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2/발칙한설교.위로

K 보십시오.

한스킴 2013. 4. 17. 16:38





K 보십시오.


주말 동안 긴 잠을 잤습니다. 일주일 동안 힘들었고, 실패하였다는 부담감이 피로함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래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아무의 방해도 없이 몸을 누이고 생각을 더듬을 수 있는 휴식처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세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후부터는 모든 것이 지나고 보면 감사한 것이 되었습니다.

K를 생각하면서 어떤 위로를 해 주어야 하나 고심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위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가장 가까운 이웃의 위로가 또한 하나님의 뜻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위로할 단어는 없습니다. 이틀 동안 잠을 푹 잔 후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하나 고심하다가 루이스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C. S. 루이스를 잘 아시죠? 제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고통의 문제’입니다. 그가 쓴 주옥같은 글들을 읽으면서 제가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였습니다. 아니 이해하였다는 교만한 단어보다는 설득 당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이성적이고 변증적인 문체를 따라 가다가 왜 인간에게 고통이 주어지는지를 알아내기란 힘겹습니다. 그의 글이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면서 읽다 보면 그가 펼치는 설득에 매료당합니다. 그렇다고 ‘고통의 문제’를 다시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지나가고 나면 깨달아 집니다.


우리는 원초적인 질문에서부터 하나님을 의심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왜 인생이 시작되었고, 하나님은 죽음의 고통에서 사람들을 구원해 내지도 않으시며, 세상에 만연한 악들을 하나도 멸하지 않으시는 걸까? 하나님은 왜 이 불의한 세상의 악들이 언제나 정의를 이기는 불합리한 세상을 그대로 두시는가? 악인은 더 부요 하고, 선한 사람은 눈물 흘리는 이 비참한 인생을 감당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높은 지위에서 더 부유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비난하고 없다 말하는 것을 그대로 듣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없다’ ‘없다’ 말하는 인생들에게 번개라도 내려 징벌하지도 않으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창조주 인가 하는 의문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다 말하는 인생은 그렇게 인생이 끝날 것입니다. 그 인생을 아무리 설득 하여도 설득될 수 없는 것은 왜 일까요?

하나님의 모든 관심사는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향해 있습니다. 제가 K의 졸업식장에 갔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저는 그 전교생 중에서 기가 막히게 K를 찾아 낼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K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필시 관심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은 하나님에게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마도 K와 남겨진 가족에게 온전히 가 있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의 몸으로는 하나님이 허락한 시간까지만 살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세상이 좋은 곳이라면, 인생이 여기에서 더 많은 시간을 살다가 돌아오도록 하였을 겁니다. 제가 표현하는 이세상은  ‘연수원이나 학교 같은 곳’ 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것 같이, 영원히 살것같이 욕심을 내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정의하여 줍니다. 기간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졸업해야 하고 퇴소해야 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자녀가 훈련 받는 곳, 하나님의 대적 세력들은 훈련 교관 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교관들 보다 권력이 높지도 못하고, 불합리하고 형편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서 이 땅의 불합리한 모든 것, 불평등과 멸시를 견뎌 훈련 받고, 잘 섬기는 제사장, 섬기는 왕이 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잘 믿고 일찍 하나님 곁으로 가신 분들은 졸업학점을 잘 이수하고, 이 땅에 보냄 받은 모든 소명을 다 이루신 분들일 겁니다.


C. S. 루이스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습니다. 그가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 때부터 수많은 책을 집필한 것을 아실 겁니다.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등 철저한 논리와 명석한 두뇌로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신학자였습니다. 그냥 진리이니 무조건 믿어라 하고 말하는 무지 몽매한 학자도 그런류의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습니다. 이성의 영역에서 그의 합리적인 설득은 앞으로도 흔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런 그가 59세의 나이에 미국에서 건너온 작가 조이Joy를 만납니다. JOY는 이혼의 아픔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와 운명처럼 루이스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됩니다. 평생을 홀로 지내다 만난 조이를 통하여 루이스는 가정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인생을 느낍니다. 하지만 JOY는 루이스를 만난 때부터 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JOY를 간호하면서 루이스는 행복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픈 아내 JOY를 두고 그 신실한 루이스가 얼마나 많은 시간 기도를 했을지 말입니다. 결국 JOY는 루이스의 곁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을 이야기 한 저서가 “헤아려 본 슬픔” 입니다. 이 책은 루이스 사후에 그 후손들에 의하여 출간이 되었는데, 충격적입니다. 그 신실한 신학자 루이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분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 하나님을 심술궂은 영감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아내와의 사별 속에서는 신앙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슬픔이 여과 없이 드러난 작품 입니다. C. S. 루이스 같은 대학자, 신학자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루이스의 슬픔을 눈물 흘리면서 공감하기 전에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JOY가 곧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루이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나, 루이스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녀를 치료할 것이라 믿었던것 같습니다. 이것은 루이스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심을 묻지않고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 조이의 병이 하나님의 섭리로 치유되기를 기도 하였는지는 짐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매정하게 조이를 데려가십니다. 정말 심술궂은 염치도 없는 영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섭섭하고,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시나요?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합니다. 그 책에서는 위대한 신학자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책의 마지막은 JOY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녀는 미소 지었으나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의 샘으로 돌아갔다.”


저는 K 아버님의 인생을 모릅니다. 하지만 K를 보면 얼마나 따뜻한 분이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로운 천국에서 쉼을 얻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그곳에서 K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일 전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곳에서 K를 만나고 있다니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릅니다.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은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톰라이트 박사가 말하는 천국(또는 하나님의 나라)을 이해하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게 되더군요. 

“예수님이 지금 계신 곳은 우리가 속한 시공간의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는 세계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땅'-와는 다르지만 수많은 방식으로 서로 교차되어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인 자신의 내적 삶에서 교차된다. 언젠가는 이 두 개의 세계가 완전하게 통합되어 서로를 온전히 다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바울과 요한이 이야기 하는 그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톰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220)

너무 복잡한 이야기니깐 톰라이트 교수의 말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의심하지 말 것은 하나님은 여전히 K를 사랑하며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겁니다. 사람이 인생을 벗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법칙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날 때 우리는 모두 C. S. 루이스와 같은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K, 하나님은 산처럼 고요히 그 자리에서 계시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우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이 왜 그렇게 일찍 아버지를 데리고 가셨을까 깊은 사색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하나님 눈에는 사랑하는 자녀 오직 K에게 온 시선을 집중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