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두레교회/대예배(요한복음43)
20190630
요한복음 19:23-42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1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4Kg)쯤 가지고 온지라 40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
제가 오늘 전해드리는 말씀의 본문이 너무 많지요. 이렇게 뭉텅이로 설교를 해도, 제가 은퇴할 때까지 구약은 커녕, 신약의 10/1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왕 사역자가 될걸 알았으면 일찍 할걸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깐 아무도 동의하지 않으시네요?) 저도 진심은 아닙니다. 우선 오늘의 본문을 초대한 성우의 목소리로 듣겠습니다.
(드라마바이블)
1.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 일하신다.
여러분 성경에 ‘그 제자’라는 표현이 보이시죠? 요한입니다. 아마 이 제자는 지금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수천 번 반복해서 생각했을 겁니다. 왜 나는 다른 제자들처럼 숨어 있지 못했을까? 그래서 이런 참상을 보아야 했는가 생각했습니다. 오늘 저는 그 제자가 왜 이 죽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 드릴 겁니다. 오늘의 요한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5년 전 제 아버지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하루 만에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이틀 후에 폐혈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고통스러운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설교 할 때 간혹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아버지는 일주일에 6일, 기분이 좋거나 나쁘시면 7일 술을 드셨습니다. 술 주정도 정말 심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아버지가 들어오는 시간이 두려웠고, 내가 고아였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실 때는 안수집사이셨습니다. 저 밑에 성경책 보이시죠? 아버지께서 사용하셨던 성경입니다. 아버지가 입원하였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그날 저녁 늦게 서울대 병원에 도착해서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평안하셨고, 별 문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저는 근무지인 천안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요 그날 제가 잠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은 건데, 오늘 여러분에게 밝힙니다. ‘아버지가 이대로 하늘나라에 가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날 새벽에 동생에게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로 이동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아버지께서 평안한 얼굴로 돌아가셨는데요. 그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참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제가 하늘나라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서 그런가 하는 죄책감으로 아버지를 보냈던 기억이 났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자식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에게 잘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더 한이 남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 어쩌면 제 아버지 같은 심정을 가지신 한 분을 성경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사랑 받는 제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쓰고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오늘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는 유일한 제자가 됩니다. 요한은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모습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인지 여러분께서 느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다 보십니다. 폐가 쪼그라들어서 숨쉬기도 벅차고, 고통스럽습니다. 한 쪽을 쳐다보니 그 아래서 로마병사들이 자신의 옷을 나눠가지고 있고, 심지어 속옷을 차지하기 위해 낄낄거리면서 제비 뽑기를 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 같은 상황이면 얼마나 공포스럽겠습니까?
그 모습을 예수님 옆에 있는 어머니와 고모도 보고 있습니다.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수님은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어가면서도 과부인 어머니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간으로서 가장 공포스럽고, 고통스럽고, 그리고 홀로 된 어머니를 더 이상 돌봐드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고대의 시대에는 성인 남자의 돌봄을 받지 않는 고아나 과부가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바다를 걸었고요.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도 만드셨자나요? 그러면 어머니를 위해서 돌덩이를 금덩이가 되게 하여 그것을 어머니께 드리면 되지 않나요? 왜 안 하셨을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냐? 관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다’ 하고 여러분께서는 배우셨죠?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홀로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 모두와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세월호 라던가, 헝가리 유람선 사건이라던가, 강원도 산불로 인해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원한이 없어지기 까지 십 년이 걸려도 기억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역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본 받아서 사신다면서요? (그러니 제발 꼴통 정치인,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세뇌하는 그런 못된 정치인의 생각을 몰아내 버리십시오. 그리고 제발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제발.) 오늘 예수님이 자기 동생이 아니라 제자에게 어머니를 모시기를 부탁하는 그 마음속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뜻이 다 포함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을 겁니다. 물질에 어려움이 없이 사시길 원하실 겁니다. 그러면, 지금 옆에 있는 분을 보십시오. 그분과 관계를 잘 맺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런 관계도 잘 하지 못하시면 물질이 나에게 흘러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아들과 딸이,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이 내게 흘러오는 물질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그 관계를 통해서 일합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값 주고 사셨다.
