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바르트의 생애와 영향
바르트는 20c신학을 지배하며 동시에 신 종교개혁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니 만큼 기독교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 슐라이에르 마허, 리츨과 더불어 위대한 신학자의 명단에 오른다. 바르트는 기성사고의 틀을 깨뜨리고 사상사적 흐름을 거슬러 올라감으로 개신교 신학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 그의 공헌이 크며, 로마 카톨릭 해석자들과 개신교신학자들이 모두 바르트에게 환호하며, 심지어 바르트의 비판가들까지 바르트사상과 관련하여 그들의 사상을 정립하고 있다. 그래서 베일리( John Baillie)는 “오늘날에는 아무도 바르트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신학을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B. 초기(1886-1909)
1. 태생 -1886.5.10 스위스의 바젤에서 프리츠 바르트( Fritz Barth)의 장남으로 탄생,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고 Barth는 세살 까지, 그리고 1935-1968(사망)까지 바젤에서 살았다. 바젤은 고대와 현대의 도시요, 아담한 대학도시이며 산업화된 도시로서 라인강에 연접해 있고 그 강 주변에 프랑스, 독일, 스위스가 만나는데 그중 바젤이 깨끗하고 조용한 자랑스러운 도시였다고 한다. 바르트는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하는 지역의 특징과 전통신앙가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평한다.(사실은 비상한 지적능력과 한 목적을 위한 집념,민주정신, 예술에 대한 감상력(음악:모짜르트)유머에 대한 센스를 지녔다. )
2. 성장 - 바르트의 사상이 스위스 종교개혁주의 계열 혹은 칼빈 계열에 뿌리 내리고 있는데 그의 성장과정과 관계가 깊다. 바르트가 3세때 부친이 베른 대학의 교회사와 신약석의학 교수가 되었고, 바르트는 여기에서 어린 시절에 성장하고 종교교육과 기본교육을 받았으며 부모의 지도와 보수신학을 전수 받았고 그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는 바르트의 신앙을 적극적인 복음주의 신학으로 양육하였고 그의 신학은 전적으로 복음을 봉사하는 신학으로 형성시켰다. 바르트는 어릴 때 수학이나 자연과학보다는 역사와 드라마에 관심이 깊었는데 Arnold Come은 말하기를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 내지는 사건으로 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으며, 바르트가 심지어 성경해석과 신학활동에서 까지 삶을] 떠난 추상의 세계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고 했다.
3. 교육- 바르트는 여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8세때 베른 대학에서 부친과 헤르만 류데만(Herman Ludemann )의 영향을 받고 거기서 칸트철학과 슐라이에르 마허신학의 영향도 받았고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눈을 뜨면서 베르린 대학에 가서 아돌프 하르낙과도 접축하였고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바르트는 하르낙의 방향에 감명을 받았으나“기독교의 본질”이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복음은 일종의 문화적 기독교의 형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르트는 마부르크대학의 당시 주도적 신 칼트학파 신학자였던 빌 헤름 헤르만(Wilhelm Herrmann) 밑에서 공부하고 싶어했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항상 보수신학을 배우기 원했으며, 아버지의 분부를 따라 다시 베른대학으로 돌아왔고 그 해 가을 학기에 튀빙겐 대학에 등록하여 보수주의 신약학자인 아돌프 슐아터(Adalf Sohlatter) 에게서 한 학기 배웠으나 큰 영향없이 오히려 레오도르 헤링(Theodor Haring) 의 강의에 주목하였다.
1908년 가을 학기 바르트는 드디어 마부르크의 헤르만 밑에서 공부하기에 이르렀고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기독론이해(증명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고, 계시는 인간의 체험 속에 있다)는 바르트의 초기사상이 되었다. 계속해서 바르트는 마부르크에서 헤르만 코헨(Hermann Cohen) 과 폴 나토르프( Paul Natorp)에게서 신 칸트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요한 봐이쓰( Johannes Weiss ) 와 빌헤름 하이트 뮬러( Wilhelm Heitmuller ) 와 아돌프 율리켜 ( A. Julicher )에게서 도 배웠다. 이처럼 바르트는 여러대학과 스승들을 통해 보수신학과 자유신학의 폭넓은 교육을 받았으나 결국 그는 성경의 주제를 무시하는 역사적 비평적 이해에 만족할 수 없었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른다.
C. 변증법적 신학 (1909-1922)
1909년 베른교회가 주도하는 목사고시를 끝내고 안수를 받아 개혁파교회목사가 되었으나 처음엔 목회를 꺼려했고(이유: 헤르만 의 영향:설교란 숙련된 경험에서 나옴) “기독교 세계”( Christli-che welt) 라는 잡지의 편집인이 되어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 잡지의 특성) 사명을 느꼈다.
