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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종교개혁과 제네바의 칼빈_황대우 교수

한스킴 2018. 8. 27. 22:14

강의안

스위스 종교개혁과 제네바의 칼빈

║황대우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I. 스위스 종교개혁과 쯔빙글리의 쮜리히


오늘날 스위스는 중립국으로 유명하다. 그와 같은 중립국이 된 것은 이미 중세부터이다. 1291년 8월 1일 독일어를 사용하는 루쩨른(Luzern), 우리(Uri), 쉬비쯔(Schwyz) 지역이 외부의 공격을 받을 때 서로 돕기로 맹세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최초로 스위스 독립 연방 체제를 구축했다. 이때부터 스위스는 지도자는 있었지만 지배자는 없는 중립적 연방 국가가 되었다. 우리에게 윌리엄 텔(William Tell)로 잘 알려져 있는 빌헬름 텔(Wilhelm Tell)이라는 전설적인 영웅은 15세기에 스위스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의 군주들에게 저항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합스부르크 가 출신의 황제 맥시밀리안 황제(Maximilianus I)는 스위스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1499년 9월 22일에 바젤(Basel)에서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했다. 1513년경에는 스위스 연합동맹에 가입한 수가 모두 16개 주(Canton)로 늘어났다. 정치적으로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와 우호관계에 있었다.

쮜리히(Zürich)는 1218년에 제국도시가 되었고 1353년에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16세기에 이 도시의 인구는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와 비슷한 오천 명 정도였으며 인구가 1만명 정도였던 바젤이나 제네바(Genève)에 비해 작은 도시였으나 영향력은 다른 주에 비해 훨씬 컸다. 쮜리히 시의 정치체제는 당시 남부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 Strasbourg) 시의 모델을 따랐다. 16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대의회가 최고의 법적인 권한을 행사했으나 사실상 최고 권력기관은 50명으로 구성된 소의회였다. 쮜리히 교회는 구역상 콘스탄쯔(Konstanz) 교구 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다.


울리히(Ulrich) 혹은 훌드리히(Huldrich = Huldrych)라 불리는 쯔빙글리(Zwingli)는 1484년 1월 1일에 스위스 토겐부르크(Toggenburg)의 빌트하우스(Wildhaus)라는 작은 마을에서 8남 3여 중 셋째로 태어났다. 1498년 겨울에 오스트리아의 (Wien) 대학에 입학했으나 1499년에 쫓겨나고 말았는데, 이유는 아마도 당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정치적인 역학관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502년까지 공부하다가 그해 여름에 바젤 대학으로 전학했다. 1504년에는 학사학위를, 1506년에는 학사학위를 받았다. 1506년 9월에 콘스탄쯔에서 사제로 안수 받은 후 같은 달 29일에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하였고 12월에는 글라루스(Glarus)의 사제가 되어 1516년까지 사역하다가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청빙을 받았고 그곳에서 1518년까지 사역했다. 그는 아인지델른에 온지 1년이 지난 즈음 한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사제로서 순결 서약을 어기게 되었다. 이러한 결점은 그가 1518년 쮜리히의 청빙을 받았을 때 큰 걸림돌이 되었으나 그 상황에서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쯔빙글리는 1518년 12월 10일 24표 가운데 17표를 얻어 쮜리히 대성당의 수석 사제로 선출되었고 자신의 36번째 생일인 1519년 1월 1일에 마태복음 1장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족보에 관해 설교함으로써 사역을 시작했다. 쯔빙글리의 활약으로 쮜리히 도시와 교회는 1525년에 종교개혁을 수용했는데 이 영향으로 1528년에는 베른(Bern)이, 1529년에는 바젤이 차례로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쯔빙글리가 주도한 쮜리히 중심의 스위스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교회의 도덕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루터가 주도한 독일의 종교개혁과 구분된다. 루터가 성경을 근거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공로가 아닌 이신칭의 이론과 같은 교회의 교리적인 개혁에 주력한 반면에 쯔빙글리는 동일한 성경을 근거로 십일조가 신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것과 사순절의 금식 기간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도덕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에 주력했다. 쯔빙글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금식을 하고 싶으면 하라. 고기를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말라.” 십일조와 금식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외 없이 지켜야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가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근거가 된 것은 바로 쯔빙글리 개혁이 기독교 역사에 남긴 결정적인 흔적 가운데 하나이다. 쯔빙그리는 당시 모든 교회의 성화와 성상을 성인숭배로 간주하여 제거했다. 그리고 예배도 가능하면 모든 미신적인 요소들을 배제한 단순성을 강조했다. 오늘날 설교 중심의 단순한 예배 형태는 그와 같은 쯔빙글리 개혁의 유산이다.


