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의미
1.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비단 예수님이 그당시 자기 제자들에게만 국한해서 던진 질문만은 아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류에게 던져진 근원적이요 궁극적인 그리고 참으로 본질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 대답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다. 2000년전 어는 작은 마을에서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이 단지 그때만의 그 특정장소나 특정인물, 특정시간에 고백되어진 일시적 고백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나오는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 고백은 시간이 흘러도 그리고 공간이 바뀌어도 삶의 모든 환경과 문화가 달라도 영원히 변치 않을 진실된 고백인 것이다. 기독론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행2:36, 5:42) 또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시다’라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고백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명하여 밝히기 위한 시도이다. 이러한 정의안에 함축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기독론은 단지 예수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문제를 넘어서서 예수는 ‘그리스도’ 또는 ‘주’라는 고백적 진술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해석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기독론은 그리스도, 곧 그의 인격과 사역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환언해서 나아가면 그리스도 중심성은 신학의 범주안에 그리스도를 역사적, 구체적 인물로서 객관적으로 그를 조명하는 역사적 관점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어떻게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명칭에 주 또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종말론적 구원자’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제자들에 의해 그리고 초대 공동체 안에서 형성이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바르트 만큼 사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신학을 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의 태동배경과 그리고 그의 주 저서인 로마서 강해 1,2판과 교회 교의학에 나타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사상이 어떻게 형성,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2.칼 바르트의 신학의 태동배경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칼 바르트의 등장
칼 바르트의 신학의 분수령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포성으로 인해서 생기게 된다. 그 이전에 바르트는 18세(1904)에 베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칸트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가능하다면 모든 하나님의 방법은 칸트와 더불어 시작되고 또한 거기서 끝나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칸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또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강화(Uber die religions)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자유주의 신학에 눈을 뜨면서 그는 1908년 marburg대학에서 헤르만(W. Herrmann)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헤르만의 제자가 되기 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당시의 바르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그(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근본적 질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 그러기에 인간이 작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은 분이고 좀더 위대한 분이고 중요한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이성과 양심 그리고 인간의 행위속에 깊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사회주의 속에 하나님자신의 의지가 직접 표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사회주의 운동이고 사회주의 운동이 현존하는 예수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자연의 부활 현상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다. ‘자연이 부활한다.’ 이 자연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 할 수 있다. 그러나 1차대전의 포성으로 인해서 그의 이러한 자유주의적 신학이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신학이다라고 생각했다. 1914년 8월 1일 1차대전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바로 그날,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전세계 앞에 그들 자신들을 빌헬름 2세와 Bethmann hollweg의 전쟁정책과 일치하는 끔찍한 선언을 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벨기에의 중립의 위반보다 더 악했다. ...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서명자들 중에서 거의 모든 나의 독일 스승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내가 지금까지 필수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던, 주석, 윤리학, 교의학, 설교의 전체가 독일 신학자들의 모든 다른 저서들과 더불어 뿌리까지 흔들렸다’라고 그는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충격으로 인해 20C 신학이 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었고 자유주의 신학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개신교 신학의 코페르티쿠스적인 혁명이었다고 표현될 만한 ‘로마서 강해’ 1판이 나온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로마서 강해
1. 로마서 강해 1판
