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제자 훈련의 끊어진 연결 고리
1. 리더가 앞장서면 교회는 따라간다
저자는 1987년 9월 뉴라이프 펠로우십교회를 시작한다. 다민족 근로자 계층 특히 퀸즈 지역의 이민자 구역을 염두에 둔 현대적 개념의 교회였다. 250만 명에 달하는 퀸즈 지역 거주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외국인들이다. 6년 만에 교회는 영어예배 400명 외에 스페인어 250명이 되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이 말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라는 말이나, 자기를 돌보는 일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한 열정 같은 것들을 저버리는 일로 잘못 이해했다. 그 결과 저자의 아내는 교회도 나가고 싶지 않게 되었고, 목사인 남편과도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는 상황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는 스페인어 예배를 책임진 부교역자가 성도 250명을 전부 데리고 도망가 버렸다. 그 상황에서도 저자는 거룩한 척 했다. "이 얼마나 은혜가 넘치는 일입니까? 교회가 두 개가 되었습니다. 더 많은 영혼이 구원될 것입니다." 그런 저자의 가식으로 인해, 그의 내면과 외면의 갈등이 공동체 전체에 어둡게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저자는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정서적으로 얼어붙은 냉혈 메시아가 아니셨다. 그도 눈물을 흘리셨고, 기뻐하셨고, 슬퍼하셨고, 연민을 느끼셨으며, 심지어 분노를 표출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자의 문제, 배반감, 가정파탄 등의 괴로움을 없애주지 않았다. 다만, 여러 형태로 경우에 따라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해 하였다고 한다. 목회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억지스러운 주장인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한가지 있다. 선한 영향력은 전염되지 않는다. 다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담임목사가 달라지면 가정이 변하고, 사역자들이 변하고, 장로와 리더 그리고 교인이 차례대로 변한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확산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선한 영향력은 전염되지 않는다. 다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부정한 것, 악한 것은 전염이 된다. 그리고 영향력도 미친다. 그것이 교회의 목회자에게서 흘러 나온다.
2.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서니 듀이 목사: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아, 아름다운 아내 제시는 젊은 목사와 불륜을 저지른다. 서니는 술에 취해 아내의 정부인 젊은 목사를 야구 방망이로 때려 죽인다. 목사 서니는 루이지애나 주로 도망쳐서 새로운 이름을 얻어 교회를 개척한다. 헌신적으로 교회사역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성미도 급하고 바람기가 많았다. 경건한 목사로서 자신을 과장하였지만 결국 거짓 인생을 살다가 살인죄가 발각되어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이끌고 열정적인 찬송가를 부른다. 거듭남을 가르치지만, 여전히 그는 내면에 여러 명의 서니가 존재한다.
밥 피어스: 월드비전이라는 단체 설립자 이야기 이다. 그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지만,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 자식들은 우울증에 자살을 기도하는 상황까지 간다. 딸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제발 돌아와줘요' 딸의 간청에도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해외사역에 전념한다. 그에게는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오직 그의 열심만 생각하였다.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의 말년은 결국 월드비전에서도 버림을 받고, 가족에게서도 버림을 받아 1978년 죽는다.
로저: 목사 로저는 교회성장을 목표로 헌신한다. 그렇게 5년을 봉사하면서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정작 자신과 가정은 절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것이 높은 수준의 제자훈련이 부족해서 일까? 절대 아니다. 이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다.(골3:5)
제2부 새로운 제자 훈련 패러다임의 성경적 기초
3. 정서적 건강, 제자 훈련의 새 지평
영성 훈련을 위하여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 반나절씩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일년 내내 계속할 수 있지만,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다가 그것을 영적인 분별력이라고 정당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몸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인간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은 악하거나, 최소한 영적인 것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까지 스며든 것이다. 이것은 성경 말씀보다는 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에 훨씬 가까운 생각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생각해 보자, 하루 종일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지내는 게, 집안을 치우고 빨래를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비해 더 영적인 것처럼 여기는 함정에 빠져있지 않는가? 칼케돈 회의(AD 451년)에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이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성경 해석이며 나 역시 거기에 이견이 없다. 칼케돈 회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확인했다(요1:14). 아울러 그리스도의 두 가지 속성은 어떠한 불일치나 혼란도 없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규정지었다.