루터의 고민은 ‘어떻게 죄인인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였던 반면에 쯔빙글리의 고민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가?’였다. 비텐베르크 개혁가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구원론이라면 쮜리히 개혁가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쯔빙글리 개혁의 출발점과 방향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즉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필요로 나아간 반면에 루터 개혁의 출발점과 방향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즉 인간의 필요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갔었다. 개혁의 동인에 대한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개혁가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두 개혁가 모두 교회와 신자의 삶을 위한 최고의 권위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뿐이라고 인정했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즉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쯔빙글리는 1531년 10월 11일에 벌어진 스위스 내전 즉 가톨릭 연방 주들과 개신교 연방 주들 사이에 벌어진 종교 전쟁인 카펠(Kappel)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몇 주 후인 1531년 11월 24일에 바젤의 종교개혁가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 역시 숨을 거둠으로써 스위스는 두 명의 위대한 개혁파 종교개혁가를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II. 하나님이 길들인 개혁가 존 칼빈(Jean Calvin. 쟝 깔뱅)


1. 제네바에 이르기까지의 청년 시절과 교육

쟝 꼬뱅(Jean Cauvin, 칼빈의 본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의 삐까르디(Picardie)라는 지역에 누와용(Noyon)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구 성당의 서기인 제라르 꼬뱅(Gérard Cauvin)이며 어머니는 쟌느 르프랑(Jeanne Lefranc)인데 그의 어머니는 칼빈이 어릴 때 사망했다. 제라르쟌느 르프랑 사이에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샤를르(Charles)는 신부(=사제)가 되었지만 후에 이단으로 고발되어 1537년에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칼빈이고 셋째인 앙뚜완느(Antoine)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합류하여 칼빈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뚜완느프랑수와(François)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아내가 사망한 후 재혼하여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칼빈의 두 이복동생 가운데 마리(Marie)는 두 오빠를 따라 제네바로 와서 살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한 명은 누와용에 남았다.


칼빈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와용에 있는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Cappettes)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빈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이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1523년 8월에 칼빈몽모르(Montmor) 가문의 소년 몇이 공부를 더하기 위해 파리(Paris)로 이주했다. 칼빈이 처음 파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마르슈 학교(Collège de La March)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는 인문주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학교육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교육 과정은 처음에 문법, 수사학 그리고 논리학(소위 3학)에 중점을 두었으며, 그 이후에 산술,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음악(소위 4과)에 중점을 두었다. 그곳에서 마뚜랭 꼬르디에르(Mathurin Cordier)는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다. 꼬르디에르는 근대식 교수법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칼빈은 이 학교에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꼬르디에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1562년 칼빈의 요청으로 꼬르디에르제네바로 옮겨와 가르쳤기 때문이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빈은 자신의 이름을 라틴식인 요아니스 칼비누스(Ioanis Calvinus)로 개명했는데, 이것이 프랑스어로 쟝 깔뱅(Jean Calvin)이 되었다. 1523년 말 즈음에, 그는 더 유명한 몽떼귀 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는 에라스무스(Erasmus)와 라블레(Rabelais)도 다닌 적이 있었다. 1514년부터 1528년까지 몽떼귀(Montaigu) 대학의 교장은 삐에르 땅뻬뜨(Pierre Tempête)였다. 그는 보수적인 학자 노엘 베다(Noel Beda)의 계승자였다. 칼빈이 토론술을 배운 곳이 바로 이곳이며, 그 과목은 이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동생활형제단의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 운동이 이곳에도 영향을 받았고 철학과 신학 모두가 유명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칼빈(Cop) 가문의 몇 사람과 친분을 가졌다. 기욤(Guillaume)프랑수와 1세의 왕실 의사였기 때문에 다양한 인문주의와 개혁주의 정신을 가진 그룹들과 접촉하였다. 네 명의 그의 아들들은 칼빈과 동료였다. 칼빈 가문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도 이러한 접촉에 아주 많이 노출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칼빈은 역시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던 사촌 삐에르 로베르 올리베땅(Pierre Olivetan)과 교제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에 따르면, 올리베땅이야말로 칼빈에게 참 종교를 가르친 사람인데, 이로 인해 칼빈이 성경을 읽고 로마교의 미신으로부터 개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Loyola)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와 칼빈몽떼귀 대학에서 마주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1527년 9월27일, 두 번째로 성직록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은 누와용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마르뜨비여(Martheville)의 쌩 마르뗑(Saint Martin) 목회직에서 생기는 수입이었다. 그러나 1527년 칼빈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성당 참사회와 직무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자 칼빈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그 이유는 아들이 성직록 없이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동시에 젊은 칼빈이 법학을 공부할 경우 미래가 더 넓게 보장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파리에서는 교회법만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1527년 말 혹은 1528년 초에 칼빈은 유명한 법학자 삐에르 드 레스뚜왈(Pierre de L'Estoile)이 강의하는 오를레앙으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빈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빈멜키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오를레앙에서 헬라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칼빈이 법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에게 헬라어를 공부하도록 권했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와 다니엘(Daniel), 프랑수와 드 꼬낭(de Connan), 니꼴라 뒤쉐맹(Nicolas Duchemin) 등이 있다.


