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오늘의 그리스도론-
서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들
1. 우주론적 관점
예수에 대한 우주론적 관점은 초대교회의 희랍세계적인 우주론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의 기본 틀은 세계는 대 우주이고 인간은 소 우주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와 신과 존재론적인 유비관계를 지니며 동시에 서로 구별되기도 한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신의 존재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한 분으로 예수는 이해되며 그러기에 구원이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신적 본질과 광채를 인식하고 인식을 통하여 이에 참여함으로써 신격화되는데 있다.
2. 인간학적 관점
사유하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과 지배자로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더 이상 우주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에 대칭하는 주체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간학적 전환”에 힘입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일어났는데 이에 의해 예수는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인간으로 이해되고 구원 역시 인간이 의식을 통하여 구원자를 인식함으로써 일어난다.
3. 이 책의 관점과 기술 방법
1. 종말론적, 메시야적 관점: 구약성서의 메시아적 관점에서 예수는 이해되어야 하며 그의 말씀과 촛점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파악하고자 한다.
2. 성령론적 관점: 성령을 통하여 잉태된 예수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으로 또한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이 땅에 오신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3. 아래로부터의 관점: 온전한 인간과 온전한 신으로서의 예수는 예수의 삶 곧 아래로부터 출발하여 이해되어야 하며 이 땅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4. 신학적 관점: 예수는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그의 말씀과 활동들을 해석할 것이다.
5. 물질론적 관점: 물질을 포함한 현실의 세계를 고려하면서 글을 써 나갈 것이다.
6. 여성신학적 관점: 예수의 삶에 함께 했던 여인들의 존재를 고려하면서 예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것이다.
7. “우주적 그리스도”의 관점: 인간은 물론 자연의 세계까지 포괄하는 관점.
8. 모든 관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통전되는데, 역사의 예수는 그의 모든 말씀과 활동의 주제를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두었기 때문이다.
제1편 예수의 역사적 배경
Ⅰ. 중간시대의 역사
1. 페르시아의 팔레스틴 통치
바빌론 포로 이후 페르시아는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하고 율법을 페르시아의 속국의 법으로 인정하면서 유화정책을 펴나갔다. 결국 이 일로 유다와 사마리아는 정치적으로 분리되고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게 되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예수는 바로 이 분열된 시대 속에서 태어났다.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통치
주전 333년 알렉산더대왕의 군대는 승승장구를 계속했는데 그의 힘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쉽게 굴복하였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자주권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희랍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더 사후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미 왕에게 점령된 유다는 315년에는 안티고누스에 의해 팔레스틴이 지배되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산헤드린이 자주권을 갖고 제반 문제들을 결정하였다.
3. 시리아의 통치와 마카비 혁명
주전 175년에 시리아의 왕이 된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민족의 희랍화와 종교 탄압을 가속화시켰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의 정책에 별로 저항하지 않았지만, 시골의 주민들은 완강히 저항하고 조상의 신앙을 지켰다. 그 중 모데인에 사는 하스몬 일가의 마타티아스는 강렬히 저항하였는데 그의 아들들은 주도적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마카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들은 종교적 문제 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및 투쟁도 행하였기에 주전 140년에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대제사장인 동시에 세습적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하스몬 왕가가 세워졌는데 일군의 하시딤은 이것을 반대하고 은둔하거나 수도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4. 하스몬 왕가의 통치
처음으로 왕으로 추대된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사두개인들과 친화하였다.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은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의 사망이후 그의 부인 살로메는 첫째 형인 요나단에게 정권을 위임하였고 그가 죽자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나라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대제사장이 될 수없었기에 그의 아들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봉하였다. 그녀가 죽자 차자인 아리스토불 2세가 왕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형제사이에 다툼이 일게 되고 이것을 해결하려 로마의 환심을 얻으려다가 결국은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점령되었다. 주전 48년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하자 힐카누스는 안티파터를 로마의 사절로 보냈고 그로인하여 안티파터의 아들 파사엘은 유다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 이후 정치적인 격변속에서도 교활한 헤롯은 살아남아서 주전 37년 로마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얻고 왕위에 올랐다. 헤롯은 하스몬 왕가의 마지막 시도를 좌절시키고 그 왕가의 마지막 공녀 마리암네와 결혼함으로써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바로 이 헤롯의 통치기간 말기에 세례 요한과 예수가 테어났다.
Ⅱ.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헤롯 왕은 죽기 직전 자기의 왕국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켈라우스는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메의 분봉왕으로,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으로, 필립보는 북쪽의 요단강 동편 지역의 분봉왕으로 봉하였다. 이들은 비록 왕의 칭호는 얻지 못했지만 유대인들에기는 그들을 통치하는 자가 곧 그들의 왕이었기에 이것은 상관없는 문제였다.
잔인한 아켈라우스는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당하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로마의 속주로 병합시켰다. 그래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본디오 빌라도가 오게 되었는데 그는 부패하였고 간교하며 잔인하였다. 예수 당시에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는 헤롯 안티파스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동생의 부인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딸 살로메를 낳았는데 그는 이것을 이용하여 세례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간교함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헤롯 왕의 사망 시기인 주전 4년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예수가 살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탄압과 착취, 로마와의 결탁으로 인한 부패는 끊임없는 사회불안을 야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2. 반 로마 혁명
증가되는 로마의 탄압과 모욕은 여러차례의 저항운동을 낳게 하였는데 주후 66년 총독 플로토스에 의해 야기된 봉기는 유다전쟁으로 까지 치달았다. 결국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불길에 휩싸이고 제 1차 반 로마 혁명은 참패로 끝났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 의한 유대교 재건 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주후 132년에는 제2차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 혁명의 실패와 함께 유대인들은 1948년 팔레스틴에 정부를 다시 세우기까지 나라와 영토를 잃어버리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랑민족이 되었다.
3. 사회, 경제적 상황
엄청남 세금 부담, 고위층의 착복 등으로 중산층과 소산자층은 사라지고 왕을 중심한 관료들과 성전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나고 가난한 자들은 절대 다수를 이루는 시기였다. 철저한 계급 위계로 인해 사회적 신분 또한 이미 결정되어 버리고 가난과 소외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여 적들과 대결하였다.
