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0) 동백두레교회/찬양예배.
"불신앙(불신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요한복음 12:37-43 37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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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요한복음은 누가 기록하고 있죠? 네, 요한 입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당시 유대 땅에서 행하였던 예수님의 사역과 유대인들의 반응을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는, 구약시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님의 때에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비록 믿은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조차 사람들이 자기들을 미워하고, 쫓아 낼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믿음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당시 유대 땅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나, 어떻게 생각 하나가 더 중요했다.”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1) 7개의 표적이면 예수님을 아는데 충분하다.
요한은 예수님이 사역하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런데요, 사실 요한복음에는 그다지 많은 예수님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표적만 간추려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수 많은 표적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화면에다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대표적 표적 7개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1. 가나혼인잔치 :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2장)
2. 갈릴리 가나 :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셨다(4장)
3. 베데스다 연못: 오래된 병자를 고치셨다(5장)
4. 광야에서 : 오천 명을 먹이셨다(6장)
5. 예루살렘에서 :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셨다(9장)
6. 베다니에서 :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11장)
7. 무덤에서 : 부활하셨다(20장)
사도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나를 따돌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말했는데요. 그런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더 자세하게 예수님의 표적을 말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알려지면 바리새인들이 핍박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서 밝히지 못했지만, 오늘날의 우리, 2000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 성경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모든 표적과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사실 저는,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표적이 몇 개 기록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그것까지 생각해 보신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겁니다. 저 역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신약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표적이 7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치 입학한 모든 학생이 당연하게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해 주었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몇 개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는지, 사실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요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아야 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장이 시작할 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몇 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죠? 6일 동안입니다. 그리고 제 7일에 쉬셨습니다. 그러니깐 합하여서,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위해 투자하신 시간이 7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에서는 7을 완전 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럭키세븐’이라고 말하지요. 7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통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7일 동안 완벽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많은 표적 중에서 7개만 추려서 말해도 완벽하게 설명이 된다고 요한복음을 설계 한 겁니다. 그리고 각 표적마다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신학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신학적인 지식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 빼고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학적인 지식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소소한 즐거움 일수 있습니다. 믿음에 도움이 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처럼 저에게도 사실 성경에 몇 개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믿어지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도 기적이며,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니 자나요! 소식만 전해 들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아, 예수님이 이런 표적도 행하셨구나 알았을 뿐입니다.
그런데요. 그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직접 예수님의 표적을 보았고, 직접 본 사람들로부터 소식도 들었습니다. 7개가 아니라 수많은 표적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상황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2)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요한은 두 개의 이사야 예언을 예로 들면서 당시의 시대를 진단 합니다.
이사야53장 1절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하나님, 우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팔을 뻗어 행하려고 하시건만, 누가 그것을 알아보았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사야서 6장 10절의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이사야6장 10절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직접 들었습니다. 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불신앙의 태도를 보인 겁니다. 사도요한의 기록한대로, 유대인의 불신앙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유대인들의 귀가 막혀 듣지 못하게 하고, 눈이 감겨서 보지 못하게 한,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유대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 그런 뜻인가요?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에게 보였던 불신앙의 태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겁니다.
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이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살아온 역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하였던 역사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불신앙적인 태도가 계속 이어져 예수님의 시대까지 이어 왔습니다. 그 불신앙이 예수님이 사역할 당시에는 최고조에 이릅니다. 사도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이곳에서 성취가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분명합니다.
예수님 시대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인 자신의 영광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기뻐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용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죄 입니다. 그 죄의 결과가 불신앙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였어도 믿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기다린 메시아가 아닙니다.
예수가 수많은 표적을 행하였어도,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경계대상이고 방해물 일 뿐입니다. 누구의 방해물 입니까? 그 시대 권력의 핵심인 바리새인들의 방해물입니다. 그런데요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간절하게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생각,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바리새인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에게…. 그게 심판이야.”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왜 그것이 심판인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 끝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심판에는 둘로 나뉩니다. 천국과 지옥, 딱 두 가지만 있습니다. 구원이냐, 영원한 형벌이냐 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은 곧 영원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왔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하도록 적극적으로 섭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고,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둔하다 못해 완고하게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그대로 버려두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마음에 있는 데로 할 수 있도록 버려두는 것으로 심판하신 겁니다.
(3) 오늘날의 우리는 혹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혹시, 혹시 말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가 바리새인 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불신앙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무감각해지고, 불신앙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감겨지고 있지는 않나요?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점검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도 예수를 모르거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가족과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시고 계시나요? 제가 불신앙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화면에 적어 두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가족과 이웃, 죄송하지만 지금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가족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감각이 무뎌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면, 결국은 그들의 인생이 끝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지옥에서 겪게 되는 영원한 죽음의 고통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자신을 죽이도록 내어준 유대인과 로마병정들을 향하여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직도 믿지 못하는 가족과 이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다면. 우리 역시 유대인처럼 마음이 무뎌지고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가는 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지 않고 있는 가족과 이웃의 그 완악한 마음을 바꾸어달라고, 회개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 받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은혜의 감격, 구원받은 감격, 그 감각이 다 소진되고 무뎌진 상태, 영적으로 영양결핍의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불신앙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그가 세상에서 어떤 권력을 가졌을 지라도, 하늘나라에는 그들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회개하는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심판입니다.
(혹시 아직 은혜의 감격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내가 구원 받은 이 사실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가졌던 그 첫사랑을 회복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가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보다, 말씀보다 나 자신에게 더 관심에 많았습니다.
성령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계속 내 소원만 기도하고, 나에게 가해지는 불공평한 현실만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가족과 이웃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처음사랑 그 은혜를 회복하게 하십시오.
목사님이 나올 때까지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 톰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2부』 (서울: IVP 2011) pp56-61
2. 이필찬, 『나는선한목자라.요한복음』 (서울:엔크리스토 2011) pp305-25
3. 브르스밀른, 『BST주석, 요한복음』 (서울:한국기독학생출판 2009) pp243-8
4. 목회와신학편집, 『요한복음,어떻게설교할것인가』 (서울:두란노서원 2009) pp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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