인간적인 모든 일을 마무리하시고, 예수님이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τετελεσται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영혼이 떠났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 라고 읽습니다. 헬라어는 원형이라는 그 말의 원 뜻이 있고, 파생된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의 원형이 무엇이고 파생된 단어가 무엇이다, 하고 파고들면 복잡합니다. 우리는 언어 전문가가 아니니깐.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다 이루었다’가 무엇을 뜻 하는지만 알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학자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이 단어의 뜻에는 ‘내가 계산을 다 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전표에 손님이 돈을 지불했는지 표시하는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손님이 돈을 다 지불하면 ‘지불완료’라고 표시를 합니다. 그런 도장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곳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가를 다 치렀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할 이 중대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지불 한 돈 입니다. 돈 보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그 생명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우리를 사신 겁니다. (이 소식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길거리에 나가서 사람을 붙잡고 전해보십시오. 2천년전에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전하면, 이런 미친놈이 있나 하고 쳐다볼 겁니다. 사람들은 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말을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 쉽지 않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이 기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 쉽지 않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 중에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분이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믿어집니다. 왜 믿어지나요? 관계를 통해서 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믿어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살아가는 모습이 진정한 예배 그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을 보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 있는 것 같아’ 하고 믿어져야 진정한 그리스도인 아닐까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하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와 대신 죽어줌으로 인해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으면서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이 말의 뜻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죽음으로 값을 치르시고, 나를 사셨다는 뜻입니다. 믿어지십니까? 믿는 자에게만 구원과 영생의 복이 더해집니다.
3. 예수님께서 정말 죽으셨을까?
2003년도에 다빈치코드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추리소설입니다. 이 책은 예수님은 죽지 않았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그 후손은 왕족으로 살았다라는 허구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소설의 시작이 루브루 박물관에서 시작이 되는데요. 여러분 루브루 박물관 외관이 피라미드로 된 것 아시죠? 그런데 그 지하에 뒤집힌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이곳입니다. 제가 다빈치 코드 소설을 읽고 나서 다시 파리에 갔을 때 일부러 찾아가 지나가는 프랑스 사람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 때문에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뒤집힌 꼭지점에,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예수님인가 마리아가 묻혀있다고 소설은 말합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처럼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설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에서 왕족으로 살았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분명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에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요한이 그 죽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인이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 그리고 로마군인들 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죽었다는 증거를 요한이 자세하게 적고 있는데요. 첫 번째 증거는 다리를 꺾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신 날은 안식일 전날입니다. 일주일중의 6번째 날인데요. 이날은 특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 전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십자가의 죄인들을 빨리 죽여서 십자가에서 치워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메달리면 어떤 고통이 오는지 아시나요? 십자가에 달리면 폐가 쪼그라들어서 숨 쉴 수가 없습니다.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숨을 쉬려면 축 늘어진 몸을 발로 밀어 올려야 합니다. 발 밑에 받침대가 있는데 그걸 의지해 딛고 일어서야 온전하게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발을 꺾어 달라는 것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 질식해서 죽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로마군인들은 전문가 입니다. 한 분대가 3명에서 5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한 팀이 십자가 처형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앙에 있었다고 하는데요. 양 옆의 첫째 사람 다리를 꺾고 나서는 예수님을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꺽고는 예수님 앞에 멈추었습니다. 군인이 예수님을 지나친 이유는 이렀습니다. 다리를 꺾은 두 사람은 계속 숨을 쉬려고 다리로 몸을 들어 올렸는데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판단을 한 겁니다.
