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2017.09.24. 한스킴
요한복음 6:16-24 16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
예수님은 광야에서 갈릴리 사람 5천명에게 떡과 물고기를 배 터지게 먹게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갈릴리 사람들 눈 빛이 달라졌습니다. 저런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먹는 문제는 걱정이 없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떡을 배 불리게 먹게 해 주었을 뿐인데, 갈릴리 사람들은 왜 왕으로 삼고자 했을까요? 그 심정을 6.25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이해가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먹는 문제가 인생의 가장 큰 문제일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먹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인 시대였습니다.
한 사람 먹을 것만 있으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만들 수 있는 분이 예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왕이 되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왕이 되려고 온 것이 아니죠.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기 전에 바다를 건너가야 했습니다. 어부인 제자들은 경험상 밤이 되면 파도가 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가버나움까지의 바닷길은 약 1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능숙한 바다 전문가들인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노를 저어서 4시간에서 5시간이면 건널 수 있는 거리입니다.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 예수님 안 내려오시네. 우리에게 먼저 가라 했으니 지금 출발합시다. 그래야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평소 같으면 벌써 가버나움에 도착하여야 하는 시간인데 겨우 절반 정도 왔습니다. 늦은 밤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자들이 염려하던 일이 일어 났습니다. 큰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들이치고 배가 침몰할 지경이 됩니다.
배를 저어도 소용이 없었고, 제자들은 배가 휙 뒤집혀 죽게 될까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때, 그 배를 향하여 걸어오는 물체가 있었습니다. 바다를 걸어오는 물체의 모습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을 살았던 제자들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두렵고 놀라워서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예수님 이었습니다. 가까이 오셔서 말씀합니다.
"나다, 두려움을 멈추어라"
이 말이 제자들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배에 맞이하였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노를 젓는데 있어서는 제자들은 ‘생활의 달인’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파도 때문에 목적지인 가버나움의 절반까지 겨우 노를 저어 왔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이 그 배에 타자마자, 곧 목적지인 가버나움에 도착합니다.
제자들이 파도 속을 뚫고 좀처럼 갈 수 없었던 목적지에 바로 도착한 겁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서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타자, 예수님의 능력이 배를 목적지에 가게 한 겁니다.
예수님이 폭풍 속 바다에서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을 해결해 준 겁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논란을 벌입니다.
정말 예수가 바다 위를 걸었어? 어떻게 인간이 바다 위를 걸어? 그게 사실이야?
네, 사실입니다.
그 증거를 성경이 말합니다. 22절부터 25절까지 그 일이 사실이라고 갈릴리 사람들이 증언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만든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오천명의 갈릴리 사람들이 증언합니다. 그 광야에서 제자들과 오천명의 갈릴리 사람들이 해변으로 내려 왔을 때 배는 단 한 척만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배였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가버나움으로 가는 배에는 제자들만 타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산으로 다시 올라 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죠.
또 다른 증인들도 있습니다. 디베랴 사람들입니다. 이튿날 아침 예수님이 광야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디베랴에 있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광야에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디베랴에서 온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을 쫓아가면 예수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버나움으로 따라 갑니다.
그때 광야에 있던 사람들도 그 배를 얻어타고 가버나움으로 따라왔습니다. 도착해서 예수를 발견하고 놀랍니다.
'어?? 예수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가버나움에 도착하니, 예수님은 지난 밤에 가버나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배에 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버나움에 계시므로 놀란 겁니다.
배를 타고 먼저 떠난 제자들은 파도 때문에 배가 뒤집힐 위험에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의 배까지 왔고 그 배를 탓 습니다.
그러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바다 가운데서 파도 때문에 배가 뒤집혀 죽을 위기에 있었던 제자들이 평안하게, 온전하게, 순식간에 가버나움에 도착한 겁니다.
이 상황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성경이 단순히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었다는 것만을 말하는 걸까요?
단지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만을 알려주는 걸까요?
여러분, 무엇이든지 아는 만큼 보입니다. 제가 그것을 증명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런 그림을 추상화라고 하는데요. 그냥 큰 검은색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이십니까?
난감하죠? 그림이라고 하니깐 보긴 보는데, 저것이 뭘 그린 건지? 무엇을 의미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혹시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았는데
이해를 할 수 없으면 직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건 누가 그렸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을 그린 작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작가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은 가득한 죄로 인해 멸망 받아야 하는 인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인생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의 은혜로 세상을 구원 하실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드렸는데요. 이제 다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제가 처음에 그냥 그림만을 보여 드렸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실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림에 대하여 설명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가 갈릴리 바다 위를 걸었다. 성경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능력만을 알려주기 위해서 였을까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매년 8월 15일을 우리나라는 어떤 날로 지내고 있죠? 광복절 입니다.
어떤 날입니까? 일본에게서 해방 된 날입니다. 그날은 기념식도 하고, 일본에게서 독립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유대인에게도 그런 날이 있습니다. 유월절입니다. 유대인에게 유월절이란 애굽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그날 모세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런데요 그 뒤를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고 쫓아왔습니다.
뒤를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데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도망 갈 곳이 없는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곧 죽게 될 처지였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모세가 바다를 가르고, 그 바다를 걸어서 건너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구원자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처럼 자신들을 구원할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 그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런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기간에 예수님은 광야에서 갈릴리 백성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 하신 후 오 천명을 먹였습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내려준 만나처럼, 예수님도 모세처럼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늘의 만나를 백성에게 먹인 겁니다.
선지자 모세가 앞은 바다 뒤는 자신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애굽 군대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바다를 걸어서 건너게 하여 준 것처럼, 예수님도 바다 위를 걸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와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게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 냈습니다.
