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10 동백두레교회/찬양예배.
그리스도인의 성장 2017.03.19. 한스킴
고린도전서 1:4-7 4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6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7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지난주까지 두 번에 걸쳐서 기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말씀 드렸는데요. 사실 저는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 들이 예언기도를 행하는 능력도 보았습니다.
저 역시 청년시절에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오직 기도에만 전념했습니다. 고백 드리자면 제가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기도에 열심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뭔가 간절했는데, 그 간절함이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가 메 달릴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 한 분 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피해서 갔다고도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때는 기도란, 내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면서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 기도 덕분에 '아버지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안수집사가 되었다. 가족 모두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신앙고백을 멋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제가 뭔가를 알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주고, 보호해주고,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땡강을 부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렸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내 그런 교만한 모습의 기도도 하나님은 예쁘게 봐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응답도 해 주셨고요. 세상의 복도 주셨습니다. 방언으로 몇 시간씩 기도도 하고요, 신유의 은사도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데 오른손이 엄청 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거라고 해석을 해 주더라구요. 하지만, 저한테 기도해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도했는데, 변화가 없더라고요.
기도와 은사가 저에게 유익이 되었을까요? 유익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성장 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어린아이에 불과 했습니다. 그냥 기도 많이 하는 어린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 합니다. 뭐라고 칭찬 하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언변과 지식이 풍족하다고 합니다. 제가 가장 못하는 부분인데요. 하나님에 대하여 논리적인 변증을 잘 하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을 전하는데 능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대중들이 보기에 믿음 좋은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있고, 그것을 전할 수 있는 언변도 가지고 있는데다가 구원의 확신까지 튼튼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믿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증거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칭찬한 것이 은사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식도 있고, 구원의 확신도 있으며, 그것을 전할 언변까지 있는 데다가 능력까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들의 판단에는 굉장히 믿음이 좋았을 뿐만아니라 영적인 사람들 이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청년의 때에 제 모습이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저는 믿음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젊었던 저를 왜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을 드리냐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 뿐이 모릅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왜요? 어린아이니깐요.
고린도전.후서를 읽어보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은사 받고, 성령 체험을 하는 동안 저의 관심은 오직 나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은사를 체험하기 위하여 쉬는 날. 휴가 때는 기도원으로 향하였습니다. 퇴근하고 저녁에도 기도원으로 향하였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으로는 상상이 안 되시지요?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의 체험도 있고, 믿음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무시하고 비웃는 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을 가르칠 때, 쉬운 말로 가르친 것 같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을 뽐내지도 않았는데요. 바울의 목적은 오직 고린도 교인의 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겁니다.
바울의 그런 수고 덕분에 믿음의 수준이 높아지자, 바울의 동역자들이 고린도에 가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아볼로, 게바가 그 동역자들인데요. 그들은 믿음의 수준이 높아진 교인들에게 꽤 높은 신학적인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바울은 신학적 지식이 사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정황이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옵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 입니다.
1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2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3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1장 편지 서두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을 이렇게 평가 했습니다. 언변과 지식이 풍족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고린도 교인을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 합니다.
말 잘하는 어린이, 성경 지식이 많은 어린이, 전도 잘하는 어린이, 은사의 능력이 많은 어린아이. 이것이 바울이 평가하는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내가 우선이 되어야 만족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육에 속한 사람처럼 산다면 문제가 더 심각해 집니다. 어린아이 같을 뿐 아니라, 시기하고, 싸우고, 자기 중심적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자존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옳다고 말하게 됩니다. 왜요? 내가 그렇게 말하였으니깐 꼭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틀린 겁니다. 그리고, 자기 눈으로 남이 틀린 것은 꼭 지적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제가 청년의 때에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 뿐만이 아니라 저와 같은 침대를 사용했던 분도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저희는 부모님과 같이 살았습니다. 저는 장남입니다. 제가 부모님을 꼭 모셔야 된다고 생각하였던 사람 중에 한 명 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그 분의 불평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의 허물을 이야기 했습니다. 저한테 이야기 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당사자에게도 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고기를 왕창 사왔습니다. 어머니의 생각은 가족들에게 풍족하게 먹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먹을 만큼만 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남지 않게 해야 한다는 똑똑한 생각이었습니다.
가족을 잘 먹이겠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틀렸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절약해야 한다는 그 분의 생각이 틀린 건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런 문제는 죽고 사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한 쪽이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면, 문제도 아닌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본인의 의견을 주장했고요. 어머니가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도 아닌 문제가 대단히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배웠다고 무식한 시어머니를 무시하는 며느리라고 생각하셨다고합니다. 그분은 저녁이 되면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식구들은 왜 하나 같이 그 모양이야? 정말 답답해서 같이 못 살겠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것을, 꼭 죽여야 하는 문제로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어린아이 입니다. 육적인 사람들 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쓸데없이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내가 틀린 말을 했어? 아니자나, 사실 이자나!"