Ⅲ. 예수 당시의 종교적 상황
1. 배타적 유일신 신앙
포로귀환 후 그들은 모든 고통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라고 생각하고 배타적 유대주의를 세우기 시작했다. 예수가 생존하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로마의 헬레니즘화와 로마 황제의 통치를 끝까지 거부하였던 이유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배타적 신앙에 있었다.
2. 율법과 성전
어떤 종파에 속하든지 모든 유대인들은 율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계약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율법과 더불어 이것을 해석한 할라하도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가르쳤다. 또하나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을 형성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것은 야위의 “집”이었고,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대표자로서 이 민족의 명목상의 수장으로,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다.
3.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사독의 후손들로서 포로기 이후 법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제사를 집행하였다. 대부분이 하스몬 왕가에 협조한 제사장들의 자손인 이들은 정치권력자의 편에서서 민중을 억압하는 일에 동조하는 동시에 로마제국의 희랍화 정책에 협조하였다. 사두개파는 율법의 글자 자체의 뜻을 고집하였고, 냉철한 사고로 인해 천사와 사탄의 존재를 허용치 않고 죽은자들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4. 바리새파
마카비 일가가 반 로마혁명을 일으켰을 때 율법에 충성하는 “경건한 자들” 곧 하시딤이 혁명에 가담하였는데 이들은 율법을 지키기위해서 가담하였기 때문에 하스몬 왕가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협조하지 않았다. 세속 안에 살면서 경건과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대 변혁을 준비하려는 바리새파는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별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5. 젤롯당원
이들은 바리새파와 같이 율법에 열심하는 자들이었지만 “철저히 지유를 지켜야 하며 하나님만을 그들의 주와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기에 로마 통치를 거부하였다. 주후 66년 제1차 반 로마 혁명의 주동자들은 젤롯당원이었다. 이들은 마사다 요새에서 자결함으로써까지 로마의 통치를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6. 엣세네파
엣세네파의 이름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데 필로와 요세푸스의 저서에서 그들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이들도 하시딤의 후손들로서 세속과의 관계를 피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하였다. 엄격한 금욕생활을 한 이들은 반 로마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쿰란 문서에 엣세네파라는 이름이 아무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쿰란 공동체가 엣세네파의 중심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7. 쿰란 공동체
이들은 속세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생활을 하였고,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의 이원론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해 조금의 타협없이 율법을 지키고자 애썼다. 성을 불결하다 하여 성관계를 하지 않는 등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계급제도와 상급자에 대한 복종을 특징으로 가졌다. 엣세네파와 많은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자신을 참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그의 비밀을 계시한 거룩한 자, 선택된 자로 이해하였다.
8. 서기관들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치며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서기관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결정권자였다. 서기관의 직책은 세습제가 아니었고 성공적으로 선배 서기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는 랍비가 될 수 있었고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어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당시에 가장 유명한 서기관은 힐렐과 샴마이 였는데 힐렐은 온건하였던 반면, 샴마이의 가르침은 엄격하였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유대 공동체가 산산조각이 았을 때 랍비 예후다는 율법 해석들을 정리하는 일에 전력하여 주후 2세기 말에 미슈나(Mischna)가 완성되어 모세의 율법과 함께 유대교 공동체 생활의 규법이 되었다.
9. 묵시사상
고난의 현실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이 세계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게 되었다 하여 묵시사상이라는 것을 발전시켰다. 묵시사상은 이원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시대를 구원불가능한 시대로 단정지었다. 또한 비관론적이며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메시아의 오심과 최후심판을 믿으며 그 후에 다가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 시간의 수를 계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 시대의 역사 밖에서 기대하지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이심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생각들과 함께 묵시사상은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한계를 깨트려 버린다. 하나님이 온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사상은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제 2 편 메시야 예수의 오심과 그의 인격
Ⅳ. 하나님 나라의 담지자 메시야 예수의 오심
1.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본 예수의 탄생
약속과 성취의 틀에서 예수의 오심은 이해되어야 한다. 약속의 전통에서 볼 때, 예수의 탄생은 이 약속을 성취할 분의 탄생을 뜻하며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뜻한다.
2. 비천한 여자에게서 태어남
예수가 억압과 착취의 대상인 여자를 통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그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거부를 뜻하며 우리 인간이 비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위하여 귀하게 쓰일 수 있음을 말한다.
3. 예수의 사회적 신분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사회적 신분이 비천하였다는 증거가 여럿 나온다. 첫째,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건 그리고 둘째, 예수 부모의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목수), 그리고 예수 자신도 본래 목수였다는 마가복음의 보도가 그 증거들이다. 그가 사용한 언어 또한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유대교 신학자 샬롬 벤 호린은 예수의 사회적 신분을 가리켜 “다윗 왕가의 한 지류에 속한 가난하고 무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4. 동정녀 수태와 예수의 무죄성
동정녀 탄생이 예수의 무죄성의 근거라고 보는 신학자들은 이원론에 지배를 받고 있기에 원죄를 인간의 생리에 유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원죄는 1. 인간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죄의 불가피성과, 2.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어디서 오는지 해명할 수 없는 죄의 비밀성과, 3. 모든 인간은 죄에 있어서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무죄성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죄를 법하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십자가의 자기희생을 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 성령의 능력 가운데 태어남
성령수태는 예수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메시야적 아들임을 말하고자 하며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임을 말하고자 한다. 또한 성령 수태는 예수의 사건이 한 인간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임을 시사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6. 율법 아래 태어남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인 율법은 시대를 거치면서 율법주의라는 기현상을 낳게 되었다. 율법주의로 인한 사회 계층의 분열과 소외는 예수가 “율법 아래” 태어났기에 또한 그에게도 적용되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울법의 유혹과 고발과 저주가 다스리는 인간의 세계속으로 오셨음을 말하며 동시에 유혹을 이기고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뜻한다.
7. 하나님 나라의 물질화 - 영원한 로고스의 성육신
말씀의 성육신은 메시야 예수의 영원한 선재(先在)를 전제하며 예수가 인간의 모든 허무성과 제한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말한다. 그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이 되었고 이것은 육을 가진 인간과 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하여 긍정되었음을 뜻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영적 세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육 곧 물질을 포괄하며 물질의 세계 속에 구체화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8. 인간의 종이 되신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자기를 비워 영광의 자리를 포기하고 무력한 십자가의 죽음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고난과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을 찾으며 그들 안에 현존한다. 그 까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이기 대문이다.
