임이 전가되며 인간은 죄에 대한 심각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악의 기원을 필요성(necessity)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견해 :

㉮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버트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자로 대우하시기 위해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 놓으셔야만 했다. 만약 이런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고 순종의 길만 열어 놓으셨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죄의 가능성을 허용하셨다. 이는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견해이다. 우리는 자주 이런 식으로 죄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설명하곤 한다. 물론 죄는 인간이 자유를 남용한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죄의 가능성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죄의 원인을 제공한 분으로 보는 오류를 극복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다. 성경에는 죄를 지을 자유라는 개념은 없다. 성경은 죄를 짓는 자유를 자유라 하지 않고 방종, 반역이라 한다. 천국에서는 죄를 지을 자유는 없으나 완전히 자유하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할수록 진정으로 자유하다. 하나님은 죄를 지을 자유는 없으시나 완전히 자유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라는 개념은 성경적인 자유의 개념이 아니다.

㉯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 더 큰 선을 이루시기 위해 죄를 허용하셨다는 견해 : 인간은 죄를 범했으나 하나님은 그 죄 때문에 더 큰 선을 도모하셨다.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예수 안의 큰 구속의 은혜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세에는 아담의 범죄를 복된 범죄(happy guilt)라고 하였다. 물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신다. 그래서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불행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선과 영적인 유익을 도모하신다. 그러나 악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선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라 할 수 있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발생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라 볼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목적, 이유에서든(그것이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을 도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을 죄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일원론적 사고는 하나님의 주권적 테두리 안에 선악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을 보존하며 이원론적 사고의 오류를 피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라도 죄와 연결되게 하는 문제를 극복하기 힘들다. 하나님께 간접적인 책임, 원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피하기 힘들다.

2) 이원론적인 관점(dualism)

일원론적인 사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죄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이러한 견해의 전형적인 예를 마니교(manichianism)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미니교의 사상에 의하면 이 우주에는 두 상대적인 주권, 원리, 왕국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 빛의 왕국과 어두움의 왕국이 공존한다. 악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 악은 어두움의 왕국에서 비롯된다. 그 기원과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으신 분이며 그에게는 죄의 책임과 원인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데는 장점이 있으나 이 우주에 서로 대립된 두 절대적인 주권이 공존한다고 봄으로써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은 성경적이라기 보다 이방 종교적 개념이다. 성경은 오직 하나의 왕국, 주권-하나님의 왕국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과 버금가는 절대 세력이 있을 수 없다. 사단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활동한다.

* 일원론적 바탕 하에서 변형된 이원론 : 이 견해는 이 우주에 오직 하나의 주권이 있으며 사단은 이 주권 하에서만 활동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단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립되는 악의 세력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원론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악은 사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의해 범죄하는 것을 사실이지만 사단은 불가항력적 세력이 아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게 하는 세력이 아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승인과 우리의 승인을 받아야만 역사할 수 있다. 우리는 사단의 결박에 매여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원해서 죄를 택하기에 그 결과로 사단의 결박에 매이게 된다. 일차적으로 죄의 책임은 절대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죄의 원인과 책임을 근본적으로 마귀의 역사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일원론과 이원론은 모두 죄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죄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아주 철학적, 사변적이며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죄를 인과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인과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따라서 그런 사고에 익숙한 우리는 죄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죄는 그 근본 성격상 그렇게 논리적으로 인과론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nonsense를 sense있게, 의미 있게 설명하려는 것과 같고 아주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을 논리적,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A logical explanation assigns sensibleness to that which is intrinsically nonsensical, a rationality to that which is irrational and certain order to that which is disorderly” (G. C. Berkower).

Berkower가 지적한 것처럼 죄를 설명하려 할 때에 죄의 참된 실제를 오히려 흐르게 할뿐이다. 어거스틴은 죄를 설명하려는 것은 어두움을 보려는 것과 같고 침묵을 들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Barth는 죄란 ontological impossibility(본질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하였다. 죄는 최고의 미친 짓이다. 죄를 이해하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죄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에 너무 묻혀 살기에 죄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다. 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결국 죄를 합리화하게 된다. 죄를 변명하게 된다. ‘인간이 불완전해서, 육신이 약해서, 환경 때문에, 죄 성형 때문에, 습관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는 식으로 변명하게 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원론적인 견해는 죄의 원인을 인간의 불완전함이나 유한성, 어떤 필요성에서 찾고, 이원론적인 견해에서는 그 원인을 사단에게서 찾는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견해들은 죄를 어느 정도 합리화시킴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약화시키고 있다.