여러분, 로마군인은 전문가 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타고난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푸욱 찔렀습니다. 왜 굳이 이렇게 확인사살을 했느냐 하면,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로마군인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져서 그들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으로 그 죽음을 확인 한 겁니다. 그랬더니 그 상처로 이미 죽은 사람에게서만 보이는 피가 덩어리가 져서 물과 분리되는 현상을 이미 보이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인은 그 쏟아지는 덩어리진 피와 물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는 죽었다. 사람을 죽이는 전문가인 로마군인이 그 증인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유대인의 장례법입니다.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썩은 향유를 백리트라 가지고 옵니다. 이 정도의 양은 왕이 죽었을 때 쓰이는 양입니다. 아무리 큰 부자도, 대제사장이 죽어도 이 정도의 향유를 쓰지 않습니다. 왕이 죽었을 때에만 백리트라 정도의 향유를 사용합니다. 의미하는 바가 크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몰약과 침향은 죽은 사람을 세마포로 묵고 그 위에 바릅니다. 시체가 섞는 과정 중에 냄새가 나지 않게 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유대인의 장례는 시체를 묻지 않고 동굴에 시체를 놓아둡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나면 시체가 썩어서 살이 없어지고 뼈만 남습니다. 그러면 그 뼈를 다시 관에다 넣습니다. 그렇게 두 단계로 장례 절차가 이루어 집니다. 유대인의 관습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분명하게 죽은 겁니다. 더구나 몰약과 침향을 가져온 니고데모가 누구입니까? 유대인의 지도자 입니다. 그가 가지고 온 몰약과 침향은 황금보다 더 비싼 겁니다. 약 4kg의 황금을 현재 가치로 따져보니깐, 약 2억 정도 됩니다. 현재의 가치로도 적지 않지만,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는데 니고데모가 이렇게 많은 양의 향유를 사용했다는 것은 유대인의 상식으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성경의 본문에 적힌 두 가지 증거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 번째 증거는, 로마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은 로마군인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문가 입니다. 그러므로 이정도 정황을 설명 들으면, 모두 예수가 분명하게 죽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두 번째 증거 역시, 유대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치밀하게 위장하기 위해서 몰약과 침향 백리트라를 사용했다고 현대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미친 겁니다. 당시의 유대의 풍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 즉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 사실을 꾸며낸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황당한 주장이라는 것을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루 한 끼니 먹기도 힘든 시절에 2억이나 되는 돈으로 위장을 한다고요? 그 돈이면 군대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으시다면, 그 분이 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증거는 온 세상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증거입니다.
다빈치코드는 소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증거하듯이 분명하게 죽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목사님을 통해서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이다. 라는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기독교는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들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 삼아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용기가 없어서 예수님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그러면 우선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십시오. 여러분의 가족과 좋은 관계를 맺으십시오. 거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하십시오.
2. 하나님이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내 인생이라고 말 할겁니다. 내 인생 내가 마음대로 사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 맞습니다. 여러분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거창하게 인생관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오셨죠. 오늘의 설교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는데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나를 위해 값을 치르시고, 나를 사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위해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모든 날과 또 죽어서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하면서 살아갈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함부로 살지 마십시오. 함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 하나는 전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3.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요 이 죽음에도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죠? 몇번째날에 창조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일빛, 이궁, 삼땅식바, 사해달별, 오조어, 육동사, 칠안식) 네, 여섯째 날 입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이 창조됩니다. 그 사람 아담이 실패해서 죄가 들어오고 사람이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여섯째 날에 죽습니다. 아담이 만든 죄가 죽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 것처럼 예수님도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첫날 일요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날 부활의 빛으로 다시 사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일찍 사역자가 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신학 공부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좀더 일찍 시작했으면 더 잘했을 텐데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지나고 나니깐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니깐. 지금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참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데 내 인생에서는 실수를 하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실패하면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하나님 이러면 안되는것 아닙니까? 하고 서러움이 복 받히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실패하고 낙심하고 세상이 나에게만 등을 돌리고 있는것 같을 때 들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는 노래인데, 제가 예배가 끝나고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들으면서, 그래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셔, 내가 겪고 있는 이 불행 속에도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을 거야! 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조용히 나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나를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셨구나 하고 깨닫고 인정하게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시는 보호자님들도 계시고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병을 얻으시고 난 후에야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병을 얻고 나서야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재활치료를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값 주시고 사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인생이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아멘)
1. 톰 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2부』 (서울: IVP 2011) pp168-197
2. 이필찬, 『에덴회복의 관점에서 읽는 요한복음』 (이필찬요한계시록연구소 2017)
3. 게리 버지, 『NIV주석, 요한복음』 (서울:도서출판 솔로몬 2010) pp647-706
4. 비슬리 머리, 『WBC 요한복음』 (서울:도서출판 솔로몬 2010) pp619-59
5. GK빌. DA카슨, 『신약의 구약사용주석 누가.요한복음』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pp690-704
6.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신약』 (서울: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pp358-64
7. 존 칼빈, 『신약성경주해 4』 (서울:신교출판사 1978) pp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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