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교회론이야기

교회론 II

한스킴 2018. 9. 10. 15:53

교 회 론

1. 교회론의 역사적 배경


2. 교회의 기초

A. 말씀과 성례전

B. 성령의 역사

C. 인간의 믿음

D. 이스라엘 민족의 “ 약속의 역사”

E. 궁극적 기초 : 예수 그리스도

F.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기초인가 ?

G.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란 무엇을 말하는가 ?


3. 교회란 무엇인가 ?

A. 에클레시아

B. 하나님의 백성

C. 그리스도의 몸

D. 성령의 전

E. 하나님 나라의 표징


4.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A.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

B. 개신교의 전통적 입장

C.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질서 - 카리스마적 공동체

D.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E.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F. 공동체의 새로운 사회 형태

G. 기초 공동체의 이상


5. 사도 계승과 교회 제도의 문제

A. 사도 계승의 의미와 문제점

B. 사도 계승의 의도와 새로운 해석

C. 개신교의 교회관과 교회 제도의 갈등

D. 근대에 있어 개인과 제도의 분열

E. 제도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토의

F. 교회 제도의 정당성

G. 교직의 필요성

H. 교직자와 교회의 공동체의 관계

I. 교직의 본질


6. 특별사제직과 만인사제직

A. 특별사제직을 폐기하는 예수의 죽음

B. 히브리서의 사제직 폐기

C.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제직

D. 여자 사제직(목사직)의 문제


7. 참 교회의 표지

A. 표지의 기능과 성격

B. 전통적 네 표지와 종교개혁의 두 표지

C. 자유와 다양성과 실천 안에서의 통일성

D. 당파성 안에 있는 보편성

E.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거룩성

F. 사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사도성

G. 하나님 나라의 표징


8. 관계 속에 있는 교회

A. 이스라엘과 교회

B. 타종교와 교회

C. 국가와 교회

D. 현대 사회와 교회




교 회 론

1. 교회론의 역사적 배경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에클레시아”는 본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뜻으로서, 사람들을 통해서 구성되는 회중을 뜻한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이 개념이 “하나님의” 혹은 “그리스도의”라는 소유격과 결합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모여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개념은 구약성서의 “카할”의 개념에 상응하며 이 개념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신약성서에서 교회는 “영을 따른 이스라엘”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시작된 교회는 교직 기구로서의 제도 교회가 아니었다. 제도 교회로서 발전하는 현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과 동시에 발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도 계승이 나타났다. 사도 계승을 통하여 제도 교회의 흔들릴 수 없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을 통해서 제도 교회의 이론이 거의 완성되었다. 칼타고의 씨프리안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이를 표현했다. 주후 4세기에 이르러서 교회는 로마의 국가 종교가 되었다. 교직자들은 로마의 국가 공무원이 된 것이다. 니케아 신앙고백에서 교회는 교회의 네 가지 표식 곧 “단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 적인 교회”를 고백하였다. 이 표식은 이후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아우구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계급 제도로 형성된 구원의 기관이다. 그는 외형적인 가시적 교회와 그 속에 숨어 있는 참된 교회 곧 불가시적 교회를 구분한다. 불가시적 교회는 참 교회요,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것이다. 1054년 filioque의 문제로 인하여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로 분열한다. 그 이후 동방 교회는 제의 종교로 발전한 반면, 서방 교회는 법적 성격을 가진 “구원의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서방의 교회는 아우구스틴의 예상을 벗어나 소위 교황주의라는 권한의 교회로 중세를 지배한다. 교황 보니파스 8세에 의하면 세속적인 검과 정신적인 검은 둘 다 교황에게 속한다. 종교개혁은 교회론을 반전시킨다. 참 교회의 표지는 복음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만이 그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조직이나 기구가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적 사귐 내지 교통이다. 정신적 교회는 “ 성도들과 참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이후 종교개혁 신학을 체계화하고자 하였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대변적 교회 2. 종합적 교회 1)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참으로 신앙하는 자들과 거룩한 자들의 모임 2) 가시적 교회 혹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 그것이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에 의하면 이 두 교회는 두 가지가 아니라 교회의 두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회중교회의 개념이 발전하였다. 개교회는 그 위의 통치기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독립적인 회중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근대 구라파의 경건주의는 전통적인 국가 교회를 비판적으로 대했다. 이 비판적 태도는 계몽주의에 와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참 신앙은 교리에 묶인 것이 아니라 자율성을 가진 인간의 이성의 신앙인 것이다. 제도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계속된다.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교회는 종교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사귐이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비조직적인 모임이다. 리츨에 의하면, 교회는 정신적, 윤리적 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활동이 계속되는 장소이지, 법적 질서와 권위를 가진 기관이 아니다. 바르먼 신학 선언에서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활동하는 형제들의 공동체로 정의된다. 칼 바르트는 교회의 제도 주의와 전통주의를 반대하고 교회의 영적, 카리스마적 성격과 사건의 성격을 강조한다. 1948년 결성된 WCC는 교회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주안점은 1.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의 일치성을 분명히 의식케 했고 2. 제3세계의 교회에 대하여 눈을 뜨게 했고 3.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 이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실천과 신학적 사유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였다. 그러나 최근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타 종교들의 형식을 수용하는 방향을 취함으로서 혼합 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는 드센 비판을 받고 있다.



2. 교회의 기초

A. 말씀과 성례전

아욱부르크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의 기초는 복음의 말씀과 성례전이라 말할 수 있다. 말씀과 성례전 가운데 교회의 보다 저 본질적 기초는 말씀이라 말할 수 있다. 말씀 없는 성례전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탄생하여 말씀에 의하여 양육되고 유지되고 성장한다. 루터는 이를 계승하여 교회는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사명과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의 본질은 말씀에 있으며, 교회의 사명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성례전을 동반하는 말씀인 것이다.


B. 성령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성령의 역사 내지 활동에 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 활동함으로써... 공동체, 참된 교회가 생성하고 존재한다. 성령이 사람들과 그들의 인간적 사역을 거룩하게 하며,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참 교회로 세우시기 때문에 교회는 존속한다.”


C. 인간의 믿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응답하는 인간의 믿음도 교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한 요소라 말할 수 있다. 단독 자의 믿음은 철저히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있음, 함께 나눔, 곧 공동체적인 삶을 뜻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유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없는 개인의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신앙적 결단과 그 결과로 얻은 그의 믿음은 성령의 사역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다 원초적 기초는 개인의 결단과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D. 이스라엘 민족의 “약속의 역사”

옛 계약은 그리스도의 새 계약을 통해서 지양되며, 구약성서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지양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것들은 새 계약과 새 계시의 역사적 터전 내지 기초를 형성한다. 옛 계약과 새 계약, 구약성서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계시, 이스라엘과 교회,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으나 연속성도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희망의 지평을 지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희망의 지평 속에서 태어나 활동하였으며, 그의 교회는 이 희망을 함께 나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약속도 교회의 기초 내지 터전을 형성한다. 팔레스틴 땅에서 시작한 교회는 아무런 역사적 관련성 없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의 역사적 연관 속에서 형성되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는 참 희망은 온 창조를 지향하며,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과 행위의 목적과 완성을 지향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E. 궁극적 기초 :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교회의 기초보다 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를 그 위에 세울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닦아 두셨고 이 기초 곧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에베소서 2:20-22의 말씀은 교회는 먼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에 기초한다. 그러나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교회의 궁극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에서 교회론의 시작을 그리스도론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리스도론이 교회론의 내용을 결정한다. 네 가지 기초는 교회의 궁극적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통합된다. 선포된 말씀은 기록된 말씀에 기초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화된 말씀으로서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기초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기초로 간주될 수 있다. 교회를 형성하는 성령의 역사도 성령 그 자체는 내용이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고 성령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삶인 것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증거하고, 자기를 현재화시키며, 자기를 전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나누어주며 공동체를 형성한다.

