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조직신학이야기

한국적 교회갱신론_이정배교수

한스킴 2018. 9. 22. 00:17


 

- 비교회주의론과 영적 기독교이해를 중심하여

이정배 교수(감신대 조직신학) 

들어가는 글 

오늘날 우리는 주변에서 "예수는 예스, 교회는 노우"라는 말을 듣곤 한다. 예수는 믿고 따르고 싶지만 교회는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런 이유로 현대의 개인주의적인 삶의 경향성을 들거나 제도화되고 관료적으로 변질된 교회의 비인격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교회에로 발길을 돌리지 않는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그속에서 선포되어지는 것과 실천되는 것 사이의 불일치경험과 변화된 세계에 대해 사실적합한 관계를 맺을수 없는 교회의 경직성이라 하겠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게된 인간은 혼란스러울 정도의 교회의 자기모순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설득되지않는 권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된 현대신학자들은 교회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염려속에서 교회론에 자신의 신학적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 교회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삼위일체론 등과 달리 한 번도 신학적인 논쟁주제가 되어보지 못했지만 - 교회는 그 자체로 신앙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 작금의 상황에서는 다른 어느것보다도 교회론이 기독교신앙의 사활과 관계된 핵심주제로 떠 오르게 된 것이다. 카톨릭신학자 한스 큉은 이일을 위해 세계를 위한 봉사의 빛에서 교회의 본질개념을 재해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개신교의 에큐메니칼 신학자 몰트만 역시 변화된 세계의 빛에서 교회의 새로운 역할과 모습을 찾고자하는 진지한 노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미국의 여성신학자 류터같은 이는 교회내의 가부장적 유산을 벗겨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진정한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장차 여성교회론이 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류터를 포함한 이들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기독교전통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시도함으로서 때론 이단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신이 속한 신학적 범주하에서 사고하는 것이기에 이들의 신학, 이들의 교회론을 우리는 교회갱신론으로 부를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위기상황을 현실적으로 분석해내고 그의 극복을 위해 자기비판적인 신학적 작업을 성실히 감당하고 있는 서구 기독교회를 바라 보면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앞날을 더욱 염려하게 된다.


1960-1970년대의 경제발전과 맥을 같이 하였던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요즈음 여러면에서 그 반대급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공룡처럼 거대해진 자신의 몸통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하여 교회가 자신의 근원적 가치로부터 이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교육시켜 세상속에서 적극적으로 봉사케하는 디아스포라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여든 사람들의 이탈을 막기위해 교회가 만든 제도 및 프로그램속에 그들을 가두워두고 있는 실정이다. 앞다투어 계발되는 뭇 성경공부교재들, 봉사와 친교를 가르친다는 미국등지에서 건너온 이런 저런 공동체훈련들 그리고 엄청나게 물적자원을 쏟아붓는 해외선교의 열기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교회의 둔화 및 정체현상의 뒤집혀진 양태로 읽혀질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떠들썩하게 했던 휴거소동 역시 물질적 풍요를 경험해버린 기존 기독교인들을 교회에 매어두기위한 수단으로 시한부종말론이 이용된 경우라 하겠다. 바로 지난 10년간 교회학교 학생수가 1/3정도 줄어가고 있다는 사실, 개척교회가 더 이상 가능치 못하다는 현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인이 생겨나지 않고 있다는 실상 등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한국교회의 감추어진 모습인 것이다.


이렇듯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겸허하게 수용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보다는, 그것을 교묘하게 위장하여 피해보려고 하는 한국교회는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더욱 적극적으로 비본질화 되어가고 있다. 여전히 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회건축에 자신의 이상을 담고 있는 목회자들이 있는가하면, 교회의 공동체성보다는 한 개인의 인위적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하기위해 동분서주하는 목회자들도 생겨나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중세기처럼 교권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단의 법을 신앙보다 위에 설정하려는 가치관 또한 만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보아, 선교사위주의 선교가 원인이 되어 교파형교회로 정착된 한국교회는 오늘의 위기속에서 자파교회의 교리에 대한 강조를 공동체결속을 위한 전제로 삼고 있으며, 더욱 본질적으로는 근본적성서주의에 입각하여 신앙인을 문자에 구속시켜 생활에 있어서 율법주의, 형식주의를 낳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주변에서 교파를 막론하고 교리수호대책위원회, 성경진리수호모임 등이 결성되고 있는 것도 교회의 자기방어적 몸짓으로 이해될수 있는 것이다. 더욱 난감한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이 종래의 성장지향적 교회상이 21세기에도 지속될수 있을것으로 믿고 교회성장의 노하우를 외국으로 수출할수 있는 한국고유의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목회적으로 아무리 정당해도 신학적으로 용납될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신학적으로 옳아도 목회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치않고 - 신학을 교회성장이데올로기로 만들어 가려는 교계의 노력이 그 구체적 실례이다. 한국교회가 신학함의 역사성과 그의 비판적 기능을 경홀히 여긴다면, 그것은 더듬이를 잃어버린 곤충의 모습으로 -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새로운 가치창출을 기대할 수 없는 존재 - 비유될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현실교회의 실상은 교회갱신을 위한 한국적 과제로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교회의 본질물음에 비추어 그로부터 멀어져간 자신의 현실태를 비판하고 새롭게함에 있어 지역간의 차이가 없겠지마는, 복음이 뿌리내린 토양과 자라난 환경이 다른 것처럼, 왜곡되어진 원인으로부터 갱신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한국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고에서 서구신학자들의 교회갱신론을 토대로 한국교회현실을 이해하고 비판하며 새롭게 되기를 바라기에 앞서 한국적 현실속에서 태동된 교회개혁을 위한 신앙열정과 신학적 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우리는 결과적으로 한국복음교회의 창시자가 된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을 핵심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비교회주의론은 1920-30년 당시 조선기독교의 현실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초창기적 교회갱신론으로서 김교신, 함석헌 계통의 무교회주의론과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양자의 방식으로 설명될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을 교회갱신론으로 이해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무교회주의론자와는 달리 궁극적으로 교회의 본질에 입각한 제도화된 교회의 필연성을 긍정했기 때문이었다. 이점에서 최태용은 앞서 언급된 서구의 신학자들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한국적 교회갱신론자로 불릴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을 다루게 된 보다 근본적 이유는 그가 비판한 당시의 조선기독교의 현실이 오늘의 한국교회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靈과 眞理]에 실린 최태용의 '조선교회의 현실분석'에 따르면, 당시 교회는 선교사에 의존된채 전혀 주체적이지 못했으며, 교단정치만이 능사였고, 또한 보수정통주의, 신앙의 형식주의 그리고 비학문적이며 주관적인 신비주의사조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하는 지적이다.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이 바로 오늘과 다르지않은 현실교회비판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그 속에 교회갱신을 위한 단초가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할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1920-30년대 상황속에서 제기된 비교회주의론 및 그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해명, 곧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이해가 이천년대를 맞고 있는 작금의 교회현실속에서 어떻게 발전적으로 수용될수 있겠는가를 묻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속에서 우리는 서구신학자들의 교회갱신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수 있겠으나, 통일희년의 과제를 앞에두고 있는 한국민족의 현실속에서, 궁극적으로는 토착화신학의 맥락에서 민족교회로서의 한국기독교의 모습을 더욱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1925년부터 쓰여진 최태용의 글모음 [천래지성]과 [靈과 眞理]가 상세하게 분석,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교회에 속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최태용과 같은 신학자를 알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그의 열정어린 글들을 정리해 나갈 것이다. 그속에서 내촌감삼과의 관계, 한국무교회주의자들과의 논쟁, 그리고 그의 사상을 신비주의로 규정하는 장로교신학자들의 평가, 또한 그의 반서구주의가 갖는 문제점, 민족교회론의 시대적 의미와 한계 등이 논쟁적으로 다루어질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본고는 다음의 순서에 따라 논리적으로 전개될수 있을 것이다. 첫째, 1920년대이후 한국상황과 교회현실 - 조선신학에의 요청. 둘째, 조선신학의 가능근거로서의 영적기독교이해. 셋째, 영적기독교로서의 한국적 교회갱신론 -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를 중심으로. 넷째, 비교회주의론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주체적 민족교회의 향후 과제. 

제1장 : 1920년대 이후 한국상황과 교회적 현실 - 조선신학에의 요청 

1920년대는 한국기독교역사에 있어서 특기할만한 시기로 평가된다. 1960-70년대의 상황이 계급모순에 대한 인식과 그의 극복을 위해 민중신학을 태동케했다면, 1919년 3.1운동을 경험한 20년대이후의 상황은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휘말려 민족모순의 증대속에서 자생적 공산주의가 발생하였으며, 그 소용돌이속에서 교회의 자기비판은 조선신학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물론 1894년 갑오동학혁명속에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함께 잉태한 민족주의의 단초를 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그들 각각은 20년대와 60년대라는 서로 다른 시대를 만나 자신들의 역량을 실험할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사적으로 1920년대를 일제문화통치의 이념하에 비정치화된 기독교교회, 그리고 그로 비롯된 교파분열 등의 부정적 교회현실과 민족사관에 근거, 한국인의 정치적 주권성을 회복하려는 민족주의자들과의 갈등의 시기라고 부를수 있는 것이다. 본장의 논의에서는 따라서 이러한 시각에 근거하여 진행시키려고 생각한다.


