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이라도 한글성경의 오류를 수정할 수 없다는 목사들이 있다. 참으로 무식한 언행이다. 한글 성경을 해석본이다. 해석자들이 오해한 오류가 반듯이 있다. 한글 성경은 히브리어, 헬라어를 번역한 번역본이다.오류를 수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목사는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I. 단어 연구의 오류
흔히 범하는 의미론적 오류
1. 어근 오류
어근 오류는, 모든 단어는 실제로 그 형태나 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 전제에 의하면 의미는 단어의 어근이나, 어근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단어의 어원에 대단히 익숙해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신약에서uvphrevth"는 '일꾼'의 뜻이며, diavkono"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로벗슨(A. T. Robertson)과 호프만(J. B. Hofmann)처럼 uvphrevth"의 뜻을 uvpo와 e;revth"로부터이끌어 낸다거나, pineapple을 pine(소나무)과 apple(사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만큼이나 본질적으로 사실적이지 않다. 의미가 전혀 다른 두 단어의 어원이 같다고 하여 어원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숨은 의미들을 찾는다면 우스운 작업이 되고 만다. 비록 a;povstolo"(사도)가 a;postevllw(내가 보낸다)와 어원이 같지만, 신약 성경의 명사 사용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사자'(messenger)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다. 이제 사자는 일반적으로 보냄을 받는다. 하지만 사자(messenger)라는 단어는 또한 자신을 보낸 사람을 대표한다는 개념과 그가 맡은 메시지를 떠올린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의 실제 용례는 a;povstolo"(사도)는 하나같이 '특별한 대표'나 '특별한 사자'라는 뜻이지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을 담고 있지 않다.
이 논의에 덧붙이고 싶은 세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첫째, 나는 어떤 단어가 무엇이든 의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게 우리는 어떤 개별 단어는 특정한 제한된 의미의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문맥은 특정한 한계 안에서만 어떤 단어의 의미를 형성하거나 한정 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전체 의미의 범위는 영구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히 많이 변한다. 그렇다고 단어들은 무한정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한 단어의 의미가 어원학 만으로는 확실하게 결정될 수 없으며, 일단 발견된 어근은 늘 그 어근을 담고 있는 어떤 단어에 의미론적인 부담을 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는 어떤 단어가 본래부터 담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의미는 관계들의 집합체이며, 언어적 상징은 바로 그 관계들을 위한 기호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귀납적으로 관찰된 사전적 범위를 제시하거나 특정 문맥 안에서 어떤 단어의 의미를 명백히 할 경우에는, "이 단어는 이런 저런 뜻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원학적인 수하물들을 너무 많이 싣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두 번째로,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구성요소들의 의미를 반영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e;k와 bavllw로 된 동사 e;kbavllw는 사실 '내가 던지다', '내가 몰아낸다', '내가 내쫓다'라는 뜻이다.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어원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헬라어나 독일어 같은 합성 언어에서 더 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언어들에서는, 영어처럼 단어들의 뜻이 명료하지 않는 언어에서보다도 비교적 그 뜻이 명백한 단어들을 더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어원이 의미와 관련이 있다고 의당 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지 귀납적으로 어떤 단어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그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세 번째로, 나는 어원학적인 연구가 쓸모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통시적 단어 연구(단어들이 장기간에 걸쳐 생겨난 경우에 하는 연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입증된 의미를 분별해 내려고 할 때나, 특별히 단 한 번만 기록에 남아 있는 어구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할 때, 이 어원 연구가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에는, 어원학이 그 의미를 분별하는 데는 썩 좋은 수단은 아니지만, 비교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실바(Moises Silva)는 이 문제에 관해 탁월하게 논의하는 중에, 어원은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의미를 결정할 때 더 큰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만 기록에 남아 있는 어구가 히브리어에 더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원학 사용은 그 언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료의 양과 반비례하여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지 어원학에만 기초한 단어의 분류는 결코 경험에 의존한 추측 이상이 될 수 없다.
2. 의미론적 시대착오(Semantic anachronism)
이 오류는 어떤 후대의 단어 용법으로 그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작품을 읽을 때 생긴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는, 가령 초기 헬라의 기독교 교부들이 헬라어로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명백하게 염두에 두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처럼, 같은 언어 안에서 발생하는 오류가 있다. 우리 시대에 사용하는 단어인 다이너마이트는 어원학적으로 duvnami"(dynamis, 힘 혹은 이적)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설교자들이 로마서 1:16절을 다음과 같이'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 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면 심각하다.