교회는 다른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각 사람의 신앙적 결단과 믿음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본훼퍼의 명제,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이다”라는 칼 바르트의 명제는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 내지 근거가 무엇이며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함께 교회의 기초를 형성한다. 그러나 교회의 가장 궁극적인 기초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이다.


F.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기초인가 ?

역사의 예수가 교회를 세웠던가 ?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었던가 ? 최근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학자들은 예수가 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16:18-19를 성서적인 근거로 본다. 그러나 콜첼만은 “예수의 종말론적 자기 의식은 오늘의 교회에 대한 생각을 배제한다”고 잘라 말한다. 위의 구절이 오늘날 예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보여지고 있다.

1) 통계학적 논증 : 교회에 대한 두 번의 언급, 마태복음에만 기록, 이것은 매우 불리한 통계학적 수치인 것이다.

2) 종말론적 논증 : 복음서의 예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는 교회를 형성하여 그것을 존속케 할 의도를 보이지 않는다. 요한네스 바이스는 이 구절을 “형성되어 가는 카톨릭 교회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3) 교회사적 논증 : 베드로는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 지도자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방 선교에서 주도적으로 일한 사람은 바울이다.

4) 심리학적 논증 : 베드로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완전한 특성을 가졌다 그런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네 가지 외에도 최근 초대 교회의 연구에서 초대 교회에는 유대파와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16: 18-19는 바울 계열의 공동체와 긴장 및 대립 관계에 있었던 베드로 계열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그의 법통과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관심에서 첨부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의 관심사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에벨링 교수의 말대로 “교회의 설립자”로 볼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초”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복음서의 구절로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사건 전체와 관련하여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삶의 사건을 통해서 교회의 기초를 이룬 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특별한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을 만들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고 먼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것이며 온 우주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를 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에 대한 예수의 의지”에 있다.

2) 온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던 예수의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부르심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세워지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보장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는 부르고 제자들은 따르는 여기에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가 있는 것이다.

3) 예수의 죽음과 함께 깨어졌던 종말론적 공동체는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새롭게 탄생한다. 새 인간성의 공동체는 그의 부활로 증명되며 교회의 기초는 여기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정초 되고 부활의 능력 속에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부활의 능력 속에서 실현되는 교회는 “십자가의 공동체”,“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하여 정초된 공동체”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 자신을 십자가로부터의 교회로,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로, 그리고 십자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서 있는 교회로 이해한다.” 교회는 철저히 십자가의 교회인 것이다.


G.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란 무엇을 말하는가 ?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 내지 근거라는 이 명제는 교회의 존재와 삶과 미래를 결정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를 의미한다.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3) 교회는 그리스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한 마음 한뜻이 되고자 노력하고 그 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해야 함을 의미한다.

4)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이시며,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명제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배타적 통치권을 뜻한다.

5) 교회의 삶과 실천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비판적으로 검증되어야 함을 뜻한다. 기초는 규범의 기능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진위성을 검증하고 판단하는 규범이다. 이것은 교회는 예수의 삶에 비추어 언제나 자기를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자기를 수정하고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6)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한 유대인으로 구약의 지평 속에서 생존하고 활동했다. 특히 묵시 사상의 지평 속에서 생존하고 활동했다. 이것은 교회도 구약의 메시야적 기다림과 희망의 지평 속에서 파악되어야 함을 뜻한다.

교회론이 그리스도론적 정초를 하는 의미는 교회의 존재와 삶과 미래는 철저히 그리스도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존재가 교회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 분의 삶이 교회의 삶을 규정하고, 그 분의 관심이 교회의 관심을 규정하고, 그 분의 목적이 교회의 목적을 규정하며, 그 분의 교회가 미래를 규정한다.



3. 교회란 무엇인가 ?

신약성서의 교회를 표현하는 개념들을 분석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인지를 기술하고자 한다.


A.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는 교회에 대한 신약성서의 기본 단어이다.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1) 구약성서의 희랍어 번역인 70인역은 ‘에클레시아“를 100번 사용한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 세속적 의미의 모임, 모인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하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계약의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의미가 드러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이다.

2) 에클레시아는 신약성서에서 세속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때는 본래 종교적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사자가 불러내어 모인 시민들을 가리킨다. 즉 EKKALEIN과 EKKLETOS로 결합된 어원으로부터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 안으로 파송을 받는 구조를 가진다. 즉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세상 안으로의 파송”의 긴장 관계가 있는 것이다.

3)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의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합적으로 볼 때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인 동시에 신도들의 모임이요, 오직 하나님의 기관인 동시에 믿는 사람들의 사귐이다.

4) 에클레시아란 단어는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를 “회상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기다리는 공동체”인 것이다.

5) 에클레시아는 모여 있는 공동체를 뜻하는 동시에 모임의 사건 내지 과정을 뜻한다.

6) 이 단어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단어는 가정 예배를 의미하기도 하고 한 지역의 예배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게 모든 교회들의 범 세계적 모임과 사귐을 가르키기도 한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다양성을 가진 개 교회로 나타나는 동시에 전체로서 한 교회인 것이다.


B.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는 구약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공동체 역시 유대인들의 민족 공동체와 여러가지 면에서 결합되어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구분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형식을 몇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회개의 죄의 용서의 표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으며, 세례는 장차 올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이 세례예식을 통해서 그들은 옛 이스라엘로부터 구분되었다.

2) 이들은 공동의 예배와 각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옛 이스라엘과 구분된다.

3) 예수가 거행한 성만찬은 회상의 만찬인 동시에 기다림의 만찬으로서 실행되었는데 이 만찬이 구분되는 예식이다.

4)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그 자신의 조직과 운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5) 최초 공동체의 사랑의 교통과 사귐은 그들을 구분해 주었다.

그러나 완전한 유대인 공동체와의 구분은 모세의 율법을 벗어난 자유로운 이방인교회의 설립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성전제의의 중단 사건을 계기로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의 세력이 더 커진 사건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차 반 로마혁명을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옛 이스라엘로부터 공적으로 분리되고 (기독교인들은 불가담) 제2차 반로마 혁명에서 완전한 분리가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을 하나님의 참 “에클레시아”, 참 “이스라엘”,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 하였다. 70인역과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백성” 곧 LAOS는 히브리어 AM에 해당하며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가르킨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개념은 에클레시아의 자기 이해를 묘사하는 가장 오래된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과 같은 개념은 이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교가 육체의 혈통을 중시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의가 그것을 보증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히브리서의 주요한 사상을 형성한다. 여기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유리하는 이스라엘은 새 계약의 백성 곧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형으로 제시된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 위에 있는 나그네요 손님이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찾아 순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가 ?

1) 이 명제는 교회는 모든 인종적 구별을 넘어서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가족”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민족적, 국가적, 지역적, 성적 제한을 넘어서는 “새로운 국제적 하나님의 백성”이다.

2)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3)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복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 실체로 생각될 수 없다.

4)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성을 가지며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숨어 있는 메시야적 희망과 기다림을 계승한다는 것을 뜻한다.

5) 교회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인 사람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교회는 오류와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6) 교회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에 따라 예언자적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 곧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회개를 요구한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전하며 왕적인 백성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섬긴다.

7)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히브리”라고 불리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루비” 즉 “법적 보호 영역 박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회에서도 ”하루비“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

8)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 자체에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궁극 목적”이 아니고 그것의 시작이요 매개체 됨을 말한다.


C. 그리스도의 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명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

1) 교회는 지교회인 동시에 세계교회라는 것을 말한다.

2)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달리 말하여 그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의 통일성을 말한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내적 결합과 통일성을 가르킨다.

3)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교회가 삶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형성되어야 함을 말한다.

4)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의 한 몸 됨과 통일성을 말하는 동시에 그들의 다양성을 말한다.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지체로 구성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용이 서로를 향하여 필요하다.

