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책인가? (3)
오늘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를 말하는 세 번째 글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이냐는 논의를 들어가기 전에 그 기록방법, 저자, 요한이 본 환상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야 합니다. 이 각각의 논점에 대하여 극단적 보수주의 해석과 자유주의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하나님이고 요한의 실제적 경험을 기계적으로 기록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요한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묵시문학적인 부분과 논리적 접근이 용이하지 않게 됩니다. 또 자유주의 해석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요한이고 극적 효과를 위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요한이 만들어낸 창작품이고 후대에 와서 보완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문학작품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저는 저의 스승이신 이필찬 교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하나님이 요한을 사용하여 집필된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실제적 경험을 묵시문학의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이 기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두 번만 읽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성경을 옮겨오고, 묵시문학적이고 이미지화 해서 문학적이고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당시의 성도들에게 설명하여 준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성도들은 요한이 그 본뜻을 숨기기 위하여 이미지화 해 놓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극단적 보수주의 |
자유주의 |
절충안 |
기록방법 |
기계적으로 기록 |
요한의 창작품+후대의 보완 |
유기적으로 기록 |
저 자 |
하나님 |
요한 |
하나님+요한 |
환상의경험 |
요한의 실제적 경험 |
극적 효과를 위한 문학적 기법 |
실제적 경험+문학적 기법 |
문제점 |
문학적이고논리적 접근이 용이하지 않음 |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 |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문학적이고 논리적 접근이 가능 |
요한계시록은 모든 고대 서적들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
시작하는 부분에서 그것들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요한은 서두에서 이것이 세가지
종류의 문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제목에 해당하는 첫 번째 구절에서 하나님이 예수께 주시고
그리고 그 계시의 연결 고리를 통해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 그리스도 – 천사 – 요한(저자) – 하나님의 종들. 이
책을 묵시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고대 유대적이고 기독교적인 문서에 속한다는 것과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다른 작품들과 흡사한 내용이 요한계시록 안에 상당 부분 존재한다는 것을 ‘계시’ 혹은 ‘묵시’라는 단어가
암시해 줍니다. 또한 1장
4-6절은 바울과 다른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사용된 서두의 통상적인 형태를 따라고 있어, 요한계시록이
서신으로서 의도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요한 계시록의 결론 부분이 많은 바울 서신의
결론 부분에 필적할만 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
기독교 예언으로서의 요한계시록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초대 기독교 예언의 정황 가운데 놓아야 합니다. 요한은 그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로 삼았던 교회들 가운데 한 선지자로서 활동해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교회들에게 보내지는 일곱 개의 메시지들은 각 지역 상황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2장21절은-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도다- 아마도 요한이 두아디라에 있는 이세벨이라고 불리는 여선지자에게 선포했던 좀더 이른 시기의 선지적 신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교회들에게 외인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그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 중에서 선지적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보쿰 교수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기독교 선지자들이 보통 기독교 예배 모임들의 정황에서 사역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도 역시 이러한 사역에 주로 가담되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한다. 특별히 예배 모임에서 이러한
기록된 예언을 읽는 것은 요한의 통상적인 예배의 참여와 직접 몸소 선지적 사역을 하는 것에 대치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초대 교회들에서 선지자들은 보통 예배 모임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신탁들을 전달하였다. 그들은 그 계시를 받았을 때 그것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고전
묵시문학으로서의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이 요한이 환상중에 본 일종의 예언, 즉 즉흥적인 예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각고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놀라울 정도의 조심성과 노력을 통해 엮어진 하나의 문학 작품입니다. 우리는 요한이 현저하게 환상적 경험을 했다는 것과 그러나 그가 그것들을 오랫동안의 사색과 기록을 통해 철저하게 문학적인 창조로 변환하였다는 사실을 절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재생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졌던 계시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요한의 서신을 받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책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록 핍박과 순교의 위험에 처해져 있었지만 결국 그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하고 말한 그 의미를 너무나 분명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계시록은 구술적 활동을 위하여 고안된 문학 작품입니다. (계1:3 복이 있도다. 이 예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이여, 이는 그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계시록은 묵시문학의 틀을 따르고 있습니다. 요한은 구약 예언과의 연속선상에 계시록을 두었습니다.
J.J.Collins는 묵시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서사적 골격을 가진 계시적 문서의 장르에 속한다. 그러한 서사적 골격에 있어서 계시는 외부 세계에 속하는 존재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조망하는 한에 있어서는 시간적인 초월적 실재를 드러내고 또 다른 초자연적 세계를 포함할 때는 공간적인 초월적 실재를 드러낸다.