3. 의미의 퇴화(Semantic obsolescence)
이 오류는 의미론적 시대착오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해석자가 본문의 단어에 과거에 통용되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상용화된 의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의미, 즉 의미론적으로 폐용된 의미를 부여할 때 이 오류가 발생한다. 단어의 의미는 여러 차례 바뀐다. 우리는 대부분 축소형 어미의 효력은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ov pai'"와to; paidion을 나이와 크기로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린 또한 많은 완료시제 접두사들의 효력은 부분적으로 혹은 전부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단어의 의미를 세우면서 헬레니즘적 헬라어의 용례보다는 무엇보다도 고전 헬라어의 용례에 호소하는 주석을 보면 다소 의심해 보아야 한다.
4. 알려지지 않았거나 가능성이 없는 의미에 호소하는 오류
W. C. Kaiser는 고린도 전서 14:34-35에서 novmo"는 모세의 법이 아니라, 바울이 반대해 온 랍비의 규범, 즉 랍비적인 해석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왔다. novmo"가 구약에는 이런 말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랍비의 규범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바울이 남성형novmo"를 사용했다고 해서 바울이 단지 회중 남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여성들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를 구성하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킨다. 헬라어에서는 사람들을 언급할 때 자주 남성 복수형을 사용한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서 당면한 문제에 느슨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교회 전체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그 교회 구성원들이 모든 문제들을 오만한 태도로 대처하는 바람에, 다른 교회들의 관습을 깨뜨리고 심지어 바울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5. 참고 자료를 안일하게 의존하는 오류
D. A. 카슨은 그의 책 '산상수훈'에서, 마태의 산(5:1)과 누가의 평지(6:17) 언급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서, 산에도 평평한 장소가 있다느니 하는 식의 보수주의를 변증하는 표준적인 해석을 했다. 하지만 마태복음 5:1에 나오는 e;i" to; o[ro"는 아마 '예수께서 산에 올라' 가셨다거나 '산으로' 가셨다거나 혹은 '산 위로' 가셨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고지로'가셨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대개 '평지'로 번역하는 누가복음 6:17에 나오는 pedinov"는 일반적으로 산악 지대의 고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전혀 둘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D. A. 카슨이 이전에 책을 쓸 때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6. 언어적 병렬광(Verbal parallelomania)
사무엘 샌드멜은 의심의 여지가 많은 '대구법'을 예로 제시하는 많은 성경학자들의 경향을 지적하기 위해 병렬광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언어적 병렬광은 몇몇 문학작품에서 가능성 있는 배경들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를 끝내지 못한 체로 언어적 병행어들을 나열하여 놓고, 그것으로 마치 개념적 연관성이나 혹은 심지어 독립성을 증명해 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7. 언어와 정신구조를 결합시키는 오류
이 오류의 핵심은 어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과정을 심하게 규제하여 그들을 특정한 형태의 사고를 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다른 형태의 사고들은 하지 못하게 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지성은 뒤죽박죽 되었다. TDNT(Theologic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는 특별히 이 둘 사이, 결합의 주범이다. 성경 언어에 관한 자신의 책 뿐만 아니라 히브리적 사유와 헬라적 사유에서의 시간 개념을 비교한 조그마한 책에서 이 사전의 명성을 실추시키는데 기여한 장본인이 바로 바(James Barr)이다.
8. 전문적인 의미에 관한 잘못된 전제
이 오류에서, 해석자는 어떤 단어에는 늘 혹은 거의 늘 어떤 전문적인 의미가 있다고 잘못 전제하고 있다. 대개 이 의미는 일단의 증거나 혹은 해석자 개인의 조직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가장 쉬운 예가 '성화'이다 대부분의 보수주의 신학적 논의에서, 성화는 신자들의 점진적인 정결을 뜻한다. 순간적인 '지위상' 혹은 '법적인' 칭의를 받은 후에 신자는 이 과정을 통해서 점점 거룩해진다고 주장한다. 비록 성화라는 용어가 그런 뜻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자의 회심 때 하나님을 향해서 한 개인이 마음을 정하는 첫 시점을 가리킨다는 것이 바울 신학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자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이상하게도 '거룩하지 않은'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 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오류를 범하면 그 다음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전체 교리를 전문 용어라고 알고 있는 한 단어로 축소시키는 해석자들도 나올 것이다.