5) 이 명제는 모든 교인들과 교회들의 평등을 의미한다. 소위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은 주후 3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6) 이 명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 된 관계를 나타낸다.

7)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실 뿐 아니라 교회로서 실존한다. 그는 교회 안에, 교회로서 실존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 형식”이다.

8)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배타적 소속성과 구분성을 내포한다. 이것은 교회가 철저히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의미하며 교회는 일종의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임을 드러낸다.

9)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신체적인 실존,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포괄되어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D. 성령의 전

“교회가 성령의 전”이라는 명제는 다음을 의미한다.

1) 이 명제는 교회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것은 말한다.

2) 예수의 삶은 성령과 함께, 성령 가운데서 시작한다. 성령 가운데서 그의 아버지와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 예수가 수행한 일을 교회가 계승해야 하며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 신약성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성령의 전의 “기초”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전의 기초가 되는 것은 머릿돌 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4) 궁극적으로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는 “돌들”로 구성되는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는 성직자들의 소유가 아니고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5)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 그것은 각 지체가 성령으로부터 받은 카리스마 곧 은사와 이 은사에 따라 각자가 행하는 봉사를 통하여 삶을 영위함을 의미한다. 은사를 성직자 계층으로 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은사 즉 카르스마를 가지고 있다.

6) “카리스마적 공동체”인 교회의 구조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교회는 각자가 그 분량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이다.

(2) 교회의 통일성과 질서는 직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3) 어떤 사람도 자기를 다른 사람 위에 세울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에게 예속시키고 지배할 수 없다.

(4)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므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7) 성령은 교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전이 교회이지만 성령은 교회로부터 구분되며 교회에 대하여 자유롭다. 이것은 성령이 언제 활동할 것인가의 문제가 성령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말하며 성령의 활동 영역도 성령 자신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떻게의 문제도 성령 자신의 것이다.

8) 기존하는 제도교회와 카리스마적 공동체의 관계는 제도교회가 폐지 되어야 함을 뜻하지 않으며 제도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일어날 수 있는 “형식과 가능화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그 속에 일어나는 “연속적인 것”이다.

9) 바울의 성령론적 교회론 내지 카리스마적 공동체 이론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의식”에 근거하며, “성령의 능력에 대한 경험에서” 발전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의 전망 속에서” 전개된다.


E. 하나님 나라의 표징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선포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이다. 제자들은 그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나타나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공동체는 흩어져 버리고 부활의 증명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던 예수가 이제 선포의 대상이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주권이 있는 그 곳에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 미래 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데전2:12,데후1:5) 이와 동시에 그것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예수와 사도들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통하여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당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구별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통하여 생성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이지만 “전단계”는 아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이 세계에 선사되는 하나님의 은사인 동시에 과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과제를 가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자요 전령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봉사에 있어서 몇 가지로 유의해야 한다. 첫째, 복음서의 예수가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 같이 교회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사회와 세계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둘째,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이 세계 안이며 세속 안에서 세속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교회는 예수의 선포가 죄의 용서와 개인의 회개를 포함하듯이 사회 개혁이 전부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 가지 가야 함을 말하여야 한다. 넷째, 복음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죄인에 대한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사회의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교회,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 선포한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으나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4.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전통적인 입장은 교회는 교직자가 있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개신됴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의 공동체”내지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A.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서로 결합되어 있는 성도들의 사귐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사귐인 동시에 성도들 위에 있고 그들 이전에 세워진 제도적 기구 내지는 교직기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인을 매개하는 매개체이다. 최근의 가톨릭 교회는 “원성례전”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것은 구원을 중재하는 교직 기구로서의 교회가 성도의 사귐보다 앞선다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중재하는 교회의 기능은 1. 성례전을 통하여 수행되며 2. 교리적 가르침을 통해서 수행되고 3. 교인들의 공동체의 삶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조정하며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한계를 명시하는 법적 통치를 통하여 수행된다. 그러므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엄격한 입장을 수정하고 교회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교회의 교직기구는 사도 계승의 표이며 교직기구는 주교, 사제, 복제의 세 계급으로 구성되며 성례전, 사법권, 교리권을 가진다. 교리권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을 가지는 것은 가톨릭 교회 전체의 공회이다. 교회의 이 모든 권한은 로마주교의 “베드로 직분”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것이 교황무오설이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교회관의 핵심을 포기하지 않으나 몇 가지 면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첫째, 교회를 단순히 교직자들의 교직기구로 보지 않고 교직자와 평신도와의 사귐으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둘째, 지배체제적인 기관으로서 교직은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 사귐을 위한 봉사를 한다고 보고 교황도 전체 주교들과의 사귐 속에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여야한다고 지적한다. 셋째로, 로마로부터 분리한 모든 기독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고 그들도 구원에 참여한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B. 개신교의 전통적 입장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 제7장에 기록된 진술에 기초한다 : “교회는 복음이 그 속에서 순수히 설교되며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참된 하나 됨을 위하여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동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가서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루터로부터 유래한다. 칼빈은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내지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이해에 근거하여 개신교는 교회를 철저히 성도들의 사귐 혹은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 공동체 위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도들을 중재하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말씀, 그리고 복음에 일치하여 베풀어지는 성례전이다. 복음선포와 성례전은 교직자들에 의해서 집행되나 여기서 그들은 주체가 아니라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교직기구는 신적질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적 지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의 교직기구의 개념이나 사도계승을 반대한다. 교직기구는 단순히 교회의 삶의 질서와 통일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봉사기관인 것이다. 그러나 교직기구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는 통일된 것은 아니다. 각 교단마다 차이를 가지고 있다.


C.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질서

- 커리스마적 공동체 -

신약성서에서는 단 하나의 완결된 교회의 질서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나타난다. 교회는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이 은사는 사적은사와 공적은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최초의 공동체는 이러한 은사들을 받아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교회가 더 확장되면서 사목과 치리의 은사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공동체의 사목과 치리를 담당하는 공적인 칭호 가운데 감독 및 집사의 직분과 장로의 직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직분은 법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은사가 직분의 권위를 세운다. 그러나 성서에서 우리는 지배체제적 감독 제도를 발견할 수 없다. 특별한 계급으로서의 장로 제도도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감독 제도와 장로 제도는 하나로 결합되는 현상이 신약성서에 나타난다. 즉 동일 인물이 장로로도 감독으로도 불리운다. 그러나 교회가 더 제도화되면서 장로 제도는 사라지고 감독 제도가 교회의 유일한 제도로 등장한다. 결국 감독들은 사도들과 거의 동등한 권위를 얻게 된 것이다. 교직자와 평신도의 분리가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다수의 감독들은 단 한 사람의 감독으로 집약되기 시작한다. 이때 주교-장로직-집사의 세 계급으로된 지배체제가 발견된다. 이것이 사도계승을 주장하는 주교직의 승계로 이어진다. 물론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최초의 카리스마적 공동체와 주교를 중심으로한 교직기구로서의 공동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1. 두 공동체는 사도들의 원초적 증언과 원초적 파송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2. 복음에 대한 믿음과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사제직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3. 그들의 봉사를 카리스마적 봉사로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4. 모든 봉사가 모든 신자들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바울의 공동체에서는 1. 어떠한 군주적 감독직도 확정될 수 없다. 2. 어떠한 장로직도 확정될 수 없다. 3. 어떠한 교직자 임직식도 확정될 수 없다. 케제만 교수에 의하면 신약성서는 교직기구로 표현될 수있는 기술적 개념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의하면 여러 가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적 공동체로서 교직자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에클레시아를 섬기는 성령 받은 사람들이 다스린다. 교직자들의 지배체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삶이라는 전체에서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