4. 영적. 정서적 성숙을 진단하는 체크 리스트
정서적인 건강이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혼자 남겨졌을 때나 반대로 다른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딪치게 되는 실제적인 체험이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정서적인 성숙을 진단하는 체크리스트를 제공하고 있다. 자신이 제자로서 어디쯤 와 있는지 영적.정서적 성숙을 진단하는 체크 리스트라고 한다. 여기에는 정서적인 성숙의 수준을 4가지로 구분하여 그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진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정서적인 젖먹이: 보살핌을 받고 싶어한다. 건강한 방식으로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정서적인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끊임없이 코앞의 만족을 좇아 움직이며, 종종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상처)을 주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주위로부터 사려 깊지 못하고 둔감하며 자기 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서적인 아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며 원하는 것이나 필요한 것은 뭐든지 받아들인다. 대체로 만족스러워하고 정서적으로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망, 스트레스, 분노가 일어나거나 끔찍한 일에 부닥치면 금방 내면이 엉클어진다. 의견 차이를 개인적인 공격으로 해석하고 쉽게 상처받는다.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으면 불평하거나 불끈 화를 낸다. 위축되거나 교묘히 감춘다든지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기도 한다. 빈정대거나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사랑이 넘치는 성숙한 방식으로 조용히 토론하기가 힘들다.
정서적인 청소년: 성숙한 어른들의 사회에 무리 없이 '편입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안다. 건설적인 비평을 받으면 마음속에서 위기감과 경계심을 느끼고 즉시 방어적이 된다. 누군가에게 베푼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기록해 두고 있으므로 나중에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갈등 상황에 부닥치면 자기 과오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의 잘못을 집요하게 부각시킨다. 자신보다는 상대편이 더 잘못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제 한 몸 살아가기도 힘에 부치다 보니 누군가가 고통이나 낙심, 필요 따위를 토로할 때 자기 상념에 빠지지 않고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기가 어렵다.
정서적인 어른: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든지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순수하게 존경하며 사랑할 수 있다. 배우자, 부모, 친구, 직장 상사, 목회자, 그 밖의 누가 됐든, 그들의 관계적인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상대가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또는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한 인간으로서 그를 사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목표,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진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닥친다 해도 피해 의식에 젖거나 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도 적대감 없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밝힌다. 한계, 능력, 약점 따위에 관해서 정확한 자기 평가를 내릴 수 있으며, 별다른 거부감 없이 다른 사람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느낌이나 필요, 관심을 다루기 위해 그들의 정서적인 세계에 개입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으며, 자신에게는 주님께 내놓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3부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6가지 원칙
5. 이면을 들여다보라(1원칙)
치유해야 할 아픔이 있음을 인정하기 전에는,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로 접어 들 수 없다. 고통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을 의식하고, 기꺼이 떠 맡으며, 자신의 소유로 삼아야 한다.[1]
분노는 잘못된 요소가 우리 외부에 있는지 아니면 우리 내부에 있는지 판별하여 일러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보통 그릇된 것이 당연히 우리 외부에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분노의 경로를 주의 깊게 추적해 보면, 우리 내부에 있는 잘못으로부터 분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그릇된 정보, 부적절한 이해, 성숙하지 못한 마음이 원일 때가 많다.[2]
선교사 네이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한다는 착각 속에서 살았던 선교사. 그의 설교는 '[3]예수님은 독약나무입니다'이었고, 그의 가족은 피폐했다. 그런데도 그의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평안이 있었을까? 자기 내면을 보지 않고, 가족의 내면을 살피지 않고서 목회자의 삶을 살겠다는 거짓말과 위선을 절대로 하지 말자. 네이선 선교사는 자신의 내면을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고통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사람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므로 내게 고통이 오면 자신의 내면을 깊고 철저하게 들여다 보아야 한다.
