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1/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42) "보라,당신들의왕이다(정치가와악한목자)” 요19:1-22

한스킴 2019. 4. 4. 08:25





"정치가와 악한 목자”


요한복음 19:1-22

1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공권력은 세상에서 힘을 발휘한다.


저에게는 아들 둘과 딸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부는 고민 없이 둘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24살에 결혼하여 아들 두 명을 낳으면서 모두 성경에서 나온 인물을 아이들의 이름으로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이만큼 믿음이 있다고 뽐내고 싶었던 겁니다. 제가 참 나쁘죠. 막내가 태어났습니다. 물론 막내가 딸인 것을 알고 이름을 미리 지어 두었습니다. '에스더'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문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절도죄로 잡혔다는 조그마한 사건 뉴스를 읽었습니다. 그 순간 아차 하면서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급히 성경의 인물이 아니라 생각해 낸 이름이 '찬양'입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끝까지 내가 믿음 있는 사람이라는 자랑을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을 아이의 동의도 없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지어두었고 '이름처럼 믿음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라고 말하고는, 내 믿음을 뽐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는 아이들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성경의 요한처럼 제자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데, 아이가 제 마음 같지 않습니다. 제가 우려하던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바로 요한이가 대형사고를 쳤습니다. 그때가 대학입시를 막 준비하던 때였는데, 그 사건 때문에 아이가 대학도 못 가는 것은 아닌가 막막했었습니다. 주위의 조언이 담당 형사의 사건 조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 형사가 당직할 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부탁을 했습니다. 덕분에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는 공정하고 억울하지 않게 사건 조서를 잘 써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결국은 요한이와 제가 검찰에 가서 담당 검사 앞에서 반성문을 쓰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경찰서의 말단 사건 담당 형사가 제 편이 되었을 때,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공권력이 그래서 무섭고 그런 말단이라도 빽이 있으면 안심이 됩니다.


1. 하나님의 계획이어야 한다.

오늘 성우들이 읽어준 성경을 들으신 여러분은,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의 편이 되어 예수를 풀어주려고 애쓰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네 빌라도 입니다. 빌라도는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저는 말단 형사가 제 편을 들어 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는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가 ‘예수는 죄가 없다’ 하고 결정하고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상황입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막강한 공권력의 보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기드론 골짜기 건너 겟세마네 동산에서 12시에 잡혀 대제사장 집으로 잡혀가 종교재판을 받은 후 - 빌라도 총독에게로 끌려갑니다. – 빌라도 총독은 이 곤란한 재판을 피하기 위해 헤롯 왕에게 예수를 보냈는데요. – 새벽에 헤롯왕은 예수님의 재판을 다시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그때가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쯤입니다.


(1) 권력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면 소용없다.

빌라도는 예수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죽은 자도 살렸다는 소식까지도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유대 명절 유월절을 기념하여 특사를 단행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살인한 자와 예수 중 한 명을 풀어주겠다고 했는데요. 빌라도는 당연히 무력하게 잡혀있는 예수를 풀어주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가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인들의 외침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호산나, 호산나”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외쳤던 유대인들이 그 자리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계획한 것이지만, 사실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손에 잡혀서 죽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제가 굳이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유대인들을 위하여 변명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종교 쿠데타와 같습니다. 유대 시민들이 다 자고 있는 한밤중에 대제사장들과 그 추종자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잘 계획한 쿠데타입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는 호산나를 외쳤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군중들 앞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감히 살인을 하려고 눈알이 빨개져 난동을 부리는 무리들 앞에 나설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험악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그렇게 변명해 주고 싶습니다.


