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원 시절, 교수 필독서였다. 그래서 자세하게 리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1강. 아브라함1 (갈대아 우르)
우리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배운 아브라함이 생각납니다. 완벽한 믿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단 한번의 실수도 없는 믿음의 조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대의 의인 욥에 비하여 아브라함의 정체는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종교 숭배자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 알게되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였지만, 아버지 데라가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움직이지 않았을 만큼 평범한 이방종교인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 되도록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열심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욥과 같이 의인을 택하지 않고, 평범하거나 아니면 그 이하인 이방인 숭배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보면, 우리가 구원 얻을만한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구원의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구원 받을 만한 존재여서 구원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선택 받았다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믿음이 충만한 것처럼 이해가 되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작업'입니다. 내 운명을 구원으로 설득하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설득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설득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공감하고. 인정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 손에 먼저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 놀랍습니다.
2강. 아브라함2 (애굽에 가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공부하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두 번째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이것은 본문을 설교하는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들어가라는 가나안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기근이 생겼다고 사명의 자리를 떠나 애굽에 들어가므로 인해서 시험에 빠졌다는 취지의 설교입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애굽왕에게 팔아먹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면 이처럼 시험에 빠진다는 설교를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설교 후 사명의 자리에서 굶어 죽어도 자리를 지키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구약의 시대라면 불을 내려서 그 설교자를 태워 죽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에 따라 아브라함을 인도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계획이 아니었다면 바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책망하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애굽에서도 이삭을 제물로 받치는 만큼의 믿음을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수준이 가나안에, 혹은 아직도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지 못한 갈대아우르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애굽에 있어서 시험과 도전의 위기에 봉착되어 있을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개입하고 있다는 믿음과 위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쯤 되면 생각나고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내 옆에서 나를 설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로보트처럼 조종하지 않으시고, 원수처럼 유기하지도 않으시며, 끊임없이 간섭하시고 있다느 사실입니다. 나를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눈물과 오래 참음과 긍휼하심으로 설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열심이 나를 완성의 자리로 견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3강. 아브라함3 (믿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이삭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크기가 언제나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삭을 요구하시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로마서4장 3절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에서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꺼내놓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열심을 내어 아브라함을 설득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말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은 분명 믿음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그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왔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만들었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만나 주셨습니다. 또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이 찾아가 가르치고 설득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만족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의 생활과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가를 생각하고,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듯이 동일하게 나를 부르실 것을 성경을 통하여 이야기 하여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주는 은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 수 있습니다.
4강. 아브라함4 (할례).
15장에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 '많은 아들을 가지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이 가지는 놀라운 상징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생활은 그 꼴로 살아? 우리의 실패가 깊어질 수록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하나님께 수치가 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지경까지 우리를 견인 하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 상황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시작은 아담의 범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죄에 거함으로 해서 은혜에 거하게 된 겁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고 불린 후,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16장에서 사라의 여종 애굽여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13년 동안 아브라함을 떠나 침묵하시다가, 그의 나이 99세가 되던 때에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하고 책망하십니다. 17장에서 다시 한번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강조하면서 나의 전능 됨이 너를 '열국의 아비'되지 못하게 하겠느냐? 하시면서, 할례를 명하십니다. 할례는 잘라 버린다는 뜻이며,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할례는 생식기를 잘라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더욱 극명하게 아브라함의 인생 동안에 나타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너무나 죄송했을 겁니다. 자기 힘으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자 인간인 자신이 힘을 보태 보았는데, 하나님이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전능한 하나님인 내가 너의 인간적인 열심이 필요하겠느냐 하는 질책입니다. 구원은,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요청하지 않았을 때 이미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완성하시는 작업입니다. 고집불통 하나님, 좀 경망스러운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하나님의 속성을 잘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고집은 누구도 꺽을 수 없습니다.