9. 동의어와 구성요소 분석과 관련한 문제들
동의성(synonymy)과 등가성(equivalence)이란 용어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다. 우리는 늘 그 둘 사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동의어들을 다루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동의어적으로'라고 할 때, 우리가 두 용어들을 사용하는 경우마다, 외연적으로 그리고 내포적으로, 두 용어의 의미론적인 구성 성분과 그것들이 담고 있는 정서적인 부담 면에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정확하게 뜻이 같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두 용어는 실제로 결코 엄격하게는 동의어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두 단어들은 특정한 문맥에서는 엄격하게는 동의어가 아니다. 즉, 각 경우는 각 단어의 진가(on its own merits)로 결정되어만 한다.
10. 선택적이고 선입관적인 증거를 사용하는 오류
해석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선택적인 증거에 호소하는 오류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토마스 H 그룸은 '성경적인 앎의 길'이라는 제목의 논의에서 몇 가지 석의적인 함정에 빠지고 있다. 히브리적인 앎의 방식은 지적이 아니고 경험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언어와 지성의 혼동에 빠지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선택적인 증거가 증명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그룸의 암시적인 전제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11. 부당한 의미론적 분리(disjunction)와 제한(restrictions)
많은 단어 연구들은 독자에게 선택의 대안들을 제시한 후에 결정을 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상보성(complementarily)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으면 그 연구들은 의미론적 분리를 요구한다. 로렌스 O. 리차드는 신약 성경에서 머리 됨은 권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순종을 명령하고 통제할 권리가 있는 분이거나, 아니면 머리로서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낮아지신 분 이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렇다. 영원한 아들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높이기 위해 낮아지신 것이며, 그리고 그는 권위가 있으시며 순종을 명할 권리도 갖고 계신다. 모든 권위는 그의 것이다(마28:18). 심지어 그와 우리의 교제도 그에 대한 우리의 순종에 입각한 것이다(요15:14). 그리고 이러한 권위에 관한 주제들은 직접적으로 예수의 머리 됨과 관련되어 있다. 리차드는 분리적인 오류를 범하였고 결과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12. 의미론적 영역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오류
단어의 의미론적 범위를 부당하게 제한함으로써 특정한 문맥에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오해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그 단어를 전문용어라고 잘못 선언하거나, 의미론적인 분리에 호소하거나, 혹은 참고 자료를 오용하는 것들이 거기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것들 각각의 범주들을 초월한다. 우리는 종종 한 단어의 전체 의미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특정 구절을 주해할 때 가능성 있는 선택 사항들을 적절하게 고려하지 않으며, 자기도 모르게 정확한 것이 포함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해 버린다. 부당하게 그리고 미숙하게 어떤 단어의 의미론적 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방법론적인 오류에 해당한다.
13. 확장된 의미론적 영역을 부당하게 채택하는 오류
특정한 맥락에서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 문맥 자체가 허용하는 범위보다도 훨씬 넓으며, 그 단어의 의미와 함께 그 단어의 전 의미론적 범주까지 가져올 수 있다고 전제하는 데 있다. 이러한 방법을 종종 오용된 전체성 전환(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이라고 부른다.
14. 헬라어 신약 성경의 셈어적 배경과 관련한 문제들
번역하는 언어들은 전적으로 다른 구조를 사용하고, 의역에 의존하고, 번역되는 언어들의 단어들과 의미론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단어를 주의하여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70인역에 대한 단어 연구 내내, 70인역을 번역하던 시대에 통용되던 헬라어 단어들의 의미론적 범위에 관해서 상당히 많이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히브리어의 원래 의도를 관찰하고 또한 헬레니즘 문학과 파피리(papyri)를 모두 연구해야 한다. 만약 어떤 학자가 구약 성경의 히브리 단어의 의미론적 범위에서 신약 성경의 헬라어 단어의 의미로 직접 옮겨간다면, 이러한 연구들을 회피하는 것이 된다.