-자신의 느낌과 행동을 정확하게 인식하라.
-'왜?' 또는 '무슨 일이지?'라고 물으라.
-복음과 정서적인 건강을 연결시키라.
-'단장한 이미지'를 떨쳐 버리라.
창조주 앞에서 쏟아 놓던 욥의 울부짖음,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았던 예레미야의 고뇌(렘20:9), 광야에서 모세가 겪었던 갈등,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다윗의 번민. 성경의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온갖 감정이나 느낌, 현실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한결같이 정직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이 모질고 고통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이 살아 낸 삶의 이야기가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 과거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차단하라(2원칙)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관점으로 책을 저술하고 있다. 몹시 불편하여 읽기가 힘들다. 내가 지금까지 이 책이 뭔가 힘겹게 느껴지는 이유가 저자의 관점이 그처럼 성경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과거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 저자가 제안 하는 것이다.
-자신이 형성되는 데 가족이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살펴보라.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요소들을 찾아내라.
-교회라는 새로운 가정에서 다시 양육 받으라.
-교회 식구가 곧 자기 가족이 되도록 이끌라.
-양육을 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인식을 가져라.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다.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감사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거기에 보태어 개인사와 과거, 우리가 태어난 장소와 시간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으로 확대해서 해석하고 싶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모두 감사 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누가 해칠 수도 있고, 스스로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요셉이 형들의 배신으로 긴 세월 동안 얼룩진 삶을 살고 난 뒤에 배운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으니[4]"
7. 깨지고 상한 심령으로 살라(3원칙)
내 안에 있는 이가 이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시다(요일4:4)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저자는 다윗처럼 기도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삼하22:30). 나는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며, 한결같으며, 신실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하나님은 열심과 달란트, 풍부한 경험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싸우는 용사요 전사요 종이 될 작정이다. 이런 준비를 갖추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상함'과 '약함'이라는 길을 무시하고 지나갈 경우가 있다. 그 결과 무방비 상태에서 엄청난 폭풍을 맞고 만다. 그리하지 않기 위하여 책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를 추천한다.
-'약함'의 신학을 개발하라.
-'악조건'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이라.
-약함을 딛고 서서 교회를 변화시키라.
-돌아온 탕자를 본 받으라.
"[5]무슨 일이든 이룰 힘을 구했지만,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약함을 주셨습니다. 큰일을 도모할 건강을 구했지만, 더 나은 일을 하도록 허약함을 주셨습니다. 행복을 가져다 줄 재물을 구했지만, 지혜로워지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 만인의 칭송을 받을 권세를 구했지만, 하나님이 필요함을 절감할 수 있도록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삶을 즐길 수 있는 온갖 것들을 구했지만, 범사에 기뻐할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구한 바 가운데 얻은 것 없지만, 소망하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입술로 드린 기도는 응답 받지 못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기도까지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보다도 큰 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일 것이다. 바울은 신약 성경 가운데 거의 절반을 썼으며, 1세기 무렵의 기독교 세계를 크게 확장시켰다. 오늘날 까지도 그를 능가하는 기록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 바울조차도 최소한 한 번 이상 사도로서의 권위와 위치에 심각한 도전을 받았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약함과 깨어짐을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과 관련 있다.
만약 바울이 오늘날 목회자의 집회에서 사도 시대의 리더로서 어떤 사역을 했는지 이야기 할 기회를 얻는다면, 자신이 어떻게 소아시아 지역에 21개 교회를 세웠는지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서 리더를 양육하는 6단계 전략(이 저서의 내용)' 따위의 제목으로 개회 설교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우선 자신의 '가시'를 고쳐 달라는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지 않으셨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곤란을 겪고 있으며 깨지고 상한 상태인지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일지도 모른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주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쓰셨다면, 세상 누구라도 들어 쓰실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살아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능력이나 달란트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권능과 힘에 달린 것이지, 우리의 능력과 재주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자신의 연약함을 통감했던 바울은 좀처럼 선두에 서고 싶어하지 않았다. 주님께 거듭 "저는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곤 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서 '가시'가 없어진다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지 잘 알고 계셨다. 바울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만일 바울이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인물이 되었더라면,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는 통로는 두말할 것도 없어 졌을 것이다.
