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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44) 사도가된여인들(요20:1-18)

한스킴 2020. 12. 7. 16:24

 

"사도가 된 여인들”

 

요한복음 20:1-18

1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한복음, 오늘 44번째 시간으로 “사도가 된 여인들” 이라는 제목으로 20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들으시겠습니다.

(드라마바이블)

 

여러분 요한복음 19장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19장에는 예수님은 정말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것도 로마의 반역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 자기 백성 유대인의 반역으로 인해 죽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놀랍게도 증인은 로마 관리입니다. 요한이 그토록 자세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훗날, 예수님은 죽지 않고 로마와 제자들의 공작에 의하여 프랑스로 망명하였다는 가설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가설을 토대로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는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을 출판하고 베스트 셀러가 됩니다. 저는 댄 브라운이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나중에라도 이런 부류의 소설을 읽으시면, 그냥 소설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항상 나쁜 의도로 우리의 마음을 무너트리는 악한 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십시오. 가짜 뉴스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여러분 중에는 한 명도 없으셔야 합니다.

 

 

그럼 20장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냐? 물론 부활입니다. 하지만, 훗날 음모론자들이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는 거짓뉴스를 퍼트립니다. 20장은 그 가짜 뉴스를 뒤집을 수 있는 장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가정입니다. BBC같은 방송국에서 나쁜 의도를 가지고 특별다큐멘터리를 편성합니다. 제목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고, 제자들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숨겨졌다’. 이런 방송을 시청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가짜 소문에 깜박 속는 사람이 무수히 생겨나게 될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토해내는 열변에 속지 않기 위해서 오늘의 본문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3가지 장면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 새 창조를 맞이하는 여인들.(첫째 장면)

오늘 본문의 첫 장면은 일요일 새벽,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는 두 여인의 모습을 비추어줍니다. 일요일은 한 주의 첫날, 즉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새 창조의 첫날,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여인들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입니다. 이 두 여인은 예수님이 죽으시던 날 그 십자가 밑에서도 있었습니다.

 

 

두 명의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 처형 후 예수님의 시신은 급하게 장사 지내어 졌습니다. 왜냐하면 몇 시간이 지나면, 유월절 명절이 시작 되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시신을 장사 지내야 했습니다. 급하게 요한의 무덤을 빌어서 장사를 치렀기 때문에, 여인들은 그 뒤처리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의 감정은 매우 슬펏습니다.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낸다면, 아마도 그냥 울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인들의 심정은 예수님 무덤에서 목 놓아 울어야만 한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여인들이 예수님 무덤으로 갔을까요?

 

 

저는, 여인들이 울고 싶어서 갔다는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여자분들만,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지 않나요? 남자들은 몰라요.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자는 남자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남자와 여자는 수준이 다릅니다. 남자가 마치 멋지게 프린트된 종이인형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변신 합체 로봇 같습니다.) 또한

여자는 공감능력 끝판 왕입니다. 여자의 그런 공감능력으로 인해, 남자들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을 여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은 깜작 놀랐습니다.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 무덤의 문을 굳건하게 막고 있었던 돌을 옮겨 놓은 겁니다. 옮겨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끔직한 범죄입니다.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제자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달려가 이 끔직한 사건을 알립니다.

 

 

2. 끔직한 소동을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둘째 장면)

장면이 바뀌어서, 여인들이 가지고 온 끔직한 소식을 들은 제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라고 소개되고 있는 요한은 무덤을 향하여 달립니다. 베드로보다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그 끔직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슬피 울지도 않고 낙담하여 돌아가, 다시 숨어 버립니다. 이럴 거면 왜 무덤에 온 겁니까? 무덤에 두 명의 제자가 등장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어떤 혐의나 사건을 인정받기 위해서 증인을 요구합니다. 증인은 2명 이상이어야 합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인입니다. 아직 제자들은 자신들이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인 2명이 보았는데 왜 굳이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해야 할까요? 여자들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한 겁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예언하였듯이 부활하셨거나, 아니면 누군가 시신을 훔쳐간 겁니다. 그런데요.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시신은 없어졌는데, 어떻게 없어졌느냐? 옷이 허물을 벗긴 듯이 그대로 있고 시신만 빠져나간 모습입니다. 만일 누가 시신을 훔쳐간 것이 사실이라면, 시신을 벌거 벗겨서 훔쳐 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요.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게 불가능한지를 제가 예를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또 제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신지 올해가 5주기(14.12.11)가 되어 가는데, 죄송하게도 제가 자꾸 소환하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아버지께서 그런 인생을 사셨는데.

 

 

아버지께서는 일주일에 6일 혹은 7일 술을 마셨는데요. 술주정이 심하셨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 던졌습니다. 이윽고 집어서 던질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놓고 ♬) 아버지가 제 풀에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우리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제가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지금의 저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고 나서 한 순간에 완전히 변하셨습니다. 얼마나 완벽하게 변하셨는지, 혹시 아버지가 쇼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왜, 우리도 쇼를 하지 않습니까? (견경한 척하기, 기도 많이 하는 척, 착한 척, 잘난 척, 예쁜 척, 성경 많이 읽는 척)

 

 

처음 얼마 동안은 그래도 술을 가끔 마셨는데요. 절대 술 주정은 하지 않고 그대로 주무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살만 했습니다. 그런데요 또 얼마가 지난 후에는 술을 완전히 끊으셨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신문도 읽지 않으셨던 분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주물 노동자로 살았기 때문에 글을 잘 읽지 못합니다. 딱 초등학생 수준입니다.

