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는 1886년 5월 10일 바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리츠 바르트 역시 신약 성서를 전공한 신학 교수였으니 바르트는 가문으로나 성격으로도 바젤 사람으로 그의 비판적인 명석함과 논쟁적인 감각, 그리고 바젤사람 특유의 날카롭고 빠른 독설까지 이어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Georges Casalis, 칼바르트의 생애와 사상, 최영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3 p.15]
바르트는 아버지가 교회사와 신약성서 교수로 있는 베른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특히 그는 칸트와 슐라이마허의 신학에 많은 흥미를 가졌다. 베른대학 시절 자유주의에 눈뜬 그는 1906년 베를린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카프탄, 궁켈, 하르낙 밑에서 수학하였고, 1907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튀빙겐 대학에서 보수주의 신학자인 슐라터 밑에서 공부하였으나, 1908년 그가 소원하던 마르부르그 대학에 가서 헤르만과 하이트 뮐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였다. 1909년 신학 교육을 마친 바르트는 제네바의 개혁교회의 부목사로 잠시 있다가 1911년부터 10년동안 스위스의 작은 공업도시 자펜빌에서 목회를 했다. 이곳에서 그는 사회정의, 저임금, 노동자의 근로조건등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과 헤르만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유주의를 신봉하였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사회주의 합일을 강조하는 그의 초기 사상은 하나님과 종교적, 윤리적 인간성의 합일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전제와 일맥상통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1차 세계대전과 자펜빌의 목회로 급진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지성인 93인이 독일 황제의 전쟁정책이 기독교 문명 보호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사건이었는데, 하르낙이 이것을 기초하였고, 헤르만, 제베르그, 라데등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에 서명하였던 것이다. 바르트는 그들이 “지성인의 선언”에 서명한 것은 잘못된 신학과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정치적 이념과 신학은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바르트는 더이상 그들의 입장을 따를 수 없었고, 자펜빌에서의 그의 목회는 항상 그에게는 불만족스러웠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항상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기독교와 역사에 대한 외경이 이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자유주의 신학으로는 청중들의 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약성서, 특히 바울서신을 면밀히 연구하게 된 것이다.[목창균, 목회와 신학 “칼바르트와 자유주의 신학” 1994, 9월 p184.]
1919년에 그는 이러한 연구에 힘입어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게 되어 성경에 대한 재발견이 일어나게 되고, 이 저서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저서의 내용은 자기의 스승인 하르낙(Harnack)과 헤르만(Herrmann) 교수에게 도전하는 도전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유일한 근거로 삼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대신 인간, 인간의 신앙, 경건, 감정, 문화등에 중심을 두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대한 반기였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고, 인간으로 대접하지 말라고 주장한다.[이성주, 현대신학, 서울:성지원 1994. p.353]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의 연속성을 강조하던 초기의 입장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인간, 시간과 영원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게 되는데, 이 질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증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1921년 『로마서주석』제1판을 충분히 평가하고 수정하여 더 혁명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제2판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 『로마서주석』 제2판은 카톨릭 신학자 아담스의 평가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이 떨어진 것”과 같은 신학계에 충격이었다. [목회와 신학 p.186]
이로써 바르트는 1921년 괴팅겐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고, 20세기 신학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1922년 『시간들 사이에』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변증법적 신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윈체스터대학 교의학 및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가 되었다.[목회와 신학p.185]
1930년 그는 본(Bonn)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32년 그가 본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에 『교회의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집필하였다.[이성주,p.353] 여기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신학자가 된 것이다. 그는 이 『교회의 교의학』을 집필하기 전에 매일 모짜르트의 음악을 듣고 집필을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바르트는 이 저서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쓰고 노력하였다. (이 저서는 1932년부터 시작하여 1968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6년동안 집필한 8000면에 달하는 12권의 방대한 전집인 것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저서는 미완성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이성주 p.353]
한편 1933년경 독일의 복음교회는 독일의 나치 정권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나치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라는 말씀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과 독일의 복음교회는 나치정권에 대항하지 못하고 1933년 투표를 실시해 75%가 나치정권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그의 신학을 정립해 나가던 이 시기에 독일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고, 바르트는 세상 권력에 굴복해 가는 독일 개신(복음)교회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바르트는 결국 1934년 나치정권에 반대하여 독일의 ‘고백교회’를 세우게 되고,[Georges Casalis, p.25-26] 나치정권에 반대하는 5개 조항의 선언문을 작성하여 1934년 5월 31일 바르멘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바르트는 독일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고, 고향인 바젤(Basel)대학으로 돌아와 신학 강의를 계속하였다. 바르트는 이곳에서도 세계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세계에 있는 교회들에게 서한을 보내는 등 계속해서 나치정권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그는 독일을 다시 방문하여 1946년에서 47년까지 교의학 강의를 다시 시작하였으나, 그는 독일에서 오래 강의를 하지 않고 다시 스위스의 바젤대학으로 돌아와 강의를 하면서 현대신학의 방향을 장악하고 지휘하다가 1968년 12월 10일 83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이성주 p.354]
칼바르트의 사상의 발전단계[주:이 사상의 발전단계는 이성주 목사님의 현대신학에 나오는 사상의 발전단계를 사용하였다.]
