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바르트 기독론이 나오게 된 배경
계몽주의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19세기의 신교신학은 종교적 감정의 보편성을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였고, 기독교를 역사적, 진화적인 종교의 계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식이 최고도로 윤리화된 종교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유일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진보된 문화와 고도의 종교를 하나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의 타당성 종교 일반의 타당성은 인간이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고도의 의식의 표현으로 이해함에 있었다. 기독교 대표자들은 자기들이 과거 미신의 시대에 속하지 않고, 문화의 진보와 일치하고 있는 것, 문화의 종교됨을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여기서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이 신학의 척도가 되었다. 이 지배적인 신학은 종교적, 인간학적 신학, 문화의 신학이었다. 그 신학의 중심 교의에 있어서, 기독교 역사 이해에 있어서, 윤리학에 있어서, 교회의 선교와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 출구없이 빙빙 돌고 있었던 그 형상과 주제는 인간의 경건이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희생 되었다. 이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표이에르바하의 도전에 대하여 기독교는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 일단 이 ‘척도’를 허락하게 되면, 그 한계를 지을 수 없는 상대주의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박봉랑. 신학의 해방,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1.6.30)437-443p] 바르트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이러한 신학의 모든 잔들을 마지막 방울까지 다 마신 뒤에, 이것이 20세기의 경건한 인간, 종교, 우리들 자신에 있어서 문제가 됨을 주지하고, 이런 신학으로는 하나님 옆에 갈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주격성이 상실했었다. 그래서 바르트는 내재속에 가리워진 하나님의 초월, 겉에 가리워진 하나님의 주격을 찾음으로써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 주격이신 하나님을 다시 찾으려 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주장되어지는 내재성이란 인간의 종합의 원리에서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의 내재인 그의 계시, 그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가져오는 것이었다. 즉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내재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속에 계신 하나님, 삶 한가운데 있는 초월,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의 동시적인 통일을 말하는 새로운 논리인 점에서 19세기 자유주의와 다르다.
2. 바르트의 ‘내적 변증법’의 주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바르트가 성서에서 발견한 ‘내적 변증법’은 그가 로마서에서 이해한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였다(박봉랑 442p).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인간을 철두철미한 죄인으로 파악했다. 인간은 결코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일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사고를 할 능력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어떤 접촉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가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과 갖는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인간적 사상은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간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하는데, 곧 영원한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전적인 타자‘이며, ‘절대적 초월자’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치명적인 간극은 여하한 어떤 경우에도 인간 쪽에서는 그 가교가 마련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편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은 하나님의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자신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은 다만 신앙에 의해서만이다. 초월하고 영원한 하나님과. 절대로 통일을 가질 수 없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서 통일을 가지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비를 말하려는 것은 은혜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1919)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만나시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건을 통헤서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며, 이 심판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시고, 이 심판에 의해서 모든 인간에게는 심판이 지나가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심판(부정)이며 동시에 용서(긍정)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일어나는 부정과 긍정, 즉 구원의 사건은 동시적이다. 회개와 구원,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동시적인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으로 부정을 당하는 심판 그자체가 곧 하나님 앞에 받아지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참으로 죄인이 되는 그 순간 나는 이미 하나님 앞에 받아진 것이다.
변증법적 신학에서 바르트가 힘을 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은총의 사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 이 변화의 사실을 극적, 종말론적으로 강조한 것이고, 이 변화, 인간의 새로움, 구원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신앙 안에만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모습이며 이것이 바르트의 신학의 출발, 그의 신학을 이끌어 가는 중심적 원리이다(박봉랑 438p).
3. 하나님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접근하시고 관계하시는 하나님, 그의 약속과 계명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실존, 은총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초기에 그가 강조했던 것은 하나님의 신성, 거룩, 초월이었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물, 문화, 인간의 모든 상상을 초월하여 계시는 절대타자,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들의 부정이다.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특성, 절대적 타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자신을 알게 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바로 그 순간, 이 신비 속에 자신을 가리운다.
