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고전총서 16(루터와 에라스무스, 자유의지와구원) |
루터와 에라스무스: 자유의지와 노예의지에 관하여
단어연구
1.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며,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상태인데, 비슷한 표현으로는 해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반대어는 규제, 속박, 구속 등이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에서 말한 정의를 정확하게 확정하기가 어렵듯이, 자유에 대한 개념도 분명하게 정리하고자 할 때,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의 전제를 살펴서 함께 분석해야 한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자유(自由, Fredom)"는 중요한 주제이다.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도 ”자유“는 중요한 내용인데, 자유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상황 속에서 다루어지는 용례들보다 그 본질적인 개념과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적으로 볼 때, 자유는 소극적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세속적인 개념과 성경이 강조하는 자유를 더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한다.
2. 자유의지
에라스무스의 신학적 주장과 그 내용을 분석하기 앞서서 먼저 자유의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사에 있었던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현재의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개념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는 자유로운 선택 혹은 능력이란 의미로, 인간이 자신을 영생에로 인도하는 구원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이것을 배격하는 능력이다. 즉, 신학상의 자유의지는 인간이 선택하여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저주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구원 받은 후 죄를 지을까 말까 하는 고민, 그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말하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의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인격적인 의지를 말한다. 일상적으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읽을까, 갈까, 말까, 하는 일상적인 결정의 자유의지라고 말한다면 그런 의미의 자유의지 일 뿐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떤 불의한 일을 행할까 말까 고민하고 의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본성에 따라 죄 짓는 생각뿐이 없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일상적인 의지적 자유의지이다. 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의지는 에덴동산의 아담에게만 있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관계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어거스틴 수도원의 한 수도사였고 당대의 가장 저명한 인문주의 학자였던 에라스무스가 남긴 문학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대중적인 작품은 <우신예찬>인데(151), 이 작품을 통하여 삶과 신앙 그리고 교회의 개혁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자기의 개혁사상과 상통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환영하였다. 이에 대하여 루터도 에라스무스를 존경하였다. 152년2월에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에라스무스(Erasmus)의 희랍어 신약성경을 텍스트로 사용하였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어려운 단어나 표현을 사용하기보다 어부, 농부, 가정주부, 시장터의 아이들과 어른들 등의 일상적인 관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집약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에는 루터가 성경을 기독교인의 교육 과정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지침서라고 여기는 그의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에라스무스는 교황정과 루터 사이에 중재인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루터가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본성적인 선한 성품을 강조하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을 보면서 초대교회에 있었던 어거스틴에 대항한 펠라기우스에 비유하였다. 이뿐 아니라 루터는 오이코람파디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루터가 에라스무스에 대하여 훌륭한 학자인 것은 인정하지만 신학자는 될 수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에라스무스는 마음이 무척 상하였는데, 루터는 이에 멈추지 않고 1524년에는 에라스무스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인문주의자로 에라스무스의 성경연구의 공헌을 칭찬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점을 언급하면서, 종교개혁자의 길과는 멀기 때문에 자신의 일이나 잘 감당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atio(자유 선택에 관한 강론)
1524년에 바젤에 있던 프로벤이 『자유의지론』을 썼다. 이에 에라스무스는 용기를 얻어, 자신을 무시하는 루터의 편지에 대한 반박으로 1524년 9월 1일에 『자유의지론』을 라틴어로 저술하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주장을 공격하면서, 인간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적 책임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루터가 주장하는 노예적 의지가 희랍 및 라틴교부들, 교회 외의 그리고 교황들의 견해와 다름을 강조한다. 그리고 루터가 인간의 의지가 전혀 무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서 증명할 수 없다고 논박하였다. 더 나아가 교회에서 루터의 주장처럼 설교한다면, 인간은 윤리적으로 약해지고 게을러지며, 더욱 악을 자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였다. 더 나아가 sola gratia(오직 은혜)와 sola fide(오직 믿음)에 근거한 루터의 신학인 노예의지론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교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 대안은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입장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의 자유의지가 강조될 때, 교회의 평화와 성도들이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에라스무스는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가졌다. 인간이 교육에 의해서 종국에는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인간은 윤리적으로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출발한다. 인간의 힘으로써, 즉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에 자신을 적용할 수 있거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들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도 자신이라고 정리한다. 이것은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사상 중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역할도 능동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 안에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할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영원한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선택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양자는 모두가 각자 해야 할 몫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평가
에라스무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르네상스적인 인문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의 양심과 자유의지의 성취는 세례를 통하여 매개되는 은혜와 협조적 인 관계에 있어야 하며, 다시 인간의 최선의 성취가 은혜를 초치하여 계속 선행을 이루어 나가야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이것은 후기 중세 스콜라주의의 구원론과 동일하며, 세미펠라기우스적인 주장과 같은 것이고 더 나아가 현재의 바울의 새관점이라는 자유신학적 입장과 거의 유사하다.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인간을 변호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약해진 것이지 전혀 그 능력이 소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신인협동설(神人協同說)을 주장하게 된다. 은총의 시작인 선행은총과 은총의 과정인 성화의 은총을 언급할 때에도, 그 시작부터 끝까지 인간의 자유의지의 노력과 활동이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무능력이라든지 죄인이기 때문에 그 핑계를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막고, 인간의 적극적인 행동과 결단을 요구하는 식으로 강조하였다.