3.1독립운동사건이 있은후 그간의 잔인한 무단통치형태로부터 민족회유를 목적하여 문화정치에로 식민지배의 형태를 바꾼 일제는 실상 더욱 본질적으로 민족의식의 말살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명목상의 문화정책은 기독교(인)에 대한 관공서의 차별철폐, 교회나 학교에서 성서교육인정, 한국어사용금지조항철폐, 교계출판물에 대한 검열철폐, 기독교정치범의 학대중지 등의 개혁안을 담고 있었으나 실상 그 어느 것도 실현된 것은 없었다.오히려 일제는 완화된 정책을 빌미로 민족주의자들의 절대독립의지를 변질시켰을뿐만이 아니라 선교사와 한국교회, 교회지도자와 평신도,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를 이간시켜 민족의 단합된 의지를 약화시킴은 물론 교회 자체의 질적 파괴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모자들이 대부분 기독교계의 목사와 신도였던 사실에 주목한 일제는 기독교와의 관계개선을 급선무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바로 이런 결과로 1920년 이후 많은 교회들이 이른바 비정치화된 개량주의의 노선을 걷게 되고, 그로써 민족주의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교사들 역시 문화통치하에서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불순한 행위로 규정하며 교회의 비정치화를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비정치화프로그램은 20년대의 문화정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만은 볼수 없는 것 같다. 이미 1907년의 대부흥운동마저 미선교사들과 일제의 담합에 근거한 비정치화과정의 산물이라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문화통치는 주권탈취와 한국강점에 따른 민족모순의 증대로부터 어렵사리 생겨난 민족독립의지를 둔화시키고 항거하는 주체로서의 민족교회의 이미지를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다. 바로 20년대이후 한국교회현실 및 그에 대한 비판운동 역시 이런 배경으로부터 이해될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1920년대 이후 비정치화된 한국교회현실은 크게 다음 3가지면에서 그 특징을 들어낸다. 첫째는 내세적 보수주의 또는 신비주의적 경향성의 지대함이며 둘째는 근본주의신학에 입각한 신앙의 율법화현상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회내의 내적 갈등으로 인한 교파내의 분열현상과 교권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선교초기부터 보수근본주의신학훈련을 받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한국교인들의 신앙형태가 내세적이며, 보수주의적으로 방향지어진 것은 사실이나 독립의지의 좌절은 신앙을 더욱 내면화시켰고, 피안에 대한 동경을 가중시켜 나갔다. 당시 교회가 정치운동보다는 미래적 영광과 축복을 설교하기 시작했고, 인간의 죄와 회개 그리고 장차 다가올 미래적 심판을 주제로 가르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묵시록을 소재로 설교했던 장로교 김선주목사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이러한 정신적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일본과의 정치적 문제를 야기시킴이 없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할수 있었고 오히려 한국교회로 하여금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20년대전까지만 하여도 일제식민통치하에서 유일하게 신앙을 고수한 유일한 집단으로 기독교인들이 거론되었으나, 이후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질책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거론될 신앙의 교리화, 율법화현상은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로 지향시켜나가는데 장애물이 된 또 하나의 교회적 현실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된 보수주의신학체계를 골격으로 삼았던 평양신학교나 그를 모태로 한 당시 장로교 및 대다수의 교회들은 밖으로부터 밀려오는 지적인 분위기의 변화는 물론 한국적인 문화풍토에 걸맞는 기독교를 꿈꾸는 토착화시도에 대해 유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미국본토에서 자라난 서구식의 근본주의신학사조를 고수하는 것만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미 선교사들의 한국전통문화에 대한 몰이해현상 및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신학사조에 대한 반항이 그대로 한국교회속에 정착되어져 버린 것이다. 근본주의를 고수하려는 이러한 신학적 노력은 바른 신앙을 신조로 변질시켰고, 그를 율법으로 정형화시키는 오류를 낳게한 소치가 되었다. 당시 정형화되었던 근본주의신앙내용으로는 성서권위에 대한 부동의 신앙, 성서에 대한 문자적 확신 등을 들수 있는바, 이로 인해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가능성이 정죄되고, 한국교회를 이단시비로 물들게하는 배타적 보수주의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를 민족의 종교가 아니라 교회의 종교로 축소시켜버린 중대한 이유라 하겠다. 이런 결과로 인해 일어나게 된 한국기독교교회내의 불행한 현실은 교파간의 갈등과 분열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1934년 아빙돈성서주석사건으로 인한 장로교와 감리교간의 그리고 장로교내의 보수.혁신의 갈등은 순전히 진보주의 신학사조를 창조적으로 흡수, 조화시키지 못한 한국교회의 책임이었다. 즉 신학적 배타주의가 난무하는 20년대 이후 상황속에서 한국교회는 심각한 신학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갈등은 곧잘 갈등하는 사람들간의 출신지역별 배경과 이권과 교권문제가 복잡하게 첨가되면서 보기 흉한 모습으로 발전되기 쉽상이었다. 교회가 교권주의로 타락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당시 선교사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사실여부에 따라 교회내의 갈등과 주도권싸움은 오히려 반민족적 특성을 지니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써 교회내의 갈등과 신학의 교파적 발전양상은 일본의 문화정치의 간계속에서 민족주의를 분열시키는 모습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교회의 분열상과 교권주의는 민족교회로서 자리매김할수 있는 위상을 스스로 포기한 것과 다름이 아니었다. 이러한 1920년대의 교회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아픈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 

"한국교회의 위치는 이땅에서 저 하늘위로 올라가 버리고 여기에는 땅을 빼앗기고, 역사빼앗기고, 몸빼앗기고, 생명빼앗긴, 빼앗긴 무리들만 남아 아우성치고 피흘리고 잡초마냥 죽어가고 있었다." 


실상 1920년대에 있어 경제공황으로 인해 이 땅위의 반 이상의 사람들이 실업자, 무신자로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당시 교회의 내세적 보수주의신앙양식, 율법화된 근본주의 신학사조 그리고 신학적 갈등 및 교권화경향성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모습에 대한 자기비판을 멈출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1920년대 교회현실에 대한 당시의 민족의 평가는 다음 세방향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어졌다. 첫째는 이광수를 비롯한 당대지성인들에 의한 교회비판이며, 둘째는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신채효를 중심한 민족사관에 근거한 기독교비판운동 등이 그것이다.


정동감리교회 전도사를 역임했던 공초 오상순선생은 이미 1920년대의 한국현실을 '폐허의 조선'이란 말로 언표한바 있었다. 민족정신의 맥을 끊고자 하는 일본의 문화식민지정책과 그 결과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이광수 역시 한때 기독교에 입문했던 지성인으로서 폐허의 조선을 책임질만한 그 역량을 상실해버린 교회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을 할수있었다. 이광수의 교회비판요지는 대략 2가지점으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하느님의 인간됨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는 본질상 성례전적이고 성육신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그는 한국교회가 폐허로 변한 한국사회에 대해 사회신조 하나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그리고 교회는 성장하여 많은 신도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사회에 대한 그들의 비판의식의 전무함은 교회의 한국적 형성, 곧 성육화를 이루지 못한 기독교의 수치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에 가슴아파하는 이광수의 교회를 향한 애정어린 비판은 다음처럼 이어진다. "원래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의 구별이 있을 이치가 없을 것이요, 인류에 복리를 주는 사업은 다 하나님의 일일 것이다. 목사, 전도사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농상공업 그 어느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리까!" 신학적 보수주의에 물들어 지적 성실성을 포기한 한국교계에 대한 이광수의 이러한 비판은 당시 지성인들의 교회관을 반영해준다. 보수적, 내세적 그리고 문자적(율법적) 신앙을 고집하여 사회추세와 함께 변화해가지 못하는 조선교회를 향해 그는 자신의 희망을 걸수 없음을 표명한 것이다. 결국 이광수는 교권적인 교회를 더 이상 용납하지 못하고 기독교와 결별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바로 이것은 이광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지성인들 대다수의 선택이었음을 교회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1920년대 이후의 기독교역사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래 사회주의계열의 반기독교운동의 진원지는 중국이었다. 중국공산당성립이후 서구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독교종교를 서구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몰아간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반기독교개념은 1920년대 한국적 상황속에서 기독교만이 서양문명과 사회발전의 실체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교회 안팎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었다. 교회의 비정치적, 보수적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는 현실적이고 진취적이었으며 소위 민중으로 불리워지는 사회의 하층계급에로 다가가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하에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동휘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게 되었고 여운형, 김규식 같은 진보적 기독교신앙인들이 공산당모임에 참여하는 사건도 연출되어졌다. 물론 이를 공산주의전술에 기독교가 휘말려든 것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한국교회의 민족적 사명을 촉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공산당모임에 참석하게된 반기독교운동자들중에는 사회주의를 목적 자체로서의 이데올로기적으로 신봉했다기 보다는 식민지현실을 극복하기위한 수단으로 그것을 수용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기독교인치고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반문하면서 기독교(교회)파괴운동이 계급해방인 동시에 인간을 온갖 미신으로부터 자유케하는 것으로 생각한 극단의 사회주의자들도 존재했지만, 이것 역시 당시 교회로서는 무조건 거부할수 있는 상황만은 아니었다. 1922년 1월 7일 동아일보사설마저 식민지적 현실속에서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메시지를 "종교가여 佳道에 出하라"는 사설을 통해 교회에게 보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군은 교단을 下하여 佳頭에 出하라. 不義에, 暴壓에 하는 民衆, 곧 人子를 爲하야 生命의 火를 投하고 審判의 火를 擧하라."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민중의 현실에 눈감고 높은 강단위에서 묵시록을 설교하며, 선교사들의 앞잡이가 되어 회칠한 무덤처럼 존재해 왔는가 하는 사실에 대한 민족의 엄중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기독교비판운동은 기독교를 비정치화시키려는 일부 2세대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적 형태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면서 선교사배척운동으로 연결되어졌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민족사관의 빛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조명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하겠다.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기록으로 이해했던 신채호는 기독교란 한국민족에게 있어서 당연코 非我로 이해되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는 자신을 我로 보고 조선을 非我로 보는 전도된 교만함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체됨을 지키지 못한 조선민족 자체의 문제였다. 이에 대한 신채호의 절규는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주선의 주의(主義)가 되지않고 주의(主義)의 조선이 되려한다.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한다."