 

 

급기야는, 어느 날 새벽부터 동네 청소를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달이 아니라, 몇 년을 비가와도 눈이 와도 청소를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봉사하자 동네에 소문이 나서, 동네 행사가 있으면 항상 초대되어 가셨습니다. 동네 청소만 하셨냐? 교회 청소도 하셨습니다. 주일에는, 제일 먼저 교회에 도착해서 교회 마당을 청소하셨습니다. 청소를 끝낸 다음에는 성도들에게 교회주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일만 열심히 하셨습니다. 교회봉사도 순번을 정해서 하자나요. 교회주보를 나누어 주는 일도 순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게으치 않으시고, 일년 52주, 하나님 부름을 받으실 때까지 그 봉사를 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끔 예배에 늦게 참석하곤 했는데요. 어느 날 아버지가 저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예수 그렇게 믿지 마라. 하려면 똑바로 해라.' 헐, 제가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2014년 12월 11일, 눈이 오는 새벽에 하나님께 돌아 가셨습니다.

장례식 아버지 입관예배가 끝나고, 장례사가 큰아들 이리 오라 하면서 아버지 앞으로 불렀습니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관에는 영혼이 떠나간 아버지의 육신이 있었습니다. 장례사가 제 손을 잡아서 아버지 눈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차갑게 식은 얼굴이 느껴졌는데요. 그 순간 제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오싹했습니다. 지금 손을 올린 그 얼굴은 제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 아버지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얼굴에 손을 잠깐 올리는데도 정말 오-싹 했습니다. 영혼이 떠난 육체를 만지는 것이 그만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비록 그 육신이 내 아버지였는데도 시신을 만지는 것은 끔직하게 싫었습니다.

 

 

그런데요. 여기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세마포와 얼굴을 덮은 수건이 무덤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가설이 사실이 되려면, 훔쳐가는 사람이 시신에게 입혀져 있었던 옷을 발가벗겨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이 죽어서 3일이 되면 경직이 와서 빳빳하게 굳어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옷을 벗겨서 훔쳐갔다는 말이 되는데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영혼이 떠난 제 아버지 얼굴에 잠깐 손을 올리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여러분은 뭔가 훔쳐보지 않아서 잘 모르시겠지만, 뭔가를 훔친다는 것은 보통 긴장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속해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 친구분 가게에서 껌을 가끔 훔쳤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그 때 껌 값을 갚아드려야 하는데…) 어쨌든, 뭔가를 훔친다는 것은 신속하고 빠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잘못된 행동이 얼마나 겁나고 떨리는지 여러분은 모를 겁니다. 좀도둑질도 무섭고 떨립니다. 그리고, 재빨라야 합니다. 더구나 시신을 훔치는 것은 무섭기도 하지만, 걸리게 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인데, 딱딱하게 굳은 몸에서 옷을 벗겨낸다고요? 속된말로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인이 바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라고 불리는 요한, 이렇게 2명입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습니다. 이제 음모론이 2개가 되었습니다. 첫째 음모론은, 예수는 죽지 않고 망명해서 마리아와 행복하게 살았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여러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음모론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을 겁니다. 다빈치코드를 읽은 사람은 예수님은 죽지 않고 마리아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해서 자손을 낳고 살았다고 말할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부활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만나실 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가짜 뉴스를 듣고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가짜 뉴스에 속지 마십시오. 세상의 소문, 그리고 신문과 뉴스에는 항상 가짜 뉴스가 넘쳐 납니다. 세상은 그런 가짜 뉴스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을 속일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그런 가짜 뉴스에 속으시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다고 의심하게 되고, 예수님은 부활하지 못했고 제자들이 시신을 숨겼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구원도 함께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사실만 믿습니다.

 

 

20장의 핵심은 예수님의 시신은 누군가에 의하여 도난 당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원하는 세상사람들에게 그 증거를 보여줍니다. 남겨진 세마포와 얼굴을 덮었던 수건이 무덤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증거입니다. 유대의 관습대로 2명의 증인도 출연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물질로 만들어진 세마포와 수건을 몸에 걸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벌거벗고 있었나요? 아닙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분명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엇이었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도 부활하면 예수님께서 입으신 그런 옷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부활의 그때 우리 모여서 패션쇼 한번 하자구요.

 

 

3. 왜 여인들이 사도의 사명을 받았을까? (셋째 장면)

이제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열렬하게 따랐던 제자 2명은 맥없이 돌아갔습니다. 여인 두 명은 여전히 예수님의 무덤에 남아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인들이 천사를 보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이 전하는 이 장면을 잘 살펴보면 천사는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보지 못한 거죠? 왜 여인들에게만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걸까요?