성경은 죄의 기원을 인과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죄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죄는 설명될 수 없으며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이 사실 자체가 인간의 모든 입을 막고 그들로 죄인 됨을 고백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죄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직하게 고백해야 할 뿐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지으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전 7:29) 인간에게 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다. 성경은 죄가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기인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악의 근원이다. 주님께서도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낸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눅 6:45).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하였다(렘 17:9). 성경은 죄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안일하게 사변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한 사변적인 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빗나간 것이다. 성경은 죄의 실제와 그 심각성을 다루며, 인간에게 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과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논리적 변명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다. NO EXCUSE! 그러므로 그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 “Only he who understands that sin is inexplicable knows what it is. one thing we know is that we are responsible for sin.”(E. Brunner).


2. 아담의 범죄(194-225) - 아담의 범죄와 우리 죄와의 관계(Hoekema의 책 pp. 259-279)를 읽고 서로 토론하기 바람.

아담의 범죄가 왜 그리 심각한가? 아담이 열매 하나 따먹은 것이 무엇이 그리 심각하냐?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굉장히 중요한 명령이다. 얼마나 엄중한 명령인가 하면 그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셨다. 사람을 영생하는 존재로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은 그 명령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분의 엄중한 명령에 불순종한 것은 최대의 반역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연합되어 사는 삶을 거부한 것이다. 선악과나무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 속에는 하나님의 권위(authority)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의 통치과 주권과 다스림을 거부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역할을 하면서 인간이 다스리는 우주와 나라를 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우주를 원한 것이 아니고, 인간을 중심으로 한 우주를 원했다. 세속주의를 대변하는 말은 homo absconditus이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욕망의 발로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인간의 본질을 모두 거부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배격하는 nothing의 세계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신의 의미를 창출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니체와 사르트르의 무신론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존하는 것이다. 니체가 시도한 것이다. 유한자가 무한자의 행세를 하면서 살려고 했던 것이다. 인생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의 문제로 고민하는 빈곤한 삶이 되었다. 필사적으로 더 많은 것을 착취하고 탐내는 삶이 되었다. 행복이 고갈되어서 이런 것을 얻기 위해서 투쟁적이 되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여유가 없어졌다. 후크마의 책을 읽어 보라. 책에서 지적하지 않은 것만 설명했다.


Ⅶ. 인간의 전적 부패와 자유의지

1. “전적부패”의 의미(Total Depravity)

성선설 : 맹자/Rousseau , 성악설 : 순자/Thomas Hobbes

성악설과 같지 않은 이유. 우리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니다.

전적부패가 의미하지 않는 것 - 이 말은 타락한 인간이 악마 같은 존재라서 아무 선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타락한 인간 안에서 상대적인 의로움이 있어서 아주 경탄할만한 종교적 윤리적 수준을 이룸을 인정한다.

전적부패의 의미

① 전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어볼 때 전적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얻기는 전적으로 불충분하다. 인간 안에 상대적인 선이 있지만 이 상대적인 선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다.

② 인간성 안에 죄로 오염되고 부패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말이다. 죄의 오염의 범위. 인간의 전 영역에 미쳤다.

결론 : 인간 안의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2. 전적부패와 자유의지의 관계

인간은 로봇이냐? 왜 성경은 믿어라, 행하라고 하냐? 이 질문은 오랫동안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어거스틴이 최초로 심도 있게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다루었다.

① 창조시 인간

② 타락 후

③ 구원

④ 종말

posse non peccare

non passe non peccare

posse non peccare

non passe peccare

able not to sin

unable not to sis

able not to sin

unable to sin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 회복

죄를 안 짓는 상태

<박영돈 특허>

죄의 길

one-way

의의 길

one-way(의의 길은 끊김)

인간이 스스로 자원해서 죄를 짓기에 돌이킬 수 없다. 자신이 원치 않는다. 때로 죄에 대해 일시적인 피곤과 실증을 느끼지만 진정한 죄에 대한 회개와 돌이킴은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우리 안에 임하지 않는다. 죄를 끊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이미 임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① 창조 : two way

② 타락 : 자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유를 남용하므로 죄에 빠졌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없다. 막혀버렸다. 스스로 자원해서 죄만을 범한다. 간헐적 회개는 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스스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③ 구원 : 구원은 죄를 안 지을 자유가 회복. 내적 결박에서 벗어나 내적 자유를 회복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심령의 자유가 회복.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 마음이 사랑하고 원한다. 생령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했다.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셨다.

