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대로쓴書評...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 레슬리 뉴비긴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한스킴 2015. 12. 9. 20:30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작가
레슬리 뉴비긴
출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평점
5점






 신학생으로서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신학생 뿐만 아니라, 선교사나 교회 지도자가 숙지하여야 할 내용이지만 특별히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말하는 목회자와 신학생은 필독서이다. 책이 좋다고 하여서 이 내용을 모두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지혜대로 잘 받아들이라는 이야기 이다. 레슬리뉴비긴의 저서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이승구교수가 뉴비긴의 신학과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리뷰를 써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한마디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래서, 나의 리뷰보다는 이승구교수의 리뷰를 그대로 인용한다. 



레슬리 뉴비긴의 신학에 대한 고찰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대학생 때 친구의 권면에 따라 매일 점심 시간 전 30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기독교적 이해를 추구하던 한 젊은이몇 년 후 기독교 사역(Christian Ministry)에로 헌신 하고, SAM의 지체와 간사로 활동하면서 선교사로 결단한 젊은이그 일을 이루기 위해 신학교에서(영국에 슐라이어마허를 진지하고도 체계적으로 소개한죤 오만(John Oman) 밑에서 자유주의적 신학을 공부한 신학생그러던 중 로마서 공부를 통해 구속의 중심성과 객관성을 확신하는 이가 된 젊은이그리하여 그 열정으로 가지고 1936년 인도의 선교사로 가서 효과적으로 사역하며 남인도 주교(Bishop of South India)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하며 또한 세계 교회협의회(WCC)의 여러 활동들을 감당했던 그 사람이 바로 레슬리 뉴비긴이다.

1974년 은퇴 후에는 인도에서 도보 여행으로 영국으로 돌아가(65버밍햄의 셀리 오크 선교사 훈련 대학에서 가르치고영국 교회의 여러 문제에 관여한 후 그가 발견한 문제를 지적하는 영국을 포함한 서구 교회에 대한 도전서 The Otherside of 1984: Questions to the Churches를 내었고[2], 프린스톤의 워필드 강좌를 하고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를 낸[3], 그러면서도 늘 검소하고 따뜻한 이웃 환대가로 노년을 보내고, 1998 1 30일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따뜻하고 겸손하면서도 용감하게 서구 기독교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었던 인도와 영국 두 세계 모두에 대한 선교사라고 칭할 수 있는 이 영국인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 레슬리 뉴비긴의 공헌

 

    {종교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의 복음}에서 뉴비긴은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의 문제점과 특히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을(36) 잘 드러내어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특히 레슬리 뉴비긴은 이런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가 지난 300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발전되어 온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2, 3, 4, 13). 지난300여년 동안 서구 사상은 결국 사실의 세계(world of facts)와 가치의 세계(world of values)를 철저히 나누는 새로운 이원론을 발전시켰는데이것이 옳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 사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뉴비긴은 잘 보여 준 것이다더구나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 전통적 기독교 비판은 결국 인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 전통이라는 또 다른 신앙(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뉴비긴은 잘 보여 주었다그래서 뉴비긴은 기독교의 합리적 전통과 인본주의의 합리적 전통을 대조시키는 것이다더 나아가서 뉴비긴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기독교나 기독교의 유일성이 신화가 아니라오히려 옥스포드 대학교의 경제학자였던 데니스 먼비(Dennis Munby) 1960년 대 초반에 쓴 {세속 사회의 개념}(The Idea of a Secular Society)과 이에 근거해 나온 저작들에 전제된 "세속 사회"라는 개념이 신화(myth)라는 것을 잘 지적하여 내고 있다 (17).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강조와 그것의 사실성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증언에서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뉴비긴의 강조는 모든 것을 다 상대적인 것으로만 취급해 버리는 이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매우 중요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그 한 부분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으로 이 세상에 임하여 역사 가운데서 진행하여 가고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으로 극치에 이를 하나님 나라[=하늘 나라天國]와 교회그리고 선교의 의미를 잘 연결하여 쉽고도 바르게 설명하는 일을 뉴비긴은 잘 해 내었다(9, 10). 이와 연관해서 그가 선교는 인간의 의무감에서 나타나는 인간적 행동이나 우리 자신의 사업이 아니라, "기쁨의 폭발로 시작"하고(191),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192f.), "새로운 실재의 현존곧 능력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현존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195), 그리고 그것은 "진리를 나누는 것"이고(205), 이런 선교의 중심에는 "단순하게 그[하나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과 그 분을 우리의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요(208), "감사와 찬양이 있고"(205),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으로 표출되는 송영"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귀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209).

