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싶다. 신학대학원 수업을 들으면 어떤 교수는 말한다.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또는 '설교를 하면 내가 살아 나는 것 같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 그 정도의 마음가짐은 가지고 있어야 설교자라고 할 수 있지' 하고 생각하였고, 그런 설교자가 되고 싶었다. 매주 설교 강단에 서면서 나는 어떤 설교자 인가 생각해 본다.
좋은 설교자 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은 "아니다"라고 망설임 없이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10년 후 쯤으로 생각해 보자. 그때도 '당신은 좋은 설교자였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그때도 망설임 없이 말할 것 같다. "아니요, 좋은 설교자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설교는 몇 편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희망사항이다.
좋은 설교자라는 것은, 그 사람의 전 인격까지 포함이 되는 것이다. 인격적으로도 설교를 하는데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는 할 수 있을까?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도 두 가지가 완벽하게 필요하다. 첫 번째, 좋은 설교문을 쓸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잘 전달해야 한다. 좋은 설교문을 쓰고도 그것을 잘 전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책을 출판하는 편이 옳다. 두 번째, 설교문의 내용은 썩 좋지 않더라도,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표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나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훈련에 의하여 진보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진심이다. 그나마 괜찮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도 나의 인격과 맞물려서 설교의 내용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죄송하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주된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이며,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위로하는 메시지만 매번 말씀에서 선포가 되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는, 주어지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인간인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다 놓고, 회개하게 하여야 한다. 쉽지 않다. 내가 지금까지 행한 설교를 되돌아 볼 때, 그 정도의 내공이 없다.
아직은 초보 설교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고민이 있다. 내 인격과 내 내면을 살펴보아 설교자로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 정도까지 고민할 수준은 아니다. 당장 설교를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성도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좌절하게 된다. 마치, 당장 내일 뭘 먹지? 하는 고민처럼, 이번 주 어떤 말씀을 전하지 하는 압박감이 밀려온다. 초보 설교자이지만, 남의 설교를 들고 강단에 설 수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지적이 아니어도, 그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설교에 대한 고민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지난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제에 쫓기다 보니, 시간이 없었다. 설교실습 중 받은 동료 전도사님의 설교 한편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나와는 성경을 보는 관점도 틀리고, 내 호흡으로 읽을 수 없는 글이었다. 강단에 올라서도 분명 남의 설교라는 것이 표시가 날 것 같았다. 그 순간 전화를 들어서 담임목사님에게 이번 주 설교는 준비가 되지 않아서 할 수 없겠습니다. 목사님이 대신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싶었다. 순간의 생각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나만 그럴까? 오늘 담임 목사님과 같이 공부하는 곳에 동행하면서 목사님의 진솔한 말을 들었다. 지난주 자신의 설교가 이상하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 좋았다고 이야기 해주면서, 다만 평소보다 원고를 많이 보시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를 하였더니 뜻밖의 고백을 하셨다.
금요일부터 교회에서 홀로 설교를 준비하였는데, 전도사님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설교가 작성이 안 되는데, 전도사님이 대신 해주시면 안되느냐'하고 말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우리 둘은 똑같은 갈등을 하였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그날의 설교 내용을 보니, 담임목사님은 오전예배를 '성령'에 대하여 하였고, 나는 공동식사 후 찬양예배에서 동일한 주제를 '하나님의 영'이라고 표현하여 말씀을 전한 것이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에 대하여 정의를 하였다. 정말 궁금했다. 이분은 설교를 무엇이라고 정의할까?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강단에 서야 한다.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강단에 서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강단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을 변화시켜서, 이전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물론 지극히 옳은 정의이다. 좋은 충고이다. 그런데 많은 선배들이 말 하였다.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은 설교로 변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마도 옥목사님은 설교가 아니라 설교에 담기 말씀, 즉 성령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를 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저자는 '설교문은 언제나 강해로 작성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말씀과 그 말씀에 담긴 뜻은 단순히 풀어내는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설명해서 좀 어렵다. 그러나, 내가 지금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설교에서 저자의 조언하는 많은 것 중, 부합되는 부분이 한가지 있다. '어떤 경우에든지 설교자는 이 땅의 인생이 잠깐뿐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충고이다. 이것은 내가 설교 할 때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기 위해 단골로 전하는 부분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적으로 삼고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을까요? 네, 잘 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잘 먹고,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도 살 수 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에게 기도해도 그 정도는 해 줍니다. 그 정도의 권세를 사탄은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얼마를 살 수 있습니까? 고작 100년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나 그 후에는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지옥을 판결 받게 됩니다."