④ 종말 : 완전히 죄를 안 짓는 단계. 성화의 마지막 단계. 그러나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상태에 이르기까지는 두 길 사이에 갈림길 속에서의 갈등과 시험을 통해서 거쳐서 가는 길이다. 내가 정말 자원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지, 나의 참된 믿음이 테스트되는 것이다. 두 길 앞에서 테스트가 된다. 내가 얼마든지 죄의 길을 좇을 수 있는데 그렇게 살지 않고, 고통은 있어도 하나님을 좇아 사는 삶... 자원해서 선택할 때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증명된다. 성화 과정에서 우리의 각오가 점점 더 강화된다. 주님을 순종하려는 강한 열망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유의지 위에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유의지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것은 이 땅에서 적당하게 살다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완전한 성화, 완전한 순종을 사모하는 이들, 부패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화가 큰 축복이다. 그러나 죄의 욕망과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는 길이 끊어진 천국엔 가기 싫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항상 죄를 선택한다. 육의 사람은 육을 추구한다. 영적 생각을 할 수 없고, 선택하지 않는다. 육적 마음은 육을 원하고 부패를 추구한다. 세속을 추구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 육신을 좇는 삶을 택하는 것에만 자유하다. 인간은 죄짓는 데만 자유하다.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삶을 택하는 것에만 자유하다. 인간은 죄를 짓는 자유만 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타율이 아니고, 자율적으로 택하기 때문이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은 내적 자유를 상실

했기 때문.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yes and no’ 두 가지 답이 있다.

yes : 타락한 인간은 아직 자유롭게 선택할 의지를 소유한 존재라는 측면에서 소유했다고 보아야.

no :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항상 죄의 길만을 택하며 의의 길을 택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있고, 없다고 봐야 하는, 이 아리송한 대답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항상 잘못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다 들어있다.



Ⅷ. 죄의 여러 가지 특성과 형태

1. 죄의 특성

1) Flight from reality, truth

Scott Peck, 「Roadless Traveled」

2) Suppressing reality, truth

3) Self-deceiving

Lewis Smedes: "First we deceive ourselves, and then we convince ourselves that we are not deceiving ourselves."

4) Darkening

5) Hardening

Scott Peck, 「People of lie」

6) Enslaving

7) Contaminating


2. 죄의 심각성의 정도

∙죄의 등급 : 로마 카톨릭 - mortal sin/venial sin

죄의 등급을 설정할 수 있겠는가? 전통적으로 로마 카톨릭에서는 경한 죄(venial sin)와 치명적인 죄(mortal sin)로 나뉜다. 전자는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고, 후자는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이 치명적인 죄는 세례 시에 받은 칭의, 성화의 은혜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버림받는다. 칼빈은 이런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인 구분을 배격했다. 이런 식으로 죄를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어떤 죄를 치명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지속적이고 지나친 불안감과 두려움을 안겨 준다. 경한 죄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가 경한 죄인데 우리가 짓는 모든 죄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치명적인 죄라고 주장했다. 크나 작으나 모두 심각한 죄임을 인정하지만, 죄의 심각성의 경중이나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생각만으로 지은 죄와 행동으로 옮긴 죄의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음란한 생각을 한 것과 음란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자주의적이고 율법적인 죄관에 대한 비판이며, 생각의 죄도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의의 경중을 혼동할 뿐만 아니라 죄의 경중을 혼동함에 있어서도 신앙생활의 문제가 생겨난다. 한국 교회를 보라. 담배를 피우면 퇴학당한다. 장로가 담배 피우면 징계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만, 거짓말 등은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피상적인 죄는 율법적으로 심각하게 다룬다. 죄의 경중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의 심각성의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criteria)는 어떤 것이 있겠는가?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죄의 유혹에 굴복하는 정도

내가 죄의 유혹에 얼마나 굴복하는가? 다윗의 경우를 보면, 죄의 심리학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도 똥처럼 보이는 것이 경건의 최고 경지인가? 신앙촌의 전도지에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옳지 않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며, 옳은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항상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통해서 우리를 유혹한다.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음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윗에게 일시적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이런 생각이 스쳐 가는 것도 죄는 죄이지만, 진정으로 원치는 않는 것,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꼭 죄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새가 머리 위에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하는 것이다. 욕망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이다. 죄를 승인하면 안 된다. 욕망이 발동하면 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게 된다.

