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교회론이야기

칼빈의 교회관/ 오토베버 / 풍만출판사

한스킴 2018. 10. 1. 23:23


Ⅰ.이 책의 논지


 오토 베버(Otto Weber,1902-1966) 는 조직신학자 이면서도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소위 이론신학보다는 교회사와 실제의 교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그는 칼빈의 교회이해가 루터교의 교회관과는 다른 점을 이 책에서 잘 설면하고 있는데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을 위하여 제정하신 기구임을 강조한다.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을 하는 신앙하는 주체인 사람에 역점을 두는 “신앙인의 공동체”의 개념보다,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고,사람들에게 신앙하도록 말씀을 주시며,그의 백성을 다스리시고 보존하시기 위하여 제정하신 기구로서의 교회 개념이 선행함을 말한다.칼빈은 교회이해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말씀 중심임을 알 수 있다. 오토 베버가 칼빈의 교회론을 소개한 점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특징은 칼빈이 교회에 대하여 논한 것을 조직신학 교과서에서처럼 평면적으로 발췌 나열함으로서 칼빈의 교회이해를 소개하지 않고 칼빈의 실제 목회와 역사적인 정황을 감안하며 상관관계를 밝히면서 그의 교회관을 이해하려고 한 점이다.이것은 칼빈이해에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높이 살만한 연구방법으로 이 책을 기술하고 있다.




Ⅱ.이 책의 핵심적 내용.


1장:교회의 형성자 요한 칼빈.

  칼빈을 교회의 형성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초기에 행했던 그의 성경강해와 그리고 훨씬 뒤에 행했던 그의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그리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창설한 사실과 예배의식을 정한 사실을 보아서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칼빈의 교회에 대한 인식에서 교회를 제도로서 이해함과 동시에 모임으로 이해했다.즉 선포된 말씀을 중심으로 볼 때 제도적인 면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의 믿음을 중심하여 생각하면 모임이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다.또한 칼빈은 “에큐메니칼”(Ecumenical)하게 행동하고 생각하였다.그리고 칼빈은 소위 노회보다는 당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그는 당회를 교회의 한 생활 형태에 속하는 반면에 노회는 하나의 보조기관으로 보았다.노회는 교리의 차이를 조정해야 하는 반면에 당회는 권징하는 일을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칼빈에게 있어서 지역교회내,더 포괄적인 성도의 모임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다는 사실은 그가 제네바의 변두리에 있는 지방교회들에 대하여 제네바 시교회의 헙법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칼빈은 여하튼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경륜 안에 있는 것이지 개인이나 개인의 집합체의 결정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그리고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칼빈은 느꼈다.그러므로 칼빈은 교회안에서,교회를 위하여 엄격히 순종함으로서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폭 넓게 봉사했다.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성령의 새로 지으시는 권능이 확장되는 일,그것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교회가 자체의 목적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릇된 교회임에 틀림없다.참된 교회는 자체의 말을 하거나 자체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며,또한 세상의 어떠한 지배자에게 복종하지도 않는다.


2장 칼빈의 교회관.

 칼빈의 교회관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먼저 초기의 칼빈주의는 고교회적이었고,로마 카톨릭의 교회제도에 익숙해 있었다.교회 질서에 대한 로마적인 이해가 그의 사상과 실천의 전제였다.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항상 교회론의 테두리 안에서 말하고 있다.칼빈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보편적으로 선택받은 자의 수”이며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입장에 근거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인할 뿐이라고 한다.이러한 설명의 골자는 어거스틴에게서 배운 것인데,선택과 교회를 연결한 것은 칼빈 자신의 생각이었다.칼빈은 또 교회를 믿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여 추상적인 요구가 없는 개인적인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칼빈은 또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실제로 구별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보고 있다.참신자와 신앙을 갖지 않은 자를 구별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보았으며 따라서 칼빈은 국민교회의 변호자라고 할 수 있다.칼빈은 이러한 그의 견해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교회의 교인으로 보았다.그러나 하나의교회가 두가지 양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는데,이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불가시적 교회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인간의 눈으로 보는 교회인현실의 교회를 잘 유지하며,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도모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의 교회관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신자들의 지체됨이라는 두가지 중요한 개념으로 전개된다.


 또한 칼빈은 교회의 징표로서 두가지를 말했는데 이는 “복음과 성례”이다.여기서의 복음은 “듣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것으로서 이 징표가 소위 가시적 교회에 속해 있어서 모든 관심을 설교와 성례의 올바른 집행에 쏟아야 한다는 것으로,본질, 즉 내용(예수 그리스도)이 중요하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직분을 중심으로한 교회(Amtskirche)로 보았으며 이런 점에서는 자기보다 한세대 앞에 살면서 ‘만인제사장’을 즐겨 논했던 루터보다도 더 전통적인 견해를 취하는 셈이다.그러나 칼빈이 말했던 직분은 다양하며 목사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그러나 목사(minister),즉 말씀의 수종자를 교회직분의 중심으로 생각한다.목사는 이러한 직분 때문에 지역 교회의 지도자이며 치리를 포함하는 말씀의 봉사자라는 뜻에서 장로들이 그를 지원하는 것이다.설교되는 말씀의 우위성 때문에 목사가 첫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외 직분으로는 교사와 집사가 있는데 이의 근거로 칼빈은 엡4:11을 들고 있다.거기에서 장로들은 교회를 이끌며 권징을 행하며 그러므로 감독과 같은 것으로 말하며 또한 이 장로와 더불어 집사는 다스리는 일과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을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교회의 질서와 실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칼빈은 교회 안에 있는 인간적인 기구 또는 조직을 아주 실제적인 말(굥의회,당회)로써 설명한다.


