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 라는 단어를 들어 보았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그 개념을 정리해봅니다.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권문상. 새물결플러스. 2008. 475p
한국이나 기독교 전반이 예수님의 양성론이 거의 단성론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인간 예수보다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부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이 아니라 영웅으로서의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셨음을 본다. 예를 들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10:30)",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실 정도로 연약한 인간으로 사셨음을 보게 된다. 더욱이 십자가의 고통은 단순히 본받기에는 우리의 행동을 넘어서는 '실제'의 아픔이었다. 고통 당하는 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버지께 십자가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절규하는 목소리(마26:39), 십자가에 달린 후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를 괴로워하셨던 서러운 외침(마27:46) 속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그 아픔을 실제로 겪었는지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나아가 성경적 양성의 실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게 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처절하게 낮아지셨는가를 깨닫게 된다.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고 버렸는가를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고상한 모습은 이처럼 실제로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한 자세일 것이다. 자기를 비우는 마음과 행동이 그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비운' 그의 삶, 이른바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독일 신학자들의 '케노시스' 개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온전히 같은 모습,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시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를 제한하신다는 것은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을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표명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은 딱딱하게 굳은, 죽은 듯한 실체가 아니라 전적으로 의지 자체이며 생명이고 행동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를 세우며 뜻을 펴는 것이고 철저하게 자신이 주인임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자체에 있어 농축된 능력이요, 그 자체가 하나의 능력인 것이다. 바로 그 잠재성 안에서 말이다. 로고스가 잠재성을 갖도록 스스로 물러났다면 이것은 바로 로고스가 자기를 제한시키는 행위로 인하여 자기 계시와 활동을 전개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장 깊은 곳의 한가운데로 한 걸음 물러났다는 것, 다시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지극히 절대적인 의지를 갖는 바로 그의 구체적인 존재의 근원으로 자리를 옮겨 스스로를 움츠러들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자 하나님은 피조된 인격체라는 존재 양식으로 만드시면서 스스로 바로 그러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셔서 스스로 영육을 가진 인간이라는 한 개인의 자아를 갖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본인 자신의 의식은 그것이 나타날 때 외형적으로는 어떤 독특한 모습의 인간적인 것, 인간 의식을 지니고 진정으로 영육을 지닌 유한한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 가운데 사신 그의 삶을 볼 때 이 중보자는 세상에서 필요한 절대적인 능력을 보여 주고 행사하는 방식인 신의 전능성을 사용하지도 아니하셨고 소유하지도 아니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실제로 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셨다. 그저 인간으로서 이 땅을 걸으시고 여기서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을 뿐이었다. 그분은 이러한 진리와 사랑이라는 윤리적인 속성 이외에 세상 통치권 같은 것을 행사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성자께서 인간이 되실 때 그가 인격의 통일성을 견지하며 자신에게로 취하신 인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갖는 지식과 그의 생활로 지극히 깊숙하게 들어왔다. 이렇게 인간이 된 이 존재는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로 들어가는 한 순간을 맞게 되고, 성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면서 인간으로서의 한 구성원이 되는 등, 이제는 삼위 하나님 사이에 상호 교제가 성부와 성령 안에 있는 인간 예수와 교제하는 형태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1]
정리
토마시우시의 케노시스 기독론이 기여한 점은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강점을 말한다면 그것은 그의 케노시스 기독론이 '하나님의 자기 수치 혹은 그의 희생을 잘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성자 하나님이 케노시스라는 형식을 빌어 인간으로 사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기로 의지를 굳히셨기 때문이다. 케노시스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반영인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틀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한 그의 기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국 신학작들의 '케노시스' 개념
그리스도는 인성, 하나님과의 인성과의 관계, 경험이 갖는 인성의 조건, 지식에 있어 인성에 따른 성장, 지식에 대한 인성이 갖는 한계 등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며, 보아야 하는 정도로 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계시하시는 신적인 진리와 사용하시는 인성 사이를 구별할 수 있다. 그분이 '태양이 떠올라서'라고 말씀하신다면 보통의 인간이 갖는 지식을 이용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이 자기 시대 과학의 한계를 지키기 위해 신성의 빛을 억제하기로 의도 하셨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적 지식을 지니도록 하셨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삶을 사셨던 그의 활동영역과 기간에서 그는 실제로 그리고 외관상 습관적으로 참으로 인간적인 경험과 양립하지 못하는 신적인 전지성을 포함한 그러한 신적인 기능과 능력의 행사를 멈추셨다.[2]
우선 생각할 것은, 성육신 하신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의 영원한 본질 가운데 성부, 하나님과 하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면서, 모든 신적인 능력, 특권,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되었다고 하여 영원한 신성을 지닌 그분의 참된 삶과 어떤 식으로든 충돌된다든지 아니면 그가 이 우주 내에서 신적인 활동을 펴 나가는데 방해 받는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3]
고어에게 케노시스 기독론은 형이상학적이기보다는 주로 윤리적인 의미를 지녔다. 성육신의 논리는 분석 가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케노시스는 성경의 표현이지 기독론을 구성하는 형이상학적인 여정의 대상은 아니었다. 토마시우스가 규정한 소위 상대적 속성들은 그리스도 인격에서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경을 그러한 그림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성이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존재하였던 것이다.
