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막내 동생하고 전화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막내 한철이가 신체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처럼 가슴이 메어지도록 답답했던 날이 예전에는 없었습니다. 새벽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고 온갖 가능한 상상력이 저를 몹시도 괴롭혔으니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이 이러했으니 사태의 파악을 맡기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시커멓게 타 들어갔을까를 생각하니,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고 "왜 그럴까?" 하는 모든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아도 해결하거나 위로할 어떠한 단어도 생각이 나지 않는터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한 없이 작고 티끌 같이 여겨졌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많은 고비가 있습니다. 그 고비라는 것이 시간을 살아내고 나면, 추억 또는 과거라는 이름으로 돌아볼 수 있지만 막상 그 순간에 직면해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죽기만큼 싫은 고통과 절망이 따릅니다. 그 순간만 참을 수 있는 이성이 있다면, 그 순간 한번더 생각하는 가슴이 있다면 그처럼 고통스럽지 않을터인데, 많은 면에서 아버지를 닮은 동생이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동생의 목소리, 사고는 나지 않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그 목소리를 들을때 안도의 평안함이 제 긴장된 육체를 나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내 가족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오늘 이 힘겨운 해프닝이 끝나면서는 한철 이에게 따뜻한 형이 되지 못한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울컥 솟구칩니다.
한철 이는 저와 12살의 차이가 있는 남동생 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부모님의 하루 노동으로 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하루살이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여동생들과 저를 반기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었으며, 그 어두운 집안에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 날은 반가움과 외로움에 범벅이된 한철이의 눈망울을 보아야 했습니다. 한 돌이 되기 전 심한 열병을 앓은 후 한쪽 팔과 다리에 마비 증상을 보인 한철 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곧 잘 동네 또래의 아이들과 놀이를 즐기곤 했지만, 가끔 병신이라는 놀림을 당하고 시무룩하게 집에 돌아오곤 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그런 한철이의 말을 전해 들으면 놀린 놈들을 찾아서 패대기를 쳐야 했지만, 가끔은 '너는 왜 팔을 못 움직이느냐'고 몸을 씻겨주면서 팔을 억지로 펴려고 하고 '움직여 봐' 하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본인도 '나는 왜 이런 몸을 가지고 있을까' 수 만번도 더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보통의 육체를 가지고 자유롭게 놀고 싶었을 것이고, 또래들의 놀림도 받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는 어려서 한철이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산으로 들로 마음껏 뛰어다니는 그 속에 끼어서 몸에 흠씬 땀이 배도록 놀고 싶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간다는 것을, 온누리교회 아버지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는 결단코 아버지의 그림자도 닮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살아왔는데, 제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닌 연민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버지 학교를 졸업하면서 깨 닳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던 나에게는, 나는 결단코 아버지와 같은 인생은 살아가지 않겠다고 모든 의식을 집중시키면서 살아왔던 나에게 아버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우리 어릴적 아버지께서는 일주일의 모두를 술에 취해 계셨다는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떤날은 어머니와 엉엉 울면서 시궁창에 빠져서 정신을 잃은 아버지를 끄집어 내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도 얼마나 사는 것이 버겁고 힘겨웠으면 술로 위로를 받으셨을까 지금은 이해가 되지만, 당시는 주물공장의 쇳일이 끝나면 술을 드시고 들어와 우리 모두를 무릎 꿇어 앉게 하시고 일장 연설을 하는 아버지가 무섭고 싫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돌림 말씀을 몇 시간이고 듣고 있다가 술에 몸을 이기지 못하시고 쓰러져 주무실 때까지 견디고 있다가 저린 발을 주무르며, 한방에 쓰러져 뒤엉켜 자야 했던 시간들은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입니다.
저에게 당시 아버지라는 단어는 지워버리고 싶은 언어였고, 나는 결코 아버지의 그림자도 닮지 않겠다고, 인생의 모든 것을 아버지와 반대로 살겠다고 결심했으며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ㅇ. 술은 결코 입에도 대지 않는다!
ㅇ. 먹어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
ㅇ. 내 아이에게는 길게 훈계하지 않을 것이며 대화한다. 끝까지 대화로 설득한다.