‘성경은 인간의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해석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되고 이 은혜에 의하여 인도되고 이끌림을 받으며 이 은혜로 성장할 때 자기를 우리에게 열어보여 준다.' 1916년 투루나이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행해진 강연 ‘성경안에 있는 놀랍과 새로운 세계(The Strange New World in the Bible)에서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적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가를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일러준다.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 도달하는 길을 발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도달하는 길을 찾으셨고 또 발견하셨는가를 알려준다. 이러한 내용이 체계화된 것이 1919년에 출판된 로마서 강해이다.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과 세상의 질적 차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것이 아니고 세상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자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었던 분이 아니고 오고 계시는 분이다. 로마서 강해 1판의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옛 세계를 새 세계로 바꾸시는데 그러한 가운데 죽음의 힘의 왕국을 인간의 개인적 노력에 의해서는 결코 분쇄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도덕적 경건을 무가치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선을 이루고자 하는 개인적 노력은 불가능하다. 그 노력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인간의 도덕적 경건을 위한 개인적 노력에 대한 강조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구조적 성격을 모르는데서 나오는 자유주의의 오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서 강해의 서술 방식은 변증법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의 부정만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긍정만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부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분명한 단절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긍정을 이야기 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의 법이 내안에 있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현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은 부정되고 또 긍정될 두 가능성이 있다. 그 원천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정(THESIS)속에서도 반(antithesis)속에서도 계시지 않고 합(Synthesis)속에 계신다. 하나님 안에만 합이 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이 합이 우리에게 발견될 수 있다. 이 변증법은 헤겔식 변증법이 아니고 ‘무한은 유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종교개혁자들과 바울에게서 찾았다. 특히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uneadlicher qualitativer unterschied Von zeit und Ewigkeit), 하나님은 하늘에, 너 인간은 땅에(Gott ist im himmel, du auf der Erden)를 말하는 키에르케고르식 변증법이다. 바르트의 초월 강조는 단순히 분리가 아니라 구별 속에서 변증법적 통일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주격으로 하나님을 찾는것, 내재 속에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초월을 찾는 것이다.
2. 로마서 강해 2판
로마서 강해 1판이 나오고 3년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2판을 내놓았다. 이것은 일부를 수정한 것이 아니고 그의 표현처럼 ‘돌 하나도 돌위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신학의 각도에서 다시 쓴 것이다. 그러면 그의 2판 로마서 강해에서 분명히 수정된 것은 무엇인가?
첫째, 바르트가 바울과 로마서 연구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둘째, 바르트는 니이체의 동료요, 친구인 바젤 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던 프란츠 오버베크(FRANZ Overbeck)dml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오버베크는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인 문화적 기독교에 반대하였다. 세번째, 그는 그의 형 하인리히 바르트의 글을 통해 플라톤과 칸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네번째, 바르트는 투르나이젠을 통하여 러시아 소설가인 토스토예프스키를 알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곤경을 통찰하게 되었다. 다섯째, 키에르케고르(1813-1855)에게서 역설을 배웠다.
로마서 강해 제 1판과 2판의 본질적 차이는 1판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데 있다면 2판에서는 세상을 부정하는 전적 타자라는데 있다.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영역속에 있는것이 아니고 세상성과 관련없는 영원성 속에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하나님은 순수한 부정이고 그러므로 차안과 피안의 피안이며 차안의 피안이며 피안의 차안을 의미하는 그 부정을 부정하는 분이며 우리의 죽음의 죽음이며 우리의 비존재의 비존재이다.’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은 모든 차안적인 긍정과 차안적인 부정의 부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적 타자이다. 로마서 강해 2판의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는 죽음의 선이있고 빙하의 계곡과 극지역과 황폐지역이 존재한다. 로마서 강해 1판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에서 성정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2판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로마서 강해 1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팔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이 동역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2판에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협력 가능성을 모두 부정했다. ‘안된다. 어떠한 계약 신학(FOderal theologie)도 있을 수 없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 인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 인식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속에 내재하고 있지 않지만 세상을 위기에 몰아넣고 심판하신다. 우리는 두가지 곧 우리의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를 알고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르트의 말 대로 우리의 곤궁을 나타내는 말 이외의 다른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절망의 신학인가? 그러나 바르트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영원이 시간과 만날때 일어나는 원의 접선과 같은 순간을 나타내는 가능성이다. 이 순간은 시간들 사이에 있는 순간이다. 그것은 역설이자 기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로마서 강해 2판의 역설의 신학은 자유주의를 단절시키는 힘은 있으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는 실패한 결정적 약점을 지닌 신학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로마서 강해를 보고 놀란것을 바르트가 표현한 것이 있다. ‘나는 어둠 속에 잠긴 교회의 종각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계단을 타지 않고 겁도 없이 종에 매달린 줄을 잡아당겼는데 그리도 큰 종소리가 울릴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교회 교의학