정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케노시스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인격론 전개에 있어 케노시스라는 개념을 채용하려 했던 루터주의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의 케노시스 개념은 신학적으로 볼 때는 루터주의 산물이라 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19세기 역사적 예수 탐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토마시우스와 고어 같은 몇몇 신학자들이 정통신학의 '양성론'에 동의하면서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적인 삶을 전개하였다. 반면, 가비, 포레스토, 포사이스와 같은 스코틀렌드 신학자들과 같은 몇몇 학자들은 양성론 교의에 무능한 면을 지적하면서, 니케아 신조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신학적인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은 가운데 자신들의 기독론을 발전시켰다.
대륙과 영국의 케노시스 기독론자들은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적인 삶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증거를 묘사하려 하였다.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적인 실제 삶 자체를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윤리적인 삶을 보여 주려 하였다. 복음서 이야기와 윤리적인 틀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성자의 신적, 윤리적 범주 안에서 인간적인 삶을 묘사함에 있어 형이상학적인 범위를 희생시키곤 하였다.
브루스의 케노시스 개념과 기독론
브루스에게 인간 예수의 윤리적인 삶은 신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당대의 학자들과는 달리 역사적인 신적 예수에 대해 회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슐라이어마허'와 '카임'이 만들어 낸 인본주의적인 견해를 거부한 후, "그러므로 우리는 신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하여야 한다"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정통 기독론이 교의적 훈련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역사적인 신적 예수님을 그가 발견해 냈던 것은 순전히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이었다. "모든 위대한 교리들은 그대로 존속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이 교리들이 갖는 윤리적인 기초와 그 의미를 발견한 자들에게만 그렇다."
브루스는 자신의 케노시스 개념과 기독론에 대한 분명한 원리를 확신하였다. 물론 케노시스 원리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동시에 신이면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수반해야 한다고 보았다. "케노시스 교리는 인격의 통일성과 양성의 구별됨, 특히 인성의 실재와 그것의 완전한 상태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가 지닌 인간적인 면은 분명히 여기서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다.
브루스는 자신의 기독론을 소시니안적인 그리스도에서 구별하려고 하였다. "케노시스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수준으로 자신을 스스로 낮추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소시니안적 그리스도는 최고 수준의 인간으로 높아진 인간이었다." 브루스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인 반면, 소시누스의 것은 단순한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가 실제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강조하였기 때문에 양자론자라고 비난 받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루스는 양자론자들을 비판함으로써 양자론주의자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이 결백함을 진심으로 보여 주려 하였다.
브루스는 구속론에 관한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만족설을 거부하였다. 이 개념은 금전관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에게 빚은 반드시 청산되거나 아니면 죄인들이 반드시 벌을 받아야 그분이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루스는 자신의 입장인 윤리적 의미를 담지한 만족설과 전통적인 구속론의 율법적인 이론과 구분하였다. 즉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은혜와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육신을 입으셨고, 죄인들을 위하여 신적인 진노의 표시로서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희생자로 죽으셨던 것이다. 브루스는 시릴이 제안한, 로고스가 자유롭게 강림하셨다는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시릴이 법의 영역에서 지적인 혹은 윤리적인 부분은 배제한 채 위격적인 범위로 제한시키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브루스는 시릴을 [4]가현설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어떤 의미에서, 브루스는 그리스도가 외형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지식에 있어서도 성장하셨다고 믿었던 안디옥 신학을 좋게 평가하는 듯하다.