1. 목회자로서의 바르트: 바르트를 이해하려면 목사로서의 바르트를 대면해야 한다. 1909년 말 고향에 돌아와 1911년까지 머물며 목회를 했는데 그는 목회를 택한 이유를 그의 논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 자유주의신학에 물든 학생들이 보수적인 신학의 교수 밑에서 배운 학생들보다 목회나 선교의 실천분야에 훨씬 덜 진출하는데 그 이유인즉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적 개인주의를 표방하며 개개신자밖에서 오는 모든 계시의 규범들과 권위를 무시하고, 역사적 상대주의에 근거를 두고 역사 속에는 절대가 없기 때문에 계시와 종교의 영역에도 절대가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 기술학을 따른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그가 훈련받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후회하는데 그는 목회 하면서 자유주의 신학과 점점 멀어져 갔다. 바르트는 1911-1921년에 걸쳐 작은 사업도시 자펜빌(Safenwil ) 에서 시무 하였는데, 여기에서 밀리 호프만( Melly Hoffmann )과 결혼하였고 투루나이젠 ( E. Thurneysen ) 과의 교제를 나누며 요한 크리스토르 불름 하르트( Johann christoph Blumhardt ) 의 종말론적 신학을 알게 되었고, 사회주의에 가담한다.
2. 종교사회주의자가 됨 - 블름하르트와 라가츠(Ragaz), 쿠터 (Kutter ) 에 의해 스위스 내에 종교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될 때 투루나이전과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이 되었다. 즉 바르트는 자펜빌과 그 곳 교회의 노동자 편에서 정당한 임금을 위해 투쟁했고, 1915년 사회민주 정당에 가담하였는데 그는 개인 영혼 구원에만 국한하는 스위스개신교의 부수주의에 반대하여 하나님나라의 사회적 차원과 역사 내에서 하나님나라 실현가능성을 강조했다. * 이처럼 바르트의 신학사상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어느 한 사건만을 가지고 바르트의 신학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3. 바르트의 새로운 터득(변증법적 신학)
1914년 8월 독일황제(히틀러)를 지지하는 93명의 저명 지성인들의 성명은 바르트에게 큰 충격적 사건이었다. (바르트의 스승이 가담했음을 보고) - 종교사회주의와 결별- 이후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헛점을 실감하였고 오직 설교준비와 성전 연주에 전력을 다했으며, 이때 그 유명한 로마서 주석을 쓰기 시작하였고 이 책으로 그 유명한 교회사에 큰 개혁을 촉구하였다. 이 당시 바르트의 관심사는 성경 내용의 문제였던 성경의 말씀-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역사, 도덕 및 종교를 발견할 수 있으나 이것이 결코 성경의 주와 관심사는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성경해석상의 현대역사비평 방법의 올바른 자리를 인정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개신교의 영감론만이 본문의 의미를 찾는데 깊이 작용했지 역사 비평적 방법은 본문의 의미 이해의 기초적 작업에 불과하다고 했다.
*. 로마서 주석(초판)- 바르트는 여기에서 분명히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기독교와 단절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인간의 죄성과 타락성의 발견이었고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데 있다. 한편 본서에서 바르트는 아직도 프라톤및 관념론적 사고형식들의 영향하에 하나님과 인간의 연속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시면서 또 긍정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학문성의 결여, 칸트적, 플라톤적,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러 비판가들에게서 배웠고 또 스스로를 비판하고 로마서 제2판을 썼다.
D. 로마서 주석 2판 (1922)
바르트를 바르트되게 한 작품이며 이 작품을 가리켜 위기의 신학, 역설의 신학이라 한다. 즉 바르트는 이 작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말했다. 수정된 내용은 1)바울과 로마서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2)문화기독교에 반대하였고, 3)플라톤과 칸트를 더 확실히 이해하였으며 4)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비참함을 통찰하였고 5)키에르 케골에게서 역사를 배웠다. 그러면 바르트의 변증법적 방법을 보면 1)이 변증법에는 살아있는 진리 즉 진정한 하나님의 진정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고 2)모든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대화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기에는 말씀과 반응, 긍정과 부정, 질문과 대답이 있으며 그 대답은 또 다시 질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에 있어서 모든 변증법적 사고의 원천은 신인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즉 인인이신 예수그리스도에서 모든 신학적 사고가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고 이 변증법적 방법은 시간과 영원사이의 위기에서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사용된 수단에 불과하며 따라서 모든 신학은 순례자들의 신학이라 했다.
그리고 바르트는 인간과 인간의 선에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모든 신학을 반대하며 인간의 위기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오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온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결코 우리역사와 동일화 되실 수 없으며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분이라 했다. 그의 오심은 원의 둘레를 접하는 탄젠트와도 같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선호하셨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이라 했다. 즉 바르트는 하나님의 심판 저편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긍정을 들었고, 하나님의 진노 저편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다고 했다.