5강. 아브라함5 (이삭) 창세기 22장15-18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고 난 후에 얻는 아들이 이삭입니다. 할례라는 의미는 생식 능력을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즉 할례 후에 난 자식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것은 곧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머물다가 애굽으로 가는 여정에는 모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하여 훈련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어지는 여정이 모두 끝이 난 시점입니다. 그 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고민 없이 바로 이삭을 데리고 갔을 겁니다. 마음속으로 인간적인 번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기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할례의 의미를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까지 밀려간 것입니다. 이삭을 육적차원의 후손으로 보지 않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아셨을 겁니다. 이 순간을 통과시켜 완성시킬 수 있는 확실한 십자가 방법이 준비 되어 있고, 이렇게까지 인도함을 받도록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히 참으시고 인도하시는 열심 있는 손길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금은 몹시도 연약하고 실패와 실패를 경험하지만 지금의 완성되지 못한 나와 완성된 22장의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은 비교의 때가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으며, 지금도 성장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의 실패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고집은 꺾을 것이 없으며 완성의 자리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6강. 야곱1 (장자권) 창세기 25장 27-34
야곱의 이름이 약탈자라는 이름으로 강도요 도둑이라는 의미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을 하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주셨겠지요.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음에도 야곱이라고 계속 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야곱은 비록 '에서'와 아버지를 속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계열이 되기 위하여, 예수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가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사모했다는 겁니다.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이 그의 영혼을 망하게 한 일이라는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땅에서는 축복을 받고, 부족함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땅에서의 인생일 뿐입니다. 야곱이 그렇게도 장자권에 집착을 한 이유를 잘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님을 통하여 자신에게 영적 장자권이 속하여 있다는 것을 들었을 텐데 기다리지 못합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장자권을 사는 광경에서도 하나님이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가장 큰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택하였다. 택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로 예수를 알게 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고, 내 자녀로 너를 인도하고 성장시키고 완성시키겠다. '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전부인줄 알고 사는 미련한 자리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유하여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인생은 결국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어서 예수를 믿도록 인도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깨 닳게 됩니다.
7강. 야곱2 (벧엘) 창세기 28장10-22
야곱, 벧엘의 사건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는 것이다.언제나 구원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야곱은 하나님이 장자로 선택을 하였다. 그럼에도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사도록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장자의 명분 때문에 형 에서의 종까지 낮아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장자가 되었지만 장자로서의 권리를 누려본 기록이 없다. 형 에서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400명의 종을 군사로 거느릴 수 있는 땅에서의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장자이면서도 유랑하는 생활을 하였고 돌아와서는 형 에서의 동생이 아니라, 종까지 낮아진다. 야곱은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 훈련이라는 것은 목표한 것이 완성 될때가지의 훈련이다. 야곱만큼 미련하게 그 훈련의 과정을 다 거친 인물도 많지 않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열심으로 만들어 가시되 야곱의 수준까지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담대해 졌는지는 창세기 47:7절을 보면 알게 된다. 당시 바로는 세상의 대통령이었다. 신이었다. 그런 바로 앞에 선다면 눈을 맞추지 못하고 그 앞에 엎어져야 하는 상황임에도 담대하게 바로를 축복합니다. 이 상황은 바로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몸을 의탁하게 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 하는 자리에서 축복을 선포합니다. 축복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하여 주는 겁니다. 야곱은 그가 살아온 험악한 세월 동안 하나님이 그를 항복하게 만들었고 그 자리에서 부름을 받은 것 입니다. 우리의 생이 야곱 같지 않다면 점검해 보아야 한다.
8강. 야곱3 (얍복나루) 창세기 33장 21-32
누군가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 우상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경배를 하지 않으면 축복을 하지 않고 저주를 내리기 때문일 겁니다. 간단한 공식입니다. 먼저 제물을 드리고 빌면, 그만큼 주는것이 우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굴복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과 마음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주인 이시기를 원합니다. 종으로서 도움만을 주는 것(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는 행위)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삼촌을 속일 때도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와 주는 것은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보장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는 겁니다. 그런 그가 얍복 나루터에서 걸립니다. 야곱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설득되지 않아 포기하려고 하자 물고 늘어지면서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스스로 언제나 훔쳤던 야곱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 입니다. 자기가 사기꾼이고 강도라는 것을 고백 받고 나서야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야곱만큼 심한 고집쟁이는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집쟁이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십니다. 항복하지 않는 야곱에게 내려와 씨름을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자 환도뼈를 부러뜨리고 떠나려 한 것입니다. 야곱은 이름을 바꾸고 나서도 본성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성경을 읽어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야곱, 강도 같은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니야, 나 같은 놈을 하나님이 돌보실 분이 아니야!' 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감수하고라도 우리를,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드시고야 마는 고집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을 세우시고, 설득하시고, 의의 길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얍복 나루터에 서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9강. 야곱4 (그의 말년) 창세기 49:22-26
