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장 13절 ‘피할 길을 내사’에 대한 이해.
Ⅰ. 서론
바울의 서신(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크게 1)여섯 가지 이다. 첫째. 교회의 분열의 문제, 둘째. 음행과 소송의 문제, 셋째. 결혼과 관련된 문제, 넷째. 우상과 관련된 문제, 다섯째. 공적예배 중에 나타난 문제로 주로 은사, 여섯째. 부활의 문제 이다.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3 πειρασμος υμας ουκ ειληφεν ει μη ανθρωπινος πιστος δε ο θεος ος ουκ εασει υμας πειρασθηναι υπερ ο δυνασθε αλλα ποιησει συν τω πειρασμω και την εκβασιν του δυνασθαι υπενεγκειν
10:13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주제로 선택한 13절은 넷째. 우상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설명에 포함되어 있다. 10장 1절부터 12절까지 우상숭배로 이만삼천명이 출애굽 중 죽은 사건의 내용과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는 권면과 붙어서 마지막 30절까지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바울이 권면하는 글에 샌드위치 구조로 묻혀있다. 그러나 많은 주석자들과 설교자들이 앞‧뒤 본문의 내용을 무시하고 그 구절만 떼어내어 시험과 고난에 처한 성도를 위로하는 구절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여 안타깝다. 도대체 ‘피할 길’은 무엇을 말하는가? 감당하지 못한 시험이 왔을 때 들어서 빼내준다는 해석은 맞는 걸까? 그러면 사도로서 고난을 몸소 감당한 바울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도란 말인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하늘에서 받을 상급만큼 귀하게 여기는 바울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이 구절을 계속 이렇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로 한다.
Ⅱ. 주석가(학자)들의 해석.
1. 스코트 해프먼(Scott J. Hafemann)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시험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까닭에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믿는 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시며,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셔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능히 감당케 하신다.”는 확신을 갖는다. 하나님은 사탄의 계획까지도 통제하시기 때문에 사탄이 믿는 자들의 믿음을 파멸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2)
스코트 해프먼은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으므로 사도바울이 말한 고리도 전서 10:13절을 인용하여 시험당하고, 감당하지 못할 시험에서는 피할 길을 내서 빼어내 준다는 의미로 글을 사용하고 있다.
2. 고린도 전서 강해, 김세윤 교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심을 강조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한계를 잘 아시고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시험이 있을지라도 피할 길을 보여 주셔서 잘 감당하게 해주십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 없이 너무 근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21:4-8을 참고하면 출애굽 세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허락하셔서 뱀에게 물려도 죽지 않도록 구원의 방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13절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믿어 세례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항구적 안녕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주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관계 속에 서 있을 때만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심 또는 안도할 수 있다는 말은 그에게 시험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 받도록 허락하기도 합니다. 교육과 연단을 위해서 시험을 받도록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시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방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과 역사의 이치에 의해 죄악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여 시험을 저지하고 빠져 나오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피하게 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으려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3)
3. 우리의 자화상 고린도 교회, 홍인규 교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통상적인 시련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만일 힘에 부친 시련을 만날 때는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능히 견디게 하신다. 10:13은 말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성급한 오만이나 절망을 배제하고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로 우리를 초대한다.4)
Ⅲ. 그리스도인에게 고난과 시험에서 ‘피할 길’은 있는가?
1. 바울도 고난을 감당 하였다.
5)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당한 고난을 자랑한다. 바울의 분명한 논지는 그리스도의 일꾼에게는 수고하는 것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시험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훈련과정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수고는 사도로서 당연히 받아야할 생활비, 선교비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여 비용을 충당하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를 어떤 사도보다 많이 당하였고, 매도 수없이 맞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보냈다. 선교 여행 중에는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 광야, 바다의 위험을 당하였다.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은 상황을 감당하였고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붙잡으려 하는 위기상황에서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는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모두 감당 하였다.
2. 예수님도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 하셨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가복음13:12-13)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들은 제자들이 그러한 일이 일어날 징조와 때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칠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 고난 중에는 가족들조차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상황까지 일어난다고 한다. 6)실제로 네로 황제 박해 당시(64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의 밀고로 죽음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끝까지 견디어 구원에 이르라고 당부 하신다. 7)여기서 ‘끝까지’(에이스 텔로스, eij" tevlo")의 ‘끝’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일반적인 부사적 의미로 ‘줄곧’, ‘영원히’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성도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날 동안에는 줄곧 고난을 이기면서 감당하면서 살아야 한다.
3. 의인 욥도 고난을 견디었다.