기독교 믿음의 대상에 대한 핵심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사람이 되시고자 하셨던 영원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이 되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러한 행위에 대한 말씀이다(Verlag Zollikon-Zürich, Dogmatik im Grundriss, Trans. by G.T.Thomson. Dogmatics In Outline,Harper & Row, Publisher 1959 ; Amerca X, 65p). 이러한 하나님 아들의 사역은 본래 전제로서 아버지의 사역을, 그리고 결과로서 성령의 사역을 포함한다. 삼위는 서로가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의 조명을 받는다. 한 가지 항목을 빼고서는 이 위만을 생각할 수 없다. 최초의 신앙고백은 세 가지의 단어, 즉 예수, 그리스도, 주로 구성된다. 신학자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추상적으로 직접적으로 그려보려 했을때, 항상 길을 잃고 헤메었었다. 심지어 너무도 두려워하는 경외감으로 그들이 이러한 높이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하려고 했을 때 또한 길을 잃고 해메었었다. 마찬가지로 신학자들이 세 번째 신앙 고백의 항목인 하나님에 관한 신학을 밀쳐 버리고, 이것과는 반대된다고 여기는 성령에 관한 신학, 즉 경험의 신학을 그리고자 했을 때 또한 길을 잃고 헤메게 되었다. 현대 신학 특히 슐라이에르 마허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신학은 17․18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신학은 삼위 중 세 번째 항목에 치우친 신학이 되었는데, 이것은 세 번째 항목인 성령이 단지 성자-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가 인간들에게 의미하는 것의 고백인 성자에 대한 해설(설명)이라는 점을 성찰하지 않고서 성령만으로 하는 모험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가 성부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새로운 점이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영원히 고귀하시고 감추어지시고 불가해(不可解)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과 모순되어 보이는 두 번 째 조항인 성자는 결국 또한 아주 새로운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초로 고귀하시고 불가해하신 성부 하나님을 명확히 하여 묘사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형상(form)을 가진다는 놀라운 수수께기에 직면하게 된다. 한 이름이 밖으로 들려왔고, 한 인간이 하나님 대신에 우리 앞에 서있다. 여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전혀 전능하지 않게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소부재에 대하여 말해왔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신성의 연합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안에서 다른 것이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곧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셨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전적으로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니라 한가지에 있어서 피조물이다.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시간안에서 인간이 되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영원히 인간이 되실 것이고, 인간으로 존재하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다른 것 가운데 진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계약의 진리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며, 바로 그 시간과 그 장소에서 실제가 되신 영원하신 진리이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 아들의 사역은 성부의 사역을 전제하며, 결과로서 성령의 사역을 포함한다. 이러한 것을 통해 하나님 행위의 온전한 풍성함을 불 수 있다.
4. 기독론적 관점들
ㄱ)기독론의 자리
기독론의 주제는 대체로 하나님의 계시와 화해라는 컨텍스트 안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컨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론이 “예수그리스도의 원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증거되어지는 예수그리스도를 다루는 것”(C.D., IV/3, I, p174 ; Thomson 2p)이라고 한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모호한 분이 아니라 명확하신 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사람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전능하신 증보자이시다. 그는 연합과 구분과 교류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과 신학의 우선권, 중심,그리고 기준이 되기 때문에 모든 신학은 이러한 기독론적 기초와 관점을 가지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신학의 주된 내용이며, 전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계시는 절정을 이룬다. 신학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기독론적이다. 신학의 출발점은 기독론이다. H. Hartwell은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 있어서 모든 신학적 전제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기독론적이라고 강조했다(2p).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신학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으로 분류되어진다.
