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5) 동백두레교회/주일예배
삯꾼 vs 선한목자 2017.11.19. 한스킴
요한복음 10:11-18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제가 짧은 군생활을 할 때 제 주특기는 화기소대 M60사수였습니다. 여러분이 람보라는 영화를 보았다면, 람보가 사용했던 기관총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기관총이 M60입니다. 우리 부대는 분기마다 사격훈련을 했습니다. M60의 실거리 사격은 300미터 400미터 500미터 입니다.
사격이 끝나면 표적지에 몇 발을 명중 시켰는지 확인하는데요. 사격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격이 끝난 후 표적에 몇 발이 명중이 되었는지 갔다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표적지 50미터 전방에 깊은 참호를 파 놓고 거기에 표적 확인병이 들어가 사격이 끝날 때까지 대기합니다.
저는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제가요 전쟁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쟁이 잌사이팅하고 통쾌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그 참호 속에서 제 머리 위를 지나가는 총알 소리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M60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반 토막으로 만들 수 있는 무기 입니다. 그 총알이 제 머리 위를 지나가는 소리가 끔직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 총에 맞으면 죽습니다. 더구나 제가 쏘았던 M60 같은 총알에 맞으면 육체가 조각조각 나게 됩니다.
몇 일전,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총격 소리가 들렸습니다. 북한군이 남한으로 탈출하는 자기편을 향하여 소총을 마구 발사했습니다. 탈출하던 군인은 차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차 바퀴가 배수로에 빠지자, 차에서 내려 달렸습니다. 북쪽 병사는 뒤에서 쏘아대는 총탄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한국측에서도 그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북한군은 가까이 접근하는 그 누구라도 쏘아댈 기세였습니다.
총에 맞은 탈출 병사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탈출을 감행하였던 그 북한 병사를 데려와야 했습니다. 그때 공동경비구역의 대대장이 부하 두 명을 데리고 직접 구출을 감행합니다. 북한군이 다시 총을 쏘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대장인 권영환 중령은 부하들에게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 중령은 자신이 직접 나섰습니다. 작전이 끝나고 권중령에게 물었습니다. 왜 직접 갔냐고 물어보았을 때, ‘차마 아이들보고 가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을 받은 부하는 작전 중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휘관을 일컬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참 군인”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는 지휘관입니다. 그런 군인을 ‘참 군인’ 이라고 합니다.
(1) 선한 목자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본문에도 ‘참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인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예수님이 왜 선한 목자인지를 설명하는데 등장시키는 동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리라고 말하는 동물입니다. 다른 말로 늑대입니다. 늑대는 무서운 동물입니다. 양 정도는 한 입에 물어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늑대가 무서운 것은 한 마리도 힘이 엄청 난데, 사냥할 때는 혼자 다니지 않습니다. 무리를 지어서 다닙니다. 최소 단위가 보통은 5-6마리 입니다. 많게는 수십 마리가 같이 공동 사냥을 합니다.
목자가 양을 먹이기 위해서 풀밭으로 인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이리떼가 다가 오고 있는 것을 삯군 목자가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삯군이라고 표현한 목자는 양들이 자기 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목적은 돈만 벌면 되는 사람입니다. 이리떼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생각합니다. ‘내가 돈을 벌라고 일하지, 죽으려고 일하나? 일단 살고 보자’. 하고 양을 버려두고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늑대가 양떼 전부를 죽이지는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먹을 몇 마리를 죽이고, 몇 십 마리를 물어 뜯어 놓을 겁니다. 늑대에게 물린 많은 양이 죽겠지만 전멸하지는 않습니다. 도망 가면서도 삯군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합니다. 삯군들은 목자의 자리에 있기 위해서 양을 위해 어떤 헌신이든지 할 것처럼 위장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신이 참 목자처럼 양을 돌보겠다는 각오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그 일을 직업으로 생각하고 일하다가, 죽음의 위기가 닥칠 때는 양을 버려두고 도망갑니다. 그래서 삯군입니다.