후일 신채호는 한국을 무력으로 점거한 일제를 강도일본으로 규정하고 그리고 한국민을 노예화시킨 문화사상의 파괴를 통해서 민중에 의한 민족주의의 기초를 세우려고 하였다. 한국민을 노예화시킨 문화사상이란 비단 일제의 잔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문화, 그들의 교회제도에 대한 거부도 함께 포함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신채호는 한국에 있어서 예수는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예수의 기독교와는 무관한 민족주의를 제창하여 왔다. 예수의 죽음을 선포한 단재 신채호의 기독교비판은 다음처럼 아주 단호하고 격렬하다. "상제의 외아드님 야소 기독이 한 지방 농촌교회당에서 상제의 도를 강연하던중 그 지방농민들에 의해 '서양에서 협잡한 것도 적지않을 터인데 왜 또 동양까지 건너와서 사기하느냐'고, '당일 예루살렘의 십자가 못맛을 또 좀 보겠느냐고 발길질차며 주먹으로 때리며, 마지막에 호미날로 퍽퍽 찍어 야소 기독의 전신이 곤죽이 되어 이제는 부활조차 할수없이 참사하고 말았다........" 무엇이 예수를 이땅에서 죽게 만들었을까? 부활조차 할수 없게끔 만신창이가 된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어디에서 민족주의자 신채호가 발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조선을 非我로 규정하는 기독교종교의 오만, 선교사에게 빌붙어서 스스로 특권계급화되려는 성직자들의 처세술, 민중들의 경제적, 사회적 고난에 대해 무감각했던 교회현실, 노예적 문화사상에 길들여진 한국기독교인들의 일상모습속에서 신채호는 민족의 역사속에서 기독교의 의미를 탈각시켜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1923년 1월 선포된 그의 [조선혁명선언]은 오로지 조선민중의 생존을 위한, 민중본위의 이상적 조선건설을 위한 민족주의이론을 기초한 것이었다. 어쨋든 20년대 이후 한국민족의 숭앙받는 사상가 신채호에 의해 선언된 예수죽음의 문제를 놓고 교회는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 마침 1925년에 일어난 허시모사건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사들의 민족우월주의실상과 도덕적 만행을 분명히 보게 하였으며, 반선교사규탄여론을 일으켜 교회로 하여금 민족의 아픔에 등돌리지 못하도록한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대로 도전이 있으면 항시 응전이 있기 마련인 법이다. 당시 교회현실에 대한 여러형태의 민족적 평가는 기독교회로 하여금 자성과 개혁에로의 길로 나서게 하였다. 목사이자 시인이었던 늘봄 전영택은 기성교회를 종교개혁이전상태의 암흑상태로 규정하고 조선에서의 종교개혁을 절규하였으며, 신흥후는 YMCA활동을 통해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충격을 적극적으로 소화해 내려고 애썼다. 그들의 반기독교운동을 민중과 민족을 위한 기독교의 사회적 요청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동안 많은 지성인들이 교계의 반지성주의, 보수주의, 비정치적 태도 등으로 인해 기독교교회를 떠나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마는 기독교 내에서의 이러한 비판운동은 교회의 민중화, 주체적인 민족교회에 대한 의식을 내부적으로 환기시킬수 있었다. 이제 2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지녔던 교파중심주의, 반지성적 태도, 교권의식의 등장, 선교사들의 반민족적 작태 등은 교회내적으로 철저하게 비판받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제도권교회의 사회적응능력이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선교사들의 인종차별주의적 우월주의, 교권정치에 대한 저항의식, 민족에 대한 사랑을 기저로 주체적 조선교회, 조선적 기독교를 수립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으니 그 대표주자를 우리는 최태용으로 칭할수 있는 것이다.


1915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최태용은 국가관리로서의 출세길을 마다하고 학창시절의 신앙체험을 토대로 명치신학부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유럽의 새로운 신학사상을 읽었으며, 특별히 일본의 무교회주의와 내촌감삼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운명이 결정지어지게 되었다. 내촌감삼을 일본이 낳은 최선의 위대한 기독교영혼으로 인정했던 최태용은 초기 그의 무교회론을 신봉하여 한국에 있어서 무교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생명과 성령이 떠나가고 규칙과 제도만이 남은 한국교회현실을 하나님없는 교회라고 혹독하게 정리할수 있었던 것도 모두 무교회주의영향이었다고 볼수있겠다. 더욱 진리를 싫어한 한국교회에 대한 최태용에 분노는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향해졌으며, 이로 인해 그가 당해야 하는 예언자적 아픔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가면서 최태용은 주체적 민족교회로서 한국교회가 거듭나기위해서는 내촌식의 무교회주의보다는 한국실정에 맞는 제도적 교회모델이 필요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신학운동과 신앙운동은 어디서나 보편타당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내촌식의 무교회주의가 일본내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그것이 한국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속에서 구체적으로 뿌리내려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에 일본과 달리 많은 교회들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여 교리와 의식만이 있고 진리와 생명이 떠난 껍질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생명신앙과 민족의 주체성을 담지한 제도적 교회로서의 교회갱신을 필요로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최태용은 자신의 교회갱신론을 비교회주의란 말로 명명하였던바, 사실 이는 내촌의 영향하에 있던 초창기부터 그가 사용한 말이었지만, 후일 내촌은 물론 김교신을 비롯한 한국의 무교회주의자들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정착되어져 갔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회주의론은 최태용의 신학사상에 함축된 靈적 기독교이해의 토대하에서 제대로 이해될수 있는 것이다. 이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다음장에서 [천래지성]은 물론 주로 [靈과 眞理]라는 잡지속에서 최태용이 강변한 영적 기독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제 2장. 조선신학의 가능근거로서의 영적 기독교이해 

내촌의 영향하에 있던 1925년 6월 최태용은, 앞서 말한바처럼, 천래지성(天來之聲)이란 개인잡지를 통해 민족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그를 위한 조선교회, 내지는 조선신학의 정립을 자신의 혼을 다해 피력하게 되었다. 2년 남짓 지속된 [천래지성]에 실린 글의 표제어만 보더라도 최태용이 얼마나 민족을 사랑하였으며, 조선의 구원을 위한 신학과 교회의 위상에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알수 있는바, 글의 제목은 '조선아 들으라', '조선의 구원', '조선을 위하여', '교직의 위험', '신앙혁명의 완전', 그리고 '교회의 제상' 등 이었다. 일본이 낳은, 일본을 위한 최대의 영혼으로 인정했던 내촌의 무교회사상에 입각하여 최태용은 1920년대 이후 한국의 민족적, 교회적 현실에 응답하려고 한 것이다. 다음 두 인용문은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과 해결에로의 의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 

"아! 하나님이여, 조선을 구하옵소서. 당신의 권능있는 복음으로 이 백성을 돌보시옵소서. 아- 저희는 썩었습니다. 육도 망하고 영도 죽었읍니다." "현금은 조선교회와 그 운동으로 말미암아 조선사람의 영혼이 구원얻지 못할 것은 확연한 일이다. 그럼으로 吾人은 조선의 구원을 의탁하지 아니하고 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의탁하여 기도하는 바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당시의 제도화되고 선교사 의존적인 조선교회를 전혀 상관없는 別物로 취급했던 최태용은 민족의 구원을 비교회적으로 오로지 하나님말씀과 직접적으로 연루시켜 성사시켜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온 최태용의 신학사상이 비교회주의와 영적 기독교란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물론 이때의 비교회주의는 어떤 주의, 제도에 빠져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주의에 대한 반대명제인바,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내촌의 무교회주의와 입장을 같이 한다고 할수 있겠으나 최태용은 자신의 비교회주의를 하나님의 靈, 곧 영적 기독교의 빛에서 이해함으로서 자신 고유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후일 자신의 비교회주의를 무교회주의사상과 구별시켜 제도화된 교회의 필연성을 인정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설립하게 된 것은 내촌의 의미를 수용하되, 그것을 한국의 정신적 상황속에 사실적합하게 뿌리내리고자한 그의 사상적 고유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비교회주의론을 내촌의 그것과 비교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래 靈的 기독교란 최태용이 자신의 첫 번째 잡지인 [천래지성]을 25회 발간을 기점으로 중단하고 1928년 12월 새로운 개인잡지 [靈과 眞理]를 창간하면서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개념이다. 그러나 한 사상가의 생각에는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계성이 있는 법, 우리는 당시 한국교회현실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최태용이 이미 [천래지성]속에서 靈과 眞理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최태용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일부 장로교역사가들에 의해 그의 영적 기독교이해가 20년대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실태의 하나인 신비주의적 형태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본 문제는 성급한 결론을 피할일이며, 그이상의 의미를 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 또한 있다고 본다. 靈的 기독교정립을 위한 최태용의 사상적 단초는 [천래지성]에 수록된 그의 소논문 "진리와 그 양식"속에 나타나 있다. 진리와 양식의 관계는 후일 영과 진리의 양태로 바뀌어지는 바 여기에서도 그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진리가 오면 그뒤에 따라 오는 것은 그 진리의 형식이다. 진리가 오고 또 그 양식이 와서 이에 진리는 나에게 명확해지고 또한 이것이 나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일하게 된다.............귀한 것은 진리요, 필요한 것은 그 양식이다." 그러나 최태용이 염려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그의 표현양식에 집착하게 된, 예컨대 웨슬리에게 임한 진리는 사라지고 메쏘디즘만 남게 되고, 칼빈에게 임한 진리는 간곳없고, 오히려 장로교라는 껍데기만 고집하는 생명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한국교회와 교계지도자들에게 '너는 진리에 속해있느냐 아니면 그 양식에 집착하느냐?'라는 양자택일적 질문을 묻게 된것이었다. 여기에는 현실교회가 그리스도 몸으로부터의 교회로부터 질적으로 일탈되어 있음이 전제되어있다. 그래서 그는 참 신앙은 교회를 떠나서만 가능하다는 역설 - 물론 이는 무교회주의의 영향이다 -을 서슴없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신앙혁명을 들으라, 기독교가 아니오 그리스도 자신을 믿으라. 교회생활이 아니오, 靈이 되라. 眞理가 되라."


