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
큰 잔치 비유: 누가 14:15-24
하나님 왕국의 도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기 위해 택한 비유이다.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 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i) 역사적 배경
큰 잔치 비유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주의 생활과 관습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2끼의 식사를 하였는데[1], 잔치는 관습상 저녁에 베풀어 졌다. 관습에 따르면, 손님을 청하는데 있어서는 두 차례의 초청이 이루어진다. 잔치가 있을 것을 미리 알리고, 두 번째는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알리는 것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상류층에서 행해지던 특별한 예의였다. 잔치가 시작되어도, 늦은 손님들은 아직 입장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이 있는데, 인사 순서가 마쳐지면 그 집 대문에 걸렸던 환영 깃발은 치워지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손님들은 입장할 수 없었다. 먼저 초대된 사람이 참석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한 일은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장만한 음식이 버려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가난한 자들에 대해 구제할 것을 강조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더라고 합당하다.
저녁식사, 잔치의 유대주의적 해석은 오는 세상에 대한 복음으로 해석을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잔치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비유가 종말론적, 즉 메시야의 잔치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해석되어지게끔 하셨던 것 같다. 누가복음의 문맥에서 볼 때 큰 잔치는 메시야의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왕국에서 떡을 먹을 자의 축복'과 관련된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왕국은 미래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미 도래 하였다. 잔치 상은 이미 차려졌고 지금 모든 것은 이미 준비 되었다. 초청도 이미 했다. 지금은 구원 받을만한 때다. 만일 이스라엘의 종교적 엘리트들이 지금 왕국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벌써 때를 놓친 것이다. 그들은 결코 잔치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이다.
ii) 복음서 기자의 해석
누가의 신학적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는 곧 가난한 자들과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에 있었다. 누가복음에서의 강조점이 버림받은 자들이 그 잔치에 참여한 것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마태복음에서의 강조점이 초대를 거절한 자들이 그 잔치에서 제외되는 것에 있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누가는 2번에 걸쳐서 종을 내보는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 종이 시내의 거리와 골목(이방인)에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와 소경들을 불러 모아 그 잔치에 초대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결국 예수님께서 그 비유 및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 중에 은근히 말씀하셨던 바를 밝히 드러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iii) 이 부류에 속하는 비유들
-결혼잔치와 금식의 비유(마가2:18-20)
결혼식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그 잔치 기간 동안에 결혼식에 참석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금식과 같은 어떤 종교적 의무들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그 당시의 관습을 언급한다. 금식하는 일이 현재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유는? 신랑이 지금 자리하고 있고, 결혼식은 시작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하셨다. 다른 곳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볼 때 이 비유 역시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해석 외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생베 조각의 비유 및 새 술과 낡은 부대의 비유(마가2:21-22)
이 비유는 새것과 옛 것에 대한 대조를 하고 있다. 어떤 새것이 왔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했다." 그러므로 낡은 것을 새것과 함께 두지 않는다. 새 시대에는 새 시대의 규율이 있다. 바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것은 곧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답변할 수 있다.
-겨자 씨 비유(마가4:30-32)와 누룩 비유(마태13:33)
동양적 사고로 잘 이해를 할 수 있는 비유이다. 서양의 진보와 성장의 관념이 아니라, 처음과 나중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유대인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곧 그 왕국의 시작은 작고 미미 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실로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임하였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 왕국이 도래했던 것에 어두웠으며, 심지어 유대 지도자들마저도 그들 자신의 종교성에 그만 눈이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결혼식이 시작되었고, 창녀들과 세리들과 가난한 자와 소경들과 같은 천한 사람들이 이미 그 왕국의 축복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눈을 가지긴 했지만 보지 못하였고, 귀가 있었지만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이 감추어졌던 것이다.
-날씨 표적의 비유(누가12:54-56)와 분쟁하는 집의 비유(마가3:22-27)
날씨의 변화를 잘 읽어내면서, 사단이 그들 면전에서 패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 그들은 귀신들이 내어 쫓기고, 귀신들린 자가 해방되는 것을 보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명히 보았다. 그럼에도 악한 것으로 보고 사단의 사역으로 단정한다면 정죄 당할 수 밖에 없다.
iv) 결론
하나님 왕국의 도래가 작고 무의미한 것 같으나 그 완성은 심히 큰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으로 도래하지 않았고, 땅을 진동시킬 만큼 굉장하게 임하지 않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그 표적은 분명한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비유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 왕국의 시작으로 생각하셨음이 분명한 것 같다.