로마서 강해를 쓰고나서도 바르트는 그 내용을 교의학적 저작으로 서술할 구상을 하지 않았다. 1922년 말하기를 신학적 논의에 대하여 이바지 할 공헌은 일종의 ‘欄外의 註’, 교정방법이거나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음식에 조금 치는 양념’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라고 하였다. 바르트는 1928\7년에 기독교 교의학을 쓴다. 이어서 기독교 교의학을 교회 교의학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 안셀무스 연구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을 출판했다. 그가 교의학의 책명을 수정한 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적’ 이란 절대적 단어의 경솔한 사용을 피하는 의미에서였고 그리고 교의학이란 그 학문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봉사하는 교회의 학문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교회교의학 전체를 볼때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인데에 있다. 바르트는 교의학 초두부터 교의학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교회의 본질이요, 교회신학의 규범이요, 척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새로운 발전에서 적극적 요소는 이것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나는 기독교 교리는 배타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여야만 함을 배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 말해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나의 새로운 과제는 내가 이전에 말했던 모든것을 재고해 보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의 신학으로서 아주 다르게 한번 다시 놓은 것이다’. 바르트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발타잘(Von Baltharsar)은 바르트 신학의 기독론적 집중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는 바르트의 사상을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중심에서 만나는 지적인 모래시계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유리로 만든 모래 시계에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만날 수 있는 다른 지점은 없다. 그리고 모래가 윗쪽에서 아랫쪽으로 유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는 필연적으로(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을 위한) 원천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중심에 있는 결정적인 접촉점(예수 그리스도)에 의존되어 있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은 다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권(1.1및 1.2)에서는 ‘교회 교의학 서설’이라는 부제 밑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설’을 제시한다. 2권에는 신론, 3권에는 창조론 4권에는 화해론이 나온다.
ㄱ. 먼저 하나님말씀론을 살펴보면 말씀의 삼중성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실재성이 신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때 계시는 역사 안의 특수한 시간에 발생되어진 그 무엇을 전제한다. 즉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사건과 관계되어진다. 여기서 첫번째 물음은 누가 계시되는가 하는 것이며 대답은 하나님이 계시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 물음은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되는가 하는 것이며 대답은 하나님 자신을 통하여 계시된다는 것이다. 세번째 물음은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대답은 하나님이 계시 안에서 자신을 주심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계시의 객관적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객관적 가능성이다. 이에 상응하여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현실이며 가능성이다. 두가지 점을 기억 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객관적 측면이 주관적 측면보다 우선하여 진술된다. 둘째는 계시의 현실성이 계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보다 앞서 말해 주어야 한다.
ㄴ. 신론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중의 양식으로 알려진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밖의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대한 사고도 반대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행위 안에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구체적인 계시 행위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는 선택 교리를 다룸에 있어서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되며 성서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선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라는 부분의 서두에 나온다. 은총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모든 길과 행동의 영원한 시작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선택에 관하여 무엇을 배우는가?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로 부터 ‘선택되어진 인간’인것을 배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시기로 선택 하신다. 그리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바르트는 또 이중 예정 교리를 나름대로 재해석 한다. 이중성의 개념을 그리스도의 선택에 연관 시킨다. 간단히 하면 하나님께서는 고난, 버림받음, 죽음, 저주를 위해서는 자기자신을 선택하시고 구원, 축복, 영생을 위해서는 죄인을 선택하셨다. 예정이 아니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아니오는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것이다. 예정은 또한 ‘예’를 포함한다. 즉 예정은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 속에서 인간이 생명에로 들리움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선택과 함께 시작한다. 이것은 그러나 인간의 신앙과 결단의 응답이 있어야 완성된다. 바르트는 이것을 인간의 하나님 선택이라고 부른다. 주도권과 우선성이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선택의 목적과 의미는 영원전 부터 선택된 인간이 응답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한다는 사실에 있다. 바르트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순종을 강조한다.