Ⅴ. 되어감 속에 있는 예수의 메시야적 인격 -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1. 예수의 메시야적 자기의식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메사야적 의식이 있었다기 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것을 형성하였다. 그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역사를 통하여 되어져 가는 과정 속에 있다.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져 있는 사회적 인격 개념에 근거하여 예수의 존재를 파악하고자 하는데, 예수의 존재는 그러므로 “관계들 속에 있는 존재”, 되어감 속에 있는 존재였다.
2.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
예수는 예언자로 인식되었지만 예언자와 동일시되지도 않았고 랍비로 인식되었지만 랍비로 동일시되기도 않는다. 그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지만 그는 그 권위의 출처를 제시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주 특이한 존재로 나타나지만, 결코 그 사회를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메시야적 권위를 가지고 메시야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의 말과 행동 속에서 메시야적 자기의식은 발견된다.
3. 삶이 존재를 증명한다.
그의 정체성은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드러날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증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양한 관계 속에 실존하였고 그 관계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의 메시야됨은 그의 고난으로 증명되기에 예수는 그의 삶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그는 메시야적 존재이기에 메시야적 삶을 살아갔고 진리는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기에 그의 삶은 그의 존재를 밝혀 준다.
4. “아빠”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우리는 예수와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이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믿는 사람은 예수와 같이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 안에 있게 된다. 하나님의 아빠되심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져오며 하나님상의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5.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 하나님상의 혁명
아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주 직접적인 현존, 임재하심, 자기를 현재적으로 드러내심을 표현한다. 그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가까이 계시며 어떤 조건도 없이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뜻하고 인자하며 용서하고 말 없이 섬기는 어머니의 상이 하나님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은 단순히 죄인을 영접하며 위로한다는 수동적 의미에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실된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모든 인간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형성하는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다.
제 3 편 사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Ⅵ. 예수와 함께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
1. 세례 요한과 예수, 예수의 광야 유혹
복음서가 예수의 공적 활동을 이야기 하기 전에 세례 요한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의 선포와 모든 활동이 세례 요한의 회개운동과 세례운동으로부터 유래하며 따라서세례 요한의 회개운동과 세례운동이 예수의 선포와 활동에 대한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이들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충분히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를 베푸는 세계이다. 또한 그 나라는 세무원들의 횡포가 없고 공직자들의 속임수와 착취가 없는 세계이다. 이 둘은 모두 기성 종교 밖에서 활동하였으며 제도화된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는데, 그것은 세례요한은 인간의 행위에 심판으로 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반면 예수는 죄인을 용납하는 은혜로서 오는 것으로 선포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습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은 광야에 기거한 반면 예수는 광야를 떠나 성읍으로 들어가 활동한다. 그리고 예수는 종말의 이론에 대하여, 묵시사상적 사변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수의 광야유혹: 세 가지 유혹은 그의 메시야적 선포와 활동의 틀을 형성하는데 첫째 유혹은 경제적인 것이요, 둘째 것은 정치적 유혹이며 셋째 유혹은 종교적 유혹이다. 그는 여기에서 “힘이 없는 메시야”를 보여주는데 이 이야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그의 모든 선포와 모든 활동의 틀을 형성한다.
2. 예수의 사역의 중심
“하나님의 나라” 선포로 시작된 예수의 공생애는 그의 사역의 중심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즉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데 있음을 잘 나타낸다. 묵시사상적 분위기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존재와 함께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의 자녀가 되는 종적인 면을 가지는 동시에 인간과 세계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변화되는 횡적인 면을 가진다.
3. 예수의 묵시사상적 전통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구약의 민족적, 역사 내적 메시야니즘에 속한다기보다 묵시사상적 보편적 메시야니즘의 전통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함께 지금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데서 차이가 있다.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예수는 죄인과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선포한다.
4. 병고침과 귀신추방의 신학적 의미 - 기적의 사회적, 새 창조적 기능
병치료와 귀신추방의 기적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보여 주는 “그리스도론적 기능”을 가진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낼 때, 거의 예외 없이 예수가 누구인지 고백된다. 병치료와 귀신추방의 기적은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종말론적 기능”을 가진다. 또한 이 기적들은 메시야 예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신학적 기능”을 가진다. 구원은 피안의 구원과 동일시되거나 실존적 내면성이나 개체 인간의 본래성과 동일시 될 수 없는 통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자들의 인간적 가치를 회복하고 그들을 사회로 통합시키는 “사회적 기능”, “새 창조의 기능”을 가진다.
5.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자신의 존재와 함께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는 비유들을 통하여 설명한다. 이 비유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성장을 나타내는 비유, 고귀함을 나타내는 비유, 잔치의 비유, 청지기 비유, 분리의 비유,찾는 비유, 일꾼의 비유등이다.
예수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동시에 초대된 인간이 어떤 결단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기능을 가진다. 또한 이것은 말의 형태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다. 그리고 비유 속에서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6.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현재”와 “현재적 미래”
한편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것임을 전제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속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현재적으로 말하는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말하였다. 이것은 피안의 것도 아니며 인간이 이룩한 역사의 어떤 단계와도 동일시될 수 없다.
Ⅶ. 하나님 나라의 사회성
1. 종교의 일반적 특징
본훼퍼에 따르면 종교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있다. 이것은 타계적인 신앙을 생성케하는 요인이 된다. 그리하여 종교는 이 세계 곧 차안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종교의 일반적 특징은 소위 말하는 물질과 대립되는 의미의 영성에 있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 영적 문제와 관계할 뿐이다. 개인주의는 또 하나의 일반 종교적 특징을 형성한다. 그리고 내면주의를 형성하고 “문제의 해결책의 역할을 한다. 이리하여 종교는 현실 전체와 관계하지 못하고 소위 종교적 문제들의 영역으로 자기를 페쇄시키고 하나의 ”국부적“현상으로 전락한다.
