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역사신학이야기

청교도의 설교_장호준

한스킴 2018. 8. 27. 22:16

참고자료

청교도의 설교

║장호준 전도사 (고신대 신학대학원)║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장로교회는 여러 면에서 청교도적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이다. 그 신앙교리와 삶의 경건성 한국 장로교회는 청교도 사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표준서들을 받아들이므로 청교도 신앙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영적 생명을 공급하는 방편으로서 설교에 대한 한국 장로교회의 인식은 바로 청교도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청교도들의 설교의 그 우위성 확보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약술하고, 그들이 설교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들이 설교에 담고자 하는 주된 사상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강단의 존엄성 사상의 뿌리를 확인하고, Q.T. 그룹성경공부, 성경주제토론 등으로 예배를 대체해 가고 있는 풍조에서 설교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저하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2. 청교도들이 설교 우위성 확보를 위한 투쟁의 역사

청교도들은 주님을 ‘설교자’로 봤다. 그들은 “주님은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설교라는 방법을 택했다”고 늘 생각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도 ‘설교자’였고, 오순절 날 베드로가 보여준 것도 ‘설교’였으며, 바울도 탁월한 ‘설교자’로 봤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중세의 요한 타울러(J. Tauler)는 성령에 의해서 크게 각성 받고 설교자로 사역했으며,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던 요한 위클마(J. Wycliiffe)도 위대한 설교자였다. 종교개혁과 부흥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설교의 부흥이요, 설교를 통해서 주어진 축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한타울러(J. Tauler)의 영향을 받았던 마틴 루터는 영적 통찰력을 가졌던 위대한 설교가였고, 제네바에서 목회를 했던 존칼빈(J. Calvin)은 거의 매일 설교를 했던 전형적인 설교가였다. 칼빈의 영향을 받았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또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되어지는 방편은 설교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고 확신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은 “교리, 예배, 교회 정치가 그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는 것"이요, 그 예배에 허락된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에 있다고 봤다.


그러면 설교란 무엇인가? 윌리암 브래드쇼(William Bradshow)는 영국의 청교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 대해 규정하면서 글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설교에 대해 정의하기를 “설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여 공회에 엄숙하게 그리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중에게 교훈과 책망으로 적용하는 것이다.”고 했다. 또한 “설교는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로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되어지는 것인데, 성령이 내적 증거에 의해서 성도의 마음에 확신을 심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 자체”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 함몬드 박사(Dr. Hammond)는 영국 국교를 대표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기를 “별나게 경건하게 하면서 앉아 듣고 있는 자들, 몸으로 섬겨야 할 시간에 앉아서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예배의 내용에서 설교의 우위성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인간은 건널 수 없는 큰 심연으로 구별”된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와 주셔야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도나 찬송보다 설교를 통해서 찾아오시고 말씀하신다.”고 확신하였다. 청교도 사상을 가진 시골 설교자들은 장날이 되면 장이 서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정규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청교도사상을 가진 주교들은 이들의 모임을 위해 장소를 마련해 주고 하사금을 주어서 격려했다. 이 때 이들이 하는 일은 정해진 성경본문을 돌아가면서 해석하고, 그 밝혀진 진리로 설교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설교자들만 참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개적으로 뜻있는 사람은 누구나 듣도록 허락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설교가 무엇인지를 훈련하는 일종의 선지학교인 셈이다. 로마 교회에서는 성례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설교가 경시되었고 참다운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설교자가 필요함을 느끼던 차에 시골 목사들의 장날 모임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에드문드 드린달(Edmund Grindal)이었다. 그가 1576년에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받아 왔을 때, 목사들의 장날 모임이야말로 교회 개혁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지원하면서 적극적으로 이 일들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군주 엘리자벳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설교를 무서워했던 것이다.” 왕의 감독들은 왕을 즐겁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설교자를 훈련하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근의 태도에 힘입은 여왕은 “한 교구 내에는 설교자 3,4명이 있으면 족하다. 부목사, 신부들을 두어 자격자의 설교를 복사해서 교구 백성들에게 읽어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대주교에서 그렇게 시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Grindal은 그러한 여왕의 명령에 강력한 표현으로 거부했다. 그는 “나는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거스르면서까지 목사의 설교권을 억압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설교에 대한 신념 때문에 왕의 명령을 거부한 Grindal은 대주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결국 설교는 공적인 예배에서 금지되게 되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설교가 금지된 후 다른 대책을 마련했는데 그것이 강좌(Lectures)라고 불려진 설교 행위였다. 이 강좌는 경건한 설교자들이 행한 것인데, 그들은 교구 일을 맡지 아니하고 성경 강해와 설교에만 전념하였다. 공적 예배에서 하는 설교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로 청교도 상인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렇게 청교도들은 설교의 사역을 보존하고 지켜온 것이다.