15. 언어 자료의 독특성을 부당하게 무시하는 오류
이 경우와 관련된 오류는 한 신약 성경기자가 주로 사용하는 어떤 단어의 용례가 대략이라도 다른 모든 신약 성경기자들의 용례라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단히 많다.
16. 의미(sense)와 지시대상(reference)을 부당하게 연결하는 오류
지시대상이나 명시적 의미(혹은 외연적 의미)는 어떤 비언어적인 실재를 언어적인 상징을 통해서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고유명사는 명백히 지시적이지만, 모든 단어들이 지시적인 것은 아니다. 또 어떤 단어의 의미 혹은 뜻은 그 단어의 지시대상이 아니며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마음 속의 내용일 뿐이다. 의미는 있지만 지시 대상은 없는 단어들도 있다. 특히 아름다운(beautiful)같은 추상적인 형용사가 그렇다.
III. 논리적 오류.
논리적 오류들의 선택목록
1. 잘못된 이접명제: 중립성 배제의 법칙에 부당하게 호소하는 오류
잘못된 분리-상보성이 용인될 수 있는 경우인데도 그릇되이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잘못-는 아주 흔하며, 공정하고 공평한 주석을 무너뜨릴 정도로 대단히 강력하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6:6)'는 형식적으로는 분리적이다. 하지만 실제 이것은 한편으로는 무자비하게 다른 사람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신랄하게 조소하며, 악의를 키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주신 충격 장치다. 자비가 희생보다 중요하지만 선지자는 희생 제사 제도를 폐지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2. 구분을 인식하지 못한 오류
이 오류에 대한 좋은 예는 데이비드 C 스테인메츠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x와 y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면에서도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오류이며, 이것이 구분을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의 대표적인 것이다.
3. 선택적 증거에 호소하는 오류
데이비드 C 스테인메츠는 어떤 증거를 대단히 선택적으로 사용한 나머지 다른 증거는 불합리하게 배제하는 오류를 보여주는데 이것이 선택적 증거에 호소하는 오류이다. 고린도 전서14:33-36에 호소하여 여성들은 늘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이 이것의 예가 된다.
4. 부적절한 삼단논법 사용의 오류
이 오류는 논쟁 시 범하는 기본적인 실수이다. 다른 때 숙고하면 가치 없는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논쟁들을 옳다고 생각한 데 기인한다. 삼단논법 중 잘 알려진 우스갯소리 하나를 소개한다.
모든 개들은 동물이다.
고양이는 동물이다.
따라서 고양이는 개다.
제정신이라면 아무도 이런 삼단논법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를 열렬하게 변호하는 사람들도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논리적으로 연결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진리가 될 수 없다.
종교적 다원주의를 열렬하게 변호하게 되면 바울의 권면이 다음과 같이 변질되게 된다.
바울은 "모든 것이 너희 것이며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모든 것을 전부 포함한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그리스도께 속해야 한다.
5. 부정 추론(Negative Inference)
부적절한 삼단논법의 한 형태이다. 전제가 사실일 때 그 전제에 대한 부정 추론 역시 반드시 사실이 된다는 논리이다. 부정 추론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전제될 수는 없다. 그리고 부정 추론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다. 간단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모든 정통 유대인들은 모세를 믿는다.
찰리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다.
따라서 찰리는 모세를 믿지 않는다.
6. 세계관 혼동(World-View Confusion)
이것은 현실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과 해석이 성경 본문 해석의 적절한 틀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전제나 문제들과 관심사와 선입견 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실제적인 지식은 거의 알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선입견을 인식하지 못한 체 본문과 대화하고, 우리의 전제나 관심사들을 참작할 때, 자신의 세계관과 성경 기자의 세계관을 혼동하게 된다.
7. 전제를 증명하지 않고 질문하는 오류
'너는 네 애인을 때리는 것을 언제 그만 두었니?'라는 질문을 누군가 받았다면,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는 충격적이고 화나게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질문을 받는 사람은 자기 애인이 되는 모든 사람을 구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자기 애인을 단 한번도 때려 본 적이 없다면, 그가 언제 그만 두었냐는 질문과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질문자가 전제한 상황을, 질문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8. 진실(truth)과 정확성(precision)을 혼동하는 오류
종종 성경의 진실성은 명백한 부 정확성으로 인해서 가치 절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두 범주들을 혼동하거나 정확성을 가지고 진실을 한정하는 것도 일종의 오류다. 성서에서 '태양을 멈추었다'고 말한 것이 과학적인 오류라고 하여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과 혼동하는 오류이다.
