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16세기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17세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신학사조가 대두되어 성경의 축자영감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신학의 난제인 삼위일체론과 예정론등의 교리를 성경안에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한 정통주의 신학사조가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가 시작되면서 성경의 난제를 인간이성에 의해 해답을 찾고자 하면서 19세기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이 태동하게 된다. 인간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의 권위를 흔들어 놓고 교회황폐를 초래하게 까지 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속에서 약200년 동안 무너졌던 정통주의 신학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Karl Barth이다. 이는 신학이 강의실에서만 맴도는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교회의 신학이라는 구체적인 자각을 가져오게 하였고 교회의 메세지선교, 위탁형태, 파송 등 신학의 중심문제를 등장시켜 성서의 기준에 비추어 음미하고 검토함으로 지난 2세기동안 프로테스탄트 근대 신학에 소용돌이 쳤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주관적 경험주의, 개인주의, 주체적 실존주의를 그리스도론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닦아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칼 Barth 신학을 모르고는 현대신학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삼위일체교리는 기독교 교의학의 난제중의 하나이다. 칼빈과 세르베투스의 논쟁에서 세르베투스는 몸통은 하나인데 머리가 셋 달린 신을 맏을수 없다고 주장하여 장작더미 불속으로 사라졌다. 칼빈도 삼위일체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못하고 삼위일체는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비이므로 믿음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삼위일체교리를 잘못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Barth는 그의 계시론의 근거를 성서 안에서 찾는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은 성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즉 근본에 있어서는 통일된 한 분 하나님이 성서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가지 존재방식으로 계시된다. Barth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가지 존재 방식을 창조자 하나님, 구속자 하나님, 화해자 하나님으로 각각 이해한다. 그런데 Barth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 일어난 계시의 사건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이와 상응하는 내적 가능성에로 소급될 수 있다. 또한 Barth에 의하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시간을 가지시며, 또한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Barth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 그리고 성령은 어떤 뜻과 내용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계시의 삼위일체적 성격
A.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계시
Barth는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삼위일체론이야 말로 기독교의 신론을 기독교적으로 특출하게 만들고 기독교의 계시개념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특출하게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론을 자기의 교의학의 최고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Barth는 여기서 계시의 주체에 대한 질문을 본래적이고 개념적으로 해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원론적인 입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아울러 그의 삼위일체론을 성서에 증거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밝혀 준다. 그리고 극단의 유일론과 극단의 삼신론을 억제하고 여기에다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관을 전개시키려는 것이 그의 복인이다. 삼위일체론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을 전제하고 있는데 첫째,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 본체, 혹은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다. 즉 Barth는 삼신론을 반대하여 무엇보다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동일성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의 하나님의 존재 안에 3인격, 3위격, 혹은 3존재양태가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은 한 분 이시지만 3실존양태를 가지신 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관계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라고 말한다. 둘째, 하나님은 ‘하나되심 속에 셋 되심’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한 존재가 세 양태의 상호관계를 가지므로 풍요로운 대적 삶을 누린다. 즉 하나님 안에 구별-하나님의 존재의 양태-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동일한 한 하나님이 세 번 자기를 계시하되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Barth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자신의 삼중적 반복”이라고 하였다. 셋째,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소산이다. 교회는 성서의 진술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 계시의 증언을 번역하고 주석한다. Barth는 삼위일체론이 참된 까닭은 그것이 성서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기 변증론자들은 유대교도와 이교도들과 맞서서 기독교 신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 분 하나님을 주장하기 위해 종속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즉 하나님만이 유일신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종속된 신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종속론을 지지한다면 하나님 외에 반신반인적 존재를 인정해야 하므로 오히려 유일신 사상과 대립하게 된다. 19세기 역사주의 자유주의 신학도 삼위일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에 나타난 계시를 무시하고 새로운 철학에 의해 제시된 사상을 활용하므로써 합리주의와의 관련에서 발전된 이상들을 따라 신앙고백적 전통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종교와 신학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당시는 Kant의 영향아래 모든 형이상학적 신존재 증명이 거부되던 시기였다. 자유주의신학자 Ritschle은 형이상학을 반대하고 그리스도를 신적섭리에 의하여 하나님 사랑의 완전한 계시자로 된 이상적 인간으로 변환시켰다. 또한 그는 성령의 격위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교회안에 주재하는 비인격적 능력으로 변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Schleiermacher 역시 삼위일체론을 형이상학적 문제라고하여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인의 즉각적인 자기인식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Shleiermacher에 있어서 계시란 우주에 대한 모든 근원적이고 새로운 직관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인간의 종교성의 차원, 인간의 계시체험, 신체험, 신의식과 동일한 것으로 서술된다. 이에 반하여 Barth는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철학적 사변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자신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삼위일체론을 말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기독교 전체, 특수 계시 전체를 주장할 수 있거나 멸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이 성서안에서 직접 언급된 곳은 없지만,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성서에 증언되어 있다.