2.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
위에 기술한 종교의 일반적 특징은 예수에게서 거부된다. 역사의 예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까지나 구체적 현실 속에 있으며 이 현실 속에서 이 현실의 모든 불의하고 불합리한 것을 개혁함으로써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3. 사회개혁으로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나라 - 예수의 희년 선포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희년의 정신과 연속되는데 안식년과 희년의 계명은 가난한 사람들의 빚과 노예화와 자연의 착취를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인 동시에 “생태계의 개혁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메시야적 시간의 시작”이요 하나님나라의 구체적 형태이다. 예수의 많은 말씀은 희년법에 관한 그의 선포와 일치한다. 그래서 예수는 희년법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개혁을 요구한다.
4. 사회적 관계와 갈등 속에 있는 예수
역사의 예수는 모든 문제와 갈등 속에서 살았으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갈등이 있는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불을 주러”왔다.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종교적 존재”인 동시에 철저히 “사회적 존재”이다. 이러한 제반 갈등 속에 실존하였던 예수의 사회적 관계 내지 사귐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여자 제자들과 남자 제자들과의 관계를 볼 때 예수는 남자 제자들은 물론 여자 제자들과의 공동체적 사귐속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민중의 관계에서 예수는 민중(ochlos)과 각별히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예수와 그의 민족 이스라엘은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범위에 국한되어 있었던 사실로 예수는 사회적, 공적존재라는 것이 증명된다.
5. 하나님 나라의 생태학적 차원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와 물질의 세계, 동물과 식물도 창조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동시에 “생태계의 구원자”로서 안식년법과 희년법의 계승적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Ⅷ. 약한 자의 편에 서는 하나님의 나라
1.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에게 먼저 전하여지는 까닭은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요일 4:8, 16). 부자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부자들의 부는 상당 부분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논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되어야 함에도, 부자는 대개 그것을 거부하기에 인간으로서의 기본 가치와 권리를 상실한 가난한 사람들의 계층이 생성된다. 때문에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파적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2. 예수는 사회주의자였던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당파성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려는 데서 시작된다. 이 평등은 사회주의적인 소유공동체도 아니고 특정한 경제체제를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가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것이 삶의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소유의 차이는 있으나 부의 과도한 독점은 사라지며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 생존권이 보장받는 사회를 이루어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3.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가난한 자도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회개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로”와 “약속”의 말씀이다. 이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역사의 주체성”을 암시하며 동시에 마음이 가난함도 요구되어진다. 자기의 가난에 대한 원망과 가진 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삶들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빈 마음이 있을 때 인간은 행복하며 빵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게 된다.
4. 여자와 어린이의 인권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당시 유대인의 사회는 한 마디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여자는 이중 삼중으로 제약과 억압속에 있었고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남성 중신의 사회에서 예수는 여자들에 대하여 아주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많은 여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다녔고 부활을 가장 먼저 경험한 사람들고 여자들이었다. 예수와 여인들의 이러한 섬김과 사귐은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하나의 혁명적인 일이었다.
약한 자의 편에 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의 권리와 존엄성을 회복하는 예수의 사건에도 나타난다. 어린이들은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교만하지 않다. 자기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날는 열려 있는 것이다.
Ⅸ. 회개와 죄 용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1. 개인의 변화도 필요하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개혁의 성격을 강하게 띠지만 그것이 단순히 사회 개혁을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사회의 개혁과 더불어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개인은 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추상적 존재도 중립적 존재도 아니다.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개인의 존재와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죄와 죽음의 세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회개하는 개인의 존재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이다.
2. 예수가 요구하는 회개
예수가 요구하는 회개는 먼저 하나님을 자기의 생명과 온 세계의 주로 승인하고 그에게 자기의 삶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이웃을 향한 섬김의 삶또한 회개하는 자가 가져야 하는 특징이다. 이러한 참사랑은 자기와 상대방을 동일화시키며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바로 여기에 “율법의 완성”이 있다.
3. 죄에 대한 예수의 침묵
개인의 죄에 대하여 예수는 복음서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적, 절대적 정의를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죄의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죄에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 어려운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개인의 죄와 용서에 대하여 거의 말하지 않는다. 또한 허다한 경우 불의한 체제 때문에 죄가 일어나는 경우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는 사회의 통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예수는 한걸음 더 깊이 죄를 파악하여 죄된 행위만을 보지않고 인간의 죄된 본성과 마음을 보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가 무엇이며 누가 죄인인가를 상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는 소위 “죄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죄의 용서
예수는 개인의 죄에 대하여 별로 말하지 않지만 개인의 죄는 용서하여 주시는 분으로 행동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죄의 용서를 포함하며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 개인의 회개와 죄의 문제, 윤리의 문제는 “구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는 강조점에 있어서 사회의 불평등의 일차적인 원인을 부자들에게 두기에 복음서의 예수는 사회적 약자들의 죄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한다.
5. 죄 용서의 사회적 의미
예수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에서 병자들과 죄인들은 소외되었고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죄용서는 예수가 당시의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의 편에 선다는 것을 뜻하며 기존의 판단기준을 뒤엎으며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예수의 죄용서는 당시 종교적 제도의 상대화를 내포하는데 이로 인해 예수의 죄 용서는 당시 이스라엘 지배층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예수는 죄의 용서와 함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기에 사회의 부유한 지배계층의 미움과 배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지막 귀결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Ⅹ. 하나님 나라의 물질성 - 굶주림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
1. 하나님의 나라는 굶주림이 없는 세계이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그의 뒤를 따르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을 자주 보도한다. 그 동기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함께 밥을 먹는 나라이다. 여기에는 자리의 높고 낮음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는데서 하나님나라의 특징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2. 밥을 함께 먹은 사건의 의미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한 동아리에 속한다는 연대의식과 공동체의식을 나타낸다. 소외된 자들에게 이 식사는 그들이 형제들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보증하는 표시이었다. 그리고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삶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말한다. 운명 공동체로서 그들은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나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동시에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하여 준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므로 예수가 있는 곳에는 굶주림의 문제가 사라진다. 3.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가 주는 교훈
이 식탁 공동체의 사건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물질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와 차별이 없는 세계임을 보여준다. 때문에 이 사건은 세계의 모든 공동체와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암시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들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물질적 차원을 시사한다. 이 사건을 통하여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삶으로써 이웃을 향해 봉사하고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을 교훈으로 주고 있다.