9. 순전히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
물론 감정 그 자체는 본래 잘못된 것이 아니다. 아무런 감정적인 표현을 쓰지 않은 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감정적인 호소는 종종 이슈들이나 이성적 논증의 잠재적 결핍을 가릴 수 있다. 진실에 근거한 감정적인 호소는 진정성과 확신을 나타내 준다. 그렇다고 하여 진실을 대체하여 사용한 감정적인 호소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이 오류는 감정이 이성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감정에는 논리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10. 부당한 일반화와 지나친 상술(overspecification)의 오류
이 오류는, 단지 우리가 그 본문이 말하기를 원하는 것과 부합하기 때문에 특정한 사항이 일반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본문은 실제 그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부자 청년을 다루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대면한다고 주장한다면 부당한 일반화이다. 예수님 사역의 주목할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의 접근 방식의 유연성과 융통성이다.
신학자 중에 마태복음 24:24을 근거로, 그 구절에서 선택 받은 자들이 속지 않는다고 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미혹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한 해석이 된다. 이것도 역시 부당하게 일반화하여 상술 한 예이다.
11. 부당한 연상적 비약의 오류
이 오류는 어떤 단어나 구가 해당 본문과는 밀접한 관련이 전혀 없으면서도 그 본문을 해석하는 데 이용되는, 연상된 사상이나 개념 혹은 경험을 유발할 때 생긴다. 이 오류는 놀랍게도 설교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 하기 위해 증거본문으로 제시할 때 쉽게 범하게 된다. 빌립보서 4: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에서 '모든 것'을 인간이 상상하고 가지고 싶고 행하고 싶은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비약하는 오류이다. 그것도 은혜롭게 예수의 믿음으로 주는 능력이라고 해석한다. '모든 것'의 뜻은 10-12절을 살펴보면 가난이나 배고픔이나 풍부함이나 궁핍함 중에서도 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자신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으로 자족하며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12. 잘못 진술하는 오류
먼 옛날의 비교적 모호한 많은 주석가들에게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책들이나 논문들이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자료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면, 우리는 심하게 왜곡된 주해를 하게 될 것이다. 심각한 것은 신중한 학자들마저 종종 신빙성이 없는 2차 자료들을 의지하거나, 그런 자료들에 대한 자신의 빈약한 기억력 때문에 잘못을 범한다.
13. 근거 없이 결론을 내리는 오류(The non sequitur)
이것은 제시된 증거나 주장의 '결과로 나오지 않은' 결론을 가리킨다. 쉬운 예를 들면 그룸(Thomas H. Groome)은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4:8).를 너무 사실대로 이해한 나머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그 구절의 결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4. 거만한 폐기처분(Cavalier dismissal)의 오류
이 오류는 상대편은 그냥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은데도 마치 실제로 자신의 주장을 다룬 것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한스 콜첼만(Hans Conzelmann)은 고린도전서 11:4-6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 한 가지를 제시하고는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이 해석은 근거가 없다'고 거만하게 말하고 있다.
15. 모호한 주장에 호소하는 오류
가장 광범위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 가능한 가장 모호한 말을 열심히 찾아내는 식의 주장은 칭찬 받을 수 없다. 그런 진술들은 명백한 차이점들을 대부분 감추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 그런 진술들은 드러내기 보다는 더 많이 감춘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진정한 동의가 없는데도 외견상의 동의만 강요하기 때문에 부정직하거나 부끄러운 진술들에 가깝다.
16. 부적절한 유비 사용의 오류
이런 오류는 실제로는 명백하게 부적절하고 적합하지 않는데도, 어떤 특정한 유비가 성경 본문이나 성경의 주제를 조명해준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유비는 늘 그 유비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가치 있는 유비가 되기 위해서는, 설명의 시점에는 연속성의 요소가 우세해야 한다.
17. '명백하게'나 혹은 이와 비슷한 표현을 남용하는 오류
만약 제시된 주장이 명백하다거나 그 주장이 논리적으로 결정이라는데 대다수 독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압도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면, 그 주석가는 '명백하게', '이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다' 혹은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해 결정적인 반박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그런 표현 자체가 그 주장에 어떤 본질적인 것을 더해준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류다.