1529년 여름에 칼빈은 대학을 옮겼다. 오를레앙에 있는 드 레스뚜왈의 다소 정통적이고도 전통적인 강의를 계속 듣는 대신, 친구 프랑수와 다니엘니꼴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쥬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Andrea Alciati)가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키아티앙굴렘(Angoulême)의 마르거리뜨(Marguerite)에 의해 그곳에 오게 되었다. 마르거리뜨는 1527년 두 번째 결혼으로 나바르(Navarre)의 여왕이 되었고, 또한 베리(Berry)의 공작 부인의 자격으로 부르쥬(Bourges)에 있는 대학을 후원하였다. 1529년에 볼마르(Wolmar)도 마르거리뜨의 초청으로 부르쥬로 왔는데, 당시 아직 어린 아이였던 베자(Beza = Théodore de Bèze)가 그와 동행하였다. 칼빈은 아마도 볼마르의 집에서 베자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1531년 3월 칼빈파리로 돌아갈 때 출판하기 위해 니꼴라 뒤쉐맹의 저서 『반박문』(Antapologia)을 가지고 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으며 그것은 그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 칼빈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년 5월 26일 사망했다.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에 매장하기 위해 성당 참사회와 협상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교회로부터 출교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다시 오를레앙을 경유하여 파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1530년에 새로 설립되어 후에 프랑스 대학이 된 왕립 대학에서 보다 심도 있게 어학 공부를 하고자 했다. 이 대학에서는 인문주의적 학습과 성경적 믿음을 결합하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칼빈이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이 때였을 것이다. 파리에서 그는 가문과 새롭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또한 개혁에 동조하던 부유한 상인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Etienne de La Forge)의 집을 정기적으로 드나들게 되었다.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동일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제라르 루셀(Gérard Roussel)의 인도 아래 이 집에서 비밀리에 자주 모였다. 파리에서 여러 집을 전전한 뒤 칼빈은 마침내 포르떼 대학(Collège Fortet)에 정착 하였다.