빌라도는 두 번째 계책을 세웁니다. 예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가시면류관을 씌워 얼굴로부터 피가 흘러내리게 하고, 홍포를 입혀 데리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여 죽여야 한다니, 왕의 복장으로 피 흘리는 불쌍한 모습을 보이면 유대인들에게 동정심이 생길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화를 내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형은 로마에 반역한 죄인에게만 처해지는 형벌입니다. 로마 병사를 살해하거나 로마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켜야 처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제 예수를 죽여야 합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체계적인 법 집행을 자랑하는 로마의 법정에서 단 6시간 만에 사형선고가 내려질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전에 제 아들 요한이가 당한 위기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저를 도왔던 사람은 공권력이 가장 낮은 말단 형사였습니다. 그가 쓴 공정한 조서가 요한이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총독이 살리고자 했으나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 뜻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겁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꼭 당신의 손으로 죽여줘야겠다는 외침을 듣고 예수 앞에 와서 다시 묻습니다. “내가 너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력이 있다. (빌라도는 진정으로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찰이나 법관이 출세와 돈에 매수되어 거짓 판결을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힘이 빌라도에게 있었습니다) 정말로 너는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냐?” 정말 간절히 진실을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즉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나를 해칠 권세가 없다.’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의 권력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빌라도는 내가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 권력이 하는 일조차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를 이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죽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서 그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더욱 두려웠고, 예수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꼭 예수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예수를 데리고 유대인 앞에 섭니다.


세상의 권력은 항상 자기의 이익에 따라 변한다.

예수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빌라도라는 정치가가 지금 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본래 정치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인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어떤 악한 일을 해서라도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지키려고 합니다. 정치가 무엇인지 가장 극렬하게 보여주는 본보기가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빌라도입니다. 빌라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겠습니다.


보십시오. 빌라도는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듯했습니다. 이번 재판에서의 정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법정에서 억울하게 죽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이스라엘의 총독이라는 권력을 가진 정치가가 그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나는 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겁니다. 빌라도가 이번에는 내 뜻을 관철 시키고야 말겠다. 하고 다짐하고 재판정에 서있는데요. 유대인들이 결정타를 날립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권력이 높은 사람이지만, 빌라도 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입니다. 빌라도의 권력과 이익이 그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황제 가이사가 빌라도의 유일한 약점입니다.


예수를 죽이라는 판결을 하지 않는 빌라도를 향하여 유대인들이 외칩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스스로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이전 성경에는 충신이 아니라 친구라고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라는 번역이 더 좋습니다. (‘가이사의 친구’라는 공식 명칭이 있다. 가이사에게 충성과 봉사를 보인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호칭이다) 역사에 의하면 가이사(티베리우스)는 잔혹하기로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그에게서 친구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그 어떤 누구라도 죽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유일한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코너에 몰린 빌라도는 더 이상 정의를 수호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를 죽이라고 판결을 합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 정의보다 자신의 이익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정치가 원래 그런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치가를 믿지 마십시오.


특별히 정치와 그 권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정치가나 목사가 있다면 그것은 100% 거짓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정치는 결코 하나님의 대리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정치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보호할 수 있다면 그 일을 예수님이 하였을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유대인들이 외쳤는데요. 이 말은 ‘다윗과 같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고서’ 외치는 겁니다. 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고 다윗, 솔로몬과 같은 유대인의 왕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운 계획, 즉 십자가에서 죽는 그 계획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빌라도의 권력은 무력하다)


여러분 세상의 정치는 하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정치는 땅에 속한 것입니다. 정치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궁지에 몰리고, 여론 전문가들이 ‘당신은 위기에 몰렸습니다.’ 하고 말해주면 얼굴을 싹 바꾸고 ‘예수를 죽여라’ 하고 말을 바꾸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정치입니다. 기독교인이 뭉쳐서 정치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요? 천만의 말씀, 말만의 콩떡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안 된다는 의미겠지요) 성경을 들고 기도하는 정치인을 조심하십시오. 기독교의 부흥을 위해서 타락한 세상을 막기 위해서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필요하고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아니 전부 가짜입니다. 언제든지 자기 이익이 우선되어 교회와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치로 기독교의 부흥을 이야기하는 무리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2. 보라, 당신들의 왕이다.

여러분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난센스 질문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그냥 생각하시는 데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렵습니다. 손해 보고, 희생하고, 이 땅의 복보다는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 거기까지는 어찌어찌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없고, 악한 세상의 권력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경험하면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면 알수록,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힘이 듭니다.


