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상편을 다시 한번 정리하였다. 시간이 없다면, 이 정도만 읽어도 충분하다.
기독교강요(상) 최종판
존칼빈/원광연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3. 295-655p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기독교강요 2권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 안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먼저 계시되고 그 다음에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구속주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즉 바른 지식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저주를 받게 되었고 그 원래 지위가 박탈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나에 대한 과신을 타파한다. 인간은 본래 자기 숭배로 빠져들기 쉽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본래 받은 것을 상실하였고 전인류의 파멸이 초래되었다. 인류의 타락을 말하여 주는 우리의 인간사는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원죄로서의 최초의 죄는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죄가 전달된다. 죄는 인간 본성 전체를 전복시킨다. 죄 된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그 본성의 타락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한'본성'의 '본질적' 타락, 그 죄악 된 상태는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1]
인간은 이제 선택의 자유를 박탈 당하고 비참한 노예로 전락 되었다. 철학자들은 이성의 힘을 신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명료하지는 않지만 자유의지를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교부들에 있어서 서로 다른 종류의 '의지'와 '자유', 조직적 은혜와 협동적 은혜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한다. 자유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게 되면 크나큰 위험이 따르므로, 이를 폐기하는 것이 교회에는 유익하다. 인간이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이 자유의지론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만심을 포기해야 한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의 초자연적 은사는 박탈당하였고, 자연적 은사는 부패되었으나 인간과 짐승을 구별시켜 주는 이성은 남아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다. 성령의 빛이 없다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죄는 무지와 구별되지만, 망상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변명할 수 없으나, 그것으로 인해 그가 바른 지식을 얻지는 못한다. 선악의 판단이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불명확하다.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알아야 한다. 선한 것과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유사하게 취급하는 자연적 본능은 자유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 의지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선을 추구할 수 없다.
인간의 부패한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 저주 받을 것 뿐이다. 인간 성품은 부패하여 그의 정신과 의지는 완전히 새로워져야 한다. 인간 전체는 육체다. 인간 부패의 증거인 로마서 3장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잃어버린 바 되었으므로 주님의 긍휼하심이 아니고서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때때로 그것이 깨끗하게 하지 못한 곳에서 제한된다. 정직함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나, 인간의 본성은 타락되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그것을 강요 받지는 않는다. 인간의 전환은 내적으로 부여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무엇보다 하나님 한 분만이 행하시는 구속사업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신자가 의지와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가 먼저 은혜를 통하여 작동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도는 특히 우리의 축복의 시작, 계속 및 끝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가 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사실성을 낳는다. 인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 개인 행위에 대한 상급도 아니요 보완도 아니다. 은혜를 떠나서 인간은 단 하나의 선행도 행할 수 없다. 어거스틴 역시 인간 의지의 독립적 행위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인간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인간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으나 성경은 사단을 사용하여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인간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으며 자발적으로 그 지배 아래로 들어간다. 하나님과 사단 및 인간이 동일한 사건에서 활동한다. 사단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외적인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지배한다. 그 자체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행위에 있어서 인간이 홀로 남겨진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배는 우리의 자유를 넘어선다. 자유의지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의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자유의지를 변호하기 위하여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들은 반박되어야 한다. 상식을 내세워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데 대한 답변으로, 첫 번째;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고 의지적인 죄는 피할 수 있다. 두 번째; 보상과 형벌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세 번째; 선과 악의 모든 구별은 철회되어야 한다. 네 번째; 모든 권고(권면)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권고는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인가? 불 경건한 자들이 완악한 마음으로 권고를 거부하면, 그들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 권고들이 그들을 대적하는 증언이 될 것이다. 율법 그 자체는 우리가 은혜를 지향하게 된다. 몇몇 계명들은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회심사역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에 따르면 성경적 언약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그들은 또한 만일 의지가 자유롭지 않다면 성경의 책망들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를 돕는다는 것은 의지의 자유를 가정하여 주장된다. 그러면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일이 아닌가? 그 사역은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되지만, 그 선물 주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것이 된다.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찾아야 한다.