제8장: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감추인 보화(마13:44)와 진주 비유(마13:45,46)
결단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이 두 비유에서 제시되고 있다.
i) 역사적 배경
고대에는 가장 안전한 '은행' 이란 가장 안전하게 숨길 수 있는 장소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소유물을 땅 속에 파묻어 두는 일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유주는 도적이나 침략자들로부터 자신의 소유물을 보호 할 수 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정황으로 하여, 그 어떤'사람'의 행위가 합법적인가, 도덕적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사건을 재 구성하는 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비유에 등장하는 그 사람이 보화를 발견했던 땅을 삼으로써 그와 같은 보화를 획득했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수님의 청중들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떠나서는 이 비유는 도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실제로 일어났던 그러한 사례들을 염두에 두시고서 그와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합법적이거나, 도덕적인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한 노력보다, 이 비유들의 세부적인 것에서 벗어나 중심요점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칭찬한 행위들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들에는 종종 어떤 것들은 아예 윤리적인 면과 거리가 먼 것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도 세부적 사항들에 매달리지 말고 그 비유의 중심요점을 찾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주 장사의 비유도 그 장사는 고가의 진주를 식별할 만큼의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좋은 진주를 사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진주를 샀다는 것이다. 즉, 천국은 자신의 소유를 전부 팔 만큼의 가치가 있고, 그런 결단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비유는 전통적으로 쌍둥이 비유로 보여지며, 동일한 요점을 가르치면서 상이점이 있다.
1. 첫째 비유는 '어떤 보화'에 대하여, 둘째 비유는 어떤 '진주 장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2. 첫째 비유는 예기치 않은 우연한 사건으로, 둘째 비유는 진주를 사러 다니는 중 발견한다.
3. 첫째 비유의 동사 시제는 현재형인 반면, 둘째 비유는 단순과거 형이다.
4. 밭/보화와 진주를 '샀다'는 것을 묘사하는 데 각기 다른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삶의 정황 가운데서 이 두 비유들의 중심요점은 무엇일까? 가장 가능성이 있는 제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국의 '가치', 둘째, 천국에 들어가는데 요구되는 '희생', 셋째,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 넷째, 천국의 '은폐성', 다섯째, 천국을 '추구'할 필요이다.
위의 두 비유가 쌍둥이 비유라면, 다섯 가지의 중심 요점 중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천국의 '가치'와 '희생'이다. 두 비유의 마지막 구절은 모두 가 사람이 모든 것을 팔아 그 보화들을 샀다고 강조되고 있다. 그 두 비유의 기본적인 강조점은 그 두 사람의 행위이다. 실로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위대한 보화(천국)를 소유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 할 결단이 있어야 한다.
ii) 복음서 기자의 해석
마태는 이상의 쌍둥이 비유를 군중들을 상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시대의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하여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이 비유들은 복음 전파적인 기능보다는 오히려 권면적인 기능을 하였다. 마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독자에게 천국을 발견할 것과 그것에 헌신할 것, 그리고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신앙고백을 굳게 지키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에게 있어서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진주 비유의 극치는, 우리가 '전적 헌신'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희생의 영역, 또는 자신의 소유를 전부 팔아서 교환해야 하는 것에 있다.
iii) 결단을 촉구하는 또 다른 비유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16:1-8)
천국의 도래에 비추어 과감한 결단을 요구하는 비유이다. 예수님은 도덕과는 관계 없는 명철함과 능숙함에 초점을 두셨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불의한 종이었기 때문에 그가 선함으로 구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청지기는 나중에 청지기 직분을 박탈 당할 때를 대비하여 채무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줌으로써 그들의 호의를 사고자 하였다. 그가 오갈 때 없을 때 채무자들에게 만이라도 영접받기 위함이다. 이렇듯 그가 빈틈 없다는 것은 바로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주는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청중들 역시 하나님을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빈틈없을 것을 권고하고 계신다.
-망대와 전쟁비유(눅14:28-32)
이 두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제자 됨의 조건을 말씀하신 문맥 가운데 배열되어 있다. 우리는 비용을 계산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왕국의 은혜로운 제의를 받아 들이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릴 것인지의 여부를 주의 깊게 숙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iv) 결론
추리는 천국이 사실상 도래 했다는 예수님의 선포와 그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오늘날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말한 여호수아서(24:15)에서 촉구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청중들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하셨다.