얼마 전에 저와 동기 목사님이 용인으로 찾아와서 카페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분이 김영웅 전도사라고 우리의 후배 전도사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요.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대학원 시절부터 사역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졸업하면 전임 사역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졸업 후 중등부 전임 사역자가 되었는데요. 당시 학생들이 70명이 넘었으니 교회 규모가 큽니다. 사회성이 좋은 성실한 전도사님이어서 사역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기 목사님이 전하길 김 전도사가 얼마 전 사임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유는 담임 목사의 이중적인 사역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교역자를 종 부리듯이 하고, 교역자 회의에서 장로, 집사를 험담하고 욕하다가도 그 앞에서는 집사님, 장로님 하면서 웃으면서 겸손한 척했다고 합니다. 전도사님이 멘붕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교회에서 사역자로 일하는 것이 이런 모습이 아닌데 고민하다가 심신이 지쳐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교회 교역자 회의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이 딱 맞아떨어지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허탈했습니다. 사역이 사업이 되어버린 목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1) 악한 목자 가야바(믿음도 권력이 되면 하나님을 배반한다)

11절에도 그런 사역자가 등장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할 빌라도보다 죄가 더 큰 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사람인데요. 이름을 딱 말하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너에게 넘겨 준 자의 죄가 가장 크다’ 너에게 넘겨 준 자, 예수님은 특정 인물 한 명을 지칭했습니다. 지금 유다라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아닙니다. 유다를 조종하여 예수를 팔아넘기게 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마도, 대제사장 가야바일 것입니다. 더 넓게 추측하면 가야바의 조종을 받는 대제사장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최고 종교지도자입니다. (요한복음 18:14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그 한 사람이란 예수님을 의미할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을 대제사장 가야바가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했을까요? 왜 그 지경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가야바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야바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잡게 했고요, 재판정에서는 예수 대신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데 결정적인 목소리가 되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는데 이렇게 앞장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본받고 싶었던 대제사장의 말을 신뢰하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가야바 같은 종류의 대제사장들은 종교적 언어가 능숙한 신학자들입니다.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서 믿음(신학)을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받고 싶은 종교지도자를 따랐던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서게 된 겁니다. 여러분 악한 목자를 분별하실 수 있습니까?


빌라도는 처음에는 자신의 올바른 판단을 거부하는 유대인 무리에게 화가 났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예수에 대하여도 화가 났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에 대하여는 두려움이 커졌고요. 유대인에 대하여는 그 분노가 혐오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 개새끼들 형편없네, 더러운 일을 내 손을 빌려서 하겠다는 심보 아니야?!) 그래서, 예수를 데리고 나오면서 외칩니다. “보라, 당신들의 왕이다!”


(2) 왕을 배반하는 백성들.

자신의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거짓 목자, 악한 목자인 가야바에게 세뇌된 유대인들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리고 대제사장 무리들이 하나님을 경멸합니다. “우리에게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구약성경 전체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제사장들이 성경을 부인하고 있는데요. 성경을 부인하는 그들이야말로, 십자가에 메 달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종교권력을 유지하겠다는 악한 목자들이 되었다고 성경은 고발하는 겁니다. 그 악한 목자들에 세뇌 당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자신들의 왕을 배신하는 반역 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은 다 불의와 불법이 왕 노릇 합니다. 즉 내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면 부자가 되지 못하고 권력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법을 집행하고 처벌해야 하는 자들이 그 권력으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범죄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과 권력에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다 심판받을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낮은 자들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이나 저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복받은 사람입니다. 심신이 연약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높이시는 분들입니다. –아멘-




3. 예수, 유대인의 왕


신학대학원 시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장면을 왕의 대관식이라고 해석하는 교수님이 있었는데요.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 장면이 왕위를 수여받는 즉위식이라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이 죽는 이 장면이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데, 이게 무슨 왕위를 물려받는 대관식이야? 이렇게 말하고 싶으실 겁니다.