1532년 4월 4일에 칼빈은 처음으로 로마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학문적인 저서 『관용에 관하여』(De clementia)를 주석하여 출판하였다. 1532년 그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왔고 법률 공부를 마치기 위해 최소 1년은 이곳에서 지냈다. 1533년 11월 1일(만성절: 모든 성인의 날), 새 학기를 시작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꼽은 교수들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기독교적 철학에 관해, 그리고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날카로운 어조의 연설을 하였다. 파리 국회는 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그는 도시를 빠져 나갔다. 국왕 프랑수와 1세(François I)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빈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 나갔다. 그는 파리 근교 어느 곳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쌩똥쥬(Saintonge) 지방으로 갔다. 칼빈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Claix)의 교구목사요 앙굴렘에 있는 성당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띠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뒤 띠예의 보기 드문 아주 큰 서재를 평화롭고 조용하게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그의『기독교 강요』 초판을 위해 연구하고 작업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1534년 4월 칼빈은 80세가 된 르페브르(Jacuques Lefèvre d’Etaples)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é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1536년에 사망함) 네락에 있는 앙굴렘마르거리뜨 소유의 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빈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빈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25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칼빈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 도시의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 그룹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아마도 플람스(Vlaams)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인 깡뗑 티프리(Quintin Thieffry)을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는 칼빈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칼빈과 그와의 약속은 실행되지 않았다. 미카엘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뒤 띠예와 함께 클레를 경유하여 뿌와띠에르(Poitiers)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빈은 그 곳 도시 외곽 쌩-브누와(Saint-Benoît)에 있는 동굴에서 설교를 하였다. 칼빈뿌와띠에르를 떠나 뒤 띠예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여행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영혼불면』(Psychopannychia)을 집필했다.


1534년 10월 17-18일 밤에 성찬을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 전체(심지어는 왕의 침실 문에도)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다(플래카드 사건). 이 문서의 기안자는 앙뚜완느 마르꾸르(Antoine Marcourt)인데, 그는 리용(Lyon)에서 추방된 후 뇌샤뗄(Neuchâtel)의 주교가 되었다. 왕은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Guillaume Budé)의 권고 등으로 인해 일단의 조치를 취했으며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위험하게 되어갔다. 11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 다음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뒤 띠예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바젤로 갔다. 칼빈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키아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는 1531년에 바젤의 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를 계승한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를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바스티안 뮌스터(Sebastian Münster)도 알게 되었는데, 베자칼빈이 그의 강의들을 수강한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Bonifacius Amerbach) 등과도 사귀게 되었다. 이 바젤 시기에 칼빈은 1년 먼저 그곳에 와 있던 니꼴라 꼽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삐에르 비레(Pierre Viret)를 알게 되었으며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와도 사귀에 되었다.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쮜리히쯔빙글리의 계승자로서 여러 개신교 도시를 대표하는 사절단들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1536년에 7월 12일에 사망한 에라스무스칼빈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5년 6월 4일에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경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쓰여 진 추천 서문은 칼빈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빈의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빈크리소스톰(Crysostomus)의 설교집의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의 초판 작업도 계속해 나갔다. 이 책은 1535년에 완성되었다. 『기독교 강요』의 서문은 8월 23일자로 되어 있으며, 국왕 프랑수와 1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매진되었다.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인 1536년 2월에 칼빈은 이전에 사용했던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으로 루이 뒤 띠예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하였다. 개혁정신을 가진 국왕 루이 12세의 딸이며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친척인 레나타(Renata. 불어로는 르네[Renée]) 공작 부인의 궁정에서 칼빈은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페라라(Ferrara)에 수 주간 머물렀다. 그녀는 1527년에 페라라의 공작 에르뀔르 데스뜨(Hercule d'Este)와 결혼하였다. 페라라에서 칼빈은 프랑스로부터 피신해 온 개신교도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Clément Marot)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뒤 띠예아오스타(Aosta)를 거쳐서 바젤로 돌아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임시 특별 사면, 즉 망명객들은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6개월 안에 공개적으로 이단과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특별 사면이 포고되자 칼빈은 다시 프랑스로 곧장 떠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였고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일을 정리했다. 동생 앙뚜완느마리가 그와 동행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지만 프랑수와 1세칼 5세(Karl V)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길을 가로막고 있던 군대의 이동을 피해 우회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2. 첫 번째 제네바 체류(1536-38)

1536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십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이 도시는 1526년 사부와(Savoy) 공작령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프라이부르크(Freiburg = Fribourg)의 주들과 소위 시민연대라 불리는 동맹을 맺었는데, 이것은 동맹을 맺은 주 가운데 하나가 위험에 처할 경우 다른 동맹 주들이 돕도록 하는 것이었다. 제네바의 주교 삐에르 들 라 봄(Pierre de La Baume)은 주로 사부와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사부와 공작의 세력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년 이후 개신교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Guillaume Farel)과 그를 돕고 있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로 줄곧 제네바에도 종교개혁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의 공작과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다.