최대한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같이 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여행도 떠나고, 여행지에서는 환전한 돈을 공평하게 나눠 숙박을 제외한 식비와 교통비등 모든 여행비용을 각자가 해결하게 하는 교육을 시키면서 이 좁은 한국이 아니라 세계인이 되게 하겠다는 극성을 부립니다. 아이들을 만나면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잘한다고 칭찬하고, 쉬는 날이면 같이 도서관에 가서 옆에서 공부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심어줍니다. 이 모든 노력이 아버지 안 닮기였지만, 전 역시나 그 아버지의 아들 입니다. 제 속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는 것을 한철이가 2년만에 일으킨 이번 소동으로,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제까지 한철이를 대해 왔다는 것을 깨닳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한철 이를 아버지의 모습으로 대했으니, 그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불쌍한 한철이 에게 돌아갔습니다. 일찍부터 담배를 배운 동생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오다가 나와 마주친 날은 그 자리에서 뺨을 때리는 매정한 형의 모습이 저였습니다. “한철아, 너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육체로 정상적인 아이들과 경쟁을 할 수 없으니 정신노동, 실력으로 앞서야 하는 거야, 네가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야.” 매번 공부에는 취미가 없는 동생을 볼 때 마다 협박과 공포심으로 주문하는 저의 이야기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한철이가 공부를 못하였던 것은, 아니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였던 것은 부모님의 불찰이었을 겁니다. 장남에게 올인하여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집안에서도 저에게 만은 과외와 학원을 보내셨고, 동생들은 스스로 공부해야 하니 저도 재미가 없는 공부가 아이들에게 재미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한철이가 중학교까지의 의무교육이 끝나고 고등학교에 입학이라도 한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습니다. 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너무 기뻐 입학식장에 동행하였고,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왼팔을 잡고 입학생 속에서 밝게 웃는 모습이 예뻐 보였습니다. 고등학교라도 졸업할 수 있을꺼라는 안도를 부모의 심정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한철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가지고 있는 장애 때문에 취직을 하지 못하여 몇 년간을 술 속에서 살았습니다. 전 참 인정이 없고 못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새파란 나이에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나 살았으니 한철이의 생활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 부모님의 고통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일할 곳이 없으니 젊음을 발산할 곳이 없고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있을 한철이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아버지를 닮은 구제불능이라고 안중에도 없었으니 인정도 없는 형입니다. 그 즈음도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마셨을 것이고, 어머니는 새카맣게 타 들어간 가슴을 안고 살아가셨을 겁니다. “한철이 어떻게 좀 해봐……”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계열사의 부사장님을 찾아뵙고, 장애를 가지고 있는 동생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간청을 하여 지금의 직장에 다니게 된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 고마움을 다시 한번 그분에게 전하여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 닳습니다.
하지만 취직을 하고도 술에 취해서 직장에 출근을 못하는 날들이 많았으나, 한철이 에게는 다행히도 제가 그 회사에 한때 몸담았던 경력으로 중간 간부들이 동생처럼 따랐고 임원들과의 친분 그리고 모기업의 임원이라는 저의 영향력 때문에 외줄타기처럼 불안한 직장생활을 이어나갔었는데, 개과천선이라고 2년 전부터 한철이가 건실한 아들로 변하였습니다. 운전면허만 따면 차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수년 전부터 했으나 의욕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 애인이 생긴 후부터 부지런히 면허를 따고, 차를 구입하여 출퇴근을 하면서 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했으니 저는 이것이 기적이라고 생각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업보로 한철이를 짊어지고 사시는 어머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녀석이 대견스럽게 보였습니다. 하루빨리 지금의 애인과 결혼하기를 종요하였고, 여자의 마음이 변하기전에 임신이라도 시켜서 주져 앉히라고 주문을 하기라도 하면 피식 웃어버리는 한철이를 몸이 닳아 다그치는 이상한 형의 모습이 저였습니다.
오늘 새벽 전화가 울리면서 그 평화가 깨진 것 같았습니다. “새벽에 회사에서 직원 두 명이 찾아와 같이 나가 술을 마시고 지금 들어왔는데 답답한지 가슴을 치고 괴로워해”, 그리곤 잠시 후 같이 술을 마신 직원에게 아들을 출근시켜 주라고 부탁을 했는데, “운전석에 한철이가 앉아서 출발했다”는 몇 차례의 전화를 어머니로부터 받고서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줘” 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전화를 받고 새벽에 침대에 일어나 앉아 한철이 에게, 그리고 같이 동행하였다는 직원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받지를 않아 도대체 그들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가능성을 정리하니 첫 번째 “정리해고 통보”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상무와 실장에게 전화를 하니 모두 똑같이 받지를 않으니 그 의문이 확신이 되었습니다. 녀석이 술이 취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일부러 사고를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답답해 졌습니다.
그리곤 내가 얼마나 힘이 없는 인간인지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해고가 되었다면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있을까? 물론 사장부터 임원 모두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 내가 비굴해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한없이 허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 그 순간 저를 절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곤 한철이 에게 퍼 부었던 내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으로 한철이 에게 따뜻하게 해주지 못했던 못난 형의 모습이 한편의 영화 다이제스트처럼 눈앞을 흘러갔습니다. 목욕을 하면서 ‘왜 병신처럼 팔을 못 펴는 거야’ 하면서 억지로 팔을 펴면 다시 접히고, 다리가 꺾이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던 매정한 형,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려 뺨을 맞았던 모습, 정신 차리라고 엎드리게 하고 몽둥이로 때렸던 매정했던 내 모습이 보이면서, 숨이 턱 막히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지독하고 정이 없던 형이었구나.……
그랬습니다. 전 지성을 위장한 개기름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가진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못된 형이었습니다. 그땐 그것이 동생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 폭력을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우매하였습니다. 동생에게 어떻게 용서를 받아야 할까 막막합니다. 9시가 넘어서야 상황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한철 이와 통화가 되었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하였고, 대리운전을 불러서 출근하였다고 합니다. 한철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상무와 통화가 되고, 실장에게는 한철 이와 통화가 되기 전 그 상황을 이야기해 줘서 보살펴 주기를 부탁하였더니 밤새도록 술을 먹은 한철 이를 점심시간에 퇴근시켜서 쉬게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집에 전화를 하니 들어와서 침대에서 자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 그렇게 긴 하루가 끝이 났습니다. 네이처포엠의 갤러리 공사를 보고 돌아와 자리에 앉아 생각난 어머니 같은 누님에게 전화를 하면서 한철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가족은 가장 많은 추억을 함께 하여야 하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저 같은 아픔이 다른분에게는 없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한철이가 나에게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아직은 제가 이 땅에 살아 숨쉬고 있으니 형제의 정을 나눌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합니다.
‘한철아……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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