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대로쓴書評...

기독교강요 / 존 칼빈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한스킴 2014. 8. 6. 20:47


기독교강요

작가
존 칼빈
출판
크리스챤다이제스트
평점
4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지식은 상호 관계가 있다.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이 많은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어느 것이 선행하여 다른 것을 낳는지를 식별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고의 방향을 즉시 돌이켜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고 있는'[1]하나님에 대해 명상하지 않는 한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나 자신에 대한 지식도 없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으로부터 나 자신을 검토하지 않는다면 명료한 나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압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위엄과 나 자신을 비교해 보지 않는다면, 나의 비천함을 자각하고 깊이 감동되는 일을 결코 알거나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를 안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안내자요 교사로 삼고 모든 좋은 것을 그에게 구하고 그것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그의 은혜로 여기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선천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주입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무지를 가장하여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모든 사람들 속에 주입하셨다. 또한 그 기억을 계속 새롭게 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새로움을 더해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지와 악의에 의해 소멸되거나 부패해진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본능적인 감각에 의해 내적으로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례하고 습관적인 죄로 인해 강퍅해진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사납게 내쫓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 하는 사람이 하는 착각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며 개인의 뜻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유령도 환상도 아니다. 헌데 일시적인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지어낸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천지창조와 그것의 지속적인 통치에 의해 빛이 난다. 하나님의 명백한 자기 계시는 우리의 모든 변명을 불가능하게 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2]이라고 격조 높게 부른 이유는 이 우주의 뛰어난 질서가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로 하여금 명상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를 선포하는 수많은 증거가 하늘과 땅에 무수히 있는데 이는 비단 천문, 의학, 과학 등이 세밀한 관찰을 하고자 하는 문제 일뿐만 아니라 제일 학식이 없고 무지한 사람들까지도 눈만 뜨면 보지 않을 수 없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 중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장 잘 입증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창조를 통해 나타내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려고 머리를 짜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을 명상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예배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있는데,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가 하나님의 계시를 가린다. 하나님의 영광을 밝혀주기 위해 그렇게 많은 등불이 우리를 위해 빛나고 있지만 미련한 인간에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말 못하는 피조물들 까지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진리를 들을 귀가 없는 척 하는 자, 눈 없는 피조물들이 그에게 보여주는 것도 그의 눈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 비이성적인 피조물들까지도 훈계를 하는데 마음이 약하다는 핑계를 대는 자들에게는 변명이 필요 없다.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안내자와 교사로서 성경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을 주신다. 그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모두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창조를 통한 계시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이다.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뿐 아니라 구속 주로까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은 반드시 증거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증거에 의해 확립되어야 한다.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3]에 의해 좌우 된다면 그것은 사악한 허위이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교회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자체에 보증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성령의 증거 이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성경의 신비성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한다. 성경의 신빙성은 모세의 예에서도 나타나는데 모세의 이적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 이적들이 하나님 사자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그리고 그 성취된 예언들은 인간의 모든 예상을 뒤엎는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경이롭게 보전하셨고, 선지자의 예언을 확증하셨다. 성경에 관한 교회의 변함없는 증언과 성경의 교리를 위해 담대하게 순교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신자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성령에 호소한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인식된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새롭고 들어보지 못한 계시들을 만들어 내거나 또는 우리를 이미 받은 복음의 교리로부터 멀리 떼어 놓기 위하여 새로운 종류의 교리를 지어 내는 따위가 아니고 도리어 복음서가 추천해 주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들의 정신에 깊이 새겨주는 데 있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미신을 바로 잡기 위해 모든 이교의 신들을 배격하고 참된 하나님만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그의 창조를 통해 알려진 것들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도들에게도 알려져 있으므로 우상숭배자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은 불 경건한 일이며 일반적으로 우상을 만드는 자는 누구나 참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떠한 회화적인 표현도, 형상화된 표현도 모두 그분의 존재와 모순된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직접적인 표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성물이라 하고 우상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이 언약괴를 없애는 것도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아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말하자면 영구적인 우상 제조 공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나님을 떠올릴 어떤 형상을 사용하든 곧바로 우상숭배로 타락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나님은 우상과 엄연히 구별되시므로 그분에게만 완전히 존귀를 돌려야 한다.

 

성경은 창조 이후로 삼위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한 본질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추상적 사변으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알아낼 수가 없고 또한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육일 간의 창조역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낸다. 우주와 만물 창조에 있어서도 성경은 명백한 특징들에 의해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시킨다.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에 대하여도 추상적인 사변에 빠지지 말고 성경의 증거를 조사해야 한다. 천사들은 단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재이다. 천사는 신자들의 보호자이며 돕는 자로서 우리들을 위하여 사용하신다. 천사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화해할 수 없는 싸움의 전쟁터에 있다. 악의 왕국이 존재하고 성경은 그 원수에 대비하여 무장하기를 권고한다. 그 악의 왕국 마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타락하였다. 마귀는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이며 우리가 이긴 존재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으므로 우리는 승리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흠 없이 창조되었으므로 그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상을 자신의 능력에 의해 부양하시고 보존하시며, 세상을 자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리신다. '' '우연'이라는 말은 Basil의 이교적인 용어이므로 그 말의 의미에 정신이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일반세상이나 우리의 인생에서 운명이나,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 뿐 아니라 미래와 관련시켜 숙고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는 매개물을 통해 때로는 매개물 없이 때로는 매개물에 반하여 역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만사의 확정적인 원리가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전인류를 향해 관심을 나타내시지만 그가 보다 각별하게 지켜주시는 기회를 다스리시는데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후회'라는 표현에 대하여 오해 하는데, 성경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후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은 파기되지도 않고 그의 의지는 변경되지도 않는다. 인간이 보기에는 갑작스럽게 변경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영원부터 알고 인정하고 결정하신 것을 끊임없이 수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의 활동을 이용하시어 심판을 수행하시기도 하시고 그들의 뜻을 굽히게도 하신다. 그들의 계획이나 의도까지 주관하신다고 하는 것을 악을 창시하였다고 보면 어리석은 해석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한 성경 인물이 다윗이다. [4]아들에게 쫓기어 도망갈 때, 시므이가 저주를 하면서 따라온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의 머리를 베게 하여 달라고 할 때, 다윗이 만류하면서 답한다. '여호와가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의 말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채찍으로 알고 그 징계를 인내로 받겠다는 것이었다.



[1] 사도행전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2]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3] 교회가 해석하는 것그 권위를 성경 위에 두는 것이 카톨릭의 오류이다교황의 가르침이 성경의 권위 위에 있다그리고 그 가르침에는 오류가 없고 변개할 수 없다는 것이 '교황의 무류성'이다더 나아가 주교단과 교회의 가르침에도 무류성을 부여한다.

[4] 사무엘하15: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