ㄷ. 창조론을 보면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전에 기초한 창조론 구축을 반대한다. 하나님의 보편적 계시에서 얻는 통찰에 근거한것, 여기에 기초하여 세워진 자연신학, 철학이나 과학에 근거한 자연신학, 혹은 창조의 세계를 탐구함으로 얻어진 어떤 근거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계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관계의 초석이요, 규범이요, 의미이다.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창조와 언약의 관계에 관한 두가지 주장을 해석하는 기초가 된다. ㄱ.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은혜의 언약의 외적 근거를 마련해 주며 ㄴ. 이 은혜의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
ㄹ. 화해론을 살펴보면 화해론은 ‘이 세상을 자기에게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바르트 全 신학을 결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죽음및, 부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들의 연속적 효과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일으켰고 이들 사이에 깨어진 언약을 회복했다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켰다는 화해론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바르트는 화해론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적 객관적 화해의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화해론의 내용과 구조를 결정하는가?를 살펴보면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종으로 낮추신 참 하나님이시요, 화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본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다. 셋째,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보호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the God-man)이시다. 바르트의 화해론에서 그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은 그 체계의 성취를 본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 표준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용적 표준으로 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리스도를 모든 신학적 접근의 출발점으로 하는 그리스도론적 신학이 수립된 것이다.
汎은총주의의 구조안에서 바르트의 화해론은 그 근거가 인간의 죄에서의 해방과 구속에 있지 않고 영원전에 있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에 그 근거를 지닌다. 여기서 성서적 구속의 사건,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인간의 죄와 허물, 사망을 대신 담당하는 그리스도의 구체적 십자가 구속사건은 이 보편적 은총의 사고 속에서 온 인류에 대한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언약 성취라는 신학적 관념으로 변모되어 버릴 위험성에 직면한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 불리운다. 그의 교리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주제는 요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이다. 화해의 주도권은 하나님편에 있다. 말씀은 자유로웠다. 외부로 부터의 어떠한 필연성도 없었다. 또한 바르트에게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도 있다. 이것은 항상 이차적이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술뒤에 온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신비인 성육신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하나님이신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안에 존재한다. 셋째,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 되어졌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본성을 자기 자신에게 까지 고양시키셨다.
그리고 김 영한은 다음과 같이 바르트의 기독론을 서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에서 출발하는 바르트의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하나님과 참 인간 됨’을 ‘하나님의 겸비와 고양으로서의 화해의 사역’에서 그리고 역으로 겸비와 고양으로서의 화해의 사역을 그의 참 하나님과 인간 됨에서 해석한다. 여기서 재래적인 신성 다음에 인성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을 그리스도의 ‘한 인격의 두 측면’, 겸비와 고양을 그리스도 사역의 두 방향과 두 모습으로 보며 이 인격의 두 측면과 사역의 두 방향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규정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에 근거한다. 바르트의 이와 같은 역동적 기독론은 범구원론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으며 바르트 신학의 보편기독론적인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바르트의 역사개념에 있어서 세속사가 구속사에 의해 흡수되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 대해 루터 신학자 글뢰게(Gloege)가 지적한 대로 바르트는 세속사를 구속사의 선험성에 환원시킴으로써 고유한 세속사를 위축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토베버는 바르트의 기독론을 평가하기를 ‘아래의 것이 너무나 엄격하게 위의 것으로 주입되어 생략되고’, ‘지상의 사건으로서의 역사는 단지 너무 쉽사리 그 앞서 놓여 있는 것의 단순한 목록이 된다’라고 했다. 