하나님은 왜 야곱의 이야기를 성경에 두었을까?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후세에 기도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축복을 주었을까? 야곱은 약탈자요, 강도이며, 사기꾼 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년에 애굽의 왕, 신 같은 바로를 축복하고, 자녀를 축복할 때 '네 아비의 축복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보다 더 좋다고 말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자신감은 아마도 야곱이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이 매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매를 맞으면서 배웠습니다. 야곱은 지독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박영선 목사님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야곱이 얼마나 지독하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를 가르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자기 편리한 대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입니다. 사람만큼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합리화 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또 야곱의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야곱이 외치는 '나의 하나님'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야곱처럼 약탈하고, 강도며 사기꾼이기 때문에, 어떻게 너 같은 것이 하나님을 찾느냐고 누가 말할 때, 그래서 내 죄악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고백, 그것이 필요합니다. 내 죄를 온전히 보고, 나는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모습으로 '아버지'하고 불러도 나를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품으신 것처럼 나를 품어주실 것입니다. 야곱이 '너희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자기 집에게 명한 것처럼 나의 맘몬과 권세와 게으름과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복으로 바꾸어 입어야 합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10강. 요셉 (Vision) 시편 105:16-22
우리가 요셉을 보는 오류는 애굽의 총리 자리에 있는 마지막 모습에 초점을 맞춘 후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늘 입지전적인 인물로 소개하고 공부하였기 때문에, 요셉이 믿음으로 승리한 것으로 하여, 그 믿음을 본 받자는 겁니다. 요셉이 믿음으로 이룬 것처럼 우리도 그리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하는 단어가 요셉의 행하는 일의 앞과 뒤에 나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했다는 건가요? 성경에는 요셉이 믿음으로 이겼다는 부분이 없습니다. 성서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가 그 발이 차꼬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상했다"1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아팠는지는 '몸'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네페쉬'입니다. 이것이 소마(body)로 번역이 되었는데, '네페쉬'는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사슬에 상했다고 번역되는 것이 이상했나 봅니다. 영혼이 상할 만큼 그의 감옥생활은 힘들었다는 겁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신 여호와는 요셉이 그의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경하게 여기게 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채찍이 많습니다. 자녀를 훈계하는 부모의 회초리 같은 겁니다. 잘못에 관한 채찍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채찍이 많습니다. 그 고침을 경히 여기지 않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여호와가 요셉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도의 인생입니다. 성도로 사는 것은 인내하여야 하는 일들의 연속입니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의심이 나는 것으로 몰아붙임을 당합니다. 이 세상은 성도에게 그런 훈련장 입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2를 바라보면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평안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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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편 105:18
2.히브리서 12:1
3.빌립보서 2:12
11강. 모세(위인이 아닌 범인) 출애굽기 3:1-8
모세의 부름을 받고 사역을 하는 동안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거슬렸느냐를 세어보니 6번입니다. 6번이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반항 한 것입니다. 그런 모세를 참아주시고, 찾아와서 만난 하나님을 생각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나에게 찾아와 모세의 사역을 주었다면, 설사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하겠다고 나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6번을 거부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반면 아론과 함께한 모세의 출애굽 제안을 이스라엘 백성은 단번에 동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핍박의 고통에서 행방되기를 기도하였고, 모세를 하나님이 보낸 사자로 인정하였습니다. 반면 모세를 세우면서 하나님은 아론에게 모세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세운 일군을 위해 이중겹을 치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모세를 들어서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다행인지, 그 인내하시는 인내만큼 지금의 나를 용납하시고 심판하지 않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고를 친 사람입니다. 그만큼 자신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더 빨리 깨닫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 한번으로 여호와께 돌아와 따라 나서겠다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후 계속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모세는 그 많은 반항만큼 견고하게 하나님 여호와 만을 붙잡는 모습을 보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 담대한 믿음이,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이스라엘을 염려하는 유언에서 드러납니다. 모세의 평범함을 위대하게 만드신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십니다.