ㄴ)기독론의 주제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실재는 거의 같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름 그 자체로는 실재가 아니며 상징이나 기호이다. 이름은 한 개인을 가르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는 기독론의 주제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실재에 대하여 말할 때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한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정확히 말한다면, 계시의 정의는 계시 그 자체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진실하신 한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과 교류가 일어난다. 이러한 계시의 실재를 바르트에 의하면 두가지로 요약하여 표현할 수 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혹은 말씀은 나사렛의 인간 예수이며, 신약 성서의 유일한 기독론적 논제가 된다. 즉 나사렛의 인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은 별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묘사하기위해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인간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과 함께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속에 나타난 사건의 특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어떤 원리나 생각이나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5. 바르트 신학에 나타나는 기독론 중심의 이해 지평
ㄱ) 하나님의 실재성과 그것의 존재 양태인 선택된 그리스도
하나님의 실재성은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한다.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존재”(C.D. II/1, V, 데이드 L. 뮬러 107p)는 성자를 통해서 계시하신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우리 사이의 사귐을 이룩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C.D. II/1,p257). 그런데 바르트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자기를 계시하시기 이전에도 그의 삼위일체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은 자기 안에서 자유하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개념들은 회피하지만 하나님의 완전성이라는 점에서는 추상적 신론의 개념을 말한다(뮬러 107p). 그는 신적 사랑의 완전성을 전제하고서 신적인 자유를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의 실재성을 사랑으로 표현하며, 이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로서 우리를 대하신다(C.D. II/1,p272-321). 이러한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곧 은혜를 인간에게 베푸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러한 은총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모든 길들과 행동들의 영원한 시작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위해서 그냥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결단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버림받는 유기와 그 모든 결과를 스스로 걸머지시고 인간을 선택하사 자기의 영광에 참여시키신다(C.D. II/2,p54). 이러한 선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결단인데,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그의 구원의 목적을 영원하신 아들 그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하시기로 결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이전의 원 역사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점이요, 이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하나되어 선택의 적극적 주체였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고 우리 인간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택되었다.
ㄴ) 화해론
화해의 교리는 실로 바르트 신학의 중심이다. 모든 교리는 이 화해론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진다. 화해의 교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진술,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에 관한 것이다. 화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들려 올려지며, 우리에게 참 존재가 주어지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만들어진다. 이렇게 임마누엘이 하나님은 어떤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이름과 연관되어 있는 역사에 관한 교리이다(C.D. IV/1,p16-17).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의 역사이며, 행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이다. 이것은 구속의 역사이다. 인간을 자신과 화해시킴으써 하나님은 사람과 세운 계약을 성취하신다. 화해는 한 때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존재했었으며 끊임없이 위협받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귐을 유지시켜 주며, 회복시켜 주며, 지지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약의 성취이다. 그는 “이스라엘과 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종말적 실현”이다(C.D. IV/1,p34).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의 성취이다 따라서 화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사역”이다(C.D. IV/1,p36).
ㄷ) 선택론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사랑을 위한 선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나며, 이것은 그의 아들 안에서 “이 세상과 자기에게 화해시키려는”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죽음 및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들의 연속적 효과는 지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일으켰고 이들 사이에 깨어진 언약을 회복했다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켰다”는 화해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뮬러,140p.) 첫째,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종으로 낮추신 참 하나님으로 보여 주어 그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보았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라고 보면서, 그리스도는하나님에 의하여 높임을 받으신 종이시오 인자이시며 따라서 화해된 인간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중보자로 보면서 우리의 속죄를 “보증하시며 증거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ㄹ) 성육신