이런 것을 ‘아이러니하다’라고 말하고요. ‘역설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19장 전체가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입니다. 왜 왕의 대관식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야바가 이끄는 대제사장 무리들은 그들의 정적인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가야바에게 예수는 자신의 종교권력을 위협하는 원수라고 결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세상 이익과 세상에서 가지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이되 스데반을 죽이듯이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찝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되 자기 민족의 또 다른 원수인 로마의 권력을 빌리기로 합니다. 로마에 반역하는 반역자로 십자가에 죽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굳이 십자가를 선택한 이유는 유대교는 대대로 나무에 메 달리는 것을 가장 불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되 저주받은 죄인으로 만들기에 가장 완벽한 해결방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혐오하였던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공식적으로 임명합니다. 이 장면이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죄명을 패에 적어서 걸어둡니다. 반역자, 살인자 이렇게 써 두어야 어떤 죄목으로 죽었는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패를 써서 붙이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 말로 적어 놓습니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온 유대뿐 아니라, 만국 공통어인 헬라어를 쓰는 모든 이방 세상과 제국의 언어인 로마어로 로마가 점령한 세계 모든 곳에 선포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죽는 것입니다. 왕이 그의 백성들의 배반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지배자인 로마가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하고, 유대 백성의 배신 때문에,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게 되는 희생의 왕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피가 난자한 예수님의 왕의 대관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왕의 대관식은 정치인과 악한 목자가 만든 합작품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정치인에게 소망을 두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이익이 위태로우면 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특별히 정치를 하겠다는 기독교인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십시오. 100% 가짜들입니다. 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지 예수를 믿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얼마 전 뉴스에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빼앗은 50대가 징역 2년 6월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정의와 법이 이런 겁니다. 권력을 가지고 국가의 돈을 수천수억을 뇌물로 받아도 관행이라고 무죄가 되고, 힘없는 서민이 배고파서 돈이 없어서 행하는 생활 범죄에 대해서는 조금의 아량도 베풀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이고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법은 권력과 돈을 지켜주지 힘없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다. 전도사다 하는 정치인들도 똑같습니다. 믿지 마세요. 표도 주지 마세요.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받는 카톡이나 문자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두 번이나 장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세뇌 당한 겁니다. 제발 자신의 생각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악한 목자에게 속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힘써 배우십시오. 악한 목자의 말이 진리인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해야 합니다. 특별히 복만 받으라고 말하는 목자를 조심하십시오. 세상의 복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복은 하늘의 복입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겁니다. 잠시 불편하지만 영원히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처럼 하나님만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만이 영원합니다. 여러분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가장 사랑합니다. 정치인이나 악한 목자처럼 겉으로 화려하고, 말 만 유창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봅니다. 그러니, 자신 있게 사십시오. 감사하면서 사십시오.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구나 깨닫고 사십시오. 고난이 닥쳐도 견뎌 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편입니다. 이 훈련을 잘 끝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빌라도의 법정에 서있던 예수님처럼 우리가 권력에게서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게 하시고, 악한 목자의 속이는 말에 넘어지지 말게 하십시오. 우리에게 권력이 없음을 인해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참 왕이신 한 분, 예수님 만으로 만족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예수님이 우리의 권력이고 우리의 영원한 이익이고 세상의 어떤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보석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1. 톰 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2부』 (서울: IVP 2011) pp168-197

2. 이필찬, 『에덴회복의 관점에서 읽는 요한복음』 (이필찬요한계시록연구소 2017)

3. 게리 버지, 『NIV주석, 요한복음』 (서울:도서출판 솔로몬 2010) pp647-706

4. 비슬리 머리, 『WBC 요한복음』 (서울:도서출판 솔로몬 2010) pp619-59

5. GK빌. DA카슨, 『신약의 구약사용주석 누가.요한복음』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pp690-704

6.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신약』 (서울: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pp358-64

7. 존 칼빈, 『신약성경주해 4』 (서울:신교출판사 1978) pp1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