12강. 욥 (하나님이 요구하신 수준에로의 시련) 욥기 23:10-14
욥기를 읽으면 주눅이 듭니다. 만일 내 3명의 자녀를 데려가신다고 가정하면, 그러면 내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지니이다'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침몰된 세월호에 내 막내 딸이 탑승하고 있으면 저런 기도가 나올까? 아닙니다. 무능한 정부를 향하여 폭탄을 들고 뛰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좋은 욥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당하여야 할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까지의 시련이라면 나는 벌써부터 힘이 쭈욱 빠집니다. 세월호 사건이 있기 전과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난 후에 내가 보는 욥기는 느낌과 마음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원통함과 고통이 기준이 아니고, 옳고 그른 것에 기준을 둔 것도 아니며, '성장'과 철이 드는 '자리'까지라면 지금은 그것을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내 진솔한 고백입니다. 하나님 저는 욥과 같은 시험이 있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의 선배가 이런 고통과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요구하는 만큼의 수준까지 견디어 주었다는 것에 교훈을 얻으라 하시면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월호의 사건으로 나의 딸을 데려 간다면 전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나를 용공 좌빨로 몰아 붙이는 나라라면 저는 그 나라의 국민이기를 거부합니다. 신앙을 편한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공부 하게 하는 것 조차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욥 만큼이 아니라, 욥이 가는 자리 비슷하게 그 계열로 시련을 주시는 것은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는 욥기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1장의 거룩한 믿음 뒤로 이어지는 37장까지 "하나님 원통합니다. 이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좀 만나서 따져봅시다." 이 고백이 더 가슴에 절절하게 동의가 됩니다. 이전에는 결말을 알 고 있으니 에이, 왜 이러는 거야 했지만, 지금은 그의 기도가 절절하게 나를 울립니다. 나는 아버지의 시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
13강. 다윗(인간이란 무엇인가) 시편 51:1-19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나옵니다. 아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우선 신학적으로 그것이 성령을 훼방한 것으로 인한 일벌백계, 성령시대에 들어서서 율법시대를 대체하는 사건이라고 이해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땅과 재산을 팔아 교회에 재산을 낸 사람들입니다. 현행법으로 사형을 당할 수 없습니다. 여기 현행법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통간을 하였고, 그것을 감추려고 하였다가 실패하자 우리야를 살인교살 하였습니다. 그리고도 태연하게 의인행세를 하다가 나단선지자의 지적을 받고서야 회개를 합니다. 그는 율법의 시대에 율법으로도 당연하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성경은 왜 이 장면을 넣었을까? 승승장구 하던 다윗이 이 사건으로 끝없는 추락은 합니다.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면서 이것이 죄 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자기의 후손으로 올 메시야가 하나님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은 다윗을 들어서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를 성공시켰고 신앙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밧세바 사건 때문에 은혜로 축복과 구원을 얻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은혜가 아니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자비와 인자와 긍휼로 다스림이 있어야 합니다.
14강. 엘리야 (세미한 음성의 하나님) 열왕기상 19:9-10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이고 승승장구 할 것 같았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갑니다. 그 거리가 지도를 살펴보면 사흘 길 정도 됩니다. 이정도 되면 엘리야가 여호와의 권능을 가지고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 선지자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여호와가 엘리야에게 찾아와 산에 서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이런 능력의 하나님은 아합과 이세벨을 박살내고, 지진으로 궁을 홀딱 삼킬 수 있으며, 불로 홀딱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는 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렇게 세미하게 말해주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여호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을 이야기 할 때 비유로만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은 원어가 mystery 입니다. secret가 아닙니다. secret는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고, mystery는 보여 주는데 봐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가 세미한 음성으로 들을 사람에게만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천국은 지금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초대를 하러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을 이야기 해 줍니다. 그 초청은 여호와의 세미한 소리를 듣는 자에게 임하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날 동안은 엘리야처럼 능력으로 성공도 하고, 이세벨에게 쫒기어 죽어라 광야 속으로 도망도 갑니다. 우리는 천국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여호와가 임하시면 구원의 문이 그날로 닫히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남겨진 자들을 찾아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15강. 베드로(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낫냐?) 요한복음 21:15-17
베드로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1기도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제자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고 말하여 줍니다. 그것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은 절대 예수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탄에게 믿음을 빼앗기지 않게 기도하신 예수님이,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것은 그대로 두시겠다는 것은 결국 베드로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해야 한다' 입니다. 그리고 돌이켜서 네 형제를 굳게 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이 기록들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은 그 복음을 기록한 저자들이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 사실성을 증병합니다.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인 부활 조차도 믿지 못하였던 제자들을 말하는 것을 읽으면서 그렇게 때문에 이 기록이 진실이고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 후 베드로를 찾아온 예수님, 기독교는 하나님이 백성을 은혜로 선택하시고, 직접 택한 백성에게 찾아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으시는데 첫 번째, 두 번째는 '아가페'라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세 번째 물음에서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씁니다. 세 번째 물음에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격이 한 단계 낮아진 표현을 쓴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실패 속에서 비록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지라도, 결과가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이전 실패에서는 믿음과 예수님이 명령한 것을 버리고 갈리리 어부로 돌아갔지만, 지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에게 맡겨진 양을 먹이는 대사도 베드로로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는 자리로 예수님이 끌어 올리는 장면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할 수 없다는 고백, 그러므로 주님이 힘 주시는 것,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심정이 됩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일을 해야만 했던 세상 직업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자리에 선 것이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내 나약함을 속속들이 보게 하는 것은 다시는 내 능력이라고 우기는 실패를 겪게 하지 않으시게 하시는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내 부족함을 나는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밀고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신뢰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펀지가 물기를 빨아들이듯이 공부하는 자세를 잊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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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누가복음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이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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