이들 자유 설교가들은 여왕의 명령에 양심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Holt Trinity Minories 교구에 모여들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청교도 사상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교구는 청교도운동의 본거지가 되었고, 역사적으로 처음 자기들의 설교를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독립성을 쟁취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예배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한 가운데 세워둔 제단을 치우고, 그 자리에 설교 강단을 세우고 성경을 거기에 펴 놓았던 것이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도 매일 설교했고, 체계적으로 설교를 했다. 그래서 “청교도들의 가장 강력한 특징 중의 하나는 설교자의 설교를 신뢰하고, 설교 듣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를 통해서 공급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Puritan들이 남겨 놓은 유산은 오직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청교도들의 설교사역에 대한 태도

존 메이어(John Mayer)는 설교자에 대하여 말하기를;

선포하도록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그가 말한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구세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말씀을 선포하러 나아갈 때 “너희 말을 듣는 것은 나의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멸시하는 자는 나를 멸시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에 집어넣어 주신 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피터 루이스, 「청교도 목회와 설교」, 서창원 역(서울: 청교도 신앙사. 1991),pp. 61-62.

고 했다. 리차드 십(Richard Siddes) 역시 설교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열정적으로 표현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높이 오르셔서 사로잡힌 자를 이끄실 때, 그가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모두 만날 때까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선지자로, 어떤 이는 교사로, 설교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 내 마음에 합한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렘 3:15)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은사 중에 은사인 말씀 선포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그처럼 귀중히 여기셨기에 그리스도 역시 중요시하셨고, 우리들도 설교자의 소명을 아주 존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한결같이 설교의 영광과 존엄성을 강조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설교라는 방편에 비중을 두셨기 때문에 영광과 존엄성이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이 왜 그처럼 설교를 존귀히 여기고 목회의 영광을 생각하게 되었던가? 이 점에 대해 존 메이어(J. Mayer)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수단이다. …우리의 회심과 믿음 및 구원의 수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더 보편적인 수단은 없다”고 했으며, 토마스 화이트(Thomas White)도 “우리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수단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그리고 다른 수단에 의해서 사람이 부름을 입게 될지라도 말씀 선포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아니 결코 부름을 받지 못한 자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점에 대해서 토마스 구드원(Thomas Goodwin)은 설명하기를 “첫째, 복음 선포 사역은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되고 제정된 것이며(사 55:10-11). 둘째,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제정하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고(요17:19-20). 셋째,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제정하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복음선포 사역을 위하여 일하십니다(사59:21).”라고 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택하셨을까? 구드윈은 문답형식으로 그 강조점을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은 다양하게 일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셨고, 둘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택한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수종들도록 설교의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방법보다 귀로 듣는 설교가 덜 우상화되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기록된 말씀을 읽을 때보다 선포된 말씀을 들을 때요. 듣는 것은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 모두에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기록된 말씀을 남겨 주심과 같이 그 말씀을 풀어 설명하는 은사들도 주셨다. 이 은사는 성도를 낳는 일이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일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는 천명 가운데 한 명 정도이다(욥 33:23). 청교도들은 이처럼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입장을 확신한 자들이다. 그래서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설교를 들으려는 욕망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할 수 있었고, 설교만이 “사단의 종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한 자들이었다.


설교는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사역이지만 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만 하는 것이 청교도 설교자들의 입장이다. 이점에 대해서 키더미스터의 리차드 박스터는 날마다 자신의 심령에 설교한 사람이었다. 박스터는 1655년 12월 위스터 샤이어의 목사들의 요청으로 일련의 설교를 했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목회사역에서 실제로 실천하고 있던 것을 정리한 것들이다. 그것이 그 다음해인 1655년에 「Reformed Pastor」란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다. 박스터는 이 책의 제3장에서 목사의 끊임없는 자기 성찰에 필요한 네 가지 영역에 대해서 언급한다. 첫째,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우리를 비켜 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지옥에서 벗어나도록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며 신실하게 살피라고 수백 번씩 그의 청중들에게 설교했으면서도 자신들은 정작 지옥에 가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청중들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선포한 바로 그 사람이 됩시다. 둘째,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짓지 말라고 설교한 그러한 실제적인 죄 속에 살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만일 죄가 악한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그 죄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까? 셋째,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큰일에 걸 맞는 큰 인물이 되도록 합시다. 설교자는 구원받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비밀한 것들을 가르쳐 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게으르지 말고 성령 안에서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우리는 우리의 모범이 교리에 상반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혀로 말한 것을 생활로 망쳐버리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열심히 성경 말씀을 연구하듯이 생활 속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고 기도하며 자기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경건의 수업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청교도 설교자들은 날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데 무거움을 느껴야 했고, 성공적인 설교사역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도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분명하게 전하고 듣는 이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데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가? 진리를 청중들의 마음에 넣어주기 위해서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인들이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바로 세워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는 무거운 책임을 바로 깨달았던 자들이다.