브루스가 해석한 현대의 케노시스 기독론과 바울 서신에 대한 주해를 보면 우리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케노시스 기독론은 중조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케노시스 기독론을 우연적으로 발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치를 당하신 삶을 묘사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비록 브루스가 체계적으로 케노시스 기독론을 정립하지는 못하였지만, 영어권 세계에 수정 케노시스 기독론을 처음으로 제안하였다는 것과 이로 인해 영국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윤리적 범주를 지닌 케노시스 개념에 눈을 돌리게 한 것은 그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브루스는 그리스도가 겪은 수치의 과정 중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케노시스의 원리를 찾아냈다. 그는 하나님의 윤리적인 삶을 인식한다면 성육신에 있어서 케노시스의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브루스는 하나님의 윤리적인 성질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었고, 구원론적인 관심을 강하게 부여하였다. 우리는 브루스가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에 대한 믿을 만한 그림을 성공적으로 제안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또 다른 신학적 기여는 케노시스 원리가 갖는 윤리적 의미를 구현시켰다는 것이다. 맥킨토쉬가 전개한 보다 체계화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는 그리스도가 갖는 인격의 통일성을 학문적 차원에서 논의하지 못하였다. 그는 위격적 연합에 대해 오해하였다. 브루스가 오해한 위격적 연합은 아마도 역사적인 관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위격적 연합을 거부함으로써 성자 하나님의 역사적 성육신을 파괴하는 위험을 간과하였다. 그는 단지 신비적 연합을 믿었을 뿐 그것을 부여주지는 못하였다. 브르수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는 일관성을 상실하고 기능주의적 기독론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가 기능주의적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신학 작업은 전혀 사려 깊지 못하였다고 비난 받을 수 있다. 그는 기독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였다.
맥킨토쉬의 케노시스 기독론
맥킨토쉬는 지적이면서 윤리적 케노시스 기독론을 전개하였다. 그가 주장한 것은 우리가 기독론 연구를 위해 사랑을 지닌 하나님 개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윤리적 특성이 우리의 양심과 의지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성자께서 자신을 비워 이 땅에 내려오시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다. 비록 성자께서 자신을 비우셨어도 케노시스적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닐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예수, 그리고 구속의 경험, 그리고 거룩한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을 기본 전제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직관적인 믿음이 이러한 원리를 충족시키는 기초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맥킨토쉬의 기독론이 갖는 중심 원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역사적 예수 없는 기독교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그리스도는 직관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오직 우리의 경험만이 역사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희생을 당하신 예수님을 주목할 때 그리고 우리의 죄인 됨을 느낄 때 우리는 거기서 바로 역사적인 예수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맥킨토쉬는 경험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를 분석하는 중요한 지침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역사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1.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첫 번째 단계이다. 2. 또 다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지 않는 자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3. 교리적인 태도보다는 성경 그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였다.
성경이 신학적 판단의 기준이다. 역사적인 예수, 그리고 구속의 경험 등 진리에 이르게 하는 이러한 두 개의 통로는 성경 없이는 그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다. 복음서의 이야기에 기록된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경외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명료하게 예수님이 진정한 유대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를 열린 마음으로 읽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맥킨토쉬의 케노시스 기독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인하여 성육신과 구속 행위가 가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 이상이다. 즉 전능하신 거룩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며 동시에 사랑이신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성은 필연적으로 사랑 없는 상태에서 함께 나타날 수 없다.