성경에서 고난과 고통의 대표적 인물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인물이 욥이다.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욥과 같은 의인은 없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은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내 가족과의 세상을 달리하는 이별보다도 내가 가진 재물이 모두 없어질 때일 것이다. 그가 가진 재산이 모두 없어졌다.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 멍에 매는 소가 5백 마리, 나귀가 5백 마리였으며 그의 자녀 아들 일곱, 딸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재벌가의 왕 회장님 가족이 모두 죽고, 사업체마저 모두 망하였으며, 더구나 혈혈단신이 되어 몸에 병까지 생기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욥은 하나님과 사탄의 우주적인 내기 상황에 자신이 던져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체 그 고난을 견디고 있다. 성경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반절)말하고 있다.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해석이 되어지는 구절이다. 따라서 욥의 친구들이 줄기차게 죄의 결과로 당하는 고난이므로 회개하라고 조언한 것은, 고난은 죄의 결과로 당하는 것이라는 친구들의 확신 때문이었다. 8)친구들은 욥이 큰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논증을 설득력 있게 전개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종 판결에서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기42: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욥이 고난을 견디어 낼 것을 알고 있었다. 고난으로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고난이 주는 유익을 욥에게 주고 싶으셨다. 피하라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견디라고’ 격려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4. 하나님이 감당하게 하시는 멍에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11:28-30)
감당하는 힘을 주신다는 의미로나 피할 길을 준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위로의 구절 중에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멍에’를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가리킨다고 보는데9) 멍에를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과 대비되는 것으로, 율법의 의도와 의미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을 가리킨다고 한다. 예수님은 그 멍에를 지라고 하셨다. 그것도 나에게 와서 내 짐을 지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완성하신 율법은 바리새인이 지킨 율법보다 강도가 높다는 것을 산상수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요구는 바리새인의 율법 해석보다 더 어렵기는 해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새 언약이 시작되기 때문에 감당하기 쉬운 멍에이며, 가벼워서 운반하기 편한 짐이다. 우리에게 피하게 하는 것은 없다. 다 감당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요구를 따를 수 있도록 친히 도와주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10) 이스라엘에서 소에게 멍에를 메는 훈련을 할 때 어미 소와 같이 멍에를 지우고 훈련하게 한다고 한다. 혼자서는 힘겹고 돌릴 수 없는 맷돌이지만 어미 소와 함께 지면 돌릴 수 있다. 훈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하여야만 하는 것이 소의 임무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이다.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서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게 힘을 공급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Ⅳ.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1.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피할 길’은 무엇이었을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서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게 힘을 공급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원리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출애굽을 위하여 모세를 부를 때도, 수많은 사사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때도 볼품없는 인물들을 불러서 위대하게 만들었다. 약하고, 미련하고, 천하고 없는 것을 택하셔서 강하고, 지혜 있고, 있는 것을 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징적인 행위이며 이것이 ‘11)종말론적인 뒤집음’이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였던 ‘피할 길(에크바신 εκβασιν)은 무엇일까? e[kbasin은 스트롱코드 1537의 합성어와 939의 어간(‘내보내다’를 의미)에서 유래한다.
13 πειρασμος υμας ουκ ειληφεν ει μη ανθρωπινος πιστος δε ο θεος ος ουκ εασει υμας πειρασθηναι υπερ ο δυνασθε αλλα ποιησει συν τω πειρασμω και την εκβασιν του δυνασθαι υπενεγκειν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보내어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바울은 너무도 분명하고 강력하게 고린도 교인이 피해야만 하는 사건을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해준다. 바울의 편지를 그대로 인용하여 보면 분명하고 확실한 멸망, 즉 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자리이므로 틀림없이 피해야만 한다.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신부인 그리스도인이 음행하는 것이며, 틀림없이 죽인다고 분명한 경고를 한다. 멸망의 자리이다. 피해야 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바울은 권면한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과 관계하지 말라고 한다. 숨으라고 한다. 떠나라고 한다.
14 διοπερ αγαπητοι μου φευγετε απο της ειδωλολατριας
13절과 14절을 샌드위치 속으로 하고 그 양쪽으로 우상숭배에 대한 권면과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13절과 14절을 따로 떼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14절을 붙여서 해석하여 하나님이 우상숭배로 인해 이만 삼천 명을 죽인 멸망의 자리에서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성도는 고난을 감당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감당하도록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천국백성이 되어 간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상숭배 하는 멸망의 길에서 피할 길을 주신다는 가르침이 성도를 올바르게 양육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을 군인이 훈련받는 훈련소라고 가정한다면, 군인은 훈련소에서 잘 훈련되어 졸업하여야 한다. 훈련소에서조차 빼내어지는 특권을 주는 것은 제대로 훈련된 병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전쟁과 같은 강도의 훈련 중 죽지 않도록 죽음의 자리에서만 피하게 하는 것이 훈련교관의 일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다.