[天來之聲]의 호수가 후반기로 접어 들면서 眞理는 靈의 개념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靈(ՐՕՅՕՌՁ)과 진리(ԼՋԂՇՈՅՉՁ)는 하나님안에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결코 피조물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바로 이 靈이 한 인간 예수속에 육화됨으로서 그가 생명인 것이며, 이런 생명으로 새로 지음을 받는 일이 기독자의 할 일인바, 이 일을 위해 제도교회로부터 초월할 것을 최태용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靈이요, 진리라고 하는 고백은 인간이 선험적으로나 후험적으로 주이신 하나님을 규정하고 제약할수 없는 초월적이며, 주체적인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는 결국 하나님의 자기계시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신앙생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영과 진리를 강조한 최태용에게 있어서 영과 진리는 동일한 것만으로 이해되지않고, 다음과 같이 양자간의 차이점도 언급되고 있다 : "영과 진리는 동일한 것에 관한 다른 방면의 말이다." 그러나 [천래지성]에서는 다른 방면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해명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는 해석학적 문제, 곧 靈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응답할수 있는가 하는 방식에 관한 내용을 담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잃은 조선교회로 하여금 靈을 회복토록 하는 것이 최태용의 급선무였기에 천래지성에서는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신학적 논변을 설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양자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그가 인식하였으며, 두 번째 잡지 [영과 진리]는 '진리와 양식'의 문제를 확장시켜 하느님 靈과 인간의 진리체험의 관계를 좀더 인식론적으로 정리하여 매시대의 신학사상과 교회의 현실태를 비판할수 있는 영적 기독교의 준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靈과 眞理]잡지속에서도 양자의 관계가 원숙하게 해명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흐른 뒷부분의 일이다. 초기의 글속에서는 하나님 靈과 인간의 응답 ; 곧 진리체험 간의 문제를 신앙과 신학, 실재와 상징이란 말로 설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 최태용은 신학이란 영적 생명인 신앙을 담는 형식으로서, - 이 형식이 없이는 신앙이 구체적으로 언표될수 없는 것이다 - 이것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란 그 시대에 있어서 확신되는 형식에 의해서 세계와 유효한 사귐을 가질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시.공간속에서 靈的 生命이 표현되고 할동할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은 매시대마다 특별한 사상가, 곧 신학자를 보내 주신다고 최태용은 생각했다. 그가 1920년대 후반 이미 슐라이에르마허를 연구했고 리츨신학과 칼 바르트의 신학사상에 대해 여러번 논문을 발표한 것은 신앙과 신학의 상관성을 밝혀내려고 하는 의도에서 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생명신앙을 위해서 신학이 필요하고 신학자가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로써 신앙의 정숙주의(신비주의)는 물론이고 새술을 새부대에 담을줄 모르는 신앙의 율법주의(보수주의)에 물든 조선교회를 비판할수 있었고, 인간의 지적 희생을 요구하지않는 기독교사상가로 자리매김될수 있었다고 본다. 최태용에게 있어 신앙과 신학의 관계는 또한 실재와 상징이라는 개념쌍으로 해석되어진다. 모든 실재(reality)는 상징으로서 나타나는바, 이때 실재는 결코 상징과 동일화될수 없고 분리될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일반 신앙인들이 실재를 담고 있는 상징을 고집하고 그곳에 얽매여 있는 반면 참된 사상가, 예언자들은 오히려 상징을 넘어서있는 실재와의 직접적 관계를 추구하며 그를 경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최태용이 상징이론을 매개로하여 다시 한국교회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시도하는 것인데, 교회의 의식과 신경, 신조 등을 신앙의 실재와 같은 것으로 붙잡고 있는 죽은 신앙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따라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요, 그리스도 자신이요, 성령자신이며, 또한 성도들의 종교경험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성경 마저도 그것은 계시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실재가 아닌 상징이라고 말함으로서- "성서란 역사적 계시를 실재로 한 상징이다"- 최태용은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는 당대 보수주의자들과 맞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상징을 실재로 취하게 되는 신앙은 결코 생명신앙일수없으며, 그것은 영적일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태용의 실재와 상징이해는 하나님말씀의 문자적 특성과 영적 특성을 그리스도(생명)지향적으로 해석해 나갔던 종교개혁과 마틴 루터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최태용이 실재와 상징을 분리하여 실재와의 직접적 만남을 생명신앙의 원근거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가 원초적 종교경험을 개념화할 수 있는 인간이성의 역할을 동시에 중시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개념화, 대상화시키는 과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알려질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과 신학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율법적이며 보수화된 한국교회의 경직성을 일깨우기위한 방편인바, 근본적인 것은 여전히 실재와의 근본적인 만남, 곧 성령체험일 수밖에 없었다. 신앙의 생명성은 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존립할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조선의 구원을 위한 신학이란 최태용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적 기독교로서만 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이제 [靈과 眞理] 100호에 이르러 우리는 최태용이 신학적 사색능력을 더욱 강조하면서 계시론과 신학적 해석학이론을 완숙하게 명시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영적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이란 방대한 논문속에서 최태용이 밝힌 신학적 해석학의 문제는 다음처럼 정리되고 있다 : 靈과 진리는 모든 기독교주장의 기저를 이루는 근본원리이다. 모든 기독교주장은 靈과 眞理를 그 구성원리로하여 언급된 것이다. 靈은 계시되려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진리는 그 계시가 사람에게서 이해언표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타자로 알려지지 아니하는 숨은 하나님이니, 그러나 또한 사람에게 자기를 현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이다.....靈이란 창조자, 절대자의 본질로 이는 설명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靈은 또한 설명되는 것이다. 이는 靈이 진리로써 자기를 현현한 까닭이다. ........다시말하면 진리는 사람이 이해한 靈이다. 사람안에 靈이 임하면 그것은 진리로서 저에게 이해되는 것이다. 또 사람은 그 받은바 靈을 眞理로서 언표하는 것이다."


우선 이 인용문안에서 우리는 최태용의 신학적 해석학과 계시론을 생각해볼수 있다. 주지하는바, 어떤 하나의 교리 내지 신조속에는 신앙의 객체적인 면(fides quae Creatur)과 신앙의 주체적인ꁁ 면(fides qua creatur)이 존재하게 된다. 전자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일으키는 능동적인 계시사건을 뜻하며 후자는 이러한 능동적인 계시사건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자기 동화력을 뜻한다. 신앙의 이러한 이중성은 주체적 자기동화없는 하나님의 계시사건은 어떤 진리로써 언표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발적 사건이 없는 개인적 체험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는, 인식주체와 객체에 대한 관계를 규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靈과 眞理"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는 언표불가능한 초월적 靈의 구체성으로서 인간의 언어를 매개로 이해된 신앙, 또는 주체적으로 동화된 신앙체험으로 말해질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진리가 인간의 언어성을 중개로 표현된다고 하는 것은 그러나 동시에 진리가 역사성속에 제한되어 표현되어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매시대의 주체적인 신학적 물음은 역사적 상황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시대 시대에 새로운 표현형식을 취하여 자기를 현현한다." 앞서 말한바, 최태용이 슐라이에르마하와 리츨 그리고 바르트 등의 신학사상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신학함에 있어서 역사성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렇듯 매 역사적 상황속에서 언어를 매개로 표현된 진리는 그러나 그 자체로 절대화될수 없다는 입장을 최태용은 강조한다. 이를 위해 신학자는 언표불가능한 靈의 근원성을 인정하되, 그것을 담고있는 진리의 시간성, 상대성을 분별해 내는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3-4세기에 고백된 교회신조들은 하나님의 영, 곧 계시사건을 당대의 언어로, 그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제조건하에서 언표한 것이기에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靈과 등가적으로 이해될수 없다는 것이 최태용의 기본생각인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영과 진리의 해석학의 문제를 현대신학의 메타포이론의 빛에서 적극적으로 재정리할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우리가 아는바 메타포(은유)란 직접적으로 말할수 없는 실재(reality)에 대해 말을 할수 있도록 하는데 그 본질이 있다. 그렇기에 메타포는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있음에 대한 인식임과 동시에 그러나 그 있음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는, 따라서 그 자체로서 "---이면서, ---이 아닌(it is, but it is not)긴장"속에 놓여있다고 말하게 된다. 이점에서 ' - 이면서, - 이 아닌'의 긴장속에서 존재론적 위치를 점유하는 메타포적 사고는 모든 종교언어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하면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언어 역시 메타포적인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 자체가 실재가 아니라, 상징이라는 최태용의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최태용이 [천래지성]이래로 靈의 근원성과 진리의 역사성, 상대성은 강조하면서 한결같이 무생명적인 문자주의, 근본주의 즉 신학적 보수주의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성실히 감행하였으나 [靈과 眞理] 100호 말미로부터 종래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방향전환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즉 근본주의 또는 고정주의로 이해된 한국교회의 훈다멘탈리즘(fundamentalism), 그리고 영의 초월성과 진리의 시간성을 망각한채 靈을 문자에 가두어 놓고 교리제도에 맹종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한국교회의 신앙인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그리고 "그들의" 지성을 회복시키기위한 신학적 노력을 경주해 왔는바, 그 경과속에서 인간의 주관적 자의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왔다는 자기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문자주의, 교회의 경직된 제도성에 반하여 靈的 생명성을 강조하는 자신의 신학적 노력이 주관주의적 신비체험과 동일시되는 오해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방어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학적 난점을 피하기 위해 최태용은 靈的 생명성이 지니는 주관성의 의미를 세속사회나 개인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다음처럼 교회공동체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교회에 있어서 주관은 곧 객관이 되고 객관은 곧 주관이 된다. 우리는 제 마음대로의 기독교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적인 것이다......교회의 것이 내것이 되고, 내것이 교회의 것이 된다." 또는 

"개인은 교회를 인하여 공공한 자가 되고 이 경험은 교회의 말씀되는 하나님말씀을 인하여 객관적인 것이 된다. 개인의 신앙체험을 교회에서 말씀되는 하나님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로 인하여 신앙경험은 객관적인 확실성을 가진 것이 된다." 


이로부터 최태용은 자신의 영적 기독교를 교회의 신학이란 말로 새롭게 부르기를 원한다. 교회공동체의 신앙경험으로서의 진리만이 진정한 초월성과 절대성을 지닐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부활을 체험한 초대기독교공동체증언이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것과 같은 깨달음이라고 볼수 있겠다. 이렇듯 신앙공동체에 대한 강조는 최태용이 내촌식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명제가 되었고 그로부터 자신의 비교회주의는 무교회주의의 교회론과는 달리 제도적 교회의 존재필요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정위된 것이다. 그러나 실상 최태용은 근본주의, 고정주의로서 정형화를 말하는 신앙의 지적 왜곡만큼이나 신앙의 심리적 주관주의적 오류를 막기위해 [靈과 眞理]를 통해, 시종일관 신비주의에 관한 비판적 글을 싣고 있었다. 최태용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종교는 결코 신비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서진리는 "그리스도사실의 확실함에 즉하여 경험된 진리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인간종교성의 발동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사로 잡힌바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종교적 감정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최태용 역시 성서의 종교인 기독교가 인간을 하나님과 내적인 깊은 사귐을 갖도록 함에 있어서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신비주의는 절대적 하나님, 곧 계시사건의 적극적 개입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감정을 더 앞세운다는 점에서 기독교와의 본질적 차이를 말할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태용은 당시 조선기독교회내에 흐르고 있는 신비주의적 경향성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교회가 제도적, 규범적인 것 만큼이나 교회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이교도적인 것으로 생명의 지속성을 끊어 버린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행위이다. 이 은총사실에 대한 부름이 신앙이다. 이런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함부로 하는 종교적, 공상적 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끝없는 바다를 정처없이 배회하는 것과 같은 종교유희다. 그것은 개인주의요,........이런 신비주의가 부흥회같은 것으로 조선교회를 지도하랴 하니 조선교회가 건전히 발달할 까닭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때 일부 장로교역사가들에의해 최태용이 신비적 열광주의노선에 서있는 사상가로 평가되는 데는 문제점이 많다. 오히려 최태용은 신비적 열광주의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종교성 자체를 부정하는 칼 바르트적 시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경배같은 장로교사가는 최태용이 성서가 말하는 유일회적 계시성을 부인한다고 보면서, 그 이유를 최태용이 靈的 기독교를 세우도록 하나님이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소위 하나님과 그의 직접적 관계성을 의심스러운 사항으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최태용에게 있어서 모든 관념과 교리 및 신조를 뚫고 하나님의 계시사건을 직접적 깨우침은 - 그것이 없다면 신앙의 생명성 자체가 사라지는 - 예컨대 다멕섹도상에서의 사도 바울의 신앙체험과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참된 해방을 위한 근거로서 본래적 영성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또한 민경배는 당시 최태용을 영지주의자로 정리했던 박형룡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속죄와 은총의 기독교와 거리가 있는 낯선 이물질로 평가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로교신학자들의 지나친 오만이며 편견인바, 속죄의 기독교를 넘어 靈의 직접적 현전 체험을 통해 성화및 기독자의 완전을 지향하는 기독교의 새 모습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속죄론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에게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긴박한 주제였으나, 오늘 우리에게는 바울에게 현전했던 동일한 靈的 체험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최태용은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지는 조선의 구원을 목적하여 신앙혁명을 이루기 위한 신학적 단초였다고 평가되어야 할것이다.