바르트의 사상의 첫 단계는 그가 신학을 시작해서 스위스 자펜빌(Safenwil)에서 11년간 목회할 때까지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시기에 모든 신학 연구를 마치고 자기의 신학사상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기에 성경의 영감설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로마서』를 깊이 연구하여 1919년에 『로마서 주석』을 세상에 내 놓게 되는 단계이다.
제2단계는 1921년 『로마서 주석』 제2판을 출판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바르트의 2단계 사상의 발전은 키에르 케고르의 영향을 받아서 변증법적 신학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는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19세기의 신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생각하는 20세기 신학의 문을 열게 된다.
제3단계는 바르트가 『교회교의학』(Christian Dogmatics) 제1권을 저술할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용어와 관념적인 철학 용어들을 전부 포기하고 시간과 영원의 변증론적 용어들도 포기하게 된다. 즉 그는 이런 용어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나타난 용어)들을 『교의학』에서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학의 명칭
바르트는 자기 스승이 주장하던 ‘감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객관적인 신을 부정하는 19세기 신학의 사상이던 주관주의적 신관을 거부하고, 객관주의적 신관을 주장하였다.[이성주, p.357] 따라서 이러한 신관을 가진 그의『로마석 주석』으로 인해 신정통주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의 주제 중에서 중요한 것은 계시의 개념이다. 바르트는 계시를 위로부터 직접 아래로 내려 오는 것으로 보고 있어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에 비하면 많이 성경으로 돌아왔으나, 성경을 “과거의 계시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효과가 현재는 없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성경의 계시가 우리에게 직접 효과가 미치기 전에는 계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계시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계시의 중심이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계시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바르트는 항상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라 인간과 간격을 두고 존재하는 객체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이성주, p.360] 여기서 객체라 함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칼바르트는 신학이란 인간의 감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비로소 신학은 성립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맹용길, 현대신학사상, 서울:성광문화사, 1980. p.125] 그는 현대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의 말에만 너무 집중하여 신학을 형성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지금은 계시가 아니라 계시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즉 그 당시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단 한번만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계시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완전한 인간의 책이라고 주장한다.[ A.D.R.폴만, 이창우 역,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계시론, 예정론, 창조론 비판) 서울:성광문화사 1981. p. 21]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은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와 만나는데 있어서 특별한 접촉점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특별한 지혜를 갖었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는 성경의 저자들이 모든 사물을 아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A.D.R. 폴만 , p.22]
바르트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라고도 한다. 바르트 사상의 발전에는 분명한 전환이 있었고, 그의 교의학에서 전체의 중심과 촛점을 예수그리스도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신학적 진술의 궁극적 표준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학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게 하는 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즉, 그는 그의 모든 신학에서 기본이 되는 분을 예수그리스도로 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이외에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진정한 접근 방법은 없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은 단지 계시에 의해 알려지며 그 계시가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알 때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가 무엇이며,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그는 인간론, 창조론, 죄론 역시 기독론에 근거(예수 그리스도)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목회와 신학 p. 189]
그의 또다른 신학의 특징 중 하나는 “변증법적 신학”이다. 그는 “우리는 속죄함을 받지 아니했으면 죄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만 죄를 논할 수 있다.”는 식의 역설적 방법으로 신학을 해석하길 좋아한다. 이러한 역설적 방법으로 신학을 해석해서인지 그는 자신의 신학사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곧 수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인간이 산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하고 또한 그 변화는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동적인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을 다른 말로 “위기의 신학”이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의 실존의 전체 기초가 위협을 받고 그들의 삶이 위기에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 신앙의도약 안에 있었던 상황에 멀고, 들어가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그 신학이 크게 강조하는 의미에서 위기신학으로 알려졌다. 교회가 생명을 가진 것은 자체의 유전적 생동력 때문도 아니고 일시적 연속 때문도 아니다. 즉 그것은 교회의 주님 때문인 것이다. 교회는 살기 위하여 계속하여 죽어야 하고,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면 지상의 형태로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제를 알아야 한다. 그는 강조해서 하나님께서 종의 형태로 인간에게 참으로 오셨음을 강조하였다.[맹용길, p.127]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위기라는 의미는 ‘사상의 전환점과 심판’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의 전환점은 자유주의자들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바르트의 신학은 철저하게 객관화된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인간의 감정, 인간의 이성, 인간의 역사, 인간의 정신, 인간의 관념, 인간의 신앙, 인간의 경건, 인간의 문화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이성주, p.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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