맥킨토쉬는 그리스도의 신적이고 인간적인 삶이 두 개의 운동 안에 하나가 되어 있다고 믿었다. 성육신 하신 분은 점진적으로 자신의 타고난 신적인 특질을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성장, 곧 그분의 인간적인 성장과 더불어 그리고 그 안에서 현실화 시켰다. 한 인격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보다 역동적이고 상호작용의 형식 안에서" 발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성은 인성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리고 역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맥키토쉬는 양성 연합을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특질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였기에 '인격체' 개념을 지닌 것으로 정의하기를 원했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외양으로 신적인 면에서는 실제적이지만 시간 속에서 인간적으로 현실화'되었다고 보았다. 역사적 예수는 이 연합으로 인하여 신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다른 한편, 성자 하나님은 육신의 연약함 안에서만 사셨던 것이다. 인간적이고 신적인 그리스도가 가졌던 이러한 독특한 삶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인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구속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필연적이었고, 우리가 겪는 구속의 경험을 돌이켜볼 때 가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구속의 경험은 이러한 연합을 증거한다.
맥킨토쉬는 성자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행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가 붕괴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사랑으로 서로 연합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와의 상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랑 안에 이루어진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는 비록 성자 하나님이 실제의 한 인간이 되어 자신을 참으로 비우는 일이 일어났어도 자신의 존재론적 신성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정리
맥킨토쉬의 케노시스 기독론은 역사적인 성육신을 생생하게 나타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성육신의 사실성을 목도할 수 있게 한다. 성경적 증거에 적합한 역사적 성육신의 모습을 묘사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 땅에 사셨던 하나님의 수치스러운 삶을 생생히 보도록 도와 준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가 지니셨던 실제의 인성을 충분하게 묘사했다.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그 어떤 가현설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는 실제로 케노시스적으로 성육하신 삶을 나타내 보여 줌으로써 그리스도 인성의 실제성을 밝혔다. 그는 전능, 전지, 편재성 등이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부각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적인 삶을 온전하게 밝히는데 있어서 그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였다. 그의 케노시스 기독론은 구원론적 이해를 보다 깊이 다지게 한다.
그러나 그의 케노시스 기독론은 몇 가지 약점을 드러낸다. 1. 그는 주관주의적 오류의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 외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을 닫아 놓았다. 2. 그는 기독론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형이상학적인 구도를 버리고 윤리적인 형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해, 스스로의 주장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맥킨토쉬의 형이상학적 구조는 신적-인간적인 삶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인격을 생각나게 하는데는 거의 학문적 기여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개한 '케노시스적으로-성육신하신-그리스도' 형식 자체는 큰 틀에서 여전히 성경적 증거를 표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맥킨토쉬가 묘사한 성육신은 그리스도의 인경에 대한 정통신학적 가르침에 부합한다. 그는 자신의 케노시스 기독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정통신학적 그림을 재형식화 하였다.
맥킨토쉬의 케노시스 기독론은 고대의 교부들의 기독론보다 더 잘 묘사하고 설명함으로써 참 하나님에 대한 정통신학적 모습을 실현시켰다. 고대의 기독론은 인성의 참 모습을 묘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맥킨토시는 자신의 케노시스 기독론을 통해 '참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정통 신학을 강화시키는데 공헌하였다. 맥킨토쉬는 구원론적 관점에서만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신 성육신하신 그 분의 참 그림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요즘 케이블 TV에서 뜨는 드라마 중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퍽퍽한 월급쟁이, 비 정규직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만 들어도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만큼 저도 3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이 곧 자기 비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감히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인생처럼 산다면 직장생활 역시 모범적으로 해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생으로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 보면 영성은 뛰어나지만, 그 날카로운 교리의 포크로 성도들의 영혼을 콕콕 찌르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성도들의 삶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지식의 칼로 성도들의 나태함을 질책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지전능하신 영역에서 내려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낮아지셨습니다. 비우셨습니다. 자신을 비워 인간의 삶 속에서 구원을 이루셨는데, 교리의 날카로운 지성으로 성도의 영혼을 재단하고 질책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로 높아지는 행위입니다.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은 성도의 척박한 인생 속으로 내려가 그들의 삶을 내 삶처럼 같이 고민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자유함을 선포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격려를 받습니다.
[1] Thomasius, Ibid
[2] Gore
[3] Weston
[4]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물질적인 육체와 결합할 수 없는 존재이며, 오직 외관상 육체의 형태를 취하였을 뿐이라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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