8. '한계'라는 선물을 받아들이라(4원칙)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는 다른 교회와 똑같이 되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동일한 만족감과 기쁨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이 이끄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시의 적절하게' 임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6].
-한계가 사라진 교회는 문제 있다: 무리한 소 그룹을 해체하고, 지친 일꾼을 돌보아라.
-예수님도 인간적인 한계를 받아들이셨다.
-스스로 한계를 분별하는 법을 배워라.
-교회 안에서 한계를 받아들이고 통합한다.
-우리의 한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주목한다.
세상 문화는 한계라는 개념을 거부하지만, 그것을 받아 들이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한계는 어린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마당에 쳐 둔 울타리와 같다. 자신에게,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역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주는 친구의 손길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잘 할 수 있는 일, 멋지게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있는 반면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일도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나는 훌륭한 CEO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최고 경영자라면 기민하고 저돌적인 자세로 험난한 상황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데, 나는 반성하고 계획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변호사나 공인회계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둘 다 예리한 판단력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주의력이 필요한 까닭이다. 나는 만능이 아니고 제한적이다. 나에게 주어진 한계를 받아 들여야 한다.
뉴라이프 펠로우십에서는 교인들이 저마다의 영적 은사를 교회에서 적극 활용하게 하는 한편, 은사와 상관없이 최소한 한 가지씩은 사역을 도우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특히 지칠 줄 모르고 일하던 이들이 거절 의사를 표시하면 크게 칭찬한다. 이런 조처들은, 자신이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우리에게 이것은 죄악된 자아(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하나님이 다른 이들을 통해서 필요를 채우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9. 슬픔과 상실감을 받아들이라(5원칙)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은, 주님을 더욱 닮아 가는 과정으로써 슬픔을 받아들인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마음 아파하는 경험이 제자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 주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슬픔과 상실감을 통해서 영혼의 폭을 성숙시키신다. 우리와 하나님의 싸움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결국 이기신다.
-자신의 슬픔에 관심을 기울여라.
-혼란스러운 중간 시간을 견뎌라.
-슬픔을 통해 속 사람이 새로 태어나게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독특하고 특별하게 지으셨다. 기질과 살아온 내력은 저마다 다르다. 다른 이들에게는 별것 아닌 상실이 누군가 에게는 치명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마,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인 원칙은, 인간은 모두 슬픔을 겪게 마련이고 아파하면서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슬픔을 받아들이는 국가적인 수용력이 바닥이 난 상태이다. 어떻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만사 뜻대로(통치자 마음대로) 풀어 나갈 수 있을지 전전긍긍한다. 우리 사회에 우울증이 만연되고 신경쇠약과 불안을 치료하는 약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0. 성 육신적인 삶의 본을 보이라(6원칙)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델을 의지적으로 따라간다. 상대방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며 두 세계 사이에 굳건히 서 있는다. 그렇게 예수님의 성육신 역사를 그대로 좇아가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제자가 된다'는 의미는 성육신의 심오한 신비를 생각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요 우주의 주관자가 역사와 인간의 몸이라는 한계 안에 자신을 거두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다(요1:14).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것을 '말씀이 피와 살이 되어 이웃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라고 옮겼다. 하나님은 세상 속으로 헤집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변화시키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주님은 충격적이고 구체적이며 원색적이고 물리적으로 확인 가능한 방식으로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신체적.정서적으로 인간의 세계에 뛰어들어 가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이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피부와 살을 취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머무는 동안,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성 육신적인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첫째, 상대방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것. 둘째,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것. 셋째, 두 세계 사이에 균형을 잡고 서는 것. 이 세가지는 서로 구별되는 역사지만 동시에 일어난다. 상대방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가 되는 여섯 가지 원칙. 자신과 교회에 적용을 권하고 있다.