요한의 요한 계시록은 J.J. Collins의 정의를 모두 충족시키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요한의 작품은 매우 독특하게도 상당히 다량의 시각적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대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에녹, 아브라함, 에스라와 같이 성경 전승의 고대 선견자의 이름 하에서 저작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그들이 계승하고 있다고 느끼는 고대 전승의 권위를 주장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그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의 예언이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정경적 묵시문학인 다니엘서의 끝부분에서 그가 특별히 모델로 삼고 있는 구절과 비교하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12:4, 9). 다니엘의 환상은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먼 미래와 관련됩니다. 그의 예언은 그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마지막 때까지 인봉된 책에 숨겨져 비밀로 남겨져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의 사자는 현저하게 다른 지시를 합니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22:10; 참조, 1:3). 요한의 예언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즉각적인 적합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예언의 서두에서 이러한 상황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계1:9). 그러므로 그는 동시대인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고대 묵시문학가들처럼 가명을 쓰지 않는 이유입니다.
회람서신으로서의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일곱 개의 특정한 교회들에게 전달된 하나의 회람 편지입니다. 아마도 밧모로부터 시작하여 아시아 지역 주위에 있는 순환로를 따라 여행하는 사자가 방문한 순서대로 명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신자인 일곱 교회들은 각각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각 교회들에게 개벽적으로 말씀하시지만 그 각각은 요한계시록 나머지에 대한 하나의 서론일 뿐입니다. 요한은 매우 독특하게도 일곱 개의 명백하게 다른 관점에서 읽혀지도록 의도한 책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서신으로서의 요한 계시록을 이해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요한이 사용한 언어는 당시의 사람들, 당시의 수신자들은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이해하였다는 것 입니다. 짐승이 무엇인지, 666이 무엇인지, 두 증인이 무엇인지 쓰는 자와 그것을 받는 수신자는 명확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고대에 7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를 말합니다. 일곱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하고 말한 요한의 메시지가 모든 교회들의 대표로서 특정한 교회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여러 다양한 실제적인 정황들을 명확하게 언급 함으로서, 모든 교회들에게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정황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지를 사용한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을 읽다 보면 많은 이미지들이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구약에 대한 풍성한 인용뿐만이 아니라 동일한 시대에 존재하는 신화적인 이미지들 또한 반영하였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의 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은 현대 그리스도인들보다도 훨씬 구약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예언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설명하여줄 일련의 선지자 집단이 있었다는 겁니다.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한 연인에 대한 환상은 로마 문명에 대한 현란한 의의화를 한 것으로서 화려한 영광을 가진 여신으로서의 로마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신은 많은 도시의 신전에서 경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당시의 성도들은 성경상의 인물 이세벨과 동일시 하여 이해 하였을 겁니다.
계시록 17장 8장을 읽다 보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이 연합하여 제국을 침략하는 동방의 왕들에 대한 묘사를 읽었을 때, 당시 성도들은 죽은 네로 황제가 파르티아에 피신하여 그 군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돌아올 것 이라는 당시에 폭넓게 전파된 네로의 신화를 생각해 내었을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무 시간적 상징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범하는 가장 많은 오류가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을 문자적 묘사들로서 혹은 암호화된 문자적 묘사들로서 읽고 있다는 것 입니다.
문자적 해석의 정점은 인, 나팔, 대접으로 묘사되는 재앙들일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재앙들은 애굽의 재앙들, 여호수아 군대에 의한 여리고의 멸망, 요엘의 예언에서 묘사된 메뚜기 군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 그 당시 파르티아 기병대에 의한 침략에 대한 두려움, 소아시아의 도시들이 종종 당하게 되었던 지진들, 그리고 지중해 지방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베수비우스의 화산 폭발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가장 나쁜 경험. 전쟁, 자연 재해들에 대한 가장 참혹한 기억들 중 어떤 것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묵시적 몫으로 만들고 그리고 그것에 성경적 묵시적 용어들로 주조시켰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논점은 사건들의 순서를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 나팔, 대접이 순서대로 오는 재앙이라는 해석이 혼란을 가중 시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논점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임박한 신적 심판의 의미를 탐색하고 알아내는 것입니다.
신약을 읽는 성경의 독자들은 바울의 서신에 익숙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다른 책과 비교해 볼 때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들 자체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되고 나면,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세련된 문학 작품 중 하나이며, 신학적 업적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이미지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모두 잘 못 해석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성도는 이 서신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힘을 얻었다는 것 입니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하여 3회에 걸쳐서 정리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기 전에 이필찬교수의 저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를 일독하기를 권합니다.
'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2 > 요한계시록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 요한계시록학교 8기(남송교회) 2019.2.20-22일 (0) | 2018.12.21 |
---|---|
요한계시록 강해(2) -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책인가? 2 (0) | 2013.03.06 |
요한계시록 강해(1) -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책인가? 1 (0) | 2013.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