D.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래 교회는 자유로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질서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를 “성도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에서 발견하게 된다. 성도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통하여 근거되기도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제직 혹은 만인 제사직으로부터 근거될 수도 있다. Communio sanctorum이란 개념은 1. 인격적으로 해석되어 “거룩한 사람의 사귐”을 뜻할 수도 있고 2. 성례전적으로 해석되어 “거룩한 사물들의 사귐”을 뜻하기도 한다. 이 두개념은 결합되어 폭 넓게 이해된다. 1. 먼저 인격적 개념으로 온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사귐을 의미하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간의 사귐을 의미한다. 2. 성례전적으로 이해되어 성례전 안에 임재하는 그리스도 자신에의 참여를 뜻한다. 이 집단은 폐쇄적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평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또 그것을 확장시키는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라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사귐을 뜻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사귐을 가졌던 사람들 곧 힘 없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사귐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E.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성도의 공동체” 내지 “성도의 사귐”으로서의 교회는 “형제자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침구들의 사귐” 내지 “친구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친구 사이에는 평등과 신뢰와 자유가 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F. 공동체의 새로운 사회형태

교회 속에는 “아무런 지배도 없고 지배체제도 없으며 아무런 지도의 요구도 없고 특권을 가진 직분도 없다.” 그것은 “계급 없는 사귐”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기능상의 차이는 있으나 신분상의 차이는 없다. 모든 사람이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이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종교가 되자 계급화된 것이다. “통일성의 지배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모습에 어긋난다.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공동체는 최고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배체제가 아니라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이다. 우리 나라의 종신직 장로제도도 이 공동체의 모습에 비하면 어긋난 교회의 모습이다. 남자들만 장로, 목사가 되는 것도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어긋난다. 기독교 공동체가 이 사회에 제시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 기능의 차이는 있지만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없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질서 안에서 자유와 평등이 있는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카리스마적 공동체”는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사회적 삼위일체”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G. 기초공동체의 이상

교회를 지배체제로 보지 않고 평등한 공동체로 보는 개신교의 교회관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초 공동체운동을 통하여 새롭게 실현될 수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기초공동체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이상을 가진다.

1) 기초공동체는 “공동의 삶”을 그 이상으로 가진다. 이 공동체는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공간에 모이지 않고 가정이나 아니면 일반 세속적인 공간에 모여 말씀과 식탁의 사귐을 나눈다.

2) 기초공동체는 물질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다. 성령은 인간을 소유욕으로부터 해방하여 베푸는 사람으로 자유롭게 해준다. 사랑은 여기서 먼저 실천되고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라는 본훼퍼의 명제가 구체적으로 체험된다.

3) 기초공동체는 힘없고 가난한 작은 형제들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있는 공동체이다.

4) 기초공동체는 소유 지향적 공동체가 아니라 봉사 지향적 공동체이다.

5) 기초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소유하는 교회가 아니라 베푸는 교회,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청빈한 교회,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당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 공동체는 세상을 위한 공동체, 타자를 위한 공동체이다.

6) 기초공동체는 비제도적, 비교권적 공동체이다. 평신도의 예배인도와 설교가 있다.

기초공동체도 나름의 문제점과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상은 기존의 교회 속에서 독립성과 자치권이 보장될 때 보다 성공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5. 사도계승과 교회 제도의 문제

A. 사도계승의 의미와 문제점

“사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전통적인 입장은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변화는 있으나 고수되고 있는 것은 “사목적 내지 지배체제적 사제직”이라는 사도계승의 입장이다. 사도계승은 마 16:18-19을 기초로 한 신학적 입장으로 전통적 교회관의 본질이다. 이것은 주교직의 사도직 연장과 주교들의 법적 정당성과 존립 근거이며 평신도와의 구분점이고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교회의 모든 권한의 승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주교들의 지배체제를 뜻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의 계승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사도계승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1) 부활의 주님이 가지신 사건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이며 목격자인 제자들의 존재는 이후에 오는 주교들과 사제들과의 분명한 구분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포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승될 수 있으나 목격자적 존재는 계승될 수 없다. 사도들이 죽은 다음에 남은 것은 사도직이 아니라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명이다.

2) 제자들의 권한을 승계 받았다고 하는 주교들이 사도들에 의하여 직접 세워진 사도들의 후계자들이었다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다.

3) 주교 서품식에서 안수함으로 성령이 자동으로 전이된다는 사고는 성령의 오심을 인간이 결정하거나 강요하는 행위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전통적인 사도계승은 불가능하다. 복음의 진리는 머리에 손을 얻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의 물건처럼 보장되거나 전수될 수는 없는 것이다.


B. 사도계승의 의도와 새로운 해석

우리는 사도계승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도계승은 교회의 사도성을 주장하고자하는 것이고 사도적 전통을 지키고자 한다. 도한 사도들과 교회의 사귐과 연속성을 말하고자 한다. 사도계승은 교회의 정통성을 말하고 교회의 내적, 우주적 통일성을 지키고자한다. 우리는 사도계승의 숨은 동기에는 동의 할 수 있으나 사도계승의 방법에는 동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사도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르게 선포함으로 이루너진다. 그리고 사도들의 뒤를 따름으로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한 사도들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계승은 또한 사도들이 물려 준 성례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도계승은 단지 주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세우는 공동체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 사도계승은 단순히 교회의 여갓적 삶과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C. 개신교의 교회관과 교회 제도의 갈등

제도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며 개인의 삶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이러한 제도는 개신교의 기본 교회관과 상응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교회관은 교회를 그 본질에 있어서 제도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성도들의 사귐 내지 공동체로 파악한다. 그것은 교직자가 주체가 되는 제도적 기구나 제도가 아니라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요, ”친구들의 사귐“이며 ”식탁 공동체“이다. 소위 ”사도계승“은 교직자에게 제한되지 않고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하나의 객관적 제도와 기구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칭하여 서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도의 사귐으로서의 교회“와 ” 제도로서의 교회“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D. 근대에 있어 개인과 제도의 분열

전통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대표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 급격히 권위는 약화되었다. 인간이 자기의 주체적 존재를 의식하게 되자, 제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제도는 개인의 자유의 실현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헤겔은 근대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러한 문제를 간파하고 개인과 사회적 제도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그는 사회의 구체적 현실이 되기 위해서 개인의 주체적 자유는 사회적 삶의 객관적 형태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개인이 사회제도에 대하여 자기를 개방하고 사회적 제도는 개인에게 창조적 활동 영역을 열어 줄 때, 개인과 제도는 중재될 수 있다는 것이다.


E. 제도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토의

엘런에 의하면 인간의 결핍의 존재이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불확실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제도는 이러한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방향과 확실성을 부여함으로 그의 짐을 덜어 주는 기능을 가진다. 개인은 이 제도를 따름으로서 그 자신의 규정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완전히 자신을 희생할 만큼 가치 있는 사회적 제도가 있는지, 제도에 대하여 자기를 완전히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에 대하여는 게엘런은 회의적이다. 쉘스키는 근대사회의 제도들은 개인의 욕구에 대하여 제도적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발전시킬 수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루만은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들에 있어서 모든 문제들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확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하여 이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도르노 등 프랑크프르트 학파는 제도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제도는 억압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벨거와 룩크만은 개인과 사회가 중재되는 단계를 3단계로 보았다. 1. 외화 내지 소외의 단계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삶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의 자기 드러냄은 사회적 삶의 형식을 만들고 제도화 현상을 일으킨다. 2. 이 제도들의 세월을 지난 전승을 통해 객체화가 일어난다. 3. 개인들은 제반 제도로 구성된 그들의 삶의 세계와 사회적 현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 자신과 동일화시키는 내화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F. 교회 제도의 정당성

오늘날 교회의 제도가 제도로서 그 필요성을 토의하게 되는 이유는 교회도 엄연한 제도이고 오늘날 신학이 교회를 교직기구가 아닌 공동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예수가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는 종래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제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의미와 타당성 내지 정당성은 과연 무엇일까 ?