4. 세리와 죄인들과의 만찬과 최후만찬
예수와 소외된 사람들이 함께 나눈 만찬에 대해 리마문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선포하고 드러낸다”고 말한다(성찬). 예수의 만찬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자 이사야의 “약속”의 지평 속에 있으며 “종말론적 만찬”이었다. 예수의 최후 만찬은 예수께서 평소의 만찬에서 현재화시킨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자신의 신체적 인격(Leibliche Person)으로 집약된다.
5. 성찬식의 역사적 유래와 의미
성찬식의 일차적 근원은 이 예식을 반복하라는 예수의 “반복 명령”에 있다. 그러나 이 만찬은 평소의 가난한 자들과의 식탁과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성찬식의 근원은 쇠외된 자들과 함께 나눈 평소의 만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 성찬식은 교회들의 성찬식이 소외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사건이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또한 성찬식은 단순히 예수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념의 만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앞당겨 일어나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성찬식을 거행하는 교회는 모든 사람이 한 형제 된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다.
Ⅺ.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 - 인간다운, 참으로 인간다운 하나님의 아들
1.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복음서의 예수는 부유한 상류층과 중산층의 사람들을 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그와 삶을 나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혈병, 문둥병, 간질병, 중풍 등 귀신들린 자들, 그 사회의 그늘 속에 사는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예수는 소위 점잖은 사람,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회의 비도덕적인 자들, 불경건한 자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사람이었다.
2. 인간의 기본 생존권이 보장되는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군의 비유(마 20:1-16)는 우리가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다른 각도로 이해된다. 물가인상과 흉년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불황은 많은 날품팔이꾼과 거지를 양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이 본문의 이야기에도 나타나는데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것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은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품삯을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기본 생존권을 보장받으며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는 인간적인 곳임을 이 비유는 시사하고 있다.
3.가치체계를 상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
율법주의로 인한 사회적 윤리의 통념을 예수는 상대화 시켰다. 그는 당시의 사회속에서 불의하고 악하며 더럽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이 일을 한다. 예수의 산상설교도 이 대립과 분리를 상대화시키며 결정적으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섬김과 섬김을 받음, 지배와 피지배, 높음과 낮음의 대립을 극복하는 궁극적 근거가 된다.
4. 지역적 대립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당시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사마리아는 심한 대립 상태에 있었으며, 이 대립은 오랜 역사적 유래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예수 당시에도 두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왕래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곧 “미친 놈”이라는 말로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이 지역적 대립을 극복하며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멸시받는 사마리아인들의 편에 선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지역적 감정과 대립은 물론 인간의 모든 파벌에 얽매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 대립과 분리에 있어서 약한 자의 편에 선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5. 구약의 하나님 상과 일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
예수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며 그 사회의 가치체계를 상대화 시키며, 지역적 대립을 무시하는 것은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인간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는 그의 나라도 인간적인 나라이다. 예수가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간성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하비루를 고통에서 불러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구약의 율법은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자비를 중요한 요소로 가지고 있다. 이 전통에서 복음서의 예수도 먼저 그 사회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Ⅻ. 사랑의 구체적 실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사랑의 위대한 행위나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1. 서로 용서하여라
사랑은 용서 속에서 구체화된다. 용서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막혔던 담을 허문다. 그러므로 예수는 서로 용서함으로써 화해하고 이웃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선포한다.
2. 자기를 낮추고 서로 섬겨야 한다 - 참 지배자는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는 자
복음서의 예수는 소위 위에 있다고 하는 자들의 착각을 깨어버리고 그들의 참 신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눅 22:26). 지배하는 자의 신분은 섬기는 자의 신분이다. 예수는 자기 낮춤과 섬김을 자신의 존재에 근거시키면서 그의 삶을 통해 불의한 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며 그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였다. 이 섬김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3. 자기의 소유를 베풀어야 한다 - 소유의 문제
예수는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하며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고한다. 예수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소유를 얼마나 많이 베푸느냐에 있지 않고, 자기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지 구제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나누려고 하는 마음으로, 있는 것을 나누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다.
4. 예수의 궁극적 요구
예수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소유의 포기와 베품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과 존재를 하나님에게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어 맡길 때 재산도 포기할 수 있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우리 존재를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그것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요구한다.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하는 궁극적 재료이다.
5. 부의 포기를 요구한 설교가들
주후 약 2세기 중반에 로마에서 설교를 하였던 헤르마스는 부자들도 그들의 재물들이 깎여지지 않는다면 주님께 유용하게 될 수 없다고 설교한다. 약 2세기 후에 암브로스는 부자들에게 혹독한 심판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에게 경고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로마 제국의 중간 쯤에 위치한 다른 부유한 도시에서 요한 크리소스톰은 부자들의 원천은 부정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경고성이 가득한 설교로 부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설교자들은 부를 교회에 바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설교하면서 가난한 이에 대한 교회의 책임도 강조하였다.
6. 사회의 부를 재분재하는 사랑
우리 나라 국민 5%가 전 국토의 65%를 소유하고 있으며, 20%의 국민이 국토의 85%를 소유하고 있다.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권력 및 정치권력과 결부되어 있는 소수의 부유한 삶들과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도적의 무리”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참으로 돕는 길은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된 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사회 전체를 위하여 사용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희년의 정신은 참으로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법인 동시에 사랑의 구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삶 역시 섬김의 삶이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내어줌의 사랑이었다.
제 4 편 종교와 하나님의 나라
예수가 자신의 몸으로 앞당겨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가르친 “주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궁극적 희망과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제사한다.
ⅩⅢ. 종교의 형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1. 종교적 관습에 대하여 자유로운 예수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던 예수의 이야기 솜씨는 매우 소박하였고 단순하였다. 그는 언제나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였고 어떤 고정된 원리들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비유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한다. 예수에게 있어 종교적 형식들은 절대적 의미를 상실한다.
2. 율법을 상대화시키는 예수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이었다. 율법이 중요하게 여겨졌던 사회에서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시킨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었다. 때문에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율법은 해석되어야 하며 인간이 율법의 기준이 된다.