바르트는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인식될 수 있나? 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없다. 오직 신앙을 통해 인식되어지는데 즉 신앙이란 인간 능력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생긴다고 했다. 바르트는 칼빈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새롭게 강조하였고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총으로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부정(No)속에서 하나님의 긍정(Yes)을 들어야 하고 우리가 직면하는 하나님의 부정은 하나님의 긍정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에서 마지막 말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한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바르트는 모든 신학을 부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신학이 인간의 신학이며 죄인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신학까지 하나님 지식에는 보장되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인간의 신 지식은 하나님의 특권과 솔선수범에 달려 있다고 로마서 주석 2판에 나타나 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2판은 모든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는 전적 타자로서 하나님을 말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말하면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말을 하시고 인간은 신적인 것을 담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하였으며 하나님은 인간적인 것을 모두 부정하시며 세상을 초월해 있고 그의 계시는 극과 극이 스치는 하나의 점과 같은 그 순간과 같다는 것이다. 그 계시가 예수그리스도며 예수그리스도의 인식은 성령 안에서 생기는 신앙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E. 교의학(1922-1932)
바르트의 사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변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신학에로 전개하는 것이다. 결국 바르트신학의 정점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로 펼쳐진다. 바르트는 궤팅겐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어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대한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몰두한다. 1924년 그가 교의학강의 준비를 하면서 헤페(Heinrich Heppe) 의 ‘개혁주의 교회학’을 대하게 되고 영향을 받는다. 1925년 문스터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책을 출판하였는데 특히 1927년 의 ‘크리스천 교의학 개요’는 바르트의 교의학적 첫 열매이다. 분서에 바르트는 과거 2세기여간의 개신교 신학과 과격히 단절하는 입장을 취했고 그의 스승 헤르만까지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인정하는 로마카톨릭신학과 쉴라이에르마허를 따르는 신 개신교신학을 반대하며,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을 펼치고 있는데 3가지 형태의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 계시된 말씀이다. 신앙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지탱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앙의 순간에도 하나님이요 인간은 인간으로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르트는 성숙한 계시교리를 말하고 있으며 계시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풀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바르트의 주된 관심은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포되었다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시며 반응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철학과 신학과의 관계에서 바르트는 자유주의 위험성은 신학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철학적 합리주의나 관념론을 마구 사용하는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장할 때 신학자가 사용하는 철학이나 다른 요소들은 이 중심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사고와 말이 신앙고백에서 출발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만 교의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 바르트는 안셀름과 그의 신학방법을 연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1931년의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은 안셀름의 신학적인 프로그램 내에서의 신증명에 관한 책이다. 바르트는 안셀름을 높이 평가하면서 안셀름의 신 증명은 적합한 신학방법을 제시한다고 하였다. 즉 바르트는 안셀름의 도움으로 전 교회 교의학의 신학방법을 체득하였다. 즉 신앙이 본성상 지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안셀름을 따르며, 신앙은 비합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이 아니며 신앙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설교인데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요, 인정이라 했다. 바르트와 안셀름은 신학적 지식추구의 시작과 과정 끝이 신앙을 전제하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그러나 신학은 우리를 신앙에로 인도할 수 없다 하였고 그래서 신학자는 교회의 신앙내용을 긍정하고 이것이 정해주는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진술들과 언어는 신앙의 대상에 유비적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인간의 언어가 결코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 과격한 변증법적 신학을 넘어섰다. 바르트가 보는 안셀름은 합리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셀름이 신학과 기도를 긴밀히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르트의 경우 신앙이란 계시사건에 의존하며,이 계시에 대한 신앙이 생길 경우에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할 수 있고, 신앙이 추구하는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결과한다. 이처럼 바르트는 계시중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펼친다.
F. 교회 교의학 시대(1932-1968)
1930년대는 바르트 생애에서 주요한 사건과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1927년의 “기독교교의학개요”에 만족이 없어서 본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의 교의학을 쓰기 시작했고 점차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뿌리를 내려갔다. 결정적 사건은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었고 바르트는 독일 기독교인들과 히틀러를 대항하는 고백교회의 주도적 신학대변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934년 독일 고백교회는 바른멘(barman)에서 “바르멘 신앙고백”을 선포하였고 바르트가 이 초안을 작성 하였다. 결국 바르트는 교수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독일에서 추방당해야 했는데 1935년 바젤 대학의 신학교수로 지내게 되었다. 당시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 집중하였고 1938년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리”를 출판하였고 “하나님의 관한 교리” (신론)의 첫번째 권이 1940년에 출판되었다.
1940년대초 세계 제2차대전이 터진 이후 바르트는 많은 갈등과 무거운 마음으로 독일 백성의 소망의 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에서처럼 시대정신의 흐름을 역류해 올라갔고 자신의 임무는 교회교의학 저술임을 알았다. 1940년대는 바르트 신학이 성숙했던 시대였다. 즉 1942년 “하나님의 선택” 1945년 “창조교리” 1950년에 “섭리와 악에대한 교리”를 출판하였으며, 그리고 1951년에 창조론의 윤리학 부분을 끝냈는데 그때 나이 65세였으며 1950년대는 노인의 몸으로 “화해론”을 완성하였고 여행을 줄이고 강연을 거절하였으나 세계도처에서 그의 강의를 들으러 몰려왔으며, 강의를 지속하게 되었는데 1962년 3월 1일 바젤에서 마지막 강의로 은퇴했으나 미국의 신학도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시카고, 프린스톤에서)
그의 생의 황혼기인 1967년 “기독교적 삶의 기초로서 세례”를 출판하였고 1년 반이 지난 뒤 1968년 12월 10일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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