 

 

(1)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덤에서 만나주지 않았을까?

(2) 왜? 천사들은 제자에게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3) 왜? 예수님은 사도가 아닌 여인들에게 사도의 사명을 주었을까?

 

 

우리는 이 세 번째 장면을 보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덤에서 만나주지 않았을까?

제가 20장의 가장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 2명이 와서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덤에서 제자들을 만나면 더 확실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만나주지 않았을까요?

 

 

(2)왜? 천사들은 제자에게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천사들이 제자들이 가고 나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계속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불과 몇 분전 제자들이 있었던 무덤 안에서 제자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여인들은 제자들이 가고 난 그 무덤에서 천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인들이 보았다면, 제자들도 보아야 하지 않나요?

 

 

(3)왜? 예수님은 사도가 아닌 여인들에게 사도의 사명을 주었을까?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사도가 된 여인들’ 이라고 정하였는데요. 여러분,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아야만, 사도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가르침을 받았고,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이 여인들이야 말로 최초의 사도가 됩니다. 여러분, 상상이나 해 보셨습니까? 최초의 사도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지금 유대인의 세계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인이 첫 번째 사도가 되다니요. 지금 여기 앉아 계신 여성분들께서는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존재들 입니다.

 

 

 

질문을 던졌으니 답을 해야겠죠.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준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따라 하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마5:4)”

 

 

제자들이 돌아가자, 여인들은 설움이 복받쳐서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왜 통곡합니까? 예수님이 없어지셨으니깐요. 여인들이 애통해 하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실만 확인하고 잡힐까 염려가 되어 도망 갔지만, 여인들은 자신들의 안위보다는 예수님이 더 염려되어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애통해 하고 있다면 가장 좋은 위로는 무엇입니까? 내가 애통해 하는 것이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여인들의 애통함에 응답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먼저 천사들의 위로를 받습니다.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왜 우는지 이유를 물어봅니다. 여인들은 잃어버린 예수 때문이라고 말을 하죠. 그러자, 여자들의 애통함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제가 어렵게 질문을 적어놓았는데, 저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 해드렸습니다. 궁금증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남은 것이 있나요? 아, 여인들이 사도의 사명을 받은 것이 남았나요? 여러분들은 아마도 마음 속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제자들에게 전하는 명령을 받았다고 사도라고 칭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력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을 내가 처음으로 전해 주는 역할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럽습니까?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가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그토록 애통해 했던 여인들이 당연히 그런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복이나 사명을 내리실 때, 남자는 항상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같이 있었고요.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축복도 사라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여자가 맡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겁니다.

 

이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1. 거짓 뉴스에 속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 무수히 많은 음모들이 있습니다. 가짜 뉴스들이 있습니다. 속이고자 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가짜 뉴스에 많이 노출되면 그 뉴스를 믿어버리게 됩니다. 목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 동기 목사님 친구가 신.천.지에 빠졌습니다. 그분도 목사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만.희가 영생 불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만.희 뿐만 아니라 자신도 신.천.지 울타리 안에 있으면 영사불사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점점 늙어가고 있으면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저도 요즘 굉장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어떤 교수 출신의 목사님이 계속 가짜 뉴스를 카톡으로 보내 주는데,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분이 어떤 신학대학원을 나왔는지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개독교 목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짜증이 나서 답신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발 그런 개독교 무리에서 빠져 나오세요'

 

 

여러분이 그런 가짜 뉴스에 속지 않는 방법은,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연구해 보는 겁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목사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동일하게 성경을 읽고 고민하고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절대로 거짓 뉴스에 속지 않습니다.

 

 

 

 

2. 애통해 하십시오. 그리고 여인처럼 공감능력을 가지십시오.

여러분, 요즘 울어보셨습니까? (여자분들은 자신의 처지가 답답할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 전, 먼저 잘 우십니다. 맞나요?) 하지만, 남자들은 잘 울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으로 노력합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술을 한잔 하고 포기합니다. 울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먼저 울지요. 한참 울고 나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그런 지혜를 가진 여인들이 있습니다. 두 명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처지에 대하여 공감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주신 예수님을 다시 못 본 다는 것이 서러워서 애통했습니다. 그 애통함으로 인해 두 명의 마리아는 천사를 보았고,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요? 그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해봐.’하고 그대로 둡니다. 이건 좋지 않습니다. 그대로 둔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심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 당신은 가만히 계시고, 나를 방해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내버려 둡니다. 자기가 맘껏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 하나하나 간섭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일에 간섭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애통해 하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기도하고, 공감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인생이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지금 우리의 이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애통해 하던 마리아를 만나주셨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애통해 하는 기도에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기도하겠습니다.

 

 

 

 

 

1. 톰 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2부』 (서울: IVP 2011) pp198-217

2. 이필찬, 『에덴회복의 관점에서 읽는 요한복음』 (이필찬요한계시록연구소 2017)

3. 게리 버지, 『NIV주석, 요한복음』 (서울:도서출판 솔로몬 2010) pp707-43

4. 존 칼빈, 『신약성경주해 4』 (서울:신교출판사 1978) pp12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