3. 예루살렘 성전과 제의의 상대화
예수는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진리 체계 곧 말씀과 성전을 상대화시킬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과 이 성전에서 거행되는 제의를 상대화 시킨다. 이제 예수의 현존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은 그 절대성을 상실하고 믿음과 기도와 용서가 오히려 강조된다. 이런 예수의 정신은 성전 정화 작업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로써 예수는 성전의 상업적 기능은 물론 종교적 기능, 제사의 기능 마저 중단시킨다.
4. 이스라엘의 혈통, 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의 상대화
예수를 통한 종교적 형식과 제도의 상대화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혈연적 존재를 상대화시키며,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판단 기준을 상대화시키는 데까지 확대된다. 물론 예수는 모든 종교적 형식들과 계명들이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교적 형식들과 계명들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겸손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기준의 상대화는 예수의 구원선포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는 구원을 선포할 때 사회의 기준을 무시하고 에수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선포한다.
5. 엣세네파, 쿰란 공동체와 예수의 차이
엣세네파 사람들은 이 세계의 모든 속된 것을 피하기 위하여 속세의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만 예수는 속세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마을에서, 거리에서 활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쿰란의 수도사들은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만 예수는 사람들을 두가지 부류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본래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또한 엣세네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지켰다. 그러한 엣세네파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는 죽음의 벌을 받아야 할 율법 위반자요 불경건한 자였다. 예수는 율법에 대하여 매우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연속선상으로 엣세네파 사람들은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음식과 성욕 같은 것들을 엄격히 제한하거나 기피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는 계급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에 반해 쿰란의 수도사들은 계급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철저히 계급에 의해 집단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쿰란의 하루 생활은 엄격하게 규칙화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철저히 규칙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에 비하여 예수의 공동체에는 수련기간이나 입잔식이나 입단의 맹세나 규칙적인 영성훈련이나 긴 기도의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그의 공동체의 규칙이나 규약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공동체에는 엄격한 규칙 대신에 자유가 있었고 강제성 대신 자발성이 있었다.
6. 종교의 형식들을 상대화시키는 이유
예수가 일체의 종교적 형식을 상대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예수가 선포하며 앞당겨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기다림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것이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를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종교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한 수단과 방편에 불과하다. 본훼퍼의 표현을 빌린다면, 종교의 모든 형식들과 제도들은 비종교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의 모든 절대성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를 상대화시켜야 한다. 또한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을 구분하는 기준은 종교의 특정한 형식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적 관습이나 형식들을 지키는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기에 그는 모든 종교적 관습과 형식들을 상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사회체제를 상대화시키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며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는 모든 관습과 형식들, 기존의 가치체계, 의와 불의의 기준을 상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인간의 행복을 우선시하였기에 율법의 체계를 상대화 시켰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목적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의 목적 앞에서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ⅩⅣ. 율법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나라 - 율법과 예수
1. 율법의 본래 목적과 전도(顚倒)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제의나 종교적 의식에 관한 종교법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회생활에 관한 도덕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율법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이웃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이 경외와 사랑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동시에 가지며 기본적으로 연약한 자,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주어진 법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율법의 근본 목적은 인간을 위시한 모든 피조물의 평화로운 삶의 세계를 실현하는데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율법의 본래 복적을 전도시켰다. 그리하여 율법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잣대가 되어 교만과 소외를 조장케하는 것이 되었다.
2. 율법의 정치적 기능
일반적으로 구약의 율법은 먼저 종교적인 것임은 사실이지만 예수 당시 율법은 정치적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경합되어 있었기에, 율법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때문에 종교적 지도층이 수호하는 율법은 단순히 종교적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틴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는 특권층이 그들의 위치와 특권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던 율법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율법의 상대화 - 사회체제의 상대화
이와 같이 종교적 기능과 더불어 사회적, 정치적 기능을 기지고 있었던 율법체계에 대하여 예수는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그는 정결에 관한 할라하를 상대화시키고 안식일에 대한 할라하를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예수는 율법의 권위와 모세의 권위보다 자기의 권위를 더 높이 세우고 모세의 계명을 상대화시키는 입장을 취한다. 율법에 대한 예수의 자유로운 태도와 율법의 상대화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제의와 모든 종교적 규정들을 상대화시키는 데까지 확대된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사회였기에 종교적 규정의 상대화는 그와 결탁한 사회체제의 상대화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4. 왜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시키는가
율법이 삶의 모든 것들을 규정하게 되면 그에 준한 인간의 행동은 규칙을 세우면 세울수록 정말 인간이 해야 하는 바는 감추어진다. 이리하여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계명들이 율법의 본래 의도와 목적을 가려버리며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예수는 이러한 함정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인간의 보상심리를 알기 때문에 율법을 상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요구를 철저히 하기”위하여 율법을 상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신이기에 예수는 율법의 본래 목적, 곧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와 평화 속에서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뜻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상대화시켰다. 그리고 더불어 율법 없는 자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율법을 상대화시켰다.
5.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는 사랑에 대한 이론이나 학설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흐뭇한 사랑의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는 사랑의 일반원리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그 이웃이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하였다. 이런 사랑은 혈통과 인종과 민족과 국경과 종교와 교파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리고 생태계의 모든 것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6. 예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는 이처럼 율법의 상대화와 완성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써 율법을 완성한다. 철저히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철저히 작은 형제들을 사랑하는 그의 삶 속에서 율법이 완성된다. 궁극적으로 율법은 에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된다. 이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택한 예수는 그 자체로 율법의 완성 내지 목적(telos)이 되었다.
ⅩⅤ. 주의 기도 - 하나님 나라 자녀들의 기도
기도는 그 집단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요, 그 집단에 연대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신조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 곧 주의 기도는 예수의 목적과 사명의 정수를 요약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의 아버지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가까우심, 땅 위의 모든 피조물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인자하심과 돌보심, 그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나타낸다. 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기에 미래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새 창조의 희망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개방성과 이 미래를 향한 그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2. 첫째 간구 :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간구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과 구별성, 그의 초월을 의미하는 동시에 정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윤리성, 그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길은 첫째, 인간이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와 하나님 조작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의 성품을 닮는 데에 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위에 있는 피조물과 온 우주가 거룩하게 될 때 거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이것은 모든 생명을 경외하고 생태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3. 둘째 간구 :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이 간구는 주기도의 핵심을 형성한다. 예수의 궁극적 의도와 목적이 여기에 나타난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미 앞당겨 현재화되고 있다고 복음서는 보도한다. 이 간구는 역사의 모든 좌절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래를 가리키며 이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의 나라가 올 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여지고 그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4. 셋째 간구 : 당신의 뜻이 …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희랍어 본문에 이 간구는 “당신의 뜻이 일어나소서”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간구는 인간과 이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역행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가 말하는 “당신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 세계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조리하고 불의한 현실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은 물론 모든 자연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가 하나로 결합되는 세상인 것이다.