예수님은 제2의 모세가 되어서 제자들로 대표되는 신약의 교회, 신약의 성도들을 구해낸 겁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바다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그 바다에서 무사히 건너게 하신 그 놀라운 사건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바다를 가르고, 그 바다를 걸어서 건너게 한 것과 똑 같은 사건입니다.
모세는 애굽 군대 공격으로 인한 죽음의 위험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바다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처럼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의미가 오늘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걸으신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다를 다스리는 것은 구원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홍해 바다를 걸어서 애굽을 빠져 나왔던 것처럼, 바다를 다스리는 예수님은 모세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 이심을 나타냅니다. 믿으십니까?
시편 저자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에 큰 물이 있었으나,” (시편 77:16,19)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 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시편 109:29-30)
오늘 본문과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광풍이 일렁이는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의 배에 올라탑니다. 광풍이 예수님을 삼킬 수 없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바다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 라는 사실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왕으로만 삼으려 했지만,
사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가수 최희준씨인가요? 그분이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잘 들어보시면 찬송가 같습니다. 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영원히 정착하지 못합니다. 곧 떠나야 하지요.
우리의 인생은 바다를 떠 다니는 배와 같습니다. 가장 불쌍한 배가 어떤 배 인지 아십니까? 돌아갈 항구가 없는 배 입니다. 사람의 인생이 그와 같습니다.
바다는 변화 무쌍합니다. 오늘 파도가 없다가도 잠시 후, 아니면 내일 갑자기 광풍이 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환경이 배라고 생각하고, 인생이 바다와 같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족과 직장과 삶의 터를 아무리 잘 관리 한다고 해도, 인생이라는 바다에 광풍이 불면 큰 일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 위에서 일생을 살아온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전문가였습니다. 생활의 달인입니다. 그러나 바다에 몰아치는 광풍에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꼼작 없이 죽는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바다를 걸어와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타셨을 때, 그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얼마 전까지의 저도 항상 두려웠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의 앞날이 불투명할 때가 잠시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을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실직의 공포, 그 두려움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 남동생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그리고 3명의 자녀들도 생각났습니다. 직장을 잃으면 어떻게 사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왜 그런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내 인생의 배에 예수님이 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메달려 있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을 제 인생의 배에 태웠다가, 그 필요가 해결되면 예수님을 배 밖으로 던져 메달려 있게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배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예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시더라고요. 메달려서 저를 쫓아오더라고요.
혹시, 여러분도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니신가요?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인생이라는 바다에 풍랑이 일고, 여러분이 타고 있는 배를 삼켜 버릴 것 같은 두려움입니까? 예수님을 여러분의 배에 초청하시고 배의 선장이 되게 하십시오. 저처럼 필요를 해결하고는 다시 바다로 던져 버리지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배에 오르시면 우리가 소원한 항구에 잘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다 우리를 배신하여도,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님은 절대로 배신하지도 않고,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배에 메달려서라도 여러분을 쫓아가십니다. 그러니, 이제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배에 초대하십시오.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신 분은, 목사님과 상담해 주십시오. 오늘도 목사님이 안수 하면서 기도해 주실겁니다. 기도를 원하시는 분은 목사님이 옆에 오실 때 손을 들어 표시해 주십시오.
여러분 목사님이 나오실 때까지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톰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 (서울: IVP 2011) pp111-14
2. 이필찬, 『진리가자유케하리라.요한복음』 (서울:엔크리스토 2009) pp148-65
3. 브르스밀른, 『BST주석, 요한복음』 (서울:한국기독학생출판 2009) pp138-41
설교자 메모: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일주일에 한 편의 설교를 쓰는 것도 벅차게 되었다. 강해설교를 지향 하지만, 원어의 의미를 녹여내서 스토리텔링 속으로 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강해설교는 매주 다음 설교가 정해져 있어서 본문을 선택해야 하는 부담과 시간을 줄여준다.
지난주 오병이어 표적을 설교하는 것에 많은 오류가 있었다. 은혜가 배제된 율법적인 설교가 되었고 제2의 출애굽의 주인공인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이번 주 설교는 주일 낮 설교여서 찬양예배설교보다 10분 정도 더 길게 천천히 본문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를 걷는 것은, 모세가 에굽군대의 위협 속에서 바다를 갈라 걷게 하는 것과 같은 표적이라고 설명을 반복해서 해 주었다. 예수님이 제 2의 모세이다. 모세가 에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 시킨 것과 같이, 예수님은 죄의 문제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그 선지라는 것이 중심메시지 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모세처럼 갈릴리 바다를 갈라서 제자들을 건너게 하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하셨다면 설교의 수고가 덜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왜 바다를 가르지 않으시고, 그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고, 즉시 항구에 도착하게 하셨을까?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첫 학기에 권성달 교수님의 성경지리를 배웠다. 목회자라면 꼭 수강해야 하는 과목이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하는 올라가고, 내려가고의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 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즉 산 골자기 바다이다.
해서, 만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갈랐다고 가정해 보자. 갈라져서 밀려난 바닷물은 베사다 평원을 잠기게 하고 가버나움, 게네사렛, 막달라, 티베리아를 덮쳤을 것이다. 백번 양보를 해서 그 밀려난 바닷물을 해변위로 쌓았다고 생각해 보겠다. 해변에 살았던 사람은 자연법칙이 무너진 현장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길이 열렸다. 그 바닷길을 건널 수 있을까?
그 바닥이 어떻게 생겼을까? 알파벳의 V자 같이 생겼을 것이다. 해수면에서 바닥까지의 깊이가 가장 깊은 곳은 200m가 넘는다. 그 길은 산악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건널 수 없다. 예수님은 그래서 바다를 가르지 않고, 그 바다를 걸어서 제자의 배에 오르셨고, 제자의 배는 그 즉시 가버나움에 도착한 것이다.
한스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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