이상에서처럼 영적 기독교를 교회의 신학이란 말로 개정하면서 공동체경험으로서 진리인식에 강조점을 두었으며, 다른 말로 하면, 다소 바르트적인 진리의 객관성에 우위를 두면서 모든 류의 신비주의사조를 거부했던 최태용이었으나, 궁극적으로 그는 신앙의 주관적 측면에 다시금 강조점을 두면서 바르트신학의 영역을 넘어 서려고 시도한다. 신앙의 생명성을 질식시키는 근본주의를 비판하기위해 인간의 주관적 체험(진리인식)을 강조했으나, 그것이 개인주의화 되지 않기 위하여 신앙경험에게 객관적(공동체적) 확실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최태용은 다시금 바르트적인 신학의 객관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신앙의 주체적 경험성, 즉 실천지향적 생명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긍정을 도출해낸 생명신학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최태용의 이러한 변증법은 그가 고백하듯이 어떻게 신앙을 생명적인 것으로 규정할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개인주의화를 극복하여 공동체성경험을 강조한 것도, 그래서 교회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것도, 진리행위로서의 신앙생활을 강조함이요, 그로써 조선민족전체의 구원을 위한 의지의 발로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생각된다 : "신앙생활이 개인주의가 아님은 교회가 있음으로서이다. ........우리가 육을 부정하고 영에 구원되면서 파지되는 진리는 그것이 교회중에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최태용은 바르트의 신학이 비록 靈이 인간속에 내재한 어떤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며 교회적인 것으로 주장한 면에서 신학함에 전기를 마련할수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을 위한 영의 현전 가능성에 대해 소극적이었을때 구체적 생명신앙으로 전개될수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실만을 강조하는 관념론에 빠지고 말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더욱 참된 신앙생활, 생명신앙만이 靈으로서 진리행위를 드러낼수 있다고 보았던 최태용의 생각속에서 우리는 正行(Orthopraxis)을 正論(orthodoxy)보다 우위에 놓은 현대 해방신학자들의 중심적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신앙생활이 곧 교의학이다, 왜냐하면 교리가 靈의 구체적 현현인 진리임과 같이 신앙생활은 靈의 경험적 현실로서의 진리이기에'라는 최태용의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교리와 생활의 일치만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지향적인 신앙의 생명적 특성을 통찰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를 정리하자면, 우선 그것이 민족과 복음을 두개의 촛점으로한 타원형과 같다는 사실이다. 두 촛점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타원형꼴이 성립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론은 처음부터 민족과 복음 양자를 붙들고 토착화된 기독교의 모습을 일구워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필자는 본장의 제목을 조선(민족)신학의 가능근거로서 영적 기독교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天來之聲]창간호에 쓰여져 있는바,기운이 쇠잔해진 조선인, 그리고 신사조에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조선의 젊은이들 그리고 정경화된 닫힌 체계로서 그 생명성을 상실한 조선교회를 향한 최태용의 간절한 기도를 보면서 우리는 조선에 대한 사랑, 교회의 생명성회복을 위한 염원이 그의 진실한 신학적 실존이었음을 분명히 느낄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조선의 젊은 청년들, 모두가 오로지 조선을 위한 학자, 예술가, 기업가가 되기를 열망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신학자로서 모든것의 근본이 되는 그리스도 복음의 전도자가 되어줄것을 그들에게 당부할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복음을 통한 신앙혁명으로부터 우리 시대의 민족구원이 성립될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일은 제도교회를 초월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최태용에게 있어서 당시 조선교회는 성경이 있고, 신조가 있고, 설교 역시 있었건만, 복음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교파분열과, 조선인들의 신앙생명이 2-3년도지속될수 없을만큼 단명함을 보면서 최태용은 복음없는 교회의 현실태를 인정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는 비교회적인 방식으로 신앙생명의 지속성을 그 첫째 과제로 삼을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신비주의, 영지주의자로 오해될만큼 인간내의 하나님의 현전, 즉 하나님말씀과의 직접적 사귐을 영적 기독교의 본질로 삼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조선교회내의 근본주의, 율법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신비주의 등을 비판하면서 태동된 영적 기독교로부터 조선의 구원을 염원했던 최태용은 이제 비교회주의란 이름하에 자신의 신학적 의지를 구체화시키고자 몰두하게 된다. 바로 그렇기에 영적 기독교를 통해 궁극적으로 조선교회를 갱신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비교회주의란 표제하에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다음장의 내용이 될것이다. 