-이면을 들여다 보라.
-과거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차단하라.
-깨지고 상한 심령으로 살라.
-'한계'라는 선물을 받아들여라.
-슬픔과 상실감을 받아 들이라.
-성 육신적인 삶의 본을 보이라.
제4부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11. 출발, 제자 훈련의 새로운 영역으로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려면, 정서적인 건강도 포함되어야 한다. 뉴라이프 펠로우십 교인들도 아직 이러한 프로그램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모험적이고 두려운 결정이라고 생각하여 전향적인 결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교회가 안전하고 은혜로운 상황과 환경을 조성하는 메시지만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먼저 자신을 움직이면 곧이어 다른 이들과 교감할 수 있으며, 결국 교회가 달라진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도록 자신을 맡기는 그 고단한 일을 감당해 나가다 보면 시스템 전체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멘토링: 정서적인 성숙을 향해 가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멘토링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 줄 수 있는 개인 또는 집단을 확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멘토가 되어 영적,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는 성숙하고 원만한 신앙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교회마다 가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인내: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되는 과정을 밟기 시작하려는 교회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멘토링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제자 열두 명을 데리고 하루 24시간씩 3년을 투자하셨으며, 그 가운데 11명만 모든 과정을 마쳤다. 게다가 그들이 배운 대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멘토링이란 순식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과정이 아니며,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기도: 기도의 능력과 성령님의 중요성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를 위해 그리고 제자로 훈련시키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 바울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자질을 가려 사람을 취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믿는 건 참으로 무모한 생각이다. 리더십과 교회가 정서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도록 기도하라. 그렇게 기도해 줄 사람들을 모으라.
12. 혁신적인 제자 훈련을 위한 토의 지침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토의를 위한 질문을 제공하고 있다.
제1과: 스카지로 목사의 이야기 : 사례연구(1장)
제2과: 제자 훈련의 새로운 패러다임. (2-4장)
제3과: 이면을 들여다 보라(원칙1. 5장)
제4과: 과거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차단하라(원칙2. 6장)
제5과: 깨지고 상한 심령으로 살라(원칙3. 7장)
제6과: '한계'라는 선물을 받아들이라(원칙4. 8장)
제7과: 슬픔과 상실감을 받아들이라(원칙5. 9장)
제8과: 성육신적인 삶의 본을 보이라(원칙6. 10-11장)
서 평
보통은 예화가 많은 책은 읽기가 편하고 좋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 아니고 타인을 통해서 접하는 간접 경험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적은 것이다. 그들의 위기가 나의 것으로 인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뭔가 불편하다. 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지만 알 수 없다. 혹시 그 상황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우리와는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는 곳의 것이기 때문인지 계속 생각하면서 글을 읽었다. 책은 넘치는 사례를 이야기 한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6가지의 원칙을 이야기 하면서도 정작 그 새로운 제자 훈련이 어떻게 진행 되어야 하는지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예화는 있지만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말하는 6장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사랑하는 자에게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가계에 저주가 흐르고 있다고 살피고 있다. 한동안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책이 서점가를 뒤 흔든 적이 있었다. 그 책이 얼마나 우리에게 좌절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축복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 그 책의 논리대로라면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은 저주아래 살아가야 하는 족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이것보다 더 은혜로운 축복이 있나? 없다. 결코 없다.