4. 청교도들의 설교 사상

그러면 청교도들은 무엇 때문에 설교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는가? 그들의 설교에 대한 사상이 무엇인가? 그들이 설교한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다. 어떤 인위적인 교리나 교회가 결정한 교훈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는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하기를 기독교는 하나님이 무어라 하시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일반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친히 나오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청교도들이 이 점을 바로 알았기 때문에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교도 설교가들은 성례나 다른 어떤 예식보다 설교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례를 본질적으로 “복음 설교에 예속된 것”으로 봤다. 그것은 성례의 가치를 저하시켜야 복음 선포가 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례는 복음의 말씀 위에 인치는 것”으로 봤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성례가 아니라 말씀이며, 성례는 그 말씀에 인치고 확신시켜 주며 확증하여 준다는 것이 청교도 사상이다. 그래서 설교를 성례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청교도의 예배순서에는 “성례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찬양의 위치까지 설교가 찬탈해 가버렸다.”고 함몬드 박사(Dr. Hammond)는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설교를 들은 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예절에 대한 잘못이나 무지로부터 깨끗해지고, 진리에 대한 지식이 점점 더 나아가며 …또한 설교는 선택된 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침울할 때 기쁨을 주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그들이 타락했다면 다시 재생시키며 …회의에 빠져 있을 때는 상담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것만이 신앙의 길에 완전히 정착하게 방식이다.”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과 순종 안에서 성숙해 가는 방법은 설교 외에 없다고 확신한 사람들이다. 존오웨(John oweu)은 설교의 유용성에 대해서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창공에 떠 있는 태양과 같다 …그러나 복음 설교는 태양 자체의 내부에 있는 그 빛과 열기를 모든 피조물보다 실제적이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태양의 움직임 그리고 그 광선과 같은 것이다.”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명력을 공급받고 성장해 가는 데 유일한 방편은 복음 설교라는 확신을 가진 자들이 청교도들이다.


무엇보다도 청교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주권을 신앙했던 자들이다. 설교의 궁극적인 효과는 사람의 능력 밖에 있음을 알았고, 설교자의 직무는 오직 말씀을 가르치는 데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보내사 만나게 하는 자들을 회심시키는 일을 그대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회심의 때를 정하는 것은 인간 편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대의 의무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의 수고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시지 않으시고, 자신의 메시지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전했느냐로 판단하신다. 윌리암 거어널(William Gurnall)은 말했다. 설교자는 가르치고 적용하고 권하는 일을 마칠 때 그의 사역은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말씀을 효과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특권임을 청교도들은 겸손히 받아들인 것이다.



5. 청교도들의 설교 방법

일반적으로 영국 국교도의 방법은 하나의 주제를 택한다. 때로는 신학적 주제나 윤리적 주제 그리고 일반적 주제를 택해서 그 주제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달랐다. 청교도의 설교 개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 단어나 구절 또는 단락으로 시작하여 정확한 의미를 밝히는 것이 첫째 작업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찾았다고 생각되면 다음으로 그 본문 속에서 교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리고나서 그러한 교리가 정당한지 그 이유를 밝히고 성경의 다른 본문을 들어 그 교리를 입증해야 한다. 이렇게 교리를 입증하는 것으로 설교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실천적 적용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 방법에 대해서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 그의 책 「The Artof Prophesying」에서 설교자가 늘 의식해야 할 네 가지 원리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첫째, 정경으로서의 성경의 본문을 분명하게 읽을 것. 둘째, 성경 본문에서 이해된 의미를 분명하게 읽을 것. 셋째, 그 의미로부터 가능하고 유익한 교리들을 끌어낼 것. 넷째, 그리고 그 교리들은 단순하고 쉬운 말로 성도들의 삶에 적요시킬 것.

이처럼 청교도의 설교 방법은 해석적이고 교리적이었으며 체계적이고 대중적이었다. 설교의 방향은 그리스도를 향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하는 태도는 간절했다. “다시는 결코 설교하지 못할 것처럼, 죽어 가는 사람이 죽어 가는 사람에게 하듯”하려고 했던 것이 청교도 설교자들의 태도였다.



6. 맺는 말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의식한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영광스런 하나님 임재 의식이 있는가? 청교도적 신앙을 물려받은 우리들에게 청교도 신앙의 생명이었던 하나님 임재 의식,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말씀에 대한 확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강단의 영광과 존엄성이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만한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권능이 있는가? 하나님이시여,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덧입히셔서 우리의 강단의 권위가 회복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