여기서 기독교 신학의 핵심인 구속론의 본질적 구조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야기시키는 불순종하는 현실적 인간의 죄를 제거하는 구체적인 역사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그대신 새로운 범기독론적인 구조, 즉 삼위일체적 신의 내적 과정과 그리스도 보편주의적 은총의 자기 운동이 지배적이 되므로 바르트 신학은 범기독론적 관념주의에 직면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다음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왕적인간의 대관식이다. 십자가는 왕적 인간의 왕관이며 예수가 대관식을 갖는 자리이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의하여 절망에 빠져 버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에 십자가는 모든 이생의 소망과 영원한 소망에의 굳건한 기초와 상징이 되었고 이러한 소망가운데 그들은 살았으며 그것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모든 신학이 중심은 십자가 더욱이 십자가는 대속의 교리의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곧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다. 십자가와 관련하여 부활을 보면 첫째, 부활은 십자가 만큼 중요하고 인간의 결정과 행동의 영역을 넘어서 발생 둘째, 십자가와 부활은 관계가 있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우리를 화해하신 사건으로서 함께 속하여 있다. 셋째, 바르트는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고 믿는다. 넷째, 십자가와 부활은 한 사건을 형성한다.
3.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론적 고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발타잘이 말한 모래 시계의 비유에서 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의 Initiative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의 계시의 접촉점을 가질 수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바르트 그 스스로가 말했듯이 그의 신학은 고요한 어두움을 깨운 커다란 종소리의 반향만큼 실로 컸다. 바르트의 기독론의 특징은 단순히 그의 신론과 창조론과 나란히 하여 그리스도론(인격과 사업)을 다룰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신학이 ‘기독론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신학의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강조는 ‘직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대하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교의학(전체로서나 부분적으로)을 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기독론의 문제는 ‘예수의 인격에서 참으로 하나님과 참으로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주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론은 시간의 한 가운데서 예수의 존재의 시간적인 사건에서 우리와 같은 한 인간 속에서 주 하나님이 진정으로 유일회적으로 행동의 주격이 된 그 사건으로 보는 문제이다. 혹자는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가 지나쳐 그리스도 유일주의(Christomonism)가 되고 말았다고 비판하기도 하며, 또 혹자는 바르트가 그리스도 안의 계시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과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계시 실증주의 (revelationary positivism)에 빠졌다고도 비판한다. 바르트의 기독론은 칼세돈 신조의 두본성 교리와 케노시스 기독론의 두 상태교리를 절묘하게 연합하고 칼빈의 삼중적 직무와 전통적인 화해의 교리와 크리스찬의 실존등을 특유의 천재적 솜씨로 관련시키고 체계화 한 점에 독특한 새로움이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고대 에큐메니칼 신조와 중세,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기독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참 고 문 헌
1)연구 저작
1. EBERHARD BUSCH, KARL BARTH, (TRANSLATION, SCM PRESS Ltd, Londonand fortress press. philadelphia)1976.
2. D.L. Muller, 이 형기 역, 칼바르트의 신학사상,(서울; 엠마오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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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토베버 저, 김 광식 역,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대한 기독교서회:1976)
5. 목 창균, 현대신학 논쟁, (두란노: 1995)
8. 오스카 쿨만 지음, 김 근수 옮김, 신약의 기독론, (나단:1988)
7. 김 균진, 헤겔과 바르트, (대한기독교 출판사:1983)
8. 김 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대한기독교 출판사:1982)
9. 조성노 편, 현대신학 개관(현대신학 연구소1994), 중에서 최 종호,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
10. 박 봉랑, 신학의 해방, (대한 기독교 출판사:1991)
2) 연구 논문
1. 김 명용, 칼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교회와 신학 20: 1988)
2. 윤 철호, 교회교의학에 나타난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기독론, 장신논단(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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