제 3장 : 영적 기독교로서의 한국적 교회갱신론

-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를 중심으로 

전장을 통해 연구되었던바, 영적 기독교를 정립하려했던 최태용으로부터 들려지는 소리는 주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교회생활이 아니고 하나님말씀과 직접관계하는 靈이 되라", "신앙이 먼저이고 교회가 나중이다", "땅의 교회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긍정하자", "우리는 교회개혁을 하기보다는 신앙혁명을 하려는 것이다", 또는 "복음이 없는 교회가 있는 것처럼 교회없는 복음도 있을수 있다" 등등. 최태용이 이처럼 교회에 대해 부정적 이해를 하게된 이유는 물론 내촌식의 무교회주의의 영향이라 하겠으나, 당시 조선교회의 현실태 그 자체가 너무도 비생명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통적인 교리신조를 이지적으로 승인하는 일, 성서문자를 율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것, 주관적이며 열광적인 인간의 감정등을 신앙으로 가르쳐왔던 조선교회는 비판적 학문정신을 억압했으며, 시대정신에 동화되지 못함으로서 신앙의 생명성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최태용은 조선교회가 이렇듯 신앙생명으로부터 이탈하게 된 근본원인으로 조선인들이 교회와 신학을 서구선교사들에게 맡겨두고 조선인으로서 그 자신에 대한 사랑을 하지 못한 사대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과거 우리 민족이 중국을 숭상하는 사대주의사조에 젖어 있었듯이, 이러한 정신적 에토스가 기독교교회사속에 또 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조와 교리를 그대로 전수받고 그들의 예배의식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학사상만을 절대로 신봉하는 조선교회로부터 살아있는 靈을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최태용의 다음의 말들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 "조선인의 자의식으로 하는 신학이 얼마만큼 진보되어 있는가!", "교회는 조선인의 교회로 얼마마큼 발달을 보이고 있는가?", "조선인은 기독교를 받아 들여서 조선인 자신의 자각으로 기독교본질을 추구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가." 그러므로 기독교의 생명신앙을 오도하는 핵심적 이유로서 최태용이 시종일관 보수신앙을 들고 있는 것은 그의 반서구주의, 반선교사주의 또는 반사대주의 정서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반서구주의정서는 최태용의 내면속에서 애국을 강조하는 내촌의 일본적 기독교이해와 자연스레 만날수 있었고, 그로부터 조선에 대한 사랑의 차원에서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무교회주의를 내촌감삼에게서 배웠다. 나는 무교회주의의 사상을 꽤 잘 습득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신앙에는 무교회주의적 요소가 다분히 잠재되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알아야 할것은 최태용은 내촌의 무교회주의를 결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靈과 眞理] 75호를 기점으로 더 이상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 제도적 교회의 필요를 인정하는 비교회주의자로 자신의 시각전환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실상 이러한 변화의 싹은 무교회주의를 신봉하던 초창기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최태용이 무교회주의 역시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실재 그 자체가 될수없는, 실재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모형일뿐이라는 영적 기독교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조선땅에서는 그 지역에 실재적인 것이 될수 있는 새로운 그림자가 만들어 져야만 한다는 토착화원리로 확대해석될수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초창기 무교회주의로부터 비교회주의에로 입장을 전환한 최태용의 신학적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 가를 먼저 살펴보고 그의 비교회주의론 속에 내포된 한국적인 교회갱신의 모티브를 긍정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비판의 기준"이란 논문속에서 최태용은 세간에 "교회주의"냐 "무교회주의냐" 식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많은 논쟁들이 있지만, 그러나 중요한 요점은 그속에 성령이 내재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이 함께 한다면 교회주의 역시 옳은 것이며, 성령이 부재한 무교회주의란 그 정당성을 주장할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태용이 교회 자체를 거부하려고 한것도 아니며, 무교회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려 든것도 아님을 알수 있다. 내촌의 말을 빌어 무교회주의 운운하는 것은 모두 껍데기요, 생명이 없는 것이라는 그의 비판속에서 우리는 최태용의 확고한 주체성을 엿볼수 있는 것이다. "성서조선"을 통하여 김교신과 나눈 대화에서도 최태용은 그의 무교회주의가 자신의 주체적 확신의 산물이 아니라, 내촌의 것의 답습임을 불만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기성교회의 제도성과 경직성(보수성)을 비판하는 신학적 원리로서 영적 기독교가 말해지고 그리고 무교회주의를 통해 그에 대한 구체화가 이루어질수 있었으나, 최태용의 심정에는 다소 변화가 생기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이 무교회주의자로 불리워지는 것을 원치않으며, 오히려 교회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실존적 고백을 하게 된것이다. 비록 자신이 기성교회의 일원으로 다시 돌아갈수는 없을지라도 신앙생명의 본질을 이루는 성령이 교회안에 역사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이 그러한 교회의 일원이 되고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이 자신의 지속적 생명성을 위해 교회공동체의 경험과 관계되어야 한다는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의 본질을 이룬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실존상황으로부터 최태용은 점차 내촌감삼식의 무교회주의와 차별성을 부각시켰고, 그를 근거로 초창기 [天來之聲]시절부터 그가 즐겨 사용했던 비교회주의를 자신의 교회론의 본질계기로 삼고자 했다. 즉, 최태용은 지식인들의 사적 모임을 통해 성서연구를 하는 내촌식의 방법에 만족할수 없었고, 더 나아가 기독교의 본질은 현대적 의식으로 파악표현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조선의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靈을 증거하는 신앙적 복음집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렇기에 그는 복음과 교회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이해하여 복음은 교회를 창조하고 그리고 교회는 복음을 보지한다는, 그래서 교회는 복음의 자리가 된다는 새로운 교회론을 예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인정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특히나 이것은 김교신이하 조선무교회주의자들과는 전혀 입장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내촌감삼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최태용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제도적 교회와 하나님말씀인 복음과의 상호구별이 있지만, 그 본질론 때문에 역사속에 생겨난 교회의 현존을 송두리째 무시할수 없으며, 오히려 본질은 현실제도를 비판하는 힘으로 존재할 것을 주장하기때문이다.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내촌식의 무교회주의와 구별되게, 교회제도를 비판적으로 긍정하는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의 핵심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바, 1935년 6월 [靈과 眞理]75호에서 최태용은 [天來之聲]으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신학활동 10년간을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신학 및 교회제도에 의존함없이 조선인의 혼으로 독자적인 복음활동(영적 기독교)을 해온 것으로 평가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비록 자신이 무교회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입었으나, 실상 한 번도 교회를 무시하는 신앙경험의 신학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자신이 조선교회의 타락성, 경직성, 그리고 무생명성을 말하여 왔다하나 그것으로 결코 교회무용론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다음처럼 강조하고 있다 :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요구하여 통절히 죄를 회개하는 영혼이 모인 장소요 거기에서는 영혼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님말씀이 전도될 장소이다. 교회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이 본질적 의미의 교회를 없애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상의 본질적 특징을 지닌 교회가 기관, 제도, 그리고 규칙으로 변질될 때, 그래서 신앙생명이 교회생활로 대치되어 버리는 경우에 최태용 자신은 본질적 의미의 교회를 지키기위해 비교회주의를 말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내촌의 무교회주의 역시 교회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타락을 책망하는 입장에서 기성교회에 대해 이의(Anti)를 제기하여 그 본질을 회복시키는 맥락에서 비교회주의로서 이해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갱신에 대한 최태용의 비전을 수용할수 없었던 당시 조선장로교회는 그를 제적시켜 버렸고, 이에 최태용 역시 기성교회와 단절하여 기성교회를 버리고 오히려 기성교회에 오염되지않은 미신자들 속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찾는 노력을 하겠다고 선포한다. 이점에서 최태용은 이러한 자신의 비교회주의를 교회에 대한 사명을 지닌 무교회주의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이것은 결국 새로운 교회제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나는 금후 전도하면서 교회를 세우겠다. 나는 금후 교회를 세우면서 전도하겠다........무교회주의를 마치고 교회적으로 전도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로부터 무교회주의에로 다가가고 또한 무교회주의로부터 비교회적인 교회에로 나아가는 최태용의 신학적 노정의 끝마침을 볼수있게 되었다. 실상 이것은 그의 영적 기독교속에서 보았듯이, 모든 진리는 시대적 제약성, 곧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재확인으로서 무교회주의는 그 나름대로 사명을 다했으나, 그것 역시 이제는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민중에게 복음, 곧 생명신앙을 증거하기위해서는 높은 수준을 요하는 개인중심의 성서연구가 중심이 될 수없고 오히려 교회가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적 기독교의 핵심내용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최태용의 비교회주의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위해 끝까지 무교회주의자로 남아 있었던 김교신과의 논쟁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무교회주의를 향한 최태용의 비판은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나의 무교회", "우리 입장을 시비하지말라" 등의 논문속에서 그 반론이 시작된다. 김교신은 무교회주의가 교회와 대립항쟁하는 곳에서 그 존재이유를 찾는 최태용의 이해가 천박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무교회주의는 성서가 명하는 진정한 에클레시아를 이루기 위한 노력인바, 교회비판을 본질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는 것은 성서적 의미의 에클레시아를 명백히 하려는 목적의 일환일뿐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김교신은 자신의 무교회주의가 한국현실문제에 눈감지 않고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잇슈에 대해서 명백한 태도를 취함으로 개인주의적 고립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논쟁에 대해 학자들마다 입장은 다르나, 어느쪽에게도 일방적 승리를 안겨주지는 않는듯하다. 즉 최태용의 무교회주의인식은, 그 자신의 평소 주장과는 달리, 내촌사후 일본내에서 제기된 제자들간의 논쟁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일본과의 관계와 한국민족의 현실에 대해 침묵하였고, 오히려 김교신의 성서조선이 더욱 철저하게 무교회주의를 한국화시켰으며 또한 반일적 시도 역시 많았다는 지적과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성례전과 조직(제도)를 완전히 배제해 버림으로서 에클레시아를 건설하기위한 구체성을 지닐수 없었기에 교회문제의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이 반서구지향성을 강하게 표방하였으나, 그러나, 친일은 아니더라도, 근일적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비판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며, 성례전을 포함한 교회제도일체의 부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가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는 성찰 역시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단 본장의 주제가 교회론의 본질 및 그 역할에 관한 것인만큼 일단 교회의 공동체성을 구체화시키려 했던 최태용의 승리를 잠정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반면 그의 근일적 태도는 후에 다시 평가되어야 할 부분으로 남겨놓아야 할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적 기독교, 곧 비교회주의로서의 교회의 본질은 어떠한 것이며, 그로써 최태용은 교회를 어떻게 갱신해 보고자 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최태용은 [天來之聲]에서 진리는 다수 대중에게 속해있지 않고 소수(小)에게 있으며, 진리는 인간의 세속적인 것속에 혼탁하게 섞여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靈으로서 순수(純)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표한바 있었다."小하고 純"한 것으로 특징지어진 진리의 성격규정이 시종일관되어 바로 최태용이 일으켜 세울 민족교회, 곧 비교회주의적 교회의 좌표가 되었음은 심히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小하고 純함'이라는 최태용의 진리인식이야 말로 조선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예언자적 소리라고 평가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두 형용사속에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향한 정당한 비판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태용이 스스로 복음교회를 세우면서 '小하고 純한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바랬다는 것은 적어도 복음교회가 그 스스로 기성교회를 비판할만한 힘을 지닌 본래적 교회, 즉 에클레시아적 의미를 지닐수 있다는 확신의 발로라고 생각되어진다. 여기에서 小한 교회는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작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나, 결코 작은 교회되기를 의도적으로 지향하거나 교회성장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교회론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순수성, 곧 교회 자신의 본질을 상실한 다수를 지닌 교회로 바뀌기보다는 오히려 진리에 붙잡힌 소수로 남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생명을 강조한 최태용으로서 생명이란 본질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모를리 없겠으나 그가 小의 의미를 붙잡은 것은 교회의 원형적 모습에 대한 집착때문인 것이다. 이는 교회성장에 맘껏 도취해 있다가 그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교인수를 잃지않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와중에서 목회방향을 잃고 있는 한국교계에 쓰라린 교훈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따라서 최태용에게 있어서 小한 교회란 純한 교회가 아닐수 없다. 이것은 영적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한바, 하나님말씀이 선포되고 전달되는 그래서 개개인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며, 상호간의 스스럼없는 사랑이 일어나는, 생활로서의 신앙, 곧 생명신앙이 구체화되는 공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태용이 기성교회를 떠나면서 했던 말, '우리 목표는 전도이지,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도 실상 純한 교회 그 자체가 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태용이 세운 독립교단으로서의 대한복음교회는 오늘에도 여전히 小하고 純한, 영적이며 생명적인 신앙공동체의 말씀을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공연히 교회는 있는데 예수는 없고, 경영학은 있는데 신학은 없다'는 말이 난무하는 상황속에서 'Anti'로서의 비교회주의론이 갖고 있는 의미, 곧 小하고 純한 생명공동체로서 대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력은 살아나야만 한다. 바로 복음교회가 내걸었던 3대 표어가 복음교회로 하여금 小하고 純한 초대교회의 원형적 의미를 지속시키는 견인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복음교회의 3대 지표는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이다. 이것은 신앙의 역동성과 학문의 철저성 그리고 교회의 토착화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靈과 眞理]라는 신학잡지를 통해 최태용이 말하려고 했던 모든 내용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매우 값진 신학적 진술이 아닐수 없다. 먼저, 복음적이며 생명적이어라는 선언은 지금까지 우리가 수차 논술한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靈에 의해 인간적인 모든 것이 철저하게 부정되는 경우를 지시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이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길을 스스로 단념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인간안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계시의 순간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활동이 인간속에서 새롭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음적 신앙이란 의인된 죄인을 말했던 종교개혁전승과 그리고 신앙이란 자기 자신을 빈그릇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던 바르트적인 개혁신학의 맥락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생명성이란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성을 전제로 하기에 인간에 의한 靈的 체험 또한 중시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靈을 따라 살아가는 지속적인 삶의 형태를 강조하게 된다. 기독교는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는 것에만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건져낸 자를 잘 살아갈수 있도록 보살피는 일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을 생명적이라 한 것은 열매맺지 못하는 생명을 생각할수 없듯이 신앙 자체는 참된 생활로서만 알려질수 있다는, 역으로 말하자면, 생명신앙만이 靈으로서의 진리를 드러낼수 있다고 영적 기독교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은 이런 맥락에서 기성교회와의 관계를 진리 대 비진리의 구도로 이해하여 小하고 純한 교회의 원형을 끝까지 간직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신앙은 이제 그 자체로 신학의 학문적 특성과 상반되지 않고 오히려 생명성을 위해서 더욱 학문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2번째 주제와 연결되어진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이미 지난 장에 상세히 밝힌바 있으나, 필요에 의해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 생명성의 반대는 고정주의, 즉 도그마에 갇혀버린 신조중심주의인바, 이에 대한 학문적 비판능력의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살리는 靈의 경험이 인간에게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비판적 학문태도에 의해 어떤 신앙이 복음적이며 생명적인지, 어느 신앙형태가 그와 다른 것인지를 구별하지 않는한, 신앙의 생명성은 전혀 보장받을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모든 진리표현들, 곧 모든 류의 신학사조 역시 시대적, 역사적 상황관계된 것으로, 그 시대의 물음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는 것이기에 스스로 절대화될수 없다는 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도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신학의 역할물음과 그의 관계를 분명히하는 두 번째 표어는 이성을 중시하되 이성 자체를 비판하여 계몽주의시대를 마감했던 칸트적 공헌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21세기를 목전에 둔 교회가 변화될 상황을 두려워하여 화석화된 교리(신앙)체계속에 닫혀 있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주관적이며 감정적인 신비주의형태로서 신앙을 대신하려는 비이성적 태도를 목도하면서, 더욱 신학과 신앙을 별개의 이물질로 보며 신학을 정죄하는 만용을 부리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두 번째 표어가 말해주는 비교회주의적인 학문성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이제 조선인 자신의 교회가 되라는 세 번째 표어는 앞서 언급한 두 표어의 필연적 결과이자,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가 처음부터 지향하는 바이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표어인 복음적이며 생명적인 신앙을 나무에 비유하여 뿌리라고 한다면, 투철한 학문정신은 그위로 뻗은 가지이고 그리고 조선인 자신의 교회, 곧 조선(민족)신학은 이제 그로부터 피어나고 맺혀진 꽃이자 열매인 것이다. 세 번째 표어, 조선인 자신의 교회, 곧 조선(민족)교회론속에는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학문적으로 설명할수 있는 부분과 이데올로기비판의 형식으로 논술될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후자의 경우를 먼저 말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조선민족은 서구인 선교사들에 의해 너무 쉽게 교회를 갖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의 신앙이 불철저해졌고, 더욱이 서구의존적이 되어 버렸다고 말할수 있다. 서양인의 문화적 요소를 그대로 실어온 교회를 조선인인 우리가 그것 그대로 기독교라 신봉하여 나갈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최태용은 '조선인 자신의 교회'라는 표어를 가지고 지금까지의 불철저한 신앙을 회개하고 거듭나서, 스스로 조선인의 자의식표출을 통해 교회를 준비할 용기를 갖자고 제안한 것이다. "조선교회의 존재에 외국인의 자선이 깔려있다는 일은 이를 조선인의 신앙이 불철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밖에란 없다. 철저한 신앙을 가졌다면 그 동기로써 제 교회를 제가하여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타의 자비에 의존하는 한, 그는 용기없는 자요, 신앙없는 자이다." 따라서 최태용은 조선복음교회의 성립이란 기성교회와의 단절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도 죽여버릴 용기의 산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최태용이 조선인의 의식으로 표출된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신학적 배경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최태용은 [나의 무교회론]이란 김교신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서 "구체적 실존인 기독교"란 논문을 통해서 성서의 진리는 그것이 무시간적인 과학적 진리가 아닌 이상,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개개인의 인격, 그가 처한 사회역사적 상황을 떠나서 제시될수 없다고 그리고 이것은 초월적인 하나님말씀이 구체적인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예수를 통해 알려진 성육신사건과 같은 경우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확대적용하여 최태용은 교회의 구체적 실존을 거부하는 무교회주의를 비판할 요량으로 다음처럼 예를 들고 있다 :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 결과되어 왔고, 아우그스티누스신학을 떠나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루터교로 나타나고 루터교를 떠난 기독교진리가 루터에게서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내촌감상에게서 무교회주의를 뺀 기독교를 배워서 우리가 과연 내촌씨의 증언을 바로 받아 들였으며, 그 사명을 바로 이해하였을까..........내촌씨에게서 무교회주의를 빼버리면 그것은 고자 내촌이 된다" 