Barth는 삼위일체론이 성서에서의 계시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이 성서에서의 계시와 직접적으로 동일할 수는 없으나 내용상 간접적으로 일치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성서에서의 계시와 삼위일체론은 내용상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Barth는 성서에 증거된 계시를 “하나님은 자신을 主로서 계시하신다.”는 진술로서 요약한다. 이 진술은 하나님이 형태를 취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이 형태 속에서도 본래대로의 감추인 하나님으로 자유롭게 남아있으며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람과 만난다는 사실을 삼중적으로 표현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성서에서의 계시는 형태(form)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하나님의 자유(freedom) 즉 성부와 역사성(historicity) 즉 성령이라는 세 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서에서의 계시는 본래 인간에게 드러날 수 없는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에 근거지워진다.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 主性의 계시인데 여기서 主性이란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유한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한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과 죽음을 당한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의 행위, 자아 구별로서 설명할 수 있다. Jungel 역시 죽은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화는 하나님의 자기 구별에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Barth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다른 자아가 되는 일은 하나님에게 불가능하지도 않으며 하찮은 일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 낸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의미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할 수 없는 바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구체적 권위와 역사적 요인으로 만들고 사건과 역사 안에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은 어떤 사고나 비유없이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소서”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의지, 행위 혹은 세계의 진행으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 하나님의 다가옴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구별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시키는 하나님의 자유, 이 아들성이 하나님의 계시안에서의 하나님의 主性이다.
둘째, 성서에서의 계시는 본성상 인간에게 드러날 수 없는 하나님을 말해준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세계와 구별되며 피조물인 인간은 직접 그 분을 알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지도 않다. 그 분은 거룩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본래적으로 숨겨있고 불가해한 존재이다. 우리가 그 분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 자신이 계시된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처럼 본래 인간에게 드러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계속 감추어져 있으며 형태에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간에 자유롭게 남아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자로서 형태를 취했을 때에도 그분의 자유로운 근거와 위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성은 계시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성이다.
셋째, 성서에서의 계시는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라는데 중요점을 가진다. 역사적 요소가 계시라는 말은 아니다. 성서는 역사적 확실성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성서의 계시는 구체적 인간에 대한 구체적 관계로서 이해되어진다. 하나님의 계시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추상적 형이상학적 정식이 아니라 유일회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기록이다. 즉 역사 자체이다. 성서는 기록된 계시의 역사성에 특별한 강조를 둔다. 성서에 의하면 계시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경험이나 개념이 아니고 우리는 단지 일어난 것을 인지하고 확인 할 따름이다. 따라서 계시는 전달 되어야만 알 수 있다. 이 실제적 일어남이 계시의 역사성이다.
Barth에게 있어서 신학적 중심 관심은 19세기 인간 중심적 신학을 거부하고 하나님 중심적 신학을 수립하는데 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모든 본질적 연결성을 거부하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확립하며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출발하여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 계시에 대한 어떤 접촉점이 인간에게 있음을 철저히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삶과 죽음 모두에게 主이며, 우리실존의 主이다. 그 실존의 主는 창조주이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계시자(Revealer), 계시(Revelation), 계시함(Revealedness)이다.