5. 넷째 간구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의 삶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태도를 예시하는 이 기도는 나의 양식이 아닌 우리의 양식을 간구하며 “매일의 양식” 곧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는 정도만을 간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의 양식”의 앞당겨 일어남이며 “본질적인 양식”, 즉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6. 다섯째 간구 :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갚아야 할 것을 면제받는 길 곧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길은 다른 삶이 우리에게 갚아야 할 것을 면제하여 주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삶이 우리에게 갚아야 할 것은 소위 말하는 “죄”일 수도 있고 경제적 “빚”일 수도 있다. 이것은 구약의 안식년벅과 희년법에 일치되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주기도를 “진짜 희년의 기도”로 간주할 근거를 제공한다. 이 간구는 인간의 공로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으나 우리가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아무 전제없이 용서했다는 사실에 전제하기에 인간의 공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7. 여섯째 간구 :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악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힘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다.
8. 일곱째 간구 :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것은 그 이전의 간구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주기도의 정점을 형성한다. 이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간구는 궁극적으로 악을 폐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오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는 간구와 상통한다.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는 우리 자신이 악한 일들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기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악을 폐기하고 그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리라는 결단의 표현이기도 하다.
제 5 편 십자가와 부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ⅩⅥ. 십자가의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 십자가 죽음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원인
1. “신성 모독자” = “사회체제의 혼란자”
예수는 그 당시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복음서는 보도한다. 그는 율법을 상대화시키고 성전을 비판하였다. 성전 폐기를 선언하면서까지 예수는 당시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 실패하였음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예수를 가리켜 대제사장은 “하나님 모독자”라고 정죄한다. 그리고 율법과 성전과 제의를 상대화시키는 것은 곧 그 사회의 기초와 전 체제를 뒤흔드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단순히 신성 모독자가 아니라 “사회 체제의 환란자”요 지배계급에 대한 “도전자”로 기소될 수밖에 없었다.
2. 정치적 죄명으로 처형당한 예수
예수는 사회주의 혁명가도 아니었지만 그 사회의 종교적 권력과 대립함으로써, 이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권력과 대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치종교 상태에 있던 지배계층에 대한 도전은 로마의 정치 세려과의 갈등을 이미 그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정치적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다. 그는 또한 젤롯당과는 다른 차원에서 정치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종교적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할 때 당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귀결이었다.
3.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과 무관하였는가 - Antisemitism 의 원인
복음서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에 일차적 원인이 없는 동정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빌라도는 정치적 술수가 뛰어난 아주 간교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이용해 또 다른 적인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책임은 면하고 원하던 목적은 달성할 줄 아는 정치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 빌라도가 호의적으로 그려진것은 기독교의 반유대두의를 보여주는 실례인데, 이것은 복음서가 편집되던 당시 기독교와 유대교는 정치적 입장으로 인하여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주후 4세기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승인 되었고 유대교는 유대의 반 로마 혁명으로 인하여 로마는 물론 기독교와도 대치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유대인에게 예수의 피값을 돌리게하려고 빌라도를 예수의 죽음에 그리 큰 원인이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잇는 것이다.
4. 젤롯당원과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젤롯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 역시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인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사회가 정치, 경제적으로 약한 자들을 너무나 억압하였고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대하여 당파성을 가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 안에 깃들인 인간의 자기 의와 제한성을 알았기 때문에 폭력을 뛰어넘는 고난의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는 원칙상 폭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 앞에서 폭력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5.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의 죽음은 아름답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은 비참하였고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예수의 지상의 삶으로부터도 추상화되고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상황으로부터도 추상화된다. 예수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능동적인 수난(passio activa)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한 것은 하나님의 옳으심에 대한 예수의 질문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하나님에게 맡기며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예수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인 고난의 모습을 보였지만, 깊은 단절로 보이는 이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양자의 분리를 보지 않고 양자의 깊은 하나 됨을 볼 수 있다.
ⅩⅦ. 왜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인가
1. 속죄제물 사상의 문제점과 타당성
물론 예수는 부활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그의 삶 자체는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 그런데도 그의 죽음이 어떻게 구원의 사건이 되는가? 신약성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단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지 않고 여러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그 중 중요한 몇가지를 든다면, 1.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 해석된다. 하나님 자신이 “성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2. 예수의 죽음은 의로운 예언자의 운명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3.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속죄제물의 죽음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또한 속전(贖錢)으로 해석되는데 그의 죽음은 사탄의 세력 곧 죄와 죽음에 묶여 있는 인간을 해방하기 위하여 예수가 치룬 속전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로 해석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해석된다.
이것들 중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은 속죄제물의 표상인데, 이것은 예수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희생제물의 죽음이요 이러한 뜻에서 구원의 사건이라는 해석이 교회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요 기독교의 중심적 교리이다. 그러나 이 속죄제물 사상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졌다. 첫째, 속죄제물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죄의 용서와 동일시함으로써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선포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응보의 원리에 근거하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약성서의 고백에 모순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속죄제물사상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깊은 고뇌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다른 차원을 제시하기에 우리는 그것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면서 동시에 제한성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2. “이 시대의 악”과 “이 시대의 고난”을 계시하는 예수의 죽음
한 인간의 존재는 언제나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 예수의 죽음도 그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고난에는 힘 있는 자들의 힘 없는 자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 의로운 자에 대한 불의한 자들의 억압과 폭력이 나타나는 동시에, 힘 없는 자들과 의로운 자들의 고난과 고통과 죽음이 나타난다.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이 시대의 고난의 거울이고, “묵시사상적 고난”을 대변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고난 속에서 악은 제 모습을 드러내며 결정적으로 극복된다. 그러기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악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구원의 사건이 된다.