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볼 때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처럼 보인다. 중보자만이 타락한 인간을 돕는다. 심지어 옛 계약(율법)도 중보자를 떠나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구약의 신앙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율법을 준 목적은 구약 백성을 거기에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재림 때까지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는데 있다. 도덕법과 의식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는데 의의가 있다. 중보자는 타락한 인간만 도와준다. 율법은 약속을 포함한다. 우리는 도덕법을 성취할 수 없고, 도덕법은 우리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게 만들며 우리를 절망상태로 몰아 넣는다. 그러나 율법에 나타난 약속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율법의 가혹함은 우리에게서 자기 기만을 제거하는데 있다. 율법의 징벌기능은 그 가치가 감소되지 않는다. 율법의 징벌기능은 신자와 불신자에게 모두 행사된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율법은 책망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구하게 한다. 율법은 범죄자들과 불신자를 견제한다. 율법은 불의한 자들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굴레가 된다. 하지만, 율법은 주로 신자들을 권고하고 복락을 누리면 살라고 촉구한다. 심지어 신자들도 율법을 필요로 한다.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 판으로 나뉘어져 있었다[2]. 첫째 돌 판은 처음의 네 개의 계명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고 있는 의무를 보여준다. 둘째 돌 판은 남은 여섯 개의 계명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행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다.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만 두어야 하는 신뢰를 다른 신에게 두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단지 말과 몸짓으로 또한 모든 외적 표시에 의해 우리가 다른 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서 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열심으로 과연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
이것은 모든 예배와 경배를 한 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불가해하며, 육신이 없으며, 보이지 아니하며,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에 아무 장소에도 갇힐 수 없다. 그렇다면 마치 어떤 형상이나 우상의 모습이 하나님을 형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이 계명은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분이며 그러한 경배에 의해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육체적인 어떤 것을 감히 부과하려 해서는 안되며 그분을 우리 감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해서는 안됨을 가르친다. 마치 그가 우리의 아둔한 머리에 의해 이해 될 수 있거나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이란 그들의 공허한 정신이 상상해 낸 꼭 그대로 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속으로 상상한 그대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우상을 상상했고, 손은 그것의 형상이 출현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러한 형상을 입은 영원한 하나님, 하늘과 땅의 한 분, 참되신 주를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방인들은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육체적으로 보여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심을 믿지 않았다. 형상을 만드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그들이 나무와 돌과 간음했다고 주저 없이 고발한다.[3]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
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하는 것은 홀로 그분이며, 그는 어떤 경쟁자도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 어느 때라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자기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하신 자비와 친절을 나타내신다.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20:7).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고 두려워 해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지극히 거룩한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을 높여야 하며 순탄할 때나, 역경에 처할 때나 매사에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그분의 손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간구해야 하며 그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
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선지서에서 안식일이 더럽혀지고 모욕당하고 침해되어 지켜지지 않고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마치 이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4] 그러나 이 계명은 그림자였으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영적 예배를 보여주기 위해 의식기간 중에 부과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빛이시오, 형상의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것이 모세 율법의 잔영처럼 폐기된 것은 바울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다. 외적 제사는 폐기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영원토록 가지기를 원하셨던 계명의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 성령의 인도에 의해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안식일이며, 유대인의 안식일은 사실상 그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경에서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인 일곱째 날에 할당되었다. 그것에 의해서,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명하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 그 안식에는 아무 한계가 정해지지 않았다. 둘째, 그것이 완전하고도 적절하게 거룩해지는 일은 일곱째 날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안식 위에 안식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져 있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우리는 부모를 존경하고 명예롭게 해야 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일들에 있어 우리의 노력이 소용될 수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축복이 부가되어 있다.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선포하며 우리의 나태함을 일깨우며 동시에 자기 부모에게 보답하고 감사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배은망덕한 자식들은 확실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출20:13).