1) 교회의 궁극적인 근거는 소위 교회를 세우라는 예수의 명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뒤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제도가 아니다. 성도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삶을 따르며 이를 통하여 예수에게 근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사회 속에서 신빙성 있게 제시하는 한에서 하나의 제도로 존립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진다.

2)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성령 가운데 일어나는 예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있다. 교회가 제도로서 존재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즉 교회의 제도는 예수와 함께 시작한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는 한에서 존립의 의미와 정당성을 가진다.

3) 교회는 개인과 사회적 체계들의 불완전성과 잠정성을 드러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그들을 개방하는 한에서 존속할 의미와 타당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증언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워 나가는 것이 교회의 제도와 모든 구조를 결정해야 한다.

4)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자유와 자발적인 섬김이 있다. 이 공동체가 반드시 제도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제도는 공동체의 자유와 자발적 봉사와 섬김을 가능케 하는 틀과 기반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즉 봉사 기관으로서 교회의 제도는 정당성을 가진다.

G. 교직의 필요성

교회제도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교직제도 곧 공동체의 인도와 치리를 전문 직업으로 하는 교직자 제도이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의 과제와 사명을 책임적으로 수행해야 할 전문인력을 필요로 한다. 교직 내지 교직기구가 필요한 몇 가지 이유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1)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순수히 지켜 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선포하기 위하여 교직이 필요하다.

2) 공동체는 예배와 성례전의 효과적인 집행, 성도들의 친교, 교회교육, 교회행정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선교적 봉사활동을 위하여 오늘날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을 쌓은 교직자를 필요로 한다.

3) 교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지도함으로써 교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며, 이단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교직자가 필요하다.

4) 오늘날 교회가 담당하여야 할 과제는 과거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심각하며 범 세계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이 문제들에 대하여 범교회적, 또 범 세계적으로 대처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직, 곧 교직이 필요하다.


H. 교직자와 교회 공동체의 관계

우리는 교직자와 평신도가 서로 권위 다툼을 하는 실정에서 우리는 평신도, 교직과 교회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 ?

1) 공동체의 대리자로서의 교직자라는 의미는 교회공동체의 위임을 통해서 있게 된 봉사직임을 의미한다. 목사는 봉사를 의미하는 라틴어 MINISTERIUM에서 유래한다. 그는 공동체를 위하여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 부터 세워진 것이다. 공동체가 먼저냐 교직이 먼저냐는 양자가 동시에 함께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생성되는 교직은 분명히 공동체의 부름과 위탁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직자를 부르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공동체를 통해서” 집행된다.

2)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직자의 권위는 교직이 공동체의 부름과 위임을 통하여 세워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은혜를 줄 수 없다.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신다. 그러므로 교직자는 자기를 단순히 공동체를 통하여 불리운 존재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를 교직자로 부르시고 세운 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다. 그는 특별한 자가 아니나 그는 특별한 ‘카리스마’ 곧 세례 받은 자들이 갖지 모사며 오직 자기만이 가진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가 원하는 것을 반목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을 선포할 수 도 있는 권한을 가진다. 교직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온 교직은 공동체 앞에 서게 되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일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공동체의 일꾼인 동시에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받은 카리스마와 교직자가 받은 카리스마가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낮다고 말할 수 없다. 카리스마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직자의 카리스마적 봉사는 공동체의 특별한 부름과 위탁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자유로운 카리스마적 봉사들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 이 권위는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처럼 교직자가 소유할 수 없고 안수로 건내 줄 수있는 것도 아니다. 교직자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 가운데서 ”예수의 일“을 수행함으로서 언제나 새롭게 권위를 증명해야 한다.

3) 결론적으로 교직과 공동체의 관계를 우리는 상호의존적 관계요 협동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후버 교수는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만나야 할”과제를 위하여 공동체 안에는 특별한 직분 곧 교직이 존재한다. 그러나 교직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사명 곧 “복음의 증인이어야 할 사명과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이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한다.” 교직 내지 교직기구는 그 외적 형태에 있어서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진 것이다 . 그것은 “인간이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있는 것이다. ” 라고 말했다.


I. 교직의 본질

오늘날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 교회의 많은 신학자들도 교직의 본질은 봉사 혹은 섬김에 있다고 말한다. 교직은 공동체를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만이 머리이다. 그 밖의 모든 지체들은 모두 평등하다. 교직은 섬김을 받음에 있지 않고 섬기는데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에 있다. 이것은 leitourgia라는 단어와 diakonia라는 의무와 섬김, 봉사를 나타내는 단어로 성서에서 확정되어진다. 교직의 본질은 섬김인 것이다.



6. 특별사제직과 만인사제직

교직자는 물론 공동체의 모든 신자들은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교직자는 물론 모든 신자들은 “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동등한 지체들이며 “하나님의 사제들”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종교개혁 신학은 만인사제직 혹은 보편적 사제직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서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 등은 교직자들만이 엄밀한 의미의 사제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포기되지 않고 “사목적 내지 지배체제적 사제직”이란 명칭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공동의 사제직”으로부터 그 등급에 있어서 구분될 뿐만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는가 ?


A. 특별사제직을 폐기하는 예수의 죽음

1) 예수는 그 당시의 유대교의 교직제도 내지 교직기구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했을 뿐 아니라 사제직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를 폐기한다. 예수의 죄 용서도 성전 제사의 폐기를 뜻하며 성전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직의 폐기를 뜻한다. 또한 예수는 그의 모든 선포와 활동에서 사제의 像이나 제사의 像을 전혀 사용하시지 않는다.

2) 역사의 예수는 그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 여하튼 예수의 부활 이후 최초의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 자신이 마련한 희생제물로 생각하였다. 예수의 죽음이 유일하고 궁극적인 희생제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유대교의 모든 제사와 희생제물의 폐기를 뜻한다면 그것은 유대교 사제제도 곧 교직제도의 폐기를 뜻한다.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사제란 단어는 단지 두 가지 면으로 사용된다. 첫째, 그것은 주로 히브리서에서 종말론적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둘째,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사제직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지배체제적 사제제도 곧 교직제도에 해당하는 “사제”의 개념을 신약성서는 알지 못한다.


B. 히브리서의 사제직 폐기

히브리서는 공동체의 신앙이 회의에 빠지는 위기의 상황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전승된 신앙고백을 견지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구약성서의 속죄제물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속죄제물로 대비시킴으로서 유형론적 성서해석을 시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서의 사제직의 성취와 폐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시대의 사제직은 폐기되었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제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2. 따라서 소위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구분은 신약 성서적 근거를 갖지 못하며, 신약성서를 통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 3.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그들은 단지 받은 은사가 다를 뿐이다. 예수는 그 존재 자체를 제물로 희생한 것이다. 제물을 받치는 자 자신이 총체적으로 제물이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제물이 필요 없다. 그는 교직기구를 폐기하는 동시에 완성한 것이다.


C.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제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모든 특별한 사제직은 폐기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직접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될 수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른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뜻하는 아래의 몇 가지 표현에서 발견한다.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이다. 그들은 모든 평등한 “선택된 민족”이요 “거룩한 겨레”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요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지체는 그러므로 중요하며 평등하다. 각 지체는 나름대로 독특하며 기능과 가치를 가진다.

3)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성령의 전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각 신자가 받은 성령은 “교직들”을 강조하지 않고 섬김 들을 창조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라고 말할 수있다. (루터)

에베소서 4:11에 의하면 특별한 사제직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주님께서 주시는 여러 은사들 가운데 하나의 은사에 불과함을 알 수있다. 그런데 만인사제직이라는 종교개혁의 명제는 주로 가톨릭 교회의 특별사제직을 거부하는 논쟁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명제의 적극적 의미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들이라면 사제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원칙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하나님과 직접적 관계 :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이를 수 있으며 (롬5:2)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게 되었다.(엡3:12, 히10:22)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엡2:18).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해서 직접적인 것이다.