마지막으로 뉴비긴이 복음 해석자로서의 회중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만드신 믿음의 공동체는 찬양 공동체요진리의 공동체이고이웃의 관심사에 깊이 있게 관여하는 공동체성도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준비되고 지탱되는 공동체서로 첵임지는 공동체희망의 공동체라고 잘 제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높이 사게 된다(18 ). 이런 그의 책을 우리 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

 

 

2. 레슬리 뉴비긴의 논의에서 아쉬운 점

 

   그런데 뉴비긴은 기독교 신앙의 정당한 변호를 하려고 하면서 "성경에 뿌리를 둔 기독교 신앙은 우선 이야기즉 자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옳게 지적하면서(32f.), (오늘날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대개 그리하려 하듯이이를 명제적인 진술과 좀 대립시키면서 논의한다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인상은 기독교적 이야기에서 명제를 도출해 내는 모든 시도를 다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는 것이다(32). 그러나 우리는 바로 정확히 그런 시도를 하였던 헤겔 같은 이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서 기독교 이야기로부터 얼마든지 명제적 진리들을 이끌어 내고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사실 전통적 신학은 계속해서 그런 작업을 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기독교 이야기 가운데서 바르게 기독교적 명제를 이끌어 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지그런 명제적 진술을 하는 것이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만일 그렇다면 이 책 자체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명제를 도출해 내고 그것에 근거해서 신학적 토론을 하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이제부터 신학적 논의는 전혀 명제화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기사 신학(narrative theology), 이야기 신학(story theology) 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기사(narrative)와 명제를 대립시키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은 시도로 보인다이는 뉴비긴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런 성향을 지닌 모든 이들의 공통된 문제이다.

 

 둘째로뉴비긴이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전통들 가운데서 "어느 전통이 믿을만한 것인가를 미리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될만한 외부 기준도 없다만일 내가 기독교 전통 안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전념한다면그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결단이 된다"(128f.)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아쉬움이 크다물론 뉴비긴은 폴라니(Michael Polanyi)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의 논의를 따르면서 우리의 이런 결단과 헌신은 "보편적 의도"를 가짐으로 단순한 주관성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며(129, 207), 또한"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모든 경험에 대해 더 비중 있는 일관성과 인지성을 줄 수 있는 합리적 전통임을 오늘날의 삶의 현장에서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 한다(129). 그는 또 다른 곳에서도 그는 "두 가지 전통의 활력과 온전성을 비교하는것이 남아 있다고 하며, "그러나 궁극적 결론은 홀로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판결을 내리는 종말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111)라고 말한다(125 참조).