이것은 김교신 자신이 내촌으로부터 배운 것은 성서의 진리였고 무교회주의는 아니었다는 논변에 대한 최태용의 반론인바, 내촌의 무교회주의 역시 성서의 진리를 담았던 하나의 구체적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최태용은 조선인 자신의 의식으로 표출된 조선의 교회를 갖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구체적 실존을 지녀온 기독교교회의 역사와 일치되는 부분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더욱이 최태용은 조선인 자신의 교회로서 조선복음교회의 출발은 옳았고 정당했다고 자축하면서 비교회주의적인 영적 기독교의 최종 열매로서 조선교회가 해결해 나아가야 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소위 말해서 당시 상황속에서 한국적 교회갱신론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최태용은 교회란 영적 기독교의 구현을 위해 재정적으로 자립하여 주체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그리고 조선인의 생각으로 기독교를 표현하여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존하도록 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영적 기독교의 목적인 조선의 구원을 위해 조선인의 구체적 상황속에서 비롯된 조선교회가 요청되는바, 공동체로서의 이러한 교회가 없으면 조선인의 신앙은 불가능하며, 조선인의 신앙이 없다면 민족의 구원은 요원하다는 최태용의 생각이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민족)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던 최태용은 실질적 문제로서 그간의 신학적 토론을 종결짓고, 선교사들의 도움없이 순수 조선민족의 힘으로 재정적 자립과 교회운영의 자율성을 행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의 최태용의 마음을 읽어보면, "우리는 새로이 교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소용되는 것은 많다. 회당이 있어야 겠고 신자가 다수 있어야 하겠고, 신학교가 있어야 하겠고, 교우가 있어야 하겠고, 다대한 돈이 있어야 하겠다. 확실히 모든 것이 우리에게 소유된다." 이미 선교초기 네비우스정책에 의해 조선교회는 자립, 자치, 자전(自傳)의 원칙을 세웠지만, 실재 선교사들에 의한 재정종속과 함께 서구문화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환기할 때, 재정자립의 천명은 탈서구화를 향한 주체적 저항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인구의 1/4가량을 기독교신자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사업을 위해 구미국가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있으며, 해외선교가 돈이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피선교국에 물질공세를 퍼붓고 그리고 선교사들을 대량으로 파견하는 일 등은 분명 복음교회의 자립, 자율정신에 비추어 볼 때 그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그렇기에 최태용은 복음교회가 교회적 조직으로 인해 전도에 급급하여 돈에 마음을 빼앗길 것을 크게 염려하며, 이것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염려하고 있다. 이것은 감리교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나는 내가 창시한 감리교회가 이땅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종교의 맛을 잃어버린 형식으로만 남을까 그것을 염려한다"고 말했던 정신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태용은 회당이 없고 교인수가 적은것 때문에 염려하지말고 하나님의 영과의 살아있는 만남, 곧 생명신앙이 소멸되지 않게 되기를 위해 기도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긍심은 그 옛날 어거스틴이 '나는 교회의 권위가 없었다면 하나님신앙을 소유할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던 심정을 느끼도록 도와준다.


다음으로 우리는 조선인의 생각으로 기독교를 이해하여 역사속에 그 구체적 실존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는 교회갱신의 과제에 주목해야한다. 우선 조선의 구원을 지향했던 최태용에게 있어서 조선인의 생각이란 조선이 당면한 민족적 현실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靈과 眞理] 전권속에는 일본과의 관계속에서 생겨난 구체적인 민족, 민중모순에 대한 인식보다는, 주로 서구선교사들의 민족우월주의, 억압적인 신앙양식의 강요속에 나타난 반서구주의, 반문화제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일본침략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언급이 미국 및 서구세력에 비교해서 월등히 적다고 하는 것이다. 서구선교사들의 자만감, 편견, 편협성 등에 대한 비판은 있어도 선교사들이 일본과의 결탁속에서 일본식민통치를 지지하여 정교분리정책을 수행한 사실 자체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 최태용의 글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최태용이 말하고 있는 조선인의 생각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다시 반문하게 만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인의 생각은 조선인의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생명신앙으로 조선민족을 구원하고 해방시키려는 민족교회에 대한 그의 열망은 정치경제적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자유케하려는 현실인식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의심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제말기 기독교의 일본화작업이 가속화되던 시절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일제의 요청을 수락하여 변절하였지만, 최태용은 끝까지 민족정신에 충실한 사상가로 평가받는 것도 관계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최태용 역시 일본강압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일본과의 관계에서 친일적인 혐의를 받고 있음을 부인할수 없는 실정이다. 1942년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란 논문에서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 "조선의 기독교회를 바르고 강한 종교를 낳기 위해서 이 국토에서 재생하고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의 기독교회는 미.영선교사가 남겨 놓고간 골동품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적으로 변모하고 재생하고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 논문을 [親日論遍集]이란 책속에 삽입시킨 본책의 편자 임충국에 따르면, 최태용이 말하는 재출발이란 서구적 기독교와 절연된 일본적 재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아마도 신사참배와 관계되는 내용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최태용이 해방이후에는 교회를 떠나 국민계몽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하고 해방된 민족으로서의 새로운 국가상을 정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반공을 근간으로 하는 이승만식의 민주주의정치제도확립과 농촌진흥을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최태용의 현실인식 또는 조선인의 의식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가 망설여지게 된다. 그러나 본 논고의 집필을 위해 복음교회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필자의 마음속에 배움이 있었던 것은 살아생전 최태용과 친분을 나누었던 조용술목사의 증언이었다. 그는 최태용의 친일 내지는 근일적 행각을 구태여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가 해방이후 이승만정권당시 자신이 세운 복음교회를 떠나 정치활동에 참여하게 된것은 무척이나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용술목사는 [靈과 眞理]를 통해 진리표현의 역사성, 시간관계성을 강조한 최태용을 환기시키며 변화된 새로운 상황에 항시라도 재빠르게 자신의 생각을 맞추어갈만한 적응력을 지닌 존재로 평가했다. 이것은 최태용에 대한 긍정과 부정적 이해가 동시에 내포된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조선기독교의 재출발"이란 논문 역시 최태용의 친일행각을 보여주는 문서라기 보다는 일제말기의 극렬한 억압상황속에서 현실에 적응하려는 최태용의 삶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아서, "조선인 자신의 교회"란 최태용의 표어는 한국의 정치,경제현실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으로부터 교회의 본질과 그 역할을 생각할수 있도록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바로 최태용의 후계자들인 복음교회지도자들이, 비록 교단은 작더라도, NCC가 주관하는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 등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 온것이 구체적 사례가 될줄로 믿는 바이다.


