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정신과 종교개혁 정신에 대하여 비교 설명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Renaissance)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宗敎改革)을 거치면서 유럽사회는 그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동아시아나 비잔틴 제국보다 낙후되었던 유럽 문명은 이 두 사건을 거치며 크게 발전하여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한 지류로 보기도 하고, 결과로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르네상스가 자연과학의 발달과 발명을 요구함과 동시에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추구하고, 종교개혁도 그 목적이 초자연적 은총에 의한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게 됨)로서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재발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란 무엇인가?
르네상스란 프랑스어로 '재생' '부활'을 의미하며, 14~1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화의 재생과 부활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고전의 모방에 그친 것이 아닌 고전연구를 통해 인간성의 풍부함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 문화 운동으로 서양 근대 사회를 형성한 밑받침이 되었다. 르네상스의 근본정신은 휴머니즘(humanism, 인문주의, 인간주의)인데, 이것은 인간존중과 자아의 자각 등을 중요시 한다. 르네상스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피렌체로부터 시작해서 움브리아, 파도바, 베네치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16세기에는 알프스 이북의 독일,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확대되었다.
르네상스의 전성기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적 번영 속에서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과시 하기 위해 예술을 후원했는데 그들은 특히 조각, 회화 등 미술을 애호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 대성당을 건축했는데, 이전까지의 고딕 양식과 달리 로마의 돔과 아치 형식, 그리스의 열주식 등을 절충해 건축에서 르네상스 양식을 확립했다. 미술에서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가 유명하다. 보티첼리는 대표작「비너스의 탄생」에서 관능적인 여성미를 표현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에 대한 낭만적인 갈망과 인생에 대한 열광적인 기쁨을 제시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렸고 뛰어난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미술 이외에도 기계 공학과 비행기의 원리, 해부학 등의 분야에서도 커다란 재능을 발휘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 조각, 건축에서 이름이 높았는데 대표작은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인「천지 창조」와 벽화「최후의 심판」이다.
그의 작품의 중요한 주제는 강렬하고 설득력 있게 나타나는 인문주의이다. 그는 인간의 정념 고상함을 예술의 가장 적합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은 르네상스 양식을 넘어서 바로크 양식을 선구로도 간주 된다. 정치 철학 분야에서는 마키아벨리가 유명하다. 그는 보편성이나 윤리성과 같은 중세의 정치 철학의 개념에서 이탈하여 국가를 완전히 주권적이며 독립적인 단위의 근대적인 형태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제2 총독 겸 장관으로 봉직하기도 했는데 그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 후 해외에서 저작 활동으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저술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통치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정의, 자비, 조약은 통치자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권력욕이나 물욕 같은 구체적인 동기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의 배경
16세기 유럽사회는 르네상스의 결과로 새로운 발명과 발달이 이루어지고, 학문과 교육에 있어서 인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지방 통치권과 중앙 통치권 사이의 반목은 자유도시에서 성장한 시민세력을 배경으로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세기의 로마 교황청은 재정적인 곤란에 처해있었다. 절대주의(絶對主義) 밑에서 영적(靈的) 문제뿐만 아니라, 세속적(世俗的)인 문제까지도 좌우해왔었던 로마 교회는 외모적으로 웅장하고 거대한 교회당과 사치스럽게 장식한 교황과 승려들에게 참된 의미에 있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때야말로 종교의 암흑시대(暗黑時代)였으며, 일대 부흥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서 순수한 기독교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진정한 종교의 부흥을 꿈꾸며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의 원인
1. 면죄부(Indulgences)의 판매
면죄부란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훌륭한 성자들이 축적한 공덕을 분양 받음으로 신앙이 부족한 성도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하여주는 혜택을 주어 금생과 내생에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해 준다는 로마교회의 교리로써 이것은 본래 회개를 전제로 만든 제도였다. 어떤 죄에 대한 현세적인 형벌들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사후에 연옥(Purgatory)에서 처벌이 요구될 터이므로 로마교회의 면죄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5세기 이후에는 그것을 더욱 크게 장려하고 확장했는데, 당시 교회의 재정부족과 베드로 대성당의 막대한 공사비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남용된 면죄부는 부패와 타락의 면죄부로 전락되었고 16세기의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2.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왕조국가의 출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교황은 알렉산더6세(Alexander Ⅵ, 1492~1503)와 율리우스2세(Julius Ⅱ,