사실, 원래 그런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양들의 주인이 아닌데, 쥐꼬리 만한 월급만을 받는데,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겠습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래서 삯군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는 겁니다. 삯군은 절대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는 목자가 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그 양떼의 주인이 자기 아버지 입니다. 아버지가 양의 주인입니다. 목자는 그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양들을 상속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양떼들의 주인은 아들이기도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요? 아버지의 양떼이므로 같이 자랐을 겁니다. 그러므로 양떼들도 아들을 주인처럼 당연히 잘 따릅니다.
먼저 성경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입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아들이 양떼 지키고 있는데, 멀리서 늑대들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은 양의 주인입니다. 참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양을 보호하려고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양들을 양의 우리에 들어가게 합니다. 산속에 있는 우리는 돌을 쌓아서 만들고 그 주위에 가시나무를 덮어놓았다고 합니다. 목자는 양들이 우리에 모두 들어가면 문 앞에 섭니다. 양들을 보호하는 양의 문이 되는 겁니다.
누구든 양에게 가려면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목자가 양의 문이 되어서 아무도 양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겁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가 자신의 양을 그렇게 보호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그 상황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문이 되어서 사랑하는 양들을 지키신다는 뜻이죠. 그렇기 때문에 참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겁니다.
목자는 양을 죽이고 헤치는 늑대 떼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 양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때 상처 입을 수 있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양을 지키는 것으로 끝내는 목자의 의미를 벗어나는 심오한 말씀을 합니다. 늑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아직 거기까지는 깨닫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예수님이 참 목자의 모습으로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킬 것이라는 의미로만 해석을 하였을 겁니다. 이중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먼저는 이스라엘과 장차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2) 왜 선한 목자인가?
예수님은 지금까지 비유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재구성 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에서 사역을 시작 하신지 2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유대 땅의 존경 받는 선생님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 중 대 부분은 토라(성경)를 교육 받았습니다. 목자입니다. 그래서 양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알고 있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양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목자는 하나님 입니다. 그 하나님의 양들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전파하는 복음을 싫어하고 시기하는 이리떼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지만, 그들의 본 모습은 돈을 사랑하는 무리였습니다. 권력을 사랑하는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삯군이요. 양을 헤치는 늑대 무리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권력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의 양들에게서 예수님을 떼어놓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죽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양떼들을 우리에 넣고 보호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이제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늑대들로 불려진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권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힘이 쌔고, 영악하다고 해도 예수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죽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목숨을 버릴 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3)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은 누구인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면 어떻게 됩니까? 목자가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양을 지키는 목자가 죽었다면 양들은 늑대의 먹이가 될 겁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으면 안되죠.
그런데 비유로 자신과 양들이 처한 상황을 지금까지 이야기 해주고 나서,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양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3)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49:6)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그런 아들이 참 아들입니다. 선한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이스라엘의 양 뿐만이 아니라, 이방까지 구원을 베푸시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양 뿐만이 아니라, 그 우리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해결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로 양들을 이끄실 수 없습니다. 공의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모든 양들의 죄의 값으로 내어주는 겁니다.
목자는 늑대무리들이 힘이 쎄고 무리를 짓고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무리들에게 양들을 돈을 주고 사는 겁니다. 그 돈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선한 목자 되신 그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저주가 아니라 복을 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땅끝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신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모두 눈을 감으시고 기도하시겠습니다. 목사님이 나오 실 때까지 기도하시는데요.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지키는 것이 있습니까? 돈과 권력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돈과 권력은 내 육체가 병드는 것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주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이 부활해서 입은 그 부활의 육체를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곳에 와서 그 육체를 입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죄와 같은 늑대의 무리에게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 죽음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 톰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 (서울: IVP 2011) pp211-5
2. 이필찬, 『나는선한목자라.요한복음』 (서울:엔크리스토 2011) pp96-110
3. 브르스밀른, 『BST주석, 요한복음』 (서울:한국기독학생출판 2009) pp194-7
4. 목회와신학편집, 『요한복음,어떻게설교할것인가』 (서울:두란노서원 2009) pp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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