B.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육신으로서의 계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그 분의 자유안에서 현실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 계시의 객관적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 즉 성육신하신 말씀이다. 이 때 그리스도의 선재는 성육신의 전제이다. 이것이 부인되면 성육신의 사건은 평범한 사람의 생일로 변한다. Barth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먼저 성부와의 일치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고 그 다음 그 구별성에서 창조자 하나님과 구별되는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셔서 인간과 더불어 계신다. “임마누엘”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모든 역사 위에 가장 크게 기발한 사실이며 ‘경건의 비밀’이다. 이것이 구속사의 중심이다. Barth는 칼케돈회의의 정통적인 교리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다”는 사실을 충실히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함에 있어서 Barth는 삼위일체론이 적절한 해석임을 따른다. Barth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예수에게 주어진 주(kurios)라는 칭호에서 찾는다. 즉 구약성서에서의 야훼이름의 계시처럼, “주 예수(Jesus the Lord)”라는 신약성서의 고백이 야훼와 예수는 같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주라는 명칭외에도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많은 증언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간의 신격화로 이해되거나 혹은 신이념의 인격화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되었다고 믿는 주장이나 혹은 일반적 진리, 로고스, 신이념을 나사렛 예수에게서 발견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주장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계시와 신앙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 인간의 언어에서 에비온 주의나 혹은 가현설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신약성서 증언은 에비온주의나 가현설의 사고와 다른 관점에서 의미를 가지는데 그 구별점은 바로 계시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우리가 들은 바는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언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에 대한 증언이다. 신약성서는 우리에게 저자의 신앙을 보여주며, 그 때 그들 생각의 반대되는 움직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자신이 하나님 외의 다른 자로서 발견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예수 이외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될 수 있다거나, 참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사되어 나타난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매우 그 의미가 다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약성서 진술은 옛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처럼 그 분이 주님이며, 실제로 자명하게 하나님과 같다는 사실에서만 성립된다. 아버지와 더불어 영원한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로서 그 분이 주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 외에는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다. 올리워진 인간이나 내려온 이념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도 피조물일 뿐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리를 점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계시한다면, 그의 피조성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예수를 성부의 계시자로 고백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성부, 성자가 서로 같은 신성을 가졌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Barth는 창조자 하나님과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여, 그 역할이 서로 다르며, 다른 존재방식으로 있는 한 분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과 적대 가운데 있는 우리세계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분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사랑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타락한 인간 세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화해는 창조의 연속이 아니라, 창조를 넘어서는 새로운 일이다. 화해는 창조의 완성으로 이해될 수 없고, 타락한 세계안에서 일어난 기적이다. 창조와 화해의 순서에 성부, 성자의 순서가 상응하며 화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자 하나님을 선행하지 않는다. 이 종속과 순서는 존재의 구별이 아니라 단지 존재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창조자 하나님과 구별되는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 즉 말씀이다. 여기서 Barth는 “우리를 위함”에 강조점을 두고 그 분은 “이미 자기 자체상”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한 신성에 근거해서야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Barth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이전에 영원한 아들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은 이 영원한 아들이 가진 내용의 반복 내지 상응에 불과 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함”만을 강조한다면, 인간의 척도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신적자격으로 끌어올리거나, 신성이나 신이념의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할 뿐이다. 이미 하나님 안에 근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를 계시한다는 말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라하여 제쳐 두고,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미에만 집중한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존재라든지 본질을 객관적으로 다루지 않고 실존의 문제성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로 지향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Barth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진술이 인간학적, 형이상학적 진술로 해석되는 것은 계시와 신앙 없이 해석할 때 생겨나는 오해라고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로 부터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현존을 설명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C. 성령, 교회와 계시
우리를 위한 하나님 계시의 객관적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은 그의 계시 사건에서 창조되는 것이지, 우리의 이성안에 이미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Barth는 신 인식사건에서부터 신 인식의 가능성, 그 한계와 진리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인식사건이 바로 교회의 현실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인간의 응답이 일어나고, 선포되는 곳이다. 인간이 계시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가능성에 의해서이다. 창조물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성립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가 主임을 알 수가 있겠는가? 신약성서는 성령이 우리를 계시에 대하여 자유롭게 풀어주기 때문이라고 답변해준다. 성령의 일과 본성은 그 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주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령은 인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계시에 그의 개인적 참여를 보장해 준다.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는 인간의 실존, 계시에 대한 인간측에서의 전적인 상응이 성령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을 받을 때에도 인간은 인간으로, 죄인으로 남아있으며 성령은 그 자체 성령이 된다. 성령의 작용에 관한 그 주체가 하나님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은 인간에 관한 진술로 바뀔 수 없다. Barth의 설명에 의하면 성령은 구속자 하나님이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주이다. 성령이 구속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오직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구속은 하나님의 계시와 화해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구속은 계시나 화해에서 볼 때 아직 오지 않은 장래적인, 완성중인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진정한 증언의 선포자가 될 수 있으며, 진정한 하나님 말씀의 선포자가 될 수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되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은 증언할 위임을 받은 사람들, 사도직,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선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인간의 말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그는 말씀을 섬기도록 우리를 불러 모은다. 하나님이 그의 영을 인간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에게 오며,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 경험되도록 자신을 주며, 인간에게 신앙을 일깨우며, 그의 약속으로 구원을 나누어 주는 신앙과 선포의 공동체를 자신의 힘으로 만든다. 성령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바를 이룬다. 따라서 성령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약성서에서 볼 때 종말론적 진술이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성취와 영원한 현실에 관련된 진술이다. 따라서 성령의 신성을 Barth는 강조한다. 즉 성령은 계시의 사건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사건 이전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 있는 것이라고 Barth는 말한다. 계시의 사건에 있어서 성령은 “그 이전 자기 자신 속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Barth는 성령을 설명하기 위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의거한다.