2) 중재자 직, 대리직 : 만인사제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단순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직접성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중재자 직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고 대리하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을 뜻한다.

3) 말씀의 선포 : 말씀의 선포는 특별사제직의 고유영역 내지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의하면 선포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다. (행4:31, 8:4, 벧전2:9)초대교회의 복음전파는 흩어진 모든 성도들에 의해서 넓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4) 세례와 성찬의 집행 :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설교와 성찬 집행과 세례 그리고 축도가 특별사제직의 고유 권한으로 고정되어 진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어느 구절도 평신도와 교직자가 행할 수 있는 일이 엄격하게 나누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이요 공동체 전체에 부과된 과제인 것이다. 교직자는 단지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육받아 공동체를 대리하여 공동체의 위임을 받아 수행할 뿐이다.


D. 여자 사제직(목사직)의 문제

여성이 사제로 안수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뜨거운 논쟁의 문제로 등장하고있다. 기독교도 사실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러나 여자도 남자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면 동등한 자격과 권리가 인정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여자의 목사직을 반대하는 논거는 대락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였다. 2. 그리스도는 12명의 남자를 택하였다. 3.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침묵할 것을 명령하였다 4.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지어졌으며 먼저 죄를 지었기에 남자를 다스릴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5. 교히 역사상 한 번도 여자 사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위의 5가지 논거는 아래와 같이 반박할 수 있다. 1. 예수가 남자인 것은 역사적 우연이다. 2. 12제자가 남자인 겅은 사회적 상황의 고려이다. 3. 바울의 고전 14:34-35과 딤전2:11-12은 여자가 시민권 조차 갖기 못했던 당시의 사회정항 속에서 해석 되어져야 한다. 바울의 이 말을 시대적 이해 없이 영원한 신적 질서로 삼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근본 뜻을 그르치게 된다. 4. 여자가 갈비뼈로 지어졌다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는 남자의 노동력이 결정적 힘을 가진 농경사회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을 가르킨다고 보기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동질성과 한 몸 됨을 가르킨다. 또한 죄를 짓는 것에 있어서도 공범이지 한쪽이 한쪽을 유혹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들다 한 몸이기 때문이다. 5. 보프에 의하면 교회사에서 여성 사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여성 부제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여성 부제는 특히 4세기 말 이후로 안수에 의한 임직을 통하여 목회를 담당하였으며 교회의 성직제도에 소속되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점에서 여성 목사직은 지지되고 있다.

1) 우리는 남자 여자를 다르게 본 구절만을 볼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본 구절들도 고려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3:28-29을 보라.

2) 성서에서 여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동참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3) “하나님은 사랑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규정은 사랑에 있다. 사랑은 양자가 구분되는 동시에 하나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특별한 성을 지배자의 위치에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4) 만인사제직에 의하면 남자는 물론 여자도 사제다.

5) 교인들의 구성을 고려할 때 여자의 목사직은 당연하다. 교회는 구성상 형제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형제 자매의 공동체인 것이다.



7. 참 교회의 表識

A. 표지의 기능과 성격

교회의 표지는 교회의 내적 본질과 외적 특징과 참 교회의 기준을 제시하는 동시에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이리하여 “교회의 행동과 교회의 질서의 전망들이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가르키는 동시에 분열된 교회에 대한 비판이요, 모든 피조물을 하나 되게 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추구해야 할 교회의 방향과 참 교회의 기준을 제시한다. 교회의 보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 안에 폐쇄되어 있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요, 온 세계를 향하여 자기를 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할 교회의 미래와 참 교회의 기준을 제시한다. 교회의 거룩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나타내는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교회에 대한 비판이요, 자기 자신과 세계를 거룩하게 해야 할 교회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런 기능들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1) 교회의 존재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따라서 교회의 표지는 “그리스도론적 성격”을 가진다.

2) 예수는 이스라엘과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던 메시야였고, 교회의 표지는 이 예수로부터 주어진다면, 교회의 표지는 “메시야적 성격”을 가진다.

3) 교회의 표지는 “희망의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의 물건처럼 언제나 소유할 수 있고 사도계승을 통하여 다음 세대의 교회에 물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언제나 기다리고 희망해야 할 교회의 참 본질과 모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B. 전통적 네 표지와 종교개혁의 두 표지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의 참 표지로 교회는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생각해왔다. 그러나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네가지 표지를 법적으로 파악하였으며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근거는 사도 계승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표지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네 가지 표지 가운데 “보편적”이란 말을 “그리스도적”이란 말로 대체한 것을 말고는 이 표지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참 교회의 표지는 법적으로 해석되는 이 네 가지 표지에 있다기 보다는 복음과 성례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개혁자들의 생각은 오늘날 루터교회 신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초기 개혁교회의 신학은 이 두가지 외에도 교회 규율을 또하나의 표지로 제시하였다. 또 재세례파는 재산의 공유까지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참교회의 표지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네 가지 표지와 그 밖의 표지들은 참 교회가 무엇인지 완전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제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적인 네 가지 표지에도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고 뒤이은 개혁자들의 두 가지 표지도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주목하여 이 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관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C. 자유와 다양성과 실천 안에서의 통일성

교회의 통일성을 말해 주는 성구들은 고전 1:10-31, 고전 12장, 갈라디아서 3:28-29, 로마서 12:3-8, 사도행전 2:42, 사도행전 4:32, 요한복음 10:16, 18:20-26, 에베소서 4:2-6 등을 들 수 있다.

1) 신약성서는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하여 말하는 동시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여러 공동체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성서가 말하는 통일성은 획일성이나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 있는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통일성은 교회의 통일된 조직이나 법질서나 사도계승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 한 세례, 한 성찬,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공통된 신앙고백,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공통된 희망, 한 마음 된 가운데 함께 나누는 사랑, 세상을 위한 봉사에 있다.

2) 분열된 교회들의 현실적 통일성은 분열된 교회들이 그들을 분열시킨 원인들을 발견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면서 실제로 연합하여 공동의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실현된다.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배격하고 협동과 연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교회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기본 명제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순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둘째, 모든 공동체는 한 믿음 안에서 이미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근거 위에서 이제 그들은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길 곧 통일성에로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각 교회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희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공동의 새로운 진리를 찾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모색함에 있어서 궁극적 기준은 각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

3) 내용적인 면에서 교회의 통일성은 삼위일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하나 됨에서 볼 수 있는데 이 통일성은 곧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모범이다.

4)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한 몸 됨 곧 통일성은 예수의 삶에서 구체화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교회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교회를 가르키는 “표식”일 뿐 아니라 분열된 세계 속에 있는 교회의 “고백의 징표”이다. 달리 말하면 교회의 통일성은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결합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가르킨다.


D. 당파성 안에 있는 普遍性

1) 보편성이란 용어는 6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 왔다. 그것은 본래의 교회론적 의미의 보편성, 논쟁적, 교의학적 의미의 보편성, 공간적 의미의 보편성, 문화-사회학적 의미의 보편성, 수적 의미의 보편성, 시간적 의미의 보편성을 가르킨다. 이 중에서 교회론적 보편성은 성서적 근거를 갖는다. 그러나 나머지의 보편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2) 그럼 보편성은 어디 있는가 ? 교회의 보편성을 보장하여 주는 것을 무엇인가 ? 첫째, 보편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교회의 보편성은 예수 그리스도, 모든 권세의 주요 만유의 주의 보편성이다.” 또한 이것은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공간적 크기, 사회-문화적 다양성, 공동체의 수와 교인의 수의 크기, 시간적 연속성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수행해야 할 종말론적 사명과 그 미래를 가르킨다.