이 책이 정말 좋은 책인지는 판단하고 싶지 않다. 너무 많은 예화가 무질서하게 있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전달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많은 예화를 책에 삽입하였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하는 질문이 책에 집중할 수 없게 한다. 옥한흠 목사님과 그 후계자 오정현 목사가 추천한 책, 내가 그들의 영성이 못미쳐서 책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깨지고 상한 심령으로 살라는 제목의 7장을 읽으면서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보석을 발견한 것 같았다. 맞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사용하신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결코 단 한 사람도 없다. 욥을 제외하면 믿음의 조상들은 어떤 사람인가? 모세는 살인을 하고 광야로 도망을 친 겁 많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오라고 불렀을 때 그는 변명한다. 나는 입술이 굳어서 말을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이 훈련시켜서 사용하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방 신을 섬기고, 자신의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 그런 그가 믿음으로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였는지 성경은 말하여 주고 있다. 동시대의 의인 욥에 비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삭은 어떤가, 그도 아버지처럼 그의 아내를 팔아 먹는 실수를 범한다. 야곱의 인생도 매 순간이 사기꾼의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당시 고대의 왕 중의 왕인 애굽의 왕을 축복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들어서 교만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 이 부분은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나마 탁월한 점은 마지막 장을 질문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11장까지 읽은 내용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완벽한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곳 에서는 일독해 볼만하다.
책을 펼쳐서 읽기가 몹시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 했다는 것이다.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공감을 하고 있었고, 또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곤 하였는데 어느덧 내가 변해 있었다. 그것은 지금 현실, 이 대한민국이라는 정의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내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했던 것 같다. 왜 하나님은 저 부패한 교회와 정의를 외면한 재판관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의 재정을 탕진하는 관리들을 그대로 두시는 걸까 하는 분노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의 심판을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오른손을 드셔서 이 나라를 치십시오." 심판이 있는 부흥을 간구하였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의 정체를 알고 나서, 더욱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사실 이 책은 전에 읽기를 시도한 책 이었다.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책이다. 아마도 지금과 똑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은 목사와 리더십의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내 뺨을 후려친다. 물론 그렇다. 나는 절대로 그들의 열심을 따라갈 수 없다. 그들의 능력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들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결코 영광을 돌릴 수는 없다. 어쩌면, 내가 사역현장에 나가서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교인을 늘리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받을 백성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내 영광을 챙기기 위해서 열심을 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감히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흔히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오해 하는 부분이 있다. "[7]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붙잡고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전사로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열심'과 '달란트'와 풍부한 '경험'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교회를 위해서 싸우는 용사요 전사요 종이 될 것이다. 그렇게 영적 전쟁에 나서는 것이다. 그 결과 무방비 상태에서 엄청난 폭풍을 맞고, '하나님,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울먹인다. 우리가 성경의 앞뒤를 살펴서 그 문장을 취하였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비천에 처하고, 궁핍하고, 배고픔에 처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그것을 통과할 것이라는 의미로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물론 풍부에 처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너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그런 고난이 많다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한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7장의 내용이다.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깨지고, 상한 심령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바울에게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기 위해서 설교를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의 고백을 들어보면 자신을 괴수중의 괴수라고 고백을 한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 수록 자신의 연약함을 통감하고 그것을 고백하였다. 능력이나 달란트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우리는 주일학교 때 설교를 들어서 그들이 일당 천 쯤 되는 용사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그들이 한 일이라고 항아리를 깨트리고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지른 것 뿐이 없다. 한 없이 약한 존재들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300명만 사용한 것이다.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 중에 있다면 깨달아야 한다.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터가 만들어 졌다고 생각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내가 연약해야 하나님을 의지한다. 조금만 나에게 강함이 있다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한다는 것을 나도, 하나님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것이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런 나를 들어서 하나님이 변화를 시작하는 열쇠가 된다.
[1] 루이스 스머즈 Lewis Smeders
[2] 유진 피터슨 Eugene H. Peterson
[3] '영광스럽고 인자하시며 사랑이 많으신'이란 뜻의 원주민 언어가 억양에 다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한다. 미국식 강세가 들어가면 '독약나무'라는 의미로 바뀌어 버린다.
[4] 창세기 50:20
[5] 무명의 남부군 병사의 기도.
[6] 에베소서 4:11-14
[7] 빌립보서 4장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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