지난주 설교에도 이런 맥락의 말씀을 포함해서 전했다. 성도의 고난을 이야기 할 때면, 경고와 위로를 주기 위해 이 땅의 삶이 잠깐 뿐이라는 것을 성도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다른 고민이 있다. '내 설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 주는가' 이다. 앞으로 '내가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가' 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없다. 그러면, 또 꼬리를 물고 생기는 의문이 있다. 그럴 자신이 없는 내가 정말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원칙적인 질문이다. 소명에 대한 질문이다. MDiv로 편입을 결정하면서, 나의 소명에 대한 부분에 대하여 계속적인 점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 드렸었다. 그 근거로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장사'비유를 소명으로 인식하였다고 고백했다.
초보 신학생에게, 설교자로서 강단에 서라는 담임목사님의 뜻밖의 권고와 기회 주시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설교자로서도, 설교문을 쓰는 훈련에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설교자로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한다. 자기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기도도 부족하다. 성경은 신학대학교에 입학하니 더 적게 읽고 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신학을 하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독서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균형 있게 읽지 못하였다. 내 전공분야에 편중되어서 읽었다.
저자는 설교를 강해식으로 작성을 하되, 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하라고 말한다. 주제설교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제를 미리 정하고, 성경을 찾아서 설교문을 만드는 설교를 하지 말라. 공감한다. 아직까지 주제설교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빨리 수긍이 간다. 본문을 정하고, 본문에 충실한 설교문을 작성하기 위해 고민했던 지금의 설교방식을 고수해도 된다는 것에 안심을 한다. 나는 지금까지 원고를 신뢰하고, 더 철저하게 원고를 준비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저자는 조심스럽게, 원고보다 성령을 믿으라고 조언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자유를 누리면서 회중과 접촉하라는 저자의 조언을 언제쯤 따를 수 있을까?
설교와 설교자를 읽다 보니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ㅇㅇ 전도사가 '교수님, 같은 설교를 계속 반복해서 설교해도 되요? 정말 중요한 것이라서요.' 라는 질문이었다.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관심 있게 읽었다. 물론, 반복해서 설교하는 것을 저자는 다른 장소,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한정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저자는 장소가 다른 곳, 다른 청중에게 설교를 한다면, 한 가지 법칙을 말한다. 그 설교가 설교자를 사로잡는 감동이 없다면 더 이상 은혜의 통로가 되지 않으니 그만 하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동일한 설교를 다른 장소에서 한 경험이 없지만, 나라면 같은 설교라도 다른 버전의 설교를 만들어서 말씀을 전 할 것 같다.
내가 가장 좌절했던 설교의 경험이 있다. 나름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고, 성도들에게 바울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설교한 본문을 선택하여 한 구절씩 읽게 하고, 봉독이 끝나면 내가 이어서 그 본문을 강해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날 설교가 내가 설계한 시간보다 일찍 끝났다. 물론 설교가 끝나고 내려오면서 '망했다' 하는 생각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공동식사가 끝나고, 구역성경 공부가 끝낸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침울하게 서 있을 때였다. 재활병동에 입원해 있었던 성도 한 분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그분은, 내 설교를 듣고 병실로 올라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부분을 찾아서 읽었다 말하곤, 설교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분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래도 한 분을 만족시켰으니 감사하다. 오늘은 저분에게만 설교를 전한 것이네,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였다. 지금은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한다. "하나님, 비록 제 설교문이 미흡하고, 제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전달을 잘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중 내 설교가 필요한 단 한 사람에게라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회개가 되는 설교가 되게 하십시오."
처음 강단에 설 때는 너무 두려웠다. 지금은 매주 설교문을 쓰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다. 내 속에서 쏟아지는 신앙고백과 하나님 앞에 성도를 세우는 감동으로 벅찼으면 좋겠다. 아직은 설교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어렵고 힘이 든다. 내가 설교를 해도 될 만큼의 인격과 자질이 있는지도 자신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마음이 더 겸손하게 내 생활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모양으로 작용했으면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저서 '설교와 설교자'는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책이 아니다. 나를 질책하고 격려하는 멘토 처럼 책상 위에 두고 수시로 보아야겠다. 만족한 설교문이 작성되지 않았다 해도,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기도하고, 청중과 소통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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