첫째, “주 성령을 믿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하나님의 主性의 담지자임이 드러난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함의 친교의 행위이다. 성령은 성부, 성자, 상호간의 사랑이며,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서” 이미 교제, 사랑, 은사이다. 따라서 성령은 계시 안에서 우리에게 작용하는 主이며 구속자이다. 둘째, “삶을 주는 자, 성령을 믿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성부와 함께 창조의 주체라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성령의 신성을 말한다. 셋째, “성부, 성자로부터 유래한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 성자와 같은 본질임을 여기서 나타낸다. 그렇지만 성령은 성부, 성자, 구별된다.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현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직접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Barth는 “아들에게서도(filioque)”라는 추가구까지 열렬히 변호한다. Barth의 삼위일체론을 보면 계시 중의 하나님은 영원한 현실 중의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넷째, “성부, 성자와 함께 숭배되고 찬양되는 성령을 믿습니다.” 숭배와 찬양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적 인간사이의 거리를 표시한다. 여기서 분명히 강조된 것은 성령의 신성이다.
이상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의 역사는 오직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존재안에 포괄되어 있으며 이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Barth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을 위한 공간이 교회임을 강조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근원을 가진다. 교회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으로부터 유래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 자녀의 생활은 교회의 현실, 즉 계시의 주관적 현실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인간의 응답이 일어나고 선포되는 곳이다. 교회의 설교는 세 가지 제한성을 가지는데, 첫째, 하나님이 임의로 말씀하실 때, 말씀하는 곳에서만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유한 말씀이 설교의 한계이다. 둘째, 설교는 인간의 말이므로 언제나 오류를 초래한다. 따라서 설교는 언제나 자아비판과 반성을 요하며, 여기에 교의학의 필요성이 있다. 셋째, 설교와 교의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의 증언에 의거해서 말해야 한다. 설교는 현재 하나님이 말씀하기기 때문에 현재적 사건으로서 성서의 진리가 된다. Barth는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각각 설명하는데 여기서 근본적인 것은 Barth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중성을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의 삼중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Ⅲ. 나가는 말
Barth는 어느 신학자보다도 더 강력하게 삼위일체 교리가 교의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강조하였다. Barth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 본체, 혹은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고, 하나님은 하나되심속에 셋이 있으며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서의 계시는 삼위일체론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계시이며 삼위일체론은 계시에 대한 해석이라고 보았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서에 나타난 계시를 무시하고 새로운 철학에 의해 제시된 사상을 활용함으로써 합리주의와의 관련에서 발전된 이상들을 따라 신앙고백적 전통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종교와 신학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해 Barth는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철학적 사변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 하나님 자신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삼위일체론을 말한다. Barth에게 있어서 신학적 중심은 19세기 인간중심적 신학을 거부하고 하나님 중심적 신학을 수립하는데 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모든 본질적 연결성을 거부하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확립하며,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출발하여,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외에 하나님 계시에 대한 어떤 접촉점이 인간에게 있음을 철저히 부정한다. 그리고 Barth는 “삼위일체 하나님” 단락에서는 계시 안에서의 주체문제, 즉 계시자 자신을 다루었다. “말씀의 성육신”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일어나는 움직임인 계시의 객관적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였다. “성령”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인식하는 우리의 깨우침, 즉 계시의 주관적 현실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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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arth, Karl. <Church Dogmatics> : The Doctrine of the World of God Vol. I. 2. trans. by G. W. G. T. Thomson Horold Knight, Edinburgh : T&TClark, 1975.
3. Weber, Otto.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김광식역. 서울 : 대한 기독교서회,1982.
4. 니이브,J.L. <기독교 교리사>Ⅰ. 서남동역.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2.
5. 윤성범. <칼 바르트>.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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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박형룡. <기독론>. 서울 :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8. 불트만, R. <신약성서신학>. 허혁역. 서울 : 성광출판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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