칼빈제네바를 거처 갈 때 그는 뒤 띠예에 의해 알려졌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칼빈제네바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빈에게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개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칼빈은 승낙하고 말았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자신의 『시편 주석』(In librum Psalmorum... Commentarius)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칼빈바젤로 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난 후, 1536년 9월 5일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네바쌩 삐에르(Saint Pierre) 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는 성경 교사로서의 임무를 시작했다. 또한 잘 알려진 것처럼 1537년 이전에 이미 그는 제네바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0월에 파렐삐에르 비레칼빈과 함께 로잔느(Lausanne)에서 열린 공개 종교 토론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칼빈은 교부들에 대한 지식으로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전에 베른에서 열린 또 다른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1537년 1월 16일에 제네바의 목사들은 시의회에 일련의 규정들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해 필요한 주요 규정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 규정들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시민들은 교회와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만 했다. 이 도시의 시민들 앞에 『신앙교육서와 신앙고백서』(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가 제시되었지만 이에 동의하도록 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 도시에서 불안을 조성시키고 있던 재세례파들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1538년 1월에 목사들은 그 때까지도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지만 시의회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시의회가 베른의 요청에 따라 베른에서 행해지고 있던 몇 가지 교회의 관례를 제네바에 도입하려 하자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목사들이 이러한 변화에 기꺼이 순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1538년 4월 25일에 이들은 강제로 도시를 떠나야 했다. 칼빈파렐베른쮜리히를 통과하여 바젤로 갔다.


3.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체류(1538-41)

바젤에서 몇 주일을 지낸 후 파렐뇌샤뗄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목사가 되었다. 칼빈은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판을 준비하기 위해 바젤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러나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써(Martin Bucer)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스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빈은 마침내 부써의 강요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새로이 구성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539년 칼빈은 또 그 지역의 김나지움(gymnagium,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의 문과 내지는 대학의 예과 정도에 해당됨-역주)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신약성경 해석을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칼빈은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1539년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36년의 제목을 약간 변경하였고 이후로 출판된 것들은 모두 이 제목을 따름)의 두 번째 라틴어판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1536년 초판의 3배 분량이었다. 1540년 그의 많은 주석 가운데 최초의 것인 『로마서 주석』(Commentarii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이 나왔다. 이 기간에 칼빈은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부합하고자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도 썼는데, 이것이 1541년 제네바에서 출판된 『성찬 소고』(Petit traicté de la saincte cène)이다.


쟝 스또르되르(Jean Stordeur)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스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페스트로 사망하자 1540년 8월 6일에 칼빈은 그의 미망인인 이델레뜨 드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했다. 이미 1539년 5월 19일에 칼빈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고 이 일은 여러 번 성사될 뻔하기도 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이 가능성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칼빈이들레뜨의 결혼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정식 혼인으로 서약되었으며 아마도 그것은 파렐에 의해 예배 시간에 승인되었을 것이다.


1542년 7월 28일 칼빈이들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자끄(Jacques)였다. 그러나 이 아들은 조산아로 태어나자 곧 사망했다. 이들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사망했다. 칼빈삐에르 비레에게 보낸 4월 7일자 편지에서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살아생전에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하게라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또한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임종시에 그녀가 자신의 첫 번째 결혼에서 생긴 아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빈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그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돌보겠노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칼빈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물던 시기에 제네바와 가졌던 접촉들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파렐에게 보낸 1538년 10월 24일자 편지에서(CO 10b:273-76) 칼빈은 혼란이 지배하는 제네바의 상황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파렐칼빈의 후원자들은 파렐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기에르멩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는 아미 페렝(Ami Perrin. 시의회 의원)과 앙뚜완느 쏘니에르(Antoine Saunier. 1536년 5월에 설립된 라 리브[La Rive] 학교의 학장), 그리고 마뚜랭 꼬르디에르(라 리브 학교와 1537년부터 관련을 맺고 있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새로 부임한 목사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앙리 드 라 마레[Henri de la Mared] 외에 자끄 베르나르[Jacques Bernard], 쟝 모랑[Jean Morand], 앙뚜완느 마르꾸르[Antoine Marcourt] 등이 그 목사들이다), 자신들이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파렐에게 보낸 1540년 3월 29일자 편지에서(CO 11:30-31) 칼빈제네바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의 편지를 기다려 왔노라고 썼다. 2월에 아르띠뀔랑 파(Articulants. “매국노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1539년에 제네바에 상당히 불리한 협약을 베른과 맺은 제네바 시의원들을 가리킴)와 기에르멩 파들은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극복했다. 또한 칼빈제네바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그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제네바에 체류하는) 위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식으로 백 번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하려는 사람들을 말려달라고 파렐에게 호소했다.