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행위에 의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불공정하게 대해서는 안 되며 누구를 공격하거나 아무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친구든 원수든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으면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며, 최선을 다해서 친구에게건 원수에게건 관대해지려고 애를 써야 한다.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출20:14)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통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순결하고 자제심 있게 말하고 행해야 한다. 그리고 순결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까닭에 우리 각자는 그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5]. 부부간에도, 자기들에게 모든 것이 허용 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신중하고 점잖게 다루어야 하며 아내들도 남편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삼가 함으로써 결혼의 순결과 절제에 합당하지 않은 어떤 것도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 안에서 결혼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출20:15)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사기에 의해 도둑질하거나 완력에 의해 움켜잡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장사나 계약을 할 때 다른 사람의 무지를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물건 값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비싸게 팔거나 혹은 너무 싸게 구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간계에 의해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친구든 적이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움과 충고를 줌으로써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것을 취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만일 그들이 어떤 물질적 곤란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하며 우리의 물질을 가지고서 그들의 가난을 덜어 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어떤 사람에 대해 거짓된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판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되고 험담을 하거나 독설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 되며, 어떤 사람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악의를 가져서도 안 된다. 오히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이 있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게 말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공정한 판단자로서 허용된 한도 내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위를 가장 좋게 해석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6]. 또한 우리가 어떤 거짓말도 기뻐하지 않으며 그럴듯한 아첨을 하지 않으며 무익한 잡담을 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다.[7]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
주님은 다른 사람의 아내나 가족이나 소유나 어떤 좋은 것에 대한 모든 탐심을 금지하신다. 이런 식으로 그는 더 많은 것을 금지하신다. 우리는 어떤 술책이나 사기나 잔꾀를 부림으로써 비록 그것이 그럴듯한 이름으로 은폐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하지 말라고 하신다. 아내가 남편과의 교제에서 떠나게 한다든지, 종들이 도망치게 한다든지, 혹은 어떤 소유물들이 그의 손에서 빠져 나가게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소유를 차지하기 위해 탐욕스런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그런 종류의 사기를 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것을 간직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들을 탐내는 것을 금하는 이 규칙은 또한 각 사람이 자기의 소명을 따라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며 자기 직분에 관계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도록 하는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소명의 은사로부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소유들을 탐내고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 알려졌지만 오직 복음 안에서만 충분하고 분명하게 게시되셨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기대되었고 명백하게 나타났다. 복음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전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관련된 오류에 대하여,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립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의 계약은 실제로 신약의 계약과 동일하다. 구약은 미래를 바라본다. 구약에서도 칭의는 오직 은혜로부터 그 효력을 얻는다. 구약 족장들이 내세의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였음을 보여주는 영생의 소망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족장들은 말씀과 동시에 영생을 소유하였다. 옛 계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와의 친교를 허락하셨고 따라서 영생도 주셨다. 옛 계약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죽음보다 강하였다. 고대인들이 누린 축복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족장들은 영생을 추구했다. 성도들의 죽음은 영생의 관문이었다. 경건한 자의 소망은 현재 환난을 넘어서 미래 삶으로 치솟는다.
구약은 5가지 측면에서 신약과 다르다: 현세적인 영적 축복에 관한 진술, 현실의 유익에 대한 강조,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이끈다. 미래의 현세의 약속들은 옛 계약에서 교회의 초기단계와 조화를 이루었으나 현세의 일들에 대한 희망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구약은 문자적 이지만 신약은 영적이다. 구약은 한민족에게 신약은 모든 민족들과 관계된다. 장벽은 그리스도에게서 무너졌다. 이방인 들을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직분을 다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었다. 중보자가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인 자만이 하나님과 우리자신 사이의 벌어진 틈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다. 중보자는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어야만 한다. 오직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자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구속하시려는 것이었다.
사도신경 분석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고백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신뢰를 두고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자신들과 무릇 지음을 받은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일은 그의 말씀, 그의 영원한 지혜로 그리고 그의 능력(성령)으로 이루어졌다(시33:6, 104:24, 행17:24, 히1:2-10). 그리고 그가 한 번 이루신 일을 지금도 유지하고, 보양하고, 활동케 하고, 보존하되 그의 선하심과 능력으로 하여, 만물이 즉시 허물어지고 무로 떨어지는 것을 피하게 하신다.