1503~1513)였다. 알렉산더 6세는 로마 교황청의 영토확장을 위해 그의 첩에게서 출생한 아들 케자르 보르기아(Cesare Borgia)를 내세워 로마 교황청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또 교황들은 교회를 위해 독신제도를 수호해야만 한다고 했으나 많은 아이들을 낳았으며, 사치와 감각적인 생활에 탐닉했다. 또 현실정치를 내세우며 그들은 마치 그들에게 속한 이탈리아 권력가들처럼 교회 국가를 통치하였다. 개혁초기를 담당했던 교황 레오 10세(LeoⅩ,1513~1521)역시 유력한 금융업자 메디치(Medici) 가(家)의 차남으로 전쟁을 잘 수행한 정치가였으나, 종교가로서의 신앙은 거의 없었으며 권익증강에만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계속되는 부패와 타락 속에서 로마교회는 큰 돈이 계속 필요한데 비하여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서 들어오는 수입금은 국가주의의 출현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심지어 고리대금업자들에게서 차용한 돈 때문에 이자까지 지출해야 했으니, 재정의 악순환과 부패는 날이 갈수록 계속되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의 이해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는 역사이해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다. 일반적인 역사이해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르네상스의 전통 즉 인문주의자들의 후예로 그들의 사상을 이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흐름 가운데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 비슷하거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도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회의 부패와 스콜라 신학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그 방법론에 있어서 고전에 대한 연구와 전문적인 숙련을 통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평가를 넘어서는 역사이해 혹은 교회사 이해가 요구된다. 중세가 암흑시대라는 일반 세속 사가들의 평가는 중세시대에 인간중심의 인간의 자유가 억압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인간이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찬란한 문화로 여기는 것이 평가 속에 전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인간이 가지는 본래적인 욕구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문예부흥이라고 하고 이에 대하여 윤리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을 제시하는 것을 암흑시대라고 표현한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르네상스와 근대를 지나 프랑스 혁명에서 그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종교개혁의 사상은 비록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평가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인문주의자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중세가 찬란한 기독교 문화의 시대처럼 보이지만 중세가 암흑기인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無知) 때문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sola scriptura). 교회의 부조리를 개혁하고 바른 삶을 제시하며 고전을 연구하는 면에서 인문주의자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본정신은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정신 비교 이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가장 극명한 대립은 에라스무스와 루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헬라어판은 교회와 사회에서 르네상스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특별히 종교개혁자인 루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는 이 헬라어판을 통하여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과 신학에 대하여 바르게 시정할 수 있었고, 정확한 기준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신학자의 유사성은 이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개혁에 대한 주장에 루터가 많은 동감을 표현하며 존경을 보이지만, 결국 중요한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인해 함께 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근원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르네상스 정신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르네상스는 철저한 인문주의자가 되자는 것이고 인간이 근원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역시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은 똑 같으나,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르네상스 정신이 로마시대로 돌아가자고 말하면서 정작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예였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즉, 노예가 동물처럼 죽어지는 것만은 외면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종교개혁에서 말하는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성경이 아니라 초대교회로, 광야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게 된다면 그것은 본질을 오해한 결과가 된다. 초대교회가 서로의 소유를 나누어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고리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가 오늘날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설교하였던 광야교회가 나온다. 40년간 광야에서 희생과 제물을 드리는 교회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초대교회, 광야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53:6)' 교회는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정리
종교개혁이 성공하게 되는 역할과 동력을 르네상스를 통해서 얻게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필요했다. 르네상스로 인해서 꽃피운 출판기술로 인하여 성경을 인쇄하여 모두가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다. 로마서 8절 28절 말씀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와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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