 칼빈은 또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관계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게 설명을 했는데 이는 1561년의 교회헌법에서 소위 두가지 형태의 신정이 타협을 본 것으로 알 수 있다.시장은 당회에 참석하더라도 당회원의 신분으로 참여하여야 하며 그리고 시정부 및 시정부의 통치권과 교회의 영적인 지도권은 분리되어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혼합될 수도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이러한 것은 교회헌법을 편판한 칼빈이 여러모로 칼케돈 신조의 유추를 따르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칼빈의 사역의 결과는 독립교회였다.그는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위하여 기초를 놓았으나 자신은 완전히 자유로운 교회를 제네바에서 경험하지 못했었다.


 칼빈은 하나의 교회를 말할 때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그리고 교회는 보이는 형태로,인간의 활동을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래적인 존재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교래서 교회는 항상개혁도ㅓㅣ어야 한다고 했다.칼빈은 교회를 카톨릭적으로 사고했는데,카톨릭 교회라는 개념은 그의 가르침에서 늘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를 개신교안에서 발견하였다.그래서 그는 이 개신교 교회 내의 보다 나은 일치를 위하여 진력하는 것을 의무로 알았다.칼빈은 보편적인 교회와 지역적인 교회를 구별하는데 다음과 같다.이 둘은 다 같이 볼 수 있는 교회인데,보편적인 교회는 몰론 지방 교회로 나누이지만 신령한 교리라는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데 일치하고 다 같은 신앙의 줄로 한테 연결되어 있다.지역교회는 도시로 혹은 마을 사람들의 필요에 응하여 흩어져 있다.지역교회들 간의 평화는 교회의 징표를 행할 때, 즉 “말씀을 사역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존중할 때“ 가장 잘 보존될 수 있으며 유익이 있다고 했다.또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의미를 지옥이란 장소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없는 것,즉 장소로 서술할 수 없는 상채로 이해했다.칼빈은 또한 신경은 기독교 교리를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하고서는 제네바 시 교회와는 달리 해석하는 교회가 제네바에 있다고 하더라도 정죄될 수는 없고,그럴 경우에는 다른 해석으로 야기될 수 있는 심각한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될 뿐이라고 하였다.그리고 그는 지역교회들은 치명적인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보편적인 신앙고백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다른 가르침의 자유는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서로 관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그러면서도 칼빈은 지역교회 안에 있는 교리의 차이는 용납하지 않고 이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그는 자기가 일하는 제네바 시에서는 엄격했다.그러나 다른 지방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면서 근본적인 신앙만 지키면 된다는 식이었다.