또한 한국인의 의식으로 표현된 조선기독교정립이란 과제하에서 우리는 최태용 자신을 크게 의식하지 못하였으나,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 곧 한국적 영성으로부터 비롯된 토착화에 대한 관심을 읽을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되었던바, 최태용은 "조선신자들은 제 자신의 의식으로 자기의 신앙을 반성하여서 서양으로부터 전도된 기독교를 비판하여 능히 제 자신이 기독교본질적인 것에 직접 접촉하여, 제가 제 자신의 기독교를 표출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논리를 수차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실재 그 자체와 부딪혀 구체적인 종교인(생명신앙)으로 살라는 종교적 실존 일반에 관한 언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적 실재에 구체적으로 접촉하는 한국인의 주체성은 실존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더욱 넓은 범위의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인 상황속에서 형성된 주체성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기독교내의 다양한 종파들 - 희랍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영국성공회 그리고 라틴적 서방기독교 등 - 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복음)이 해당지역의 역사, 기후, 지질풍토, 민족성, 언어, 전통, 생활습관 등의 토양속에 화육되어서 이루어진 특별한 기독교유형들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태용 역시 이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전개시키지 않았을뿐,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단지 최태용에게 있어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가 내용적으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게만 생각될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적 주체성과 기독교적인 본질과의 관계인바, 이들은 결코 어느 한쪽에 의해 다른 것이 규정되는 주객으로 대립한채 있지않고, 지평융합을 통한 상호창조적 변형(mutual transformation)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최태용에게 있어서 이런 류의 다원적 해석학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그가 서구적 관념의 옷을 입은 기독교를 비판하며, 동아시아적 주체성 더 나아가 한국적 생각으로 표현된 기독교 및 교회의 재형성을 요구한 것은 교회갱신의 과제중 가장 큰것으로 감히 한국적 교회갱신론이라 이름해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제 4장 : 비교회주의론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주체적 민족교회의 향후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이해와 그의 비교회주의적 교회론이 갖는 민족주의적 특성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앞선 내용에서와 같이 많은 긍정적인 점이 밝혀졌으나, 영적 기독교와 그의 교회론이 갖는 신학적 문제점 여전히 남아 있으며, 더욱이 이천년대를 앞두고 더욱 발전적으로 논의 되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는 복음교회의 앞날은 물론 한국기독교계의 장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최태용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민족의식, 민족구원을 위한 의지는 요즘 논의되기 시작한 소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될수 있다고 볼수 있다. 아시아를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구적 언설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결국 동서간의 존재론적 위치를 상정함으로서 아시아열등주의를 조장해 왔던 것이다. 바로 최태용이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강요된 서구우월주의를 거부하고 주체적 조선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해 노력했던 사실은 이런 면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평가받을만 하다. 그러나 최태용의 조선신학 내지는 민족교회론이 과연 오리엔탈리즘이란 덩굴을 헤쳐 나가기에 충분했을까 하는 점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동양적 혹은 아시아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서구인들에 의해 정의된 규범적인 것이 되어버린 상황과 상응해서 아시아종교들에 대한 기독교의 상상력 또한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고, 자기 충족적일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때, 최태용의 민족구원론 역시 성취론적인 기독교의 입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실상 최태용이 영적 기독교를 통해서 취했던 토착화를 위한 신학방법론은 번역모델수준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되어진다. 즉 번역모델이란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알멩이와 껍데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해하는 토착화방법론인바, 영과 진리의 관계와 상응한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번역모델은 먼저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덧붙여진 문화적 요소를 가능한한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그 순수한 복음을 새로운 문화적 상황과 맥락속에서 알맞게 번역해가는 두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것은 서구기독교의 탈헬레니즘화, 곧 성서의 계시사건으로부터 그리스적 사고범주를 제거해 버리는 하르낙과 같은 입장속에서 그 본질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독교복음 자체의 초월성 및 보편타당성이 전제되는 관계로 오히려 문화의 생동력을 진지하게 인정치않는 한계에 직면할수 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바로 최태용은 한국인의 의식으로서 복음을 새롭게 이해할 것을 종용했을때, 복음의 초월성에 더 큰 비중을 둔 나머지 한국인의 의식, 문화의 본질에 대한 분석적 고찰을 진지하게 수행할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최태용이 하나님말씀으로, 오로지 그의 靈으로만 조선의 백성이 구원받을수 있다고 말했을때, 여기에는 조선인의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유교,불교 등의 가치관과 유교,불교인들의 현존에 대한 근본적 부정에 대해서 의문이 생겨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최태용이 하나님의 영만 전도되는 새로운 교회를 주장하였고, 이러한 교회밖에서는 전혀 구원이 존재할수 없다는 논리를 폈을때, 하나님의 세계관계성, 인간문화 및 역사속에 활동사시는 하나님의 계시 등에 대한 적극적 이해를 간과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육체로 대변되는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며 동시에 전적으로 새롭게 하는 변증법적 역할로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바르트적인 신학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보여진다. 비록 최태용이 바르트후기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개인주의적 체험을 넘어서는 교회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신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던 것은 여전히 초기 바르트의 초역사적 계시사건, 곧 영(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그리고 서구적 형식을 입은 기독교를 비판하고, 반서구주의로 표방할수있는 점은 있으나 한국문화에 대한 철저한 긍정과 대 일본과의 관계에서 충분한 정치적 능동성을 발휘할수 없도록한 이유였다고 생각해 볼수 있지 않을까? 물론 최태용은 당시 장로교회를 통해 순육론자로 비판받을 만큼 예수의 순수 육체성을 강조하여 예수 역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 그 신앙행위를 통해 靈적 존재가 되었다고 할만큼 신적 절대타자성을 부정하기도 했으나, 그의 靈개념은 육체에 대한 반명제로 이해되어 여전히 변증법적으로 사용될수밖에 없었음을 주목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점으로 인해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은 다시금 시대적 제한성을 띨수 밖에 되었다. 영적 기독교로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의 명제는 생명신앙의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세계역사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을수 있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교회만이 하나님말씀의 현전장소가 되고, 그곳에서 죄의 고백이 일어나며, 자신이 죽고 영으로 변화되어 생명신앙을 갖게된다는 그의 영적 기독교론, 곧 비교회주의가 다시금 교회주의에로 전락되지 않으려면 창조적 교회갱신론으로 그 본래의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본질이해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확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1920-1930년대 상황이 아닌 이천년대를 앞둔 오늘의 한국상황속에서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했던 그의 교회론이 스스로 감당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묻는일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이땅의 교회란 임박한 종말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생겨난 종말공동체라 하겠다. 혹자는 교회를 부활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초대교회이래로 신앙인들은 하나님나라를 열망하면서 교회의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하나님나라와 등가적인 교회의 존재의미 및 그 역할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해왔다. 비록 교회가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대망)대신에 예수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왔지마는, 여전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는 공동체임이 틀림없다.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백성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런 자의식의 영향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운 목적은 세상에 대한 선교이자, 세상의 구원인바, 이러한 사역의 주체는 세상속에 살고있는 평신도라는 의식으로까지 전개되어 가고 있다. 이들 평신도들은 이제 종래의 성직자중심의 계층질서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사도직을 인정받는 민주적 공동체를 이루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평신도들의 자기 이해는 실상 세계 자체가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것인바, 세계를 하나님의 활동무대로 이해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볼때,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은 제도권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세계의 이분법적 구도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명신앙 역시 개인주의화할 위험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명신앙이 자신을 선교의 주체로 인식하는 세계내의 평신도의 자의식으로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면,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은 20-30년대에 지녔던 시대적절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주제로서 우리는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속에 여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언급되지않고 있는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당시 상황속에서 이러한 기대를 갖는다는 것이 시기상조일수도 있겠으나, 비슷한 시기의 타교단의 교리적 선언이나 사회신조속에 남녀평등, 즉 남자와 여자라는 성적 구별 및 신분상의 차별을 철폐하려는 구체적 제안이 쓰여 있음을 보면서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속에 이러한 문제의식이 내포되고 있지 못한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교회내에 참석하는 같은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남녀의 상황이 다르며, 예나 지금이나 여성인 신앙인들이 많았던 한국교회의 현실속에서 본 주제에 관해 침묵했다는 사실은 비교회주의론의 개혁성향에 비추어 볼때,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최태용이 세속사회의 개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 신앙공동체의 경험을 강조했지만, 그 구성원들의 구체적 삶의 조건들을 고려치 않았고 또한 여성경험의 인식론적 특권을 무시함으로서 비롯된 결과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최태용의 비교회주의론속에도 당시 일반적인 교회의 경우처럼 그리스도안의 평등이니 사귐이니 하는 말은 사회변화, 교회변화를 일으키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가부장적 요소가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 무방한듯 싶다. 하나님을 靈으로, 초월적 말씀으로 이해하는 구조속에서 우리는 신학이 오히려 가부장적 체계를 고착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가능성을 부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세계교회가 남성과 여성을 갈라놓는 고착된 역할을 극복하고 교회와 세계를 위해 여성에게 주어진 능력과 경험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심지어는 여성에게도 사제직을 허용하며 하나님을 어머니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갱신되고 있음을 직시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머니로 이해한다는 것은 靈으로서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최태용의 교회론속에서는 수용키어려운 것인바, -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인간과 하나님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이 강조되기에 - 교회론 자체의 더욱 급진적 변화를 가능케 할수 있을 것이다. 즉 특별히 오늘날 환경파괴, 곧 사실적 종말론의 위기속에서 하나님을 어머니라 부른다는 것은 이 세계를 신의 몸으로서 이해하여 자연에 대한 친밀한 돌봄과 책임의식을 환기시킬수 있으며, 그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지평확장을 분명하게 제시할수 있는 것이다.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 및 그의 비교회주의를 재평가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상황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최태용의 신학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현실은 크게 달라졌다. 민족통일과 인간생존의 터전이 되는 환경 및 생명에 대한 물음이 새롭게 민족의 과제로 부상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민족의 구원을 위해 애썼던 최태용의 주체적 민족교회론은 이러한 주제와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 한국의 신학은 주체사상과의 대화, 한국역사 및 전통사상의 주체적 재발견, 농촌절기문화에 대한 재평가, 아시아종교로서의 생명사상 등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할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통일과 생명이 민족최대의 당면과제가 되고 있는 지금, 최태용의 비(Anti)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어 그의 신학 및 교회론이 민족구원을 위한 교두보가 될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그래서 통일이후의 교회상을 그려낼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