1540년 9월 2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열렬한 기에르멩 파(Guillermins. 기욤파)의 한 사람인 아미 페렝에게 칼빈제네바에 돌아오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10월 13일에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칼빈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간단한 공식 서한이 10월 22일에 보내졌다. 이 편지 때문에 이틀 동안 칼빈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10월 23일에 답장을 보내서 제네바 교회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정말 딜레마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요구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말 순종하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간단하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목사는 부르심을 받은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내적인 확신과 신자들의 동의 없이는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다음날인 10월 24일에 칼빈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면 파렐이 원하는 일(즉, 제네바로 돌아가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 자신의 주인이 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심장을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칼빈의 좌우명이 된 이 말은 그의 기념주화에 새겨진 그림이 되었다. 그 기념주화에서는 심장을 들고 있는 그의 두 손이 그려져 있고 "준비된 자세로 그리고 성실하게"(prompte et sincere. 신속하고 진지하게)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1541년 5월 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에게 내려졌던 금지령을 폐지하고 만장일치로 칼빈을 다시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칼빈, 파렐, 소니에르, 그리고 다른 몇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받들어졌다. 칼빈은 마침내 1541년 9월에 제네바를 향해 출발했다.


4. 두 번째 제네바 사역

당초 칼빈제네바에 임시로 머무른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가 자신의 제안대로 교회법 초안을 작성하겠다고 결정하자 최선을 다해 언제나 제네바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해버렸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시의회와 칼빈,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제네바 목사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9월 26일 새로운 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비록 칼빈의 생각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1541년의 교회법은 제네바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교회법은 1547년에 증보되었으며 1561년에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그동안에 칼빈의 부인이 제네바로 오는 일정과 짐을 옮기는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칼빈은 다시 목사직을 맡기로 했다. 자신이 돌아온 후 첫 예배 시간에 칼빈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직분자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리고 1538년에 중단되었던 성경 본문에서부터 다시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단지 직무상의 중단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교회법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승인된 다음날인 1541년 11월 21일에 시민법을 제정하기 위해 시의회는 세 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위원을 임명했다. 칼빈도 이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543년 1월 28일에 제네바 총회는 재판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시민법을 채택하였으며, 그 제외된 부분도 1544년 초에 채택되었다.


교회법을 개정하고 시민법을 제정하는 등 칼빈의 귀환은 시의 여러 가지 행정들을 처리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시의회와 교회의 역할을 정의해야 하는 문제, 또 그 도시에 새로이 도입된 엄격한 생활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구 제네바 시민들인 제네바 출신들(enfants de Genève)과 점점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에 반대하는 당을 형성했다.


4-1. 엄격한 생활 방식으로 인한 갈등

제네바에 새로 도입된 더욱 엄격한 생활방식에 대해 저항이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카드 제조사의 사장을 역임하고 소의회의 일원이었으며 포병대 대위인 삐에르 아모(Pierre Ameaux)의 아내가 1545년 1월에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인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아모는 재혼을 허가 받았다. 1546년 1월 26일 아모칼빈이 자신의 최근 이혼 소송에서 반대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빈의 교리와 생활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모는 체포되었다. 소의회는 온건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아니면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선택을 하지 못해 결국 이 문제를 200인 의회에 상정했다.