 성례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성례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인간이 이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행위라는 것이다.성례는 그 자체밖에   있는 어떤 것을 상징할 뿐 아니라,그것이 상징하는 대상을 통하여 작용한다.이러한 작용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그래서 칼빈의 성례론을 영적 실재론(sakramentalen Realismus)이라고 한다.이런 성례의 원리를 칼빈은 세례와 성찬에 적용하였다.세례와 성찬은 성례로서 질적인 유사성이 있다.세례는 사죄의 징표요,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할과의 연합이 있으며,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징표의 세가지 개념을 칼빈은 말했다. 그러나 믿음은 세례의 징표로서 필요하며 양자는 서로 관련되고 있다.유아세례의 경우 세례는 중생을 일으키는 징표는 아니고 징표를 효력있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는 성례를 총괄적으로 논할 때의 순서와 비슷하게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칼빈은 그의 성찬 교리를 십자가에 단번에 돌아가신 것과 관련시킨다.칼빈은 루터가 강조한 것만큼 그리스도의 성육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강조한다.칼빈은 그당시 성찬에 대한 양극단론 즉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가 머고 마시는 것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과 성례에서 경험하는 것을 단지 하나의 정신적인 것으로만 축소하려는 주장을 피하려고 하였다.칼빈은 쯔빙글리와는 달리 먹는 것이 신앙에서 나온것이지 먹는 것은 곧 신앙은 아니라고 말했다.성찬의 징표는 다만 성령께서 최선의 축복을 위하여 자의로 임하시는 표지이다.성찬의 거룩한 비밀은 두가지 것을 함축하고 있다.즉 우리는 앞에 놓여서 우리의 연약한 인식 능력을 도와 불가시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그리스도의 몸의 징표와 그리고 동시에 징표 자체를 통하여 빚어지고 제공되는 영적인 진리이다.징표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표현한다.“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징표를 받았으면,그리스도의 몸 자체를 받은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고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밝히고 있다.칼빈ㅇ든 그리스도의 몸이 지금도 실제의 몸이라는 것과 구렇기 때문에 우리의 부활도 실제적인 몸이다는 것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자와 국가에 대해서는 칼빈은 원칙적으로 항거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또한 나쁜 정부에게 주관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항거할 수 있는 권한을 칼빈은 부인한다.오히려 그러한 정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가운데서 다스리신다는 신앙을 말하며,칼빈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을 구약과 구약의 율법에 두지 않고 오직 사랑의 계명에다 둔다.이러한 그의 사상은 점차 항거의 권리를 인정하는 쪽으로 무게를 더하다가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이 개정출판된 이후 항거의 권리를 적극 옹호하는 쪽으로 그 무게를 더했다.이렇게 그의 사상이 점차 변화된 것은 종말론에 대한 사살에서 비롯되었다.칼빈은 그의 종말론의 초점을 개인에게 두지 않고 교회에다 두었기 때문이다.칼빈의 종말론의 요점은 모든 신앙은 장차 올 것을 지향하며,그리고 이미 온 것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과의 사이에 산다. 따라서 신자는 인내함과 동시에 활동한다.칼빈은 천년왕국에 대해서도 천년왕국은 이 지상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개념이지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칼빈은 계시록을 과대평가하지 않으면서 천년왕국은 현세의 축복이든 하늘 나라의 영광이든 제한된 시간에 국한시킬 수 없다는 개념을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교회론은 실제적이었다.그는 자기 시대에 산 사람이다.그리고 그는 자기 시대의 교회를 보았다.그러나 이 교회는 그 영원한 운명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이 개념을 달리 표현하면 선택이다.교회는 다만 하나님의 영원한,미리 예정하시는 뜻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교회는 존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그의 영원하신 듯 가운데서 멸망을 받을 세상으로부터 선택하셨기 때문이다.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교회는 또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유지될 것이다.칼빈은 본체론에서나 교회론에서 실재론자이기 때문에 교회를 종말론적인 견지에서 설명한다.교회는 결코 가시적일 수가 없다.교회는 그 이상이다.교회는 이미 오셨고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Ⅲ.소감

 이 책을 일고 칼빈의 교회관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가 있었느데 나름대로의 느낀점은 교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먼저 칼빈의 교회관이 루터와 차이가 나이는 것이 있다면 예정론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또한 교회의 지표와 성도의 교제를 알맹이로 하는 루터와는 달리 가시적,불가시적 교회로 나눈다는 것이고 이 불가시적 교리는 선택의 교리에서 드러나고 가시적 교회는 성례전과 선포와 신앙고백,삶의 모범,성례참여를 지표로 삼으며 이를 하고 있으면 누구나 사랑의 판단으로 교회의 회원으로 본다는 것이다.그러나 최근의 교회론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매우 심각하게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 속에 투영되어 있는 참 교회라는 개념은 부패한 현실적 교회에 안주할 수 없다는 강한 개혁의지가 그 핵심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에 더 무게를 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사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와의 구별은 두 개의 교회라기 보다는 동일한 하나의 교화의 두 양태로 이해해야 한다.즉 보이는 교회는 현존하는 구체적 교회를 의미하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 혹은 완성된 교회의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칼빈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말한것에 특이한 면이 있다고 하겠다.[칼빈의 교회관]을 읽으면서 느낀점은 칼빈은 루터의 만인제사장직으로 인해 약회된 느낌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들의 위치를 부각시키고 강조했다는 점과 가능한 교직제도를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모든 직책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과 모든 회의 체제가 (당회,제직회,공동의회,노회,총회) 귀족주의적 민주주의(aristocratic Democracy)로서 민주주의적 대의원체제인 점이 두드러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가시적인 건물이나 제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도의 모임인 교회로서의 참 진리가 퇴색되어 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적 조직체가 부패할수록 제도적 교회가 필요없다는 사상의 ‘무교회주의’가 성행한다고 볼 때 우리는 극단적 중앙집권제(주로 카톨릭)나 개인주의적 교회관(주로 개신교)을 경계하면서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언제나 성령의 활동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우리의 교회는 세상 한 복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여 중립을 핑계삼아 본질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교회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전위대로서 사탄을 물리치는 영적 싸움의 최일선을 담당하고 교회밖 ‘선한사람’들과 함께 평화로운 사회위해 봉사해야 할 것이다.이 [칼빈의 교회관]에서는 또 한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지방교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교리적 자유도 허용해주었다는 것으로서 오늘날 현실에 적용시킨다면 타교파를  관용하며 이해로 하나됨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부분적 차이는 불가피하나 신앙의 동질성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한국교회는 하나됨의 자리로 과감히 나아가고 교세확장보다는 말씀 전파를 우선하며 기도하는 자세로 역사개혁 임무를 수행할 때 21세기 주님의 명령을 따른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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