우리의 사는 날 동안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일들이 때로는 잘 안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역경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말이다(롬8:28).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의심치 말고, 자애로우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고, 또 마찬가지로 그가 주시는 구원을 기다리며 살아야겠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이 첫 부분에서 배우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란 것은 전적으로 확실하며 또 참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
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며, 지
옥에 내려 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
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께로부터 그의 친절과 자비로 인하여 보내지셨다는 것,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얽매여 있었던 마귀의 압제에서 우리를 풀어 주시러 내려왔다는 것, 우리가 꽁꽁 묶여 있던, 죄의 멍에로부터 풀어 주시러 오셨다는 것, 우리가 떠넘겨져 있던 영원한 형벌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러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 그가 아버지의 친절과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를 입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이를 그의 신성에 합하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분을 중보자로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강조하여 그를 '사람'이라 칭하였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바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하나님'이란 말을 쓰지 않은 것처럼 이 말도 빼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서 중보자를 찾아야 할지, 또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로 갈 수 있을지 어느 누구라도 곤란을 겪지 않도록 하려고 곧 이어서 '그는 사람이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적 아들이 우리의 몸으로 그의 몸을 삼으시고, 우리의 살로 그의 살을, 우리의 뼈로 그의 뼈를 삼으사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이 사실에 우리의 소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창2:23-24, 엡5:29-31).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고통을 받아 하나님 심판의 무서움과 격심함을 느낌으로 말미암아(사21:9) 하나님의 진노를 중재하고 우리의 이름으로 그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며(사53:4, 11), 그리하여 우리의 빚을 지불하고 형벌을 제거하시되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그 같이 하신 것이다. 그들은 복된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중에 특별한 위로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참 인간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죽을 몸이 아니며, 몸과 영을 받되 부패되지 않고 영화 된 상태임을 말한다.
이제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계신 것이 우리를 위해 큰 유익이다. 이는 그가 거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앞에 나아감을 얻게 하며, 그 길을 닦고, 우리를 그분께 드리며, 그로부터 우리를 위해 은혜를 간구하시며, 우리 죄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끊임없이 화해시키고 계시기 때문이다(히7:24, 9:11, 롬8:26-27, 요일2:1). 그러므로 그가 비록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우리의 시야로부터 그의 몸을 감추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신자와 함께 있어 도움과 힘이 되시고, 또 그 현존의 분명한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그는 약속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성령을 믿사오며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사실은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 외의 다른 길이 없듯이 성령 외에 다른 지도자나 인도자가 우리에게는 없다. 또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도 오지 않는다. 은혜는 그 자체가 성령의 능력이요 활동이다. 은혜를 통해 성부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신다. 은혜를 통해 그는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며 또 우리를 씻기시고, 그에게로 불러 가까이 가게 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신다(롬8:11-17, 엡2:18, 고전12:1-13). 성령의 이런 은사들은 우리의 어떤 의무나 공적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자유롭게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의 사역은 거저 주시는 것이므로 아무것도 우리의 공적으로 돌릴 수 없다. 이러한 일들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를 위한 믿음이어야 함이 마땅하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먼저 우리는 거룩한 공 교회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선택 받은 자의 전체 수, 천사들이나 사람들(엡1:9-10, 골1:16), 사람들 중에서는 죽은 자든지 아직 살아 있는 자들, 산 자들 중에서는 어느 땅에 살고 있든지, 또 어느 민족 속에 흩어져 있든지 간에 이들이 한 교회요 사회이며, 하나님의 한 백성인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이 모두의 지도자요 통치자이며, 한 몸의 머리이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기초가 있기 전에 택하심을 입어(엡1:4)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모이도록 하셨다.