교회라는 공동체에도 이런 사람이 많으면 고린도 교회처럼 됩니다. 지식이 많아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풍성해도,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린아이에 머물면 문제가 생깁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데,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교회는,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성장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장을 하느냐? 그 모델이 예수님 입니다. 빌립보서 2장5절부터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5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신처럼 인간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으셨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더 낮추시고, 우리를 섬겨주었습니다. 순종하였습니다. 어디까지 섬겨주고, 어느 순간까지 순종하였습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나는 것의 시작이 순종입니다. 자기만 주장하던 모습에서 남을 배려하게 되는 순간이 순종을 배우는 순간입니다. 순종은 관계를 맺는 시작이고,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요 그 순종이 쉽나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양보하고 상대를 용납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요.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는 피아노를 강단 위에 둘 것인가, 강단 아래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의견이 나뉘어서 장로 두 분이 싸웠다고 합니다. 결국은 그 싸움 때문에 교회가 둘로 쪼개 졌습니다.
그런데요 더 황당한 사실은, 그 두 분의 장로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만났습니다. 그 두 분의 의견이 갈려 싸웠기 때문에 교회가 두 개로 쪼개졌는데, 그 이유가 기억에 나지 않더라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아노를 어디에 두던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서는 생각도 나지 않는 것 때문에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염려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것에서 자존심을 내 세우지 않는 것이 성장의 시작입니다. 교회의 일을 논의하거나 어느 의논의 자리에서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으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상대의 의견을 따라 해 주어도 좋습니다.
여러분 순종을 연습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시작입니다.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권고하는 것을 순종하도록 애쓰십시오. 남편을 세워주십시오. 그것이 순종입니다. (저는 너무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실천하지 못했지만,) 남편은 아내를 더욱 사랑해 주십시오. 그것이 아내를 세워주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 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성령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육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 기도 잘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 능력이 있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한 순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한 순간에 확 바뀐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뭐라고 그럽니까? '응, 죽을 때가 되었구나'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완전히 변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간난 아이를 보면, '어휴 저게 언제 걸어다녀' 하지만, 때가 되면 걷게 됩니다. 울기만 하였던 아이가 말을 하기 까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기 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 믿은 지 10년이 되었다면, 이제 10살 정도의 어린아이처럼 보아 주는 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 믿은 지 10년 되었으니깐, 성자처럼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정죄하는 것이 마귀의 시선입니다.
그 증거가 저 입니다. 제가 예수 믿은 지 40년 차가 되었는데요. 여전히 실패하고,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일 저를 사탄의 시선으로 본다면 진작에 죽여야 될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완전해야 한다고 높은 잣대를 우리에게 들이 되거든요.
"40년 되었는데 그것뿐이 안돼? 나이로 치면 40살이다. 넌 틀렸어, 그렇게 예수 믿어서 뭐하냐, 그래서 구원 받겠어?"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내가 변한 것에 시선을 두십니다. "어휴 그래도 이제는 부모님 감사한지 알고, 아버지를 이해하는 수준까지 되었네, 장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우리는 분명히 성장해야 합니다. 하늘나라 백성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완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훈련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다가, 하늘 나라에 가서야 완성이 됩니다.
제가 요즘 주일학교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요. 예배 중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아이들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합니다. 더러는 벌컥 문을 열고 엄마에게 달려 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엄하게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떠들게도 나두고, 장난치게도 나 둡니다. 아이들은 다 그렇게 크는 겁니다. 그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도 커 가면서 집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릴 작정입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를 믿어 새사람이 되었다고 기대치를 높이지 마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분은 예수 믿은 지 50년 만에 조금 변하더라고요. 본질적인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변할 수 있는 것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서 천국의 백성으로 훈련 받아 가는 그 모양입니다.
저도 지금 전도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거룩하지 않습니다. 아니, 거룩한 척 하지도 못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실수하고, 넘어지고, 실패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분량까지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실수하고, 넘어지고, 실패하여도 툭툭 털고 일어날 겁니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사탄이 '전도사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 하고 정죄 하여도 속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저를 언제까지라도 용서할 것을 알기에 다시 시작할 겁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실패하면 다시 일어 서십시오. 그렇게 예수를 닮고자 애쓰는 모습으로 사십시오. 순종의 모습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게 하십시오. 예수의 모습을 닮기 위하여 애쓰며 사는 우리의 모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성장을 성령으로 도우시고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
1. 최영기, 『가정교회 삶 공부, 첫 단계』 (서울:요단출판사 2016)
2. 최영기, 『삶 공부 강의안』 08. 성장
'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1 > 생명의삶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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