3) 교회의 보편성은 기독교가 국가종교나 세계의 지배 종교가 됨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부적 관심을 넘어서는 교회의 보편적 관심에 있다. 그것은 피조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보편성에 있다.

4) 교회의 보편성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고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부분적 시작이다. 따라서 교회의 보편성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질 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존의 세계질서 틀 안에서 기독교적 세계 국가나 하나의 세계 사회를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보편성을 실현하려는 제국주의적 환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 40:4-5,눅 1:51-53, 고전 1:27-28 등을 보면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낮은 자들,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믿음 안에서 일으켜 세움으로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함으로서 자기의 보편성을 실현해야 할 교회도 이들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당파적일 수 밖에 없다. 교회의 보편성은 이 당파성에 의해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삶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셨다.


E.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거룩성

교회는 물론 교회의 신자들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교회”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 달리 말하면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1)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도덕적 삶이나 도덕적 행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부터 결과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칭의는 물론 성화도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1. 인간의 죄를 예수의 몸 안에서 심판하고 2. 용서를 선언하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하다 이 교회는 세계와 죄로부터 분리된 하나님의 “성소”이며 “성전”이다.

2) 신약성서는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거룩한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는 어떤 특정한 사물들의 거룩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정한 공간이나 기물이나 행사가 거룩한 속성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교회가 거룩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대물적 거룩”을 말한 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는 “인격적 거룩”을 말하고 있다.

3)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죄성으로 흐려지지않도록 항상 다시금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교회 밖에 있다기 보다는 교회 안에 있다. 그것은 자신의 무신성과 불신앙이다. 이 적을 이기는 방법이 회개이다. 이것은 언제나 개혁되어야 할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에게 주어진 , 교회가 언제나 소유하고 있는 속성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회개와 개혁을 통하여 교회가 쟁취해야 할 종말론적 목적이요 과제이다.

4) 거룩한 동시에 죄된 교회가 참으로 “거룩한 교회”가 될 수있는 길은 한 마디로 거룩한 하나님을 닮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이 거룩한 하나님을 닮을 때에 교회는 거룩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을 따라 교회도 1. 이 세계로부터 구분되는 데에 거룩성이 있다. 2. 그러나 세계로부터 교회의 구분은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구분된 존재로서 세계와 자기를 결합시키고 이 세계의 고난받는 피조물들과 연대함으로써 자기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 3. 또한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예수를 따름에 있다. 그것은 자기포기요 하나님의 고난받는 피조물들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교회를 말한다. “청빈한 교회”, “청빈한 사람들의 교회”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5) 세계 속에서 교회가 “거룩한 교회”로 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구조적인 악을 예방하는 차원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본훼퍼와 정치 신학은 이것을 간파하였다.


F. 사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사도성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사도적인가 ? 사도적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1) 사도적 교회란 그의 가르침과 선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들인 사도들의 증언에 기초하는 교회를 말한다. 여기서 사도성은 교회의 “사도적 근거”와 “사도적 연속성”과 “사도적 정당성”을 가르킨다.

2) 전통적으로 사도계승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던 사도성은 타당하지 못하다. 참 “사도적 교회”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과제를 수행하는 교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부르심과 파송을 받은 교회가 사도적 교회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천 년 전의 교회의 형태와 사고방식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반복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뒤를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의 파송에 복종하느냐 하지않는냐가 중요한 것이다.

3) 온 세계와 인류를 향하여 파송된 사도들은 이 세계의 영광스러운 존재들로 나타나지 않고 이 세계에 대하여 “죽은 자들”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주님의 종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교회가 참으로 사도들에게서 근거한 “사도적 교회”라면 교회는 종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4) 사도들은 온 세계와 인류를 위해 파송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적 교회는 온 세계와 인류를 향하여 파송 되는 교회요, 다른 교회들은 물론 다른 교파들과 함께 협동하여 세계를 섬기는 교회이다.

G. 하나님 나라의 表識

참 교회의 표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표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나타나는 그곳에 참 교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참 교회의 표지로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예수의 멧세지에 상응하고 메시야적 전통 속에서 교회를 파악하게 하며 구교와 신교의 일치점을 제공하는 장점을 가진다. 동시에 이것은 복음의 선포에 관심을 가지는 종교개혁정신과 상응하며 이 시대의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의 보다 나은 세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나타난다.



8. 關係 속에 있는 교회

세계의 모든 것은 관계 속에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근거가 되었던 예수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존하였던 사회적 존재였다. 교회는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동시에 메시야적 지평에 있다.


A. 이스라엘과 교회

교회와 이스라엘의 문제는 메시야적 희망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메시야적 희망의 종교이다. 그것은 생명은 온 세계 안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메시아즘에 있다. 따라서 교회가 이스라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교회가 구약성서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메시야적 희망을 회복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사실 기독교는 서구의 국가종교로서 반유대주의는 물론 유대인 배척주의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하여 기독교가 침묵하고 구약성서에 대하여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유대주의를 취할 때 이것에 비례하여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희망을 상실하고 서구 사회의 시민종교 내지 문화종교로 전락한 역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고찰해 보면

1) 기독교와 이스라엘은 내적으로 연결성을 갖는다. 최초의 기독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 곧 유대교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특별한 종교현상을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 외에는 이스라엘 종교는 물론 그 사회와 결합되어 있다. 기독교는 자신을 “새 이스라엘”,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한다.

2) 기독교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내적 연관성과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관계는 예수의 신앙고백 속에 이미 정초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이방인의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자기를 분리시켰다. 이 분리는 이스라엘 자신의 적극적인 박해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 고백을 신성모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후 2세기의 랍비들의 기도문에는 “이단자들과 나사렛파”라고 저주하는 말이 주요 기도문인 “Schmone 'Esre"에 삽입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더욱 심화의 과정을 거쳐서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교황들은 유대인 배척주의를 주장하였다. 십자군 원정은 유대인들을 회교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하고 진행되었다. 이 전통은 루터와 칼빈에게 와서도 이어졌다. 약 1500년동안 기독교와 서구사회는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3)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교회의 적대적 태도는 기독교의 절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의 약속의 성취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타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선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태도를 계속적으로 취한다면 양자 사이에는 불화와 갈등만이 있게 되고 이 불화와 갈등은 다시 반유대주의나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초래할 수도 있다.

4) 로마서 9-11장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고전적인 본문이다. 이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동일한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특별한 위치와 사명을 가진 존재로 존속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그 때까지 교회를 자극하는 교회의 동반자로 존속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강요하여서는 안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로 일어났음을 그리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의와 자비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B. 타종교와 교회