이제 이 사회는 보편적이요, 다시 말해서 우주적인데 이는 둘이나 혹은 세 교회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모든 택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가 되고 연합되어져서(참고 엡1:22-23) 그들이 한 머리에 붙어있는 동안 한 몸으로 함께 자라며, 함께 결합되고 짜여져 가는 것이 한 몸의 지체들과 같다(롬12:5, 고전10:17, 12:12, 27). 이들은 한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또 하나님의 한 영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상속으로 부름을 받아 함께 살아가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요10:28), 진정으로 그 일원이 된 자들은 결국 소멸되거나(요10:28) 또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대한 성부 하나님의 선의의 생명과 구원, 간단히 말해서 하늘나라 그 자체를 찾게 되는 고로,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자인지, 누가 유기되고 소외된 자들인지 구별해 볼 수 있다. 우리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 또는 입술로는 고백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으로는 그 입술로 고백하는 하나님을 여전히 부인하는 자들(평생을 통해 사악한 사람들, 죄의 탐욕에 취해 있는 자들, 자기들의 악함을 전혀 개의치 않는 자들), 이런 유의 사람들은 그 스스로 보여주는 조짐들을 통해 그들이 교회의 일원이 아닌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죄 용서를 믿는다.' 교회 자체는 이 죄의 용서로 구성되고 또 이것이 기초가 되어 교회를 지탱한다(호2:18-23). 죄의 용서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요, 또 그분이 우리와 화해하게 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 죄의 용서만이 우리에게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며, 우리를 그 안에 머물게 보호해 준다(시46:4-5, 87:1-3, 딤전3:15). 신자들이 이 죄 용서를 받는 때는, 그들이 자기들 죄의 자각으로 억압되고 고통 받고 또 고민하고 있는 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며 두려워하고, 스스로에 대해 혐오하고, 무거운 짐 밑에서 탄식하고 허덕일 그때이다. 이 죄에 대한 혐오와 또 스스로의 혼란으로 인해 그들은 자기 육체와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회개를 몸의 감옥 속에 거하는 한 계속 추구해 나가는 사이, 그들은 거듭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런 회개를 얻게 된다. 이는 그들의 회개가 그렇게 대접을 받을 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인데, 그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자신들의 궁핍을 자각함으로써 모든 교만을 꺾고, 자신들을 온전히 내던져 그 무지함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때에 가서야 마침내 주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내미시는 자비의 달콤함을 맛보기 시작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를 맛볼 때에 그들은 편히 숨을 쉬고 위로를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와 또 복된 구원이 자기들을 위함인 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모든 인간 육체가 일시에 한꺼번에 썩음에서 썩지 않음으로, 죽을 몸에서 불멸로 일으켜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고전15:20-56, 살전4:13, 행23:6-9).이미 죽은 자들도, 벌레가 먹었든, 흙으로 변했든, 재가 되었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산화되었든지 간에 그들의 몸을 다시 받을 것이다(요5:28-32), 그러나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 육체의 부패성을 벗어 버리게 될 것이다. 모든 자들이 갑작스런 변화를 통해 불멸의 본질로 건너가게 되고, 경건한 자들은 생명의 영광으로, 유기된 자들은 죽음의 정죄로 이르게 된다(마25:31-46).
마지막으로, '우리는 영생을 믿는다'. 이는 주님께서 그 자신의 백성들 곧 몸과 영이 영화롭게 된 자들을 복락 가운데로 받아들이실 그때에 일어날 일이다. 이 일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모든 좋은 것들을 자기 속에 충만이 가지신 주님께 우리가 굳게 붙어 있을 때 생명과 빚과 의를 참되고 완전하게 성취시키는 일이다(고전15:28-53).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옳고도 적절한 말이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은총을 제거하지는 않으나 그것에 선행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적을 결합시킨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런 공로도 얻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 은혜로만 주시는 구원에 대하여 감격하면서도 우리의 생활은 때론 내 욕심과 내 욕망을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더 빨리 하는 것은 왜 일까? 내 마음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도 내 생활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죄가 왕 노릇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세상과 싸운다. 공부만 하는 지금은 그런 세상의 유혹에서 떨어져 있지만, 전임 사역의 현장에서 일하면서 다시 사회와 부딪히고, 죄와 싸우는 성도들의 상담을 받으면, 어떻게 위로하여 줄 수 있을까?
바라는 것은 내가 은혜가 없이 근본주의자처럼 정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그 아픔과 그 죄로 상처받은 성도에게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의 마음처럼 대하기를 바란다. 매일 그렇게 되기를 기도를 한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겠다고 하면 언제나 변함없는 내 기도 제목은 그것이었다. "만일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다면 이렇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볼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여 달라고 한다." 그렇다. 내가 하나님 같은 마음을 가질 수는 없다.그러나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1]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전7:29
[2] 출32:15, 34:1, 신10:1
[3] 렘2:27, 겔6:4, 사40:19-20, 합2:18-19, 신32:37
[4] 겔20:12-13, 22:8, 23:38, 렘17:21,22,27, 사56:2, 민15:32-35
[5] 마5:43-48, 엡5:3-4, 고전6:13-20, 마19:11-12, 고전7:1-40
[6] 마7:1-5, 롬13:8-10, 14:10
[7] 잠5:6, 마12:36-37, 엡4:25-28,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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