1546년에 춤을 금지하는 법을 위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칼빈제네바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는 시장관인 앙블라르 꼬르느(Amblard Corne)와 포병대 대장인 아미 페렝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치리회에서 페렝의 아내는 치리회 회원들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는데, 그들이 자기 집안인 파브르 가문(the Favres)에 대해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치리회 회원들은 그녀 아버지의 간통 문제에 대해서도 일련의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1546년 8월에는 페렝-파브르 가문과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아벨 뿌뺑(Abel Poupin)이 집례한 아미 페렝의 친척 결혼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을 듣고 있지 않던 신랑이 "예"라는 대답 대신 머리를 내저어버렸다. 곁에 서 있던 아미 페렝은 웃어버렸고 이 둘은 시의회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게다가 페렝 부인의 삼촌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결혼식 전날에 페렝의 어머니는 싸움을 하던 중에 가족 한 사람을 때려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녀는 교회치리회 앞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달아나 버렸다.


1547년 9월 20일에 시의회 회의석상에서 아미 페렝은 자기 아내와 장인의 수감과 관련하여 시의회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페렝 역시 체포되었고 10월 9일에는 그의 의장으로서의 직분이 박탈되었다. 그에 대한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다음과 같은 고발이 접수되었다. 5월에 베른 대표로 파리에서 열린 앙리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페렝은 그곳에서 황제 칼 5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베른제네바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수백의 기마병 지휘권을 페렝에게 주겠다는 추기경 뒤 벨레(Du Bellay)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베른페렝을 지지했으며 페렝을 고발했던 로랑 메그레(Laurent Maigret) 역시 페렝파리에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프랑스 왕실의 도움을 얻고자 했음을 폭로했다. 메그레도 체포되었다. 시의회 내에서의 토론은 격렬해졌다. 11월 29일에 페렝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 메그레는 감옥에 남겨졌다.


1548년 가을에 칼빈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칼빈로잔느에서 가인(Cain)이라 불리고 있었고 곧 제네바에서 축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11월 선거에서 칼빈의 대적들이 승리했다. 이제 그들은 사법부와 관련된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칼빈은 다가오는 시 장관 선거가 시 정부 내에서 완전한 개혁을 창출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1549년 1월 18일에 시의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시 전체에 복음을 따라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법을 지키도록 요구했다(CO 13:158-60).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적인 생활을 준수하며 교회 예배에 충실히 출석하라고 간곡히 권고했다. 규정 준수 여부를 감독하던 사람들은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만 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도록 요구되었다. 목사들의 직위 해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히 처리하도록 했다. 포고문은 그 다음 예배 전에 공포되어야 했다.


칼빈이 염려한 대로 1549년 2월에 아미 페렝은 수석 시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555년 2월에 거행된 선거는 칼빈의 추종자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4명의 시 장관 모두 칼빈을 지지하였으며 페렝의 추종자들인 제네바 출신들은 모든 정치 일선에서 영향력을 잃어 버렸다. 그 다음 달에 다수의 프랑스 망명객들(약 50명)이 제네바 시민권을 취득했다. 페렝 가문을 포함한 오랜 제네바 가문들은 많은 프랑스 망명객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1555년 5월 6일 시의회는 시민권을 획득한 프랑스 망명객들에게 10년 동안 선거권을 허락 하지 말고 무기 소지를 금하자는 페렝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요구안을 지지하기 위해 5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5월 16일에 시위 집회를 가졌으며 이 시위를 마칠 때 다수의 시위대가 제네바 출신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날 밤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시 장관 오베르가 누군가를 체포하려 하자 페렝이 자기 수하의 간부를 낚아채 갔다. 다음 날 조사가 진행되어 5월 23일에는 주동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소의회와 대의회는 페렝의 사건에 착수하였지만 그는 체포되기 전에 다른 세 명과 함께 도시를 빠져 나갔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 중 세 명에게는 형이 집행되었으며 나머지는 망명했다. 베른 시의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으며 부재중에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 중 한 명인 프랑수와-다니엘 베르뗄리에르(François-Daniel Berthelier)는 제네바로 돌아왔는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9월 2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페렝파의 종말을 초래했다.

1555년 5월에 페렝파의 패배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로 칼빈은 편지에 제네바의 상황들을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투쟁이 끝나자 종교개혁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다. 칼빈은 또한 주변국가의 교회 일에 좀더 깊이 연루되었다.