3. 율법을 완성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의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과 완성인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죽음 속에서 결정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연대와 이 세상의 연약한 자들과의 연대를 그의 죽음 속에서 하나로 결합시키면서 율법의 근본목적을 삶으로써 실천하였기에 구원은 이제 율법을 떠나 예수 자신에게로 옴겨진 것이다.
4.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예수의 십자가 서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그의 나라를 세움과 결합되어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참 흔적은 십자가에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사랑의 계시이며 하나님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참 신학과 하나님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5.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예수의 죽음
- 속죄제물 사상의 새로운 해석과 수용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법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범주에서 “속죄제물”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예수의 “자기를 내어줌”인 동시에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줌”이었다. 서로 자기를 내어 줄것을 요구하는 모든 인간의 죄된 본성이 예수의 십자가에서 심연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아들의 운명 속에 함께 하면서 참된 사랑의 제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 예수는 제물(victima)인 동시에 새 창조의 승리자(victor)이다.
6. 십자가의 사건은 단지 “민중사건”인가
민중사건이라고 말하는 동기는 이해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민중사건 이사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죄가 용서 받으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이리하여 죄인과 하나님이 화해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하나님의 사건”이요 “구원의 사건”이다.
ⅩⅧ. 부활의 능력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1. 부활의 정치적 해석학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을 신앙의 틀에서 기술한다. 그리고 그것은 묵시사상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심판 사상과 연결된다. 묵시사상의 기다림의 동기는 “하나님의 의”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승리에 대한 기다림과 생성되었으며 이 희망의 표현이었다. 이 신정론의 틀에서 예수의 부활은 죄악과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역사의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앞당겨 일어났음을 말한다.
2. 묵시사상의 틀에서 본 부활의 의미
예수의 부활은 묵시사상의 틀로부터 유래하지만 그것은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 “의롭게 하는 의”로 나타나는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게 진리가 있고, 그를 처형한 자들은 거짓이었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뜻한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예수는 참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종말적 메시야로 밝혀진다. 궁극적으로 부활은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의 화해와 구원의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예수가 선포한 말씀의 육화(肉化, incarnation)였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의 사건이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의 첫열매가 되는 사건으로서 보편적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죄와 죽음을 그 특징으로 가진 이 세계 속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돌입”을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다.
3.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 역사적, 비판적 방법의 공헌과 문제점
신약성서 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분이 부활하였다는 사실 자체이지,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증주의적 역사과학의 측면에서 볼때 예수의 부활은 검증받지 못하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게 된다. 근대과학은 인간에게 역사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지닌다. 첫째,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검증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역사를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위험이 있다. 사실 역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자체 속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사건의 생동성 가운데서 파악하지 못하기에 과거의 역사를 그의 의미 연관 속에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비판적 방법에 의해 조명된 대상은 현재에 대한 의미와 타당성을 상실하고 단순한 과거로 전락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은 내적 동질성을 가지기 때문에 유사성 혹은 유비성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의 사건은 역사가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사건으로부터 파악되고 판단된다. 이리하여 각 사건의 특수한 점은 무시된다. 그리고 이것은 객관적 검증만을 인정하기에 하나님의 역사활동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4. 역사를 열어주는 예수의 부활 - 역사의 새로운 개념
역사적 학문들은 신적 현실을 부정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현실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개연성을 가진 판단만 할 뿐이지만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개연성의 판단에 근거될 수 없다. 인과법칙의 상관관계 역시 예수의 부활에 적용될 수 없는데 그것은 부활은 인과관계의 고리에서 일어나는 서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예수 부활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기에 그것은 역사의 “미래적인 것의 옴”인 일들의 연속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이 세계의 부정적인 것이 부정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세워지는 과정이다. 예수의 부활은 에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나타나는 죽음의 세력을 직시케 하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역사와 그것의 미래를 보게 한다.
5. “아날로기아의 원리”와 “모순의 원리”
역사적 이해는 아날로기아의 원리를 전제하지만 부활은 모순의 원리로도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을 그의 다름과 함께 허용하고 상대방을 나와 다름 속에서 인식하는 모순의 원리는 자기와는 다른 부활의 사건 속에서 참 자기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6. 예수의 부활은 육의 재활인가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예수의 부활인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 양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더이상 죽음이 없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철저히 변화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이 개년들과 표상들을 가지고 예수의 부활을 적절히 묘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일어난 사건이지만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사건으로 존속하는 것이다.
맺음말 : 예수는 누구인가
1.예수는 본질적으로 메시야다
예수의 많은 칭호들 가운데서 예수의 존재를 가장 본질적으로 나타내는 칭호는 “메시야”칭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존재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세우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배자 메시야의 칭호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무력하심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는 생에 마지막에 답변될 수 있는 것이지, 삶의 과정 속에서 답변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침묵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메시야적 존재를 문제삼음으로써 그의 마지막 운명을 앞당기지 않는다.
2. 메시야의 기능 - 구원의 메시야적, 생태학적 이해
예수 메시야는 행위에 따라 인간을 심판하는 묵시사상적 메시야라기 보다는 죽음과 희생으로 구원하는 구원자이다. 그리고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관심하였기에 그의 구원은 인간적 경계를 넘어서 생태계까지 포괄하는 구원론적 범주를 가진다.
3. 하나님의 아들
이 칭호는 예수의 존재의 유래를 나타내기보다 그의 법적 위치를 나타내는 기능론적 용어이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요,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대리하는 자이다.
4. 주(퀴리오스)
이 칭호는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적, 인종적, 신체적, 생태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오직 메시야 예수를 그들의 주로 가져야 하며 그에게 속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메시야 예수가 역사의 완성자이자 주시라는 것을 나타낸다.
5. 사람의 아들 - 참 하나님, 참 사람
이 칭호는 종말의 심판자와 구원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한 그분은 인류의 아들 혹은 인류에 속한 자 곧 “사람의 아들”로 계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6. 친구, 형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사랑과 존경의 관계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는 친구요 형제이다.
7.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메시야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에게 부여한 삶의 규정 곧 “함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모든 인간의 삶의 규정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웃과 자연과 조화된 가운데서 산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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