2) 얼마나 의도적인가

나의 의지가 얼마나 죄에 의도적으로 개입되었는가? 자원에서 죄를 짓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실수로 잘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무고하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도피성 제도가 그것을 배려한 것이다. 그러나 무심코 지은 죄가 무조건 무고한 것은 아니다. 무심코 자기 자랑하는 말이 튀어 나왔다. 프로이드 등의 심리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의 세계는 빙산의 일각과 같다.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한다. 의식한데서만 우리의 행동과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잠재의식까지 좋은 버릇이 쌓이게 만들어야 한다. 잠재의식이 우리의 인격과 인상과 됨됨이를 형성한다. 평상시에 성령을 좇아서 살아서 깊은 레벨의 성령 충만과 치유가 일어나야 한다. 잠재의식세계의 문제는 잠 속에서도 간혹 나타난다. 아직도 이것은 규명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거룩한 사람은 꿈속에서도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 꿈속에서 이상한 사람은 실제로도 이상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평상시에 불결한 사람은 꿈도 뒤숭숭하고 이상할 수가 있다. 여자들의 경우에,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지 못하면 밤에 잘 때 가위눌리는 경우가 많다. 아직 다각적으로 분석을 해야할 것 같지만, 이런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꿈 속에서 계시를 받은 것으로 볼 때 경건한 사람은 꿈도 경건할 것이다.

3) 지식의 정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고의적으로 거스려 짓는 죄는 더 큰 죄가 된다. 무지에서 지은 죄는 조금 excuse가 된다. ‘알았으면 안 지었을텐데’라는 전제 하에서 조금은 가볍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무고하지는 않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음의 부패성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싫어하고 알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무지한 것이다. 무지 자체가 무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지 자체가 심각한 죄악이다. 하니님 섬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내 마음이 변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 무지 자체가 무고함이 되지 못한다. 빛을 받은 후의 죄악이 더 심각하다. 예수 믿은 다음에 너무나도 큰 용서의 은혜를 받았다. 빛 가운데서 죄악을 범하는 것, 아주 어리석고 완고한 죄악이다. 선생된 자의 죄악이 더 크다.

4) 더 근본적인 죄악(fundamental sin)

근본적인 죄악이란 자기 중심적임,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려는 것이 근본적인 죄이다. 죄의 경중을 혼동할 때 신앙 생활에 큰 문제가 생긴다. 한국 교회는 아주 심각한 죄악을 너무나도 간과하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이 더 심각한 죄악을 범하고 있다. 우리 교단의 이런 사태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교만에서부터 모든 죄악이 따라 온다. 교만은 죄악을 줄줄이 사탕으로 끌고 온다. 교만한 사람은 성욕을 제어하지 못한다. 야망이 큰 사람일수록 성욕이 크다.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 쓸데없는 담배를 가지고 치고 하지 말아라. 좀 기다려주고 심각하게 다루지 말아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담배는 아디아포라이다. 완전히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담배 끊어라. 담배 못 끊으면 목사하기는 힘들다. ^^;; 리차드 마우가 골초였는데, 풀러 신학교와서 담배를 끊었

다. 그는 천국에서 잔치에서 콜레스테롤이 많은 음식을 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맛있는 시가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ㅋㅋㅋ 흑인 여자가 담배를 옆에서 피우는데 담배 연기가 자기 코를 스칠 때 너무나도 그 향기가 향긋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했다나... *_* ㅎㅎㅎ

5) 성령훼방죄

① 이 말씀은 고난받기 전에 예수님께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신 후에는 예수님을 거역한 죄는 용서받고 성령을 거역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순절 전에만 유효한 말씀이다.

② 그리고 분명한 성령의 역사와 나타남을 보면서도 사단의 역사로 왜곡시키는 극악무도하고 완고함에 대해서 성령의 역사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죄악인 것이다. 성령의 강한 역사를 분명히 목격하고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다. 그 완악한 죄, 극악한 죄가 바로 성령훼방죄이다. 성령의 역사를 보고 회개하고 신뢰하기 보다 부인하는 것이다.

③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회개케 하시는 그 은혜를 거부하고 회개치 않으면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는 없기 때문에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④ 하나님의 은혜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용서하는 은혜보다도 더 큰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너무 강퍅하졌기 때문에 회개 가능성을 스스로 배제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죄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 혹시 내가 이런 죄에 빠졌을까하고 염려하는 것은 이런 죄에 빠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가 있다. 이런 염려가 있는 사람은 살아 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완고해서 이런 죄 가운데 빠진 사람은 이런 염려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