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학이야기

나의 우리의학 순례의 길2

한스킴 2004. 2. 13. 10:23

 

농촌으로 내려갈 결심을 굳히고

8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우리농촌과 농민의 삶이 전국민에게 생동감있게 비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이 진행되면서 쌀을 비롯한 농산물 수입개방이 이뤄지면 농민들의 생활터전이 붕괴되고 한국농민이 살아남기 힘들 것이란 의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농민들은 의기소침하여 농촌을 떠날 준비를 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이들은 절망감에 싸여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몸도 도시에서 계속 살다가는 지탱하기도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게다가 제가 하는 신학이 이 땅의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현장과 결합해야한다고 생각했던 저는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삶의 근거를 옮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막상 농촌으로 옮겨 살아갈려고 생각하니 내가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고 대학에서 강의하던 자로서 농민들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당시에 유행처럼 번지던 수지침을 배워서 농촌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배울 곳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요행히 서울 신촌에 있는 연세대 민주동문회사무실에서 주관하는 수지침강좌 소식을 듣게되어 아주 저렴한 비용에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요가나 니시건강법 그리고 침뜸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 손으로 직접 침을 놓고 뜸을 뜰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가 이해가 일천했지만 우리의학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외워둘 필요가 있는데도 외우는 것이 더뎌 마지막 수료시험을 보았을 때 꼴찌를 한 것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가르치는 것이 가장 잘 배우는 것

서울을 떠나 거창읍으로 옮겨서 자리를 잡게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수지침의 도움을 받은 자들이 조금씩 생겨나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가르쳐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제 실력이 너무도 형편없었던 터라 도저히 가르칠 수 없노라고 말씀드렸지만 몇 차례의 요청을 받고 돕는 뜻에서 아는 만큼만 가르쳐드리기로 하고 공동으로 재료와 책을 구입하여 12주 계획을 세워 강좌를 열었습니다. 그 때 참여한 이들이 주로 거창지역 농촌목회자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이미 한 번 배웠던 것을 다시 익혀가며 가르치다 보니 제게도 큰 도움이 되었고 함께 참여한 이들도 흡족해하여 참 인상적이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강습이 있고 난 뒤 저는 거창지역에서 일약 유명강사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거창군농민회, 거창군여성회, 전교조 거창지회, 거창문화센터, 거창 ymca 스포츠단 자모회 등에서 10여 차례의 강습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거창을 넘어 김천ymca, 해남 ymca, 이서 농촌개발원, 원항교회, 청주제일교회, 광주지역 목회자모임, 대구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포항지역, 부산지역 등등등 50여 차례의 강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여자들이 질문하면 곤궁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럴 때는 솔직히 모른다고 하고 나름대로 연구하여 답을 찾아내기도 하고 더 나은 전문가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점차 많은 다양한 상황과 임상실습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죽어가던 자들도 살려낸 경험도 수차례 하게 되었습니다. 점차 의학이 재미가 붙기시작하면서 수지침을 넘어서서 몸침과 관련된 책도 보고 직접 배워서 익히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서양의학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의사 친구들에게 인체해부학 병리학 약물학 공중위생 예방의학과 같은 책들을 빌려 보아가며 서양의학과 우리의학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서로 도울 길은 없는지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본업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한 번 재미가 들린 우리의학에 대한 탐구는 제 관심을 끝없이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텃밭수준의 농사를 지어오다 94년부터 98년까지는 본업농사꾼으로 살기로 스스로 서약한 바가 있어 점차 우리의학과 관련된 활동을 자제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진료활동이나 강습활동을 피하고 오로지 자립하는 농사꾼으로 살아가려 애썼습니다. 우리의학의 입장에서 보면 바른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사도 우리의학에서는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농민들과 하나되어 살려고 하는 한 열심히 농사지어 농사만으로도 자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창에서 1800평의 과수원과 1000평의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은 때도 있었고 한곳에 몰려있는 만 평 농장을 얻어 우리밀과 우리콩을 비롯한 각종 야채를 생산하며 벌도 키우는 농사를 하며 먹고 사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잘 해결해내었고 생명살림의 농업에 대한 한 체계도 나름대로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합천에서 새롭게 시작한 우리의학 강좌

97년부터는 농장터를 구하러다니다 거창에서 합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농사와 교육이 중심이 된 공동체를 한다고 여러가정이 모여서 공동체적 삶을 구현하려 애쓰다가 흩어지는 아픔도 겪었지만 제가 합천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역시 한민족생활의학 강좌였습니다. 합천으로 옮긴 둘 째 해인 98년 봄부터 합천군청 사회복지과에서 여성취미교실의 하나로 한민족생활의학 강좌를 개설하여 제게 강의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2시간짜리 16회로 구성된 한강좌만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많은 요청이 있는지 지금껏 40여명씩 9기를 마쳤습니다. 30명 모집을 해도 추가로 억지를 쓰는 이들 때문에 항상 40-70명씩이나 되었으니 합천에서 강좌에 참석한 이들만 해도 400명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제 고향이 합천이지만 고향 떠난 지 30년만에 다시 찾게된 합천에는 전혀 아는 이들이 없어서 얼마나 낯설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리에 나가면 아는 이들로부터 몇 번씩이나 인사를 받을 만큼 안면이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학 전파의 사명을 절감하며

그러다 점차 제자신이 이러한 우리의학 강좌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약간만 익히기만 하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기도 하고 위기에 처해서도 안정감있게 사람을 보살필 수 있기도 하고 스스로 건강을 얻을 수 있는 이렇게 중요하고 좋은 방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동안 가르치고 익히며 깨달은 바의 내용이 너무도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 많아 그것을 남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제게 차올라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는 우리의 몸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의 전과정을 통해서도 우리 인체에 대해 배우는 내용과 양이 너무 보잘 것 없고 그것도 서양의학 일변도로 채워져있습니다. 대학에서도 배울 기회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고 사회인이 되고는 더더구나 그런 기회가 잘 오지 않습니다. 결국 제 몸의 주인이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보기보다는 약사나 의사에게 의존하고 마는 것이 우리모두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건강한 우리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전해지는 말 가운데 '돈을 잃은 것은 적게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서에도 온천하를 주고도 한 생명과 바꿀 수 없다는 말이 나오듯이 우리의 생명은 참으로 소중한데도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데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지만 정작 중요한 몸을 체계적으로 익히고 돌보는데는 너무도 인색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학 이야기를 통해 우리몸 바로알고 건강한 몸 만들어가기운동을 펼쳐가려고 합니다.

또한 너무도 쉽고 안전하지만 유익한 많은 우리의학적 지식과 기술들이 상업적인 의료체계를 통해서는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사장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까지 제도권 의학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오히려 제도권 교육에서 소홀히하거나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들이지만 우리조상들이 전해준 중요한 우리의학의 생활건강법들에 대하여 제가 아는 만큼 많은 분들께 나누어드리려 합니다. 제 글이 진행되는 동안 회원으로 참여하는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말과 질문들에도 성실하게 답변을 찾아가면서 제자신도 성숙해가고 이 땅의 우리의학도 더욱 발전해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