제9장. 비유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
은혜로운 아버지의 비유(눅15:11-32)
이 비유는, 하나의 비교 점만을 가진 비유임이 분명하다. 이 비유에서의 아버지와 탕자, 형이 행동하는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결정과 속마음이다. 즉, 세리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면서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극시켜 분노를 유발시키며 당황케 만드시는 하나님을 상징 또는 묘사하고 있다. 탕자를 세리, 창녀 등 죄인으로, 형을 바리세인들과 서기관으로 해석한 이 비유를 알레고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i) 역사적 배경
당시 중동의 문화권으로 이해를 할 때, 작은 아들은 자신의 몫을 챙겨 가지고 먼 땅으로 간 패륜아로 묘사된다. 당시에도 재산을 미리 상속해 주기는 하지만, 재산권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행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큰아들의 상속분은 아버지 재산의 2/3이다. 이 비유에서 탕자는 회개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탕자가 자신이 지은 죄의 이중성(하늘과 아버지)을 인식한 것과 인식한 순서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곧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자기 몸과 같이 그의 이웃(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이킨다. "일어나 내 아버지 께로 가겠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화해의 입맞춤을 하여주고, 제일 좋을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어 준다. 아버지가 탕자를 자신의 아들로서 받아 들이고 그에게 자식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맏 아들이 돌아왔다. 아들의 항변에서, 그는 마땅히 자신의 아버지께 드려야 할 사랑의 존경을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 보다는 아버지의 명령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었다. 예수님의 이런 묘사는 종교적 열성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형은 동생과의 형제 됨을 거절한 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실로 맏 아들은 의와 공의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비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마침내 그의 아버지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 이시라는 사실조차도 인정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눅 15:1, 2에 따르면, 이 비유는 예수님이 세리들 및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이유를 묻는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을 향하여 그 물음에의 답변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보는 것은 우리가 비유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비유는'은혜로우신 아버지'의 비유이고, 강조점은 아버지와 맏 아들이 대면하는 장면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탕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은혜로우신 분 이시라는 것을 말 하신다. 그것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앞에서 하나님께서 탕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과 예수님의 사역을 적대시하는 그들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변호하고자 하신 것이다.
ii) 복음서 기자의 해석
회개metanoia, 회개하다e;pistrefw 등의 용어가 마태복음에 7회, 마가복음에 4회 사용되고 있음에 반하여 누가복음에는 17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복음의 강조점중의 하나는 회개에의 요청 및 모든 이에 대한 구원의 제공이다. 누가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즉 잃어버린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은혜로운 아버지의 비유는확실히 이러한 주제와 잘 부합된다.
iii)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또 다른 비유들.
-은혜로운 고용주의 비유(마20:1-16)
예수님의 '삶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 및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제공하시는 것에 반대한 자들을 향해 주어진 것임이 거의 분명하다. 이 비유를 그렇게 해석할 때에만 이 비유에서 주인이 나중에 고용된 자들에게 관대함을 베푼 것에 대해 처음에 고용된 자들이 불만을 토로한 것과 실재 예수님이 사역할 당시의 상황, 즉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세리들 및 죄인들에게 그의 왕국을 제공하시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평을 토로한 것이 만족스럽게 일치한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본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너그러우신 분이시다.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은 우리가 간단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비판이 실제로 얼마나 불의하고 가증되며, 무정하고 무자비한지를 보여주고 자 하셨다. 우리는 선이 결핍되어 너무도 쉽게 처음에 고용된 일꾼과 같은 생각으로 빠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선하고 사랑이 있는 자들이라면, 한 시간 만 일한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주인의 너그러움을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은, 나중 된 자(세리들과 죄인들)가 하나님의 왕국의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과연 먼저 된 반면, 먼저 된 자(종교적 엘리트들-바리세인과 세리들)가 그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나중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iv) 결론
은혜로운 아버지 및 은혜로운 고용주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 가운데 묘사된 하나님의 성품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것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자비 가운데 큰 죄, 심지어 창기의 죄까지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이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심으로써 자비를 나타내 보이신다. 하나님은 자랑하고 거만한 자들은 멸시하시나, 겸손히 그의 자비를 찾는 불의한 자들과 간음한 자들 및 세리들은 의롭다 칭하신다.
인간의 사악한 죄의 깊숙한 곳까지도 그는 자비와 용서의 손길을 펼치신다. 그런즉 아무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가 누구이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있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지 않고, 그들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시다.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그들을 열심히 찾고 계신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시86:15)
[1] 헬라인들은 하루 세 끼를 먹었고, 로마인들은 하루에 네 끼를 먹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단 두 끼만 먹었는데, 첫 번째 식사는 대략 오전 10시쯤 먹었고, 두 번째 식사는 어두워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저녁 시간에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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