2.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의 집에서 살펴보는 ‘피할 길’
사사기를 읽다 보면 16장 삼손을 마지막 사사로 사사의 이야기를 끝내고 몇 개의 글이 연속으로 붙어 있다. 왜 이후의 사사인 엘리를 소개하지 않고 사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글을 붙여 두었을까? 이유가 있다.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첫째, 미가와 단 지파의 이야기. 두 번째, 레위사람과 그의 첩과 관련된 베냐민 지파의 이야기 이다.
단 지파는 블레셋평야와 쉐펠라 지역의 일부를 분배 받았지만 블레셋 평야에 거주하는 민족을 쫒아내지 못하여 분배 받은 지역에 거주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에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정탐 병이 이르게 된다. 미가의 집은 그 어미가 은 이백으로 신상을 만들어 두었다. 미가의 집에 신당이 있어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모시고 있었는데, 유다 베들레헴에서부터 레위인이 흘러들어와 미가의 집 제사장이 된다. 미가는 우상을 만들어 신당에 두고 레위 사람을 제사장 삼았으니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뻐한다. 가짜 성전에서 가짜 제사장을 두어 종교의 모습을 갖춘 우상을 섬기게 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멸망의 자리에 미가의 집이 놓이게 된 것이다. 단지파의 정탐꾼이 이르러 미가의 집 레위 제사장에게 거할 땅을 찾기 위해 자신들의 형통을 점쳐 달라고 한다. ‘12)평안히 가라, 형통할 것이다’ 레위 제사장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난 정탐꾼들이 라이스라는 좋은 땅을 찾아내어 그 땅을 치러 올라가는 도중에 미가의 집에 다시 이르게 된다. 정탐꾼들로부터 미가 집안의 우상과 제사장 이야기를 들은 단 지파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13)17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갈 때에 그 제사장은 무기를 지닌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 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20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24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25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 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30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미가의 집은 단 지파에게 그들이 정성껏 만든 우상을 빼앗기게 된다. 미가의 집이 이 사건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단서는 사사기18:31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할 길이다. 하나님에게서 멸망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빼 내어주는 피할 길이다. 반면 미가가 만든 신상은 단 자손에게 그들이 멸망 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뉠 때, 그곳 단에는 여로보암의 신당이 서고, 금송아지를 세워 이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하는 장소가 된다. 단은 미가의 집에서 우상을 훔쳐내어 단 자손의 신당에 둔 이후로 우상의 도시가 되었다. 종말론적으로 요한계시록에서 구원을 받은 144,000의 민족을 살펴보아도 단 지파는 사라져 버린다.
14)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Ⅴ. 맺는말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신다. 요한계시록의 끝을 계획하시고 창세기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을 심판하거나 훈련하기 위하여 주변 이방민족을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욥기를 읽어보면 천상에서 사탄과 하나님이 ‘우주적인 내기’를15) 펼치신다. 16)아모스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도시에 악이 생기겠느냐?”라고 반문한다.(암 3:15)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 악을 다스리기도 하신다는 사실은 17)누가복음 22:31-32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일으키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분명하게 구속사에서 악을 존재하게 허락하셨고 그 강도와 범위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피할 길’은 시험에서 빼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를 훈련시키고 테스트 하신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때까지의 인생여정을 살펴보면 그는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서 재물을 모으는 실패와 실 수 등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할 길’을 분명하게 주시는데 그것은 고난과 시험이 아니라 멸망당하는 우상숭배 그 자리에서의 ‘피할 길’이라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말하는 샌드위치의 구조 속에 있는 것을 따로 떼어내어 환난과 시험(훈련) 속에 있는 성도를 위로하는 구절로 사용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끝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고린도 전서 10장 13절, 14절을 해석한 글로 글을 마친다.
18)여러분의 앞길에 닥치는 시험과 유혹은 다른 사람들이 직면해야 했던 시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한계 이상으로 내밀리지 않게 하시며, 그 시험을 이기도록 언제나 곁에 계시며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떤 대상으로 전락시켜 이용하거나 통제하려는 모습이 보이거든, 할 수 있는 한 속히 그 모임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참고문헌
1. 고린도전서 강해, 김세윤, 두란노아카데미 2008
2. 우리의 자화상 고린도 교회, 홍인규, 킹덤북스 2013
3. 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양용의, 성서유니온선교회 2010
4. 온전한 신뢰, 스코트 해프먼, IVP 2006
5. 예수님이 읽으신 성경, 필립 얀시, IVP 2010
6. 메시지 신약, 유진 피터슨, 복 있는 사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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