세계는 단일 문화권이 될 정도로 가까워지고 국가의 벽은 무너져가고 있다. 그리고 지구적 위기와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입장에 서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변화 속에서 기독교와 가톨릭도 타종교에 대한 관계정립을 새롭게 재 편성하고 있다. 예전에 있었던 서구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정책이 과거의 상처로 남은 것도 이러한 변화를 주는 큰 요인이다. 또한 서구 교회의 약화도 기독교의 타종교와의 대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1) 칼 바르트, 본훼퍼의 종교 비판 : 이러한 추세 속에서 바르트와 본훼퍼의 종교비판은 타종교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바르트의 종교비판을 생각해 보면 바르트는 종교와 계시를 구분한다. 종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게 도달하며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활동의 총괄개념이며 계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와 종교,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의 형식을 분명히 구분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종교의 자기 비판과 개혁을 요구하지만 결코 기독교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종교란 종교 일반이 아니라 기독교에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비판은 기독교가 그 대상인 것이다. 이 비판은 “종교의 지양”이라고 표현되는데 이때 지양은 폐지라는 의미보다는 고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그의 방대한 문헌을 통해서 거의 타종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신앙의 영역밖에도 다시 말하여 타종교의 영역에도 진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속사 안에서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진리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르트를 철저한 배타주의자로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혹은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본훼퍼의 명제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칼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이론에 그치지 않고 공산주의의 종교 폐기 정책의 근거로 수용되었다. 그는 종교는 종교의 제반 형식 속에 사회적 소외와 비참이 표현된다고 보고, 그 소외와 비참에 대해 종교는 소극적인 저항, 환상적인 저항을 하며 환상적인 위로를 하는 것으로 소외와 비참을 더욱 더 심화하기 때문에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소외와 비참을 일으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사라지면 종교도 폐기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그의 종교는 세상의 일반종교가 아닌 서구의 기독교를 염두해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교회도 모든 역사적 사회적 형태들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며 주어진 상황 속에서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3) 가톨릭 교회와 칼 라너의 입장 :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제2바티칸 공회를 기점으로 배타적 입장에서 다소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전향했다. 누구든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원칙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가능성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학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칼 라너이다.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은혜로운 구원의 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용한다고 보며 하나님은 자기 존재와 의지를 모든 인간에게 알려주며 “하나님 자신을 향한 은혜로우며 초자연적인 역동성과 목적성”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누구든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의 궁극 목적으로 지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역사와 파멸의 역사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서 그의 현존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에 대하여 항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같은 “보편적이며 익명적인 구원의 역사와 계시의 역사”로부터 “명시적이고 공적인 구원의 역사와 계시의 역사”를 구분한다. 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궁극적 자기 전달로부터 시작한다. 라너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타종교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잠재적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함으로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타종교인들마저도 기독교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4) 타종교의 타당성

우리는 타종교의 타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도 인간이 본래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죄성, 타락과 불안, 허무와 고독을 알고 있다. 타종교들도 죽음의 의미와 무의미,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2.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들도 이 세계가 본래의 상태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타종교들도 이 세계의 유한성과 허무와 타락과 구원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3.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들도 인간과는 다른 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이 아는 신이 참 신이냐 아니냐의 문제점이 있지만 그들도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들도 신의 자비와 은혜, 분노와 심판을 그들 나름대로 알고 있다.

5)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 타 종교의 문제점 : 기독교는 타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시되는 타종교의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보편적인 공통점을 연구함으로서 각 시대와 각 지역의 종교 속에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다른 종교가 그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체요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에 있어서 궁극적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길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가 미신이요 이단이라고 그저 정죄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보다는 기독교 자체에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 겸손한 자세로 타 종교를 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독특성을 지키고 유지하면서 타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자기를 보완하는 일에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더우기 이 대화의 주제는 교리적인 면에서 국한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세계의 문제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교회 자체에 있지 않다. 교회는 그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자기를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존립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야 하기에 자기를 고착시키지 말고 정체 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교회는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에 있어서 자가확대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오히려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른 종교도 그 목적에 있어서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인류의 행복에 있을 것이다. 이 목적에서 교회와 타종교는 관심이 일치함으로 공동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만남과 대화를 가질 수 있다.


C. 국가와 교회

국가와 기독교를 따로 생각할 수는 없다. 항상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취급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첫째, 교회는 어디까지나 국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요 국가의 국민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안에서 교회와 국가는 서로 관련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복음은 개인의 심령이나 교회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실현될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개인의 심령과 교회는 물론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국가와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1) 중세기까지의 발전 : 신약성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주고 있지 않다.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기 이전까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론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381년부터 기독교는 로마의 국가종교 즉 제국종교가 되고 부터는 기독교신앙이 국가종교로 바뀌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결합된 하나의 기독교 왕국이 된 것이다. 이후로 정교합일주의로도 교황정치주의로도 변모하며 시대를 다라 교차하는 형태로 관계되어 왔다.

2) 루터의 두 왕국론과 루터교회 신학자들의 오류 : 중세기 전체가 교회와 국가를 교묘하게 결합 한데 반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구분하는 소위 “ 두 왕국론”을 말한다. 이것은 루터가 아우구스틴을 계승한 것인데 갈등과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이원론적이 아니라 “논쟁적 구분”이다. 양자는 서로 분리된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두 가지 방편에 불과하다. 루터가 거부한 것은 정치와 종교의 합일주의이며 동시에 성직자들의 신정이다. 루터는 이를 통하여 교회를 국가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를 교회로부터 해방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 신학자들의 오해로 교회와 국가는 양자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영역인 것처럼 오해되었다. 즉 하나님은 국가의 현실과 관계없는 소위 종교의 영역에 국한된 존재이고 국가는 하나님 없는 국가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의 견해를 잘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1. 국가를 국가 되게 하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을 가진다. 양자가 구분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도록 루터는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이런 의도가 오해되서 양자가 무관심 속에 나누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3)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의 입장 : 칼빈도 루터와 같이 국가와 교회를 구분하지만 칼빈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독립된 영역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개혁주의의 이러한 전통은 “바르먼 신학 선언” 제1명제와 제2명제에 잘 나타난다. 이 명제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교회는 그러므로 불의의 동지가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고 그것을 구원해야 한다.

4) 바르트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 바르트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속한다. 바르트는 국가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도 공동의 책임을 지며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뒤따름을 실천해야 한다. 이 양자는 그리스도 안에 그들의 공통된 근원을 가지며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의 공통된 목적을 가진다. 양자는 하나의 구심점을 가진 두 개의 원과 같다. 교회는 안쪽 원이고 국가는 외적인 자유와 평화, 사회의 인간성을 이룸으로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섬기는 바깥쪽 원이다. 즉 국가는 루터나 루터교회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무질서와 죄를 억누르기 위한 권위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외적이고 지상적이며 잠정적인 방편이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비가 될 수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토대로 보면 교회와 국가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가진다. 1. 교회와 국가는 영역과 형태를 달리한다. 2. 그러나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다. 두개의 영역은 나누어질 수 없다. 3. 교회는 국가의 과제와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국가를 돕기도 한다. 4. 교회는 국가를 돕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행사하기도 한다. 5.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하는 국가는 교회를 돕기도 한다. 6. 이와 동시에 국가는 교회가 국가의 정당한 법질서를 따르도록 요구한다.


D. 현대사회와 교회

오늘날 과학 기술의 세 번째 혁명을 맞이하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노력을 하여야 한다.

1) 교회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

2)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외적인 제도와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無神性에 있다. 1.하나님 없는 인간에게는 죽음을 넘어서는 미래와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2.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자기 중심적 욕망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다. 3. 자기 중심적 욕망은 인간을 이웃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

3) 오늘 한국의 사회에 있어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한국인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1. 먼저 교회는 지배체제적, 관료주의적 의식을 민주적 의식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2. 교회는 남자, 여자에 대해서 평등한 관계임을 인식해야 한다. 3. 윤회론적, 운명론적 의식도 변화되어야 한다. 4. 교회는 참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5. 동양인에게는 정신과 물질은 나누고 정신적인 것을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물질적인 것을 속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의식이 숨어 있다. 이 같은 구분을 바꾸어야 한다. 6. 교회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악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다스리는 세계를 세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4) 현대사회는 이전의 어떠한 시대보다도 경제의 문제가 가장 큰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사회 정의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세계에 있어서 시급한 문제는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 경제 정의는 공정한 부의 분배와 부의 기존적인 삶 유지를 위한 가난한 자들에게로의 환원이 관건이다.

5)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의한 정치를 고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도록 권고하며 정치적 정의를 요구하여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모든 인간의 평등과 평등한 권리를 선포하여야 한다. 모든 인간의 평등과 권리가 보장되는 동시에 생명에 대한 경외와 보호와 장려가 실천됨으로써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닮게 된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1. 인종주의의 철폐를 요구해야 하며 2. 남자와 여자의 성적 차별을 철폐하도록 촉구해야 하고 3. 장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교회는 앞장서서 일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적”, “순복음적” 교회이고자 한다면 영혼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그의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