18. 권위에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호소하는 오류
이것은 저명한 학자들이나, 존경 받는 목사들, 그리고 귀한 저자들, 다수의 사람들, 혹은 다른 다양한 권위들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이 오류는 권위 호소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근거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만약 그 권위의 근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호소는 글쓴이가 그 관련 권위의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만 입증할 뿐이다. 그런 호소가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그 권위의 일반적인 명성을 지지의 근거로 채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합리적인 변호나 설명이라기 보다는 학문적인 인물 인용에 불과하다.
IV. 성경 해석의 전제적 오류와 역사적 오류
신해석학의 영향
1. 해석 과정에서 거리 두기를 하지 않아 생긴 오류들
가장 명백한 오류는 개인의 신학적 관점으로 본문을 읽는 것이다. 여러 세기 동안 로마 가톨릭이 '너는 베드로라'(마16:13-20)는 본문에 잘못 기초하여 교황 제도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그 본문에서 반석을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고백이나 믿음, 혹은 그의 주님과 동일시하려고 달려드는 개신교 해석자들이 과연 있었을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다른 문제에서 범한 오류로 생긴 우리의 전제들은 성경 본문에 의해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만약 그 문제가 단지 해석자 개인이 신학적으로 신봉하는 것에 불과한데, 심지어 그것이 책으로 출판했다 할지라도 개인적인 전통의 문제가 아닐 때는 더욱 문제가 된다.
2. 성경의 스토리 라인을 무시하는 해석들
많은 해석자들이 성경의 모든 기록 뒤에 전지하신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고의적으로 성경 일부를 성경의 다른 부분과는 대립되도록 마음대로 해석한다. 포스트모던의 편견은 이러한 경향을 두드러지게 했다. 그 결과 솔로몬의 아가서는 포르노 문학의 사례이고, 야고보와 바울은 결코 양립할 수 없으며, 사복음서들은 서로 다른 공동체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 사이에 조화시킬 수 없는 차이점들을 반영한다는 등의 주장이나 혹은 이와 비슷한 주장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3. 성경의 '기정 사실들' 외부에서 작업해야 한다는 처절한 고집 때문에 생긴 오류들
오늘날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현재 통용되는 사회적 의제를 가정된 '기정 사실'로 간주하고 본문을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실제로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오류
1. 역사적 재구성의 남발
이 오류는 신약성경 문헌들을 석의할 때는 1세기 유대와 기독교 역사에 대한 추론적 재구성에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2. 인과 관계의 오류
인과 관계의 오류들은 사건의 원인들을 잘못 설명한 오류들이다. 이런 오류는 '사건 B가 사건 A다음에 일어났다면, B는 A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그 예이다.
3. 동기의 오류
동기의 오류는 인과 관계의 오류의 부분집합으로 볼 수도 있다. 즉 '동기적 설명은, 결과는 이성적 행위이고 원인은 그 행위 이면에 있는 생각이라는, 특별한 종류의 인과적 설명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또는 그것은 비인과적 조건에서는, 양식화된 태도의 패러다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4. 개념적 병렬광
언어적 병렬광과 대응되는 개념적 상대이다. 헤밀튼은 에베소서 6장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를 '다른 한편에게는 억압이 되는 한편의 진리'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가장 큰 분열을 초래하는 인간의 갈등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구절로 사용하고 있다. 개념적 병렬광은 특정부분에서 잘 훈련을 받았으나 성경의 지식은 주일학생 수준에 불과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매력적이다.
V. 결론적인 숙고
더 많은 오류들을 범할 기회들
1. 문학 장르와 관련한 문제들
두 개의 문학 작품들을 비교할 때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공평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문학적인 장르 영역에서 설교자들은 잠언을 다룰 때 가장 흔히 실수를 범한다. 잠언은 약속도 아니고 사례법도 아니다. 하지만 만약 잠언을 약속이나 사례법으로 다룬다면, 어떤 일이 '약속'된 대로 성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잠언은 신자들을 대단히 낙심시킬 수도 있다.