바르트는 제4부 2권에서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다. 그는 여기에서 시간 안에 있어서의 예수의 존재를 다룬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행동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며,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신비이다. 성육신이 의미하는 바를 4가지(윤철호. “교회교의학에 나타난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기독론”, 장신논단, p199-200)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신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쪽에서는 어떤 역할도 없는 철저한 하나님의 행위이다. 성육신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며, 하나님이신 아들이 성육신의 행위의 주체이다(C.D. IV/2,p45).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곧,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인간 예수가 행동하고 고통 당할 때 하나님 자신이 행동하시고 고통당하신다. 이 인간 예수가 승리할 때 하나님 자신이 승리하신다. 세째,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졌다.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공통적으로 가지신 것이고 인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공통적으로 소유하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본성을 자기 자신에게까지 교양시키셨다. 하나님은 인간 본성을 자신의 본성과 연합시키신다.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이 고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 분 안에서만 참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 의하여 깨졌던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받아들여진다(C.D. IV/2,p270).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모든 신학은 그리스도론이 된다. 즉, 신학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안에 표함되어 있는 것에 대한 것을 진술하고 표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이 모든 것을 규정함으로, 칭의론, 화해론, 구원 뿐만 아니라 창조론, 인간론, 선택론, 교회론 및 종말론, 하나님과 그 분의 구원의 역사에 관한 인간의 모든 인식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인식과 지혜, 세상의 모든 현실까지도 규정한다(이신건 39p, H. Zahrnt, Die Sache mit Gott, 11f ).그리고 말타자르는 이 ‘그리스도 보편주의’를 모래시계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두 그릇(하나님과 피조물)은 오로지 중심의 좁은 지점,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양자의 만남을 통해서만 만난다. 모든 것은 중심에 있는 좁은 지점에 달려 있다. 바로 이 가장 좁은 지점이야말로 결정적이고, 모든 것이 유래하는 행위, 접촉, 사건이다(이신건 39p, H. U. von Balthsar).
- Work Cited -
Herbert Hartwell, The Theology of Karl Barth : An Introduction. The Westminster Press 1964 ; America.
John Thompson, Christ In Perspective ;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The Saint Andrew Press: Edinburgh; Great Britain.
Verlag Zollikon-Zürich, Dogmatik im Grundriss, Tran. by G.T.Thomson. Dogmatics In Outline Harper & Row, Publisher, 1959 ; Amerca
데이비드 L. 뮬러, 『칼바르트의 신학사상』, 이형기 옳김. 서율;양서각, 1988.
윤 철 호. “교회교의학에 나타난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기독론”, 장신논단, 1992년 8집.
이 신 건. 칼 바르트의 기독론적-전이의 해석학에 대한 논평, 제1차 학술 발표회 (신학적 해석학: 호남신학대학교 해석학연구소)
김 국 남. “칼바르트의 성육신론”, 한신대 석사 학위논문, 1981
최 종 호. “칼바르트의 그리스도론”, 한신대 석사 학위논문, 1978.
김 휘 은. “칼바르트의 그리스도론 연구”, 이화여대 석사 학위논문, 1980.
송 태 헌. “칼바르트의 기독론에 관한 연구”, 서울신대 석사 학위논문, 1987.
현 성 길. “칼바르트 기독론에 나타난 문제점과 현대 신학에 미친 영향”
Fred H. Klooster "Karl Barth's doctrin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Westminster Theological Jounal, Vol. 24(1961. 11.-1962 .5.).,
H. Klooster "Karl Barth's doctrine of reconcili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Jounal, Vol20(1958.5), 170p.
Greshan Machen "The Theology of Crisis", Westminster Theological Jounal (1991, Fall)Vol 53, N2
John Cobb.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 Church Dogmatics, by Karl Barth" Intepretation, Vol. 16(1962. 10), N4.
N. E. Stonehouse. "Jesus in the hands of a bartian", Westminster Theological Jounal, Vol. 1-1(1938. 11).
Richard A. Muller. "Karl Barth and the path of theology into the twenty century: HistoricalObserbations" Westminster Theological Jounal, Vol. 5(1989, Spring), N1-1.
'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3 > 조직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바르트의 그리스도론 (0) | 2018.11.08 |
---|---|
칼 바르트의 화해론 (0) | 2018.10.31 |
칼바르트의 예정론 (0) | 2018.10.28 |
칼바르트의 생애 (0) | 2018.10.22 |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The Kingdom of GOD and Church (0) | 201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