루터의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on the Bondadge of the Wil)
루터의 『노예의지론』에는 많은 내용들이 집약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 동안에 다룬 루터의 신학들이 함께 표현되지만, 전체적으로는 인간의지가 죄로 인하여 속박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루터는 논리의 전개를 위하여 성경의 명확성, 인간의 본성, 숨겨진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신앙과 은혜의 중요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등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힘있게 펼치고 있다. 기독교 진리의 명확성과 자유의지에 관한 규명 그리고 그 예로서 에굽의 '바로'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정리한다. 루터가 이 글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써 사람들을 구속하였음을 믿는다면, 모든 인간들은 전적인 부패로 죄인인 것과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객관적인 복음의 사실로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9-10)란 말씀을 언급한다. 만약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헛되거나 아니면 사람의 가장 가치 없는 부분의 구속자로 만드는 것으로 곧 신성모독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루터가 에라스무스의 입장을 반박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먼저 노예의지론이 희랍 및 라틴교부들, 교회 외의 그리고 교황들의 견해와 다르다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이 틀린 것임을 밝힌다. 또한 교리의 불 명확성을 강조하며 교리를 제거하는 것은 기독교를 없애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평가한다. 더 나아가 교리적 주장에 흥미를 느끼는 마음이 곧 기독교인의 마음이며,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주장에서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있어서 핵심 된 것은 복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 복음은 성령을 통하여 일으키는 구원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교리적 확신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 역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로 평가하고, 그것은 곧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에 해당한 것이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이런 것을 몰라야 한다든가, 이런 사실이 불분명하다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능력(지성, 특히 양심과 의지)은 복음말씀을 통한 성령역사가 없이는 노예의지에 불과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자연인의 선과 그가 행한 행동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여도 이는 노예의지의 성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불 신앙자들이 취한 행동에 불과한 것임을 루터는 강하게 주장한다. 에라스무스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그 무엇으로, 자신을 향할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는 인간의지의 능력을 말한다. 즉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은총에 협조할 수도 있고, 은총에서 돌아설 수도 있는 능력을 그의 의지 안에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그 자신의 궁극적 구원이나 파멸에 스스로 책임적인 존재이다. 그는 자유의지에 대한 성경적 증명을 시도하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과 계명을 주셨고 인간이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 충성하면,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징벌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 자신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신학적 입장을 성경으로 비판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귀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그의 중요한 논점이다. 즉 인간이나 천사나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아래 살고 있고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존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유 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루터는 또한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여 해석하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구분하여 해석하는데, 계시된 하나님과 숨어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 에라스무스의 오류임을 루터는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상태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적인 의존 상태에 있었으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인간의 행동은 자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내적으로 감동받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사탄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의 논리와 의지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어떤 강압에 의해서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유로운 것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탄의 영에 의해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비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자유로운 분이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만 행동하심을 강조한다. 루터도 타락한 인간의 부분적인 자유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인간도 선한 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악을 행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한다는 것이 선한 사람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행동의 동기인데, 타락한 인간의 동기는 그 자체가 타락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든지 아니면 사탄에 의해서 움직이든지 둘 중 하나이지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순수한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고 루터는 설명한다.
루터의 신학적 분석은 에라스무스의 신학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영원한 삶을 획득할 자격을 얻으며, 하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인간의 성격이 초자연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뜻에 따를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를 소유하고 있고, 이 자유의 행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라는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 부자연스러운 멍에로부터의 먼저 해방됨을 의미했다. 더 나아가 인간의 하나님과의 협력을 에라스무스가 구원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본 것과는 달리 루터는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일 뿐이며, 이것을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루터가 자유의지를 비판함에 있어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행을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한다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고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값싼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불경스런 행위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루터는 성도가 성경을 읽는 방법과 기준을 『노예의지론』에서 보여주는데, 성경의 명확성은 외적인 것으로서 말씀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으며 동시에 마음의 지식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내적인 명확성이란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경에 있는 것을 조금도 보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들이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논하거나 인용할 때조차도 그것을 이해하거나 실제로 알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믿지 않고 그 밖의 다른 것들도 믿지 않는다면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편14:1). 모든 성경과 성경의 각 부분을 이해하는데 성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루터는 강조한다. 동시에 '외적인' 명확성에 관하여서는 성경의 그 어떠한 것도 모호하거나 애매한 것은 없으며,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가장 극명하게 빛 가운데로 가져와져 있으며 온 세상에 선포되어 있다는 것이 루터의 입장임을 밝히고 있다.
정리
요한복음의 말씀 중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누구든지 오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 외에는 길이 없다고 동시강조를 말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타락한 인간은 죄의 노예이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를 소유한 처지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크고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으며 더 나아가 성도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사실을 루터는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 되었으니깐 기뻐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신분의 변화가 되었으므로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되고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면 더 절망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죄에 대하여 절망을 느껴야 한다. 구원 받았어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분 뿐이 없다. 구원을 받았다 하여도, 인생을 살아갈 때에도 오직 예수만이 필요할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구원확신의 최고의 증표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찜찜하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확실하다.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으로 그 모습으로 살아야 편하다. 루터는 회심을 강조하고,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확신을 강조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화를 강조한다. 우리는 이미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회심에만 관심을 가진 다는 것은 아기의 때만 관심을 가지는 것과 같다. 칼빈이 회심의 기쁨을 가지고 있지만 강조하지 않은 것은 그는 아기의 때보다 성장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도 혼란스러운 "자유의지"에 대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말(자유의지)을 보존하는 데는 반드시 큰 위험성이 따르며 따라서 폐기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큰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쓰지 않기를 원하며, 나의 충고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도 이 말을 피하기 바란다” 깊이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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