2. 구약 성경의 신약 성경 사용과 관련한 문제들
이 문제들에는 두 성경 사이의 관계가 모형론일 경우 구약 성경 귄위의 성격, 난해 구절들을 전적으로 경건하게만 해석하려는 위험, 구약 성경이 그 문맥과 함께 인용되었는지에 관한 의문 등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많은 다양한 오류들을 야기시킨다.
3. 침묵을 통한 주장
학자들은 종종 침묵을 통한 주장이 약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만약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가 화자나 해설자의 언급을 보다 더 기대할 수 있는 경우라면, 침묵을 통한 주장은 더욱 강해진다.
4. 본문 병치와 관련한 문제들
어떤 근거에 의해서 해석자들은 어떤 구절들은 서로 연결시킬 수 있고, 또 다른 구절들은 연결할 수 없다고 한다. 개별 구절들을 해석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몇몇 구절들이 연결하는 방식들-그리고 또한 그런 연결이 그 다음 구절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치는 방식들-과 관련된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
5. 통계학적인 주장과 관련한 문제들
우리는 부분적으로 수(number) - 명백하게 편집적인 자료나 혹은 다른 곳에 나타나는 특정 단어나 구가 어떤 특정 문서에 나타나는 빈도 - 등에 의존하는 편집 비평적인 결정을 통해서 많은 석의적인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통계학적인 주장과 관련한 많은 방법론적인 오류들이 있다.
6. 구조주의 발흥
새로운 오류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이 학문이 성경 연구에 적용됨으로써 생겨나고 있다.
7. 상징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을 구분하는 문제들
문자적인 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오해하거나, 그 반대로 상징적인 것을 문자적인 것으로 오해하여 해석하는 오류들이다.
한꺼번에 야기되는 단편적인 오류들
실제적인 주석 작업에서, 몇몇 구절들은 그 자체로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오류들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율법이 죄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독자들은 자신의 석의 과제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깊은 염려에 사로잡힌 채 이 조그마한 책 읽기를 끝낼 위험이 있다. 이런 회의는 오히려 대단히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알고 고치는 데 좀더 열린 태도를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회의가 너무 심하면 우리는 깊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심적으로 눌리게 될 것이며, 방법만을 너무 많이 알게 만들어, 진리 그 자체는 간과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딜레마를 최소로 하는 방법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서 중심적인 진리에 집중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아주 엉뚱한 곳으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운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연구하라.
Book review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과목은 당연히 히브리어와 헬라어 과목이었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시작하였으나 원어와 점점 친해 진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되고 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헬라어 일지라도 일단 붙잡고 읽어보고 뜻을 유추해 본다는 것이다. 'D. A. 카슨'의 성경 해석의 오류의 첫 번째 단원이 단어 해석의 오류부터 시작하고 어근의 오류부터 시작한다. 이 부분이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근거 없는 자신감" ('근자감' 이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신조어) 때문이다. 헬라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이유 없이 넘겨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읽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변화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여 주는 카슨의 책은, 읽고 의미를 파악하기 쉽다
우선 'D. A. 카슨'의 책을 요약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저자가 글을 쓰는 패턴이 쉽게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신중하게 정독하면 어렵지 않게 소제목에서 말하는 바를 어디에 배치하는지 찾을 수 있다. 저자에 따라서 글을 쓰는 방법은 다르지만, '카슨'은 소제목의 결론을 먼저 말한다. 결론을 말하고 부연하여 사례를 들어서 그것을 풀어내는 글쓰기 패턴을 가지고 있다. 고맙게도 그것은 책이 끝날 때까지 거의 모든 소제목에서 그 같은 패턴을 유지하면서 글을 써주고 있었다.
오류에 대한 모든 것은 말하되, 작은 책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 저술의도.