4-2. 제네바 아카데미

제네바 아카데미는 1559년 6월 5일 칼빈을 의장으로 하여 쌩 삐에르 교회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 개교했다. 이미 칼빈스트라스부르크에서 돌아온 직후인 1541년에 학교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555년에 제네바에서의 정치적 상황들이 변할 때까지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학설립을 위해 먼저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1558년 초 부르-드-푸(Bourg-de-Four) 병원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건축을 할 수 있는 정부의 재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칼빈은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모금하는 일을 관장했다.

칼빈과 다른 목사들은 교육 계획안을 만들어 승인을 받기 위해 시의회에 제출했다. 새로운 대학에서 기존에 있던 라 리브 학교는 7학급의 사립초등학교(schola privata)가 되었다. 처음 두 학급에서는 아이들이 불어와 라틴어 쓰기 읽기를 배웠다. 그리고 다음 학급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독해 영역과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는 영역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수요일에는 수업이 없었다. 아침에 학생들은 교회에 갔으며, 오후에는 휴식 시간을 가졌다. 토요일에는 학습했던 내용을 복습했으며, 다가오는 주일을 위해 교리문답을 공부했다. 학습을 시작하는 날이 되면 교리문답에 있는 기도로 (특히 학교를 위해) 시작했다. 기도와 시편 찬송은 학습 시간표에 고정적으로 들어 있었다. 학생들은 또한 주기도문 암송과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을 배웠다. 교사들은 목사들과 교수들에 지명되었으며,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사립초등학교에 출석하던 학생들은 시립중등학교(schola publica)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 학교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의 기관이었다. 등록한 학생은 제네바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고 교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임명된 5명의 교수가 가르치는 27개의 강의 과정을 수강하였다. 히브리어 교수는 히브리어 주석을 이용한 구약성경 해석으로 학생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리스어 교수는 그리스 철학자(특별히 윤리학이 주목을 받았다)와 시인의 글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인문학을 담당하던 교수들은 자연과학, 수학, 그리고 웅변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특히 마지막 과목은 목사나 변호사를 준비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쳤다. 토요일 오후에는 실제적인 신학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몇몇 목사들의 지도 아래 학생들은 설교를 발표하고 평가를 받았다. 이미 언급한 교수들 외에도 성경해석을 위한 두 명의 교수가 있었다. 대학 초창기에는 칼빈베자가 이 자리를 채웠다. 교수들은 금요일에 있던 목사회에도 참석했다. 포도 수확 철에는 3주간 방학 했다.

1559년 6월 5일 쌩 삐에르에서 이 도시의 비서관 미쉘 로제(Michel Roset)가 대학의 규정들을 크게 낭독하고 교사들이 그 법률과 신앙고백서에 동의하기로 맹세한 뒤 목사들이 시의회에서 대학 학장으로 추대한 베자가 개막 연설을 했다. 대학이 자리 잡은 건물은 15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에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이나 법률 중 한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다.


4-3. 칼빈의 마지막 시간들

1555년 5월 칼빈의 반대파들이 제네바에서 떠나간 후, 종교개혁자들이 그 이전보다 갈등이 훨씬 줄어든 시기에 들어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556년부터 그의 건강은 쇠약해져 갔다. 엄청난 노력과 그의 동생 앙뚜완느의 도움으로 『기독교 강요』의 새로운 판을 준비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칼빈은 1558-59년의 겨울 동안 심하게 앓았다.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할 때 그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했지만 1564년 초에 그의 좋지 않은 건강 탓에 그 활동 중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1564년 2월 2일에 에스겔서를 인용하며 칼빈은 마지막 강의를 했고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했다. 4월 27일에 칼빈은 시 장관들과 소의회의 의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칼빈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칼빈의 집으로 찾아 갔다. 칼빈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칼빈은 그들의 우정에 감사를 표했으며 비록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기는 했어도 하나님께 봉사하며 이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자신의 결점을 참아 준 그들의 인내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그가 실패한 일들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칼빈은 그들에게 공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추구하라고 당부했다. 그런 후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된 베자를 추천하면서 칼빈은 목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후 칼빈은 다수의 친구들과 주요 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5월 2일에 마지막 이별의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파렐칼빈을 방문했다. 5월 19일에 목사들이 그의 집에서 정기적인 주간 모임을 가졌을 때 칼빈도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 5월 27일에 그는 사망하였고 다음 날 매장되었다. 칼빈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숭배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의 무덤조차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