제 1장의 첫 번째 오류에 대한 설명 '어근 오류'에 대하여 '카슨'은 정성스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카슨'에게 있어서 그만큼 어근오류가 가장 중요하고 더욱 깊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충분하고 다양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다른 오류들에 대하여서도 이처럼 상세하고 지루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살짝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류에 따라서 그것을 강조하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고 생각될 즈음, 어떤 것은 충분한 설명을 생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카슨이 책의 말미에서 언급하기를 '이 조그마한 책 읽기를'하고 언급한 것을 볼 때, 책의 저술 목적이 모든 오류에 대한 이야기를 하되 가급적이면 작은 분량의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저작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저자의 의도가 그렇다면, 글을 읽는 독자는 그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책을 읽던지 아니면 더 복잡하고 자세하게 기술한 책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만이 없다. 말하고자 하는 결론 부분을 첫머리에 넣어서 글을 읽는 독자가 충분한 정의를 숙지하고, 덧붙여 설명하는 부분을 따라가면서 세부사항을 파악하면 된다. 이 얼마나 고마운 저자의 배려인지 책을 읽는 독자는 고맙기만 하다.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번역
책을 읽다 보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처음에는 '카슨'이 책을 어렵게 쓴 것으로 오해를 하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가 기록한 몇 개의 오류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전혀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아주 쉽게 독자들에게 오류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하는 '카슨'의 노력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번역자가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을 시도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김경식 교수님이 학습게시판에 올려주신 번역의 오류를 살펴보면, 이건 해도 너무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차라리 원문으로 읽고 싶다.
분명한 것은 원어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원문을 통하여 오류를 짚어내는 시도를 한다. '카슨'은 원어에 대한 학습을 이야기 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 원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오류를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선책은 원어를 학습한 지식으로 좋은 주해서나 저자를 찾아낸다.
'카슨'의 책을 읽다 보면 오류의 대표적인 주석자나 신학자가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류를 범하는 학자 중에는 한 가지 이상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잘 파악하는 것이란 결국은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어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다행스럽게도 '카슨'의 책에서처럼 잘못 해석하는 학자들에 대한 정보를 잘 파악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책이 서고에 꽂히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카슨'의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많은 오류가 있나 하는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책 읽기가 끝나면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에 지배 당할 수도 있다. 주석상의 오류가 있는 책을 공부함으로 인해서 가지게 되는 편견으로 성경을 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다.
실제로 내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집사 한 명은, 성경에 대한 얇은 지식을 가지고 대단히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성경에는 육체와 영혼(이분설), 그리고 육체와 영과 혼(삼분설)으로 구별하는 본문이 같이 있다. 이중 이 집사님은 '삼분설'을 취하는 책을 읽고는 그것이 진리 라고 확신하고는 성경공부 시간에 담임목사님에게 도전한다. 언제나처럼 그 집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고는 '바울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영과 혼과 골수까지 라고 분명하게 삼분설을 이야기 하는데, 이 교제는 '이분설'을 이야기 하고 있으니 어떻게 이 책을 신뢰하며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사실 질문도 틀렸다) 분위기는 싸해지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관심 없는 다수의 성경공부 참가자들이 지루한 설명을 들어야 한다. 단 한 사람과 10여분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30분이 넘도록 납득할 생각이 없는 사람을 붙잡고 설명에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어설프게 아는 독자는 결국 독배를 마실 수 밖에 없다. 역시 원문을 공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핵심적인 진리를 벗어나서 엉뚱한 곳에서 고생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배우는 것이 잘못되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눈을 사로잡은 '선택적 증거에 호소하는 오류'
설교를 하면서 설교자를 유혹하는 것은, 어떤 한방이다. 그래서 선택적 증거를 가지고 불합리한 결과를 도출해 내려고 한다.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기발함을 발휘하는 목사라는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다. 본문에 충실 하려는 열망이 없다면, 자신이 보고프고, 하고 싶은 말을 합리화 하기 위해 본문을 선택하고 이를 진리인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오만을 저지를 수 있겠다.
논리적 오류는 설교자들이 자주 실수하는 오류를 지적한다.
어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원어에 대한 실력이 따라가지 못할지라도 국어에 대한 실력이라도 출중하면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는 실수를 반으로 줄일 수 있겠다. 설교자들이 흔히 범하는 논리적 비약이나, 잘못 진술하는 주석서를 진리인양 선포한다면 얼마나 끔직한 현실인가?
이렇게 수 많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D. A. 카슨'의 책만 읽고도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카슨'이 지적한 오류와 관련된 것을 피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책이 필요하다. 그것을 '카슨' 자신이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카슨'에게 신뢰가 간다. 그래서 마지막을'카슨'의 글 끝머리를 인용한다.
"나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손쉬운 대답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서 중심적인 진리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는다면, 아주 엉뚱한 곳으로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공평하게 연구하고, 두려운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의미를 결정함으로써 점점 석의 기술이 좋아지게 되고, 결국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딤후2:15) 일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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