 결국 이것은 뉴비긴이 일종의 "종말론적 검증"(eschatological verification)을 생각하면서그때까지는 모든 전통들의 대조 가운데서는 "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모든 경험에 대해 더 비중 있는 일관성과 인지성을 줄 수 있는 합리적 전통"으로 드러나는 것, "어떤 전통이 활력과 온전성을 가지 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일종의 기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묻게 한다그는 물론 뒤에서 우리의 결단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결단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로 앞의 진술을 보완한다(129). 만일에 그가 진정 이 후자의 보완하는 말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보여 주신 계시가 있고그 계시에 충실한 반응만이 믿을만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것을 "외적 기준"을 제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자주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계시"라고도 말하지만(277), 그것을 그런 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까지는 나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이런 그는 세속적 인본주의국가주의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교 등을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강하게 논의하는 제10장에서의 논의(특히 200, 201)의 요점을 잊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오히려 그는 계시를 말하는 기독교 전통도 다른 합리적 전통과 나란히 선다고 말하면서 알라스데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함께 강조하기를 "이런 경쟁적 주장들의 유효성에 대해 판결을 내릴만한 중립적인 재판석은 없다"(109)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로그가 때때로 복음 전도(선언적 기능)와 정의와 평화를 위하는 행동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봉사적 기능)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과 그에 대한 그의 조화의 시도는 좀 애매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그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교회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도 무시해 버리는 선교 개념을 지지하는데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221). 그러면서 이런 것이 " 그 개념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잘못 사용한 경우다"라고 말하고 있다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비판하는 이들과 여전히 그런 극단적 오용을 주장하는 이들을 앞에 놓고 그것이 "현재 기독 공동체를 철저히 분열시키는 선교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개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221, 222) 과연 정당한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뉴비긴의 논의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결국 그가 말하는 100년 전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 학교에서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을 영원히 기뻐하는 것이다"고 배우고그것이 별들의 운행만큼이나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36)이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 동안 다원주의자들에 의해서 더 이상 사실이 아닌 개인적 의견으로 여겨진 것에 대항해서뉴비긴의 논의의 결과로아니면 적어도 그의 논의 안에서는 이것이 다시 자명한 사실로 회복되었는가에 대해 물을 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다'라고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모호한 점이 그의 논의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뉴비긴이 제시하는 기독교가 19세기 말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믿고 신봉하던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에 대해 뉴비긴 자신이 과연 적극적으로 그렇다고 말하려는 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특히그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분은 어떤 사람은 영광을 받게 하고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만드시지 않았다"(138, 141)라고 단언할 때 이런 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물론 선택은뉴비긴이 잘 강조하는 바와 같이, "특권적 신분으로서의 선택"이 아니다(139).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고난과 비난과 굴욕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국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140, 141)고 시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비긴이 바르트와 같이 "예수님은 나중에야 세상에 나오신 분이 아니다그분 안에서그분을 통해서그리고 그 분을 위하여 우리와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그 분이 인간의 본질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준다"(142)고 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함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논의가 "보편 구원론적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물론 그는"우리가 로마서에서 공부한 말씀은 보편 구원론적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145). 그러나 그는 또한 가장 엄격한 자기 훈련의 요구가 고전 9:27 같은 말씀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복음의 전체적 성격이 긴장을 유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145). 그는 이로부터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합리적 보편 구원론을 거부하며(145, 146), 또한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 받을 것인가를 따지는 일에 휘말리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논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도록한다고 말한다(145). 그러나 그는 왜 "우리는 누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성경은 분명히 어떤 구별을 말하고 있다"고 단언하지 못하는가바로 이런 곳에서 뉴비긴의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다.

 

 

3. 한국에서의 종교 다원주의 논쟁에서 유의할 점

 

 무엇보다 먼저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나 또 어떤 점에서는 인도 사회와도 달리기독교가 어느 정도 이 땅에 선포된 상황 가운데서는 이미 우리가 종교적으로 다원적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뉴비긴도 말하고다른 많은 이들도 말하듯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세계도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곳이었다"(254). 그 초대 교회의 상황과 한국에서는 이런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상황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헌신하도록 하는 기연이 되었다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사회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단에 근거한 신앙의 선택을 의미했던 것이고때로는 그 결단에는 큰 희생이 동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한국 상황에서는 종교 다원적 상황은 서구에서 최근에 겪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에로의 변이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서구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책에서 레슬리 뉴비긴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에 직면해서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정신사적 작업에 근거해서 이데올로기적인 종교 다원주의나 내포주의를 제시하고 그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결론인양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그런 입장은 상당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뉴비긴을 포함한 여러 비평가들이 잘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 종교 다원적 현상과 (2) 종교 다원주의를 구별해야 한다종교 다원적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고어떤 의미에서 이런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핍박을 받지 않으면서 또 강제 받지 않으면서 참되게 신앙하고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그러나 종교 다원주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이런 비판에 직면해서 서구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이나 내포주의자들은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나아 갈 길은 무엇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를 유일한 진리요 바른 신앙으로 선택했던 한국 등의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의 기여할 바가 있다고 여겨진다유교나 불교나 도교의 도리를 다 살펴보고그들이 제시하고 삶의 길을 정진하며 그 안에서 힉(John Hick) 등이 동료 종교인들에게서 발견하는 성인적(聖人的삶의 길을 열심히 걷다가도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의 계시에 부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의 자신들의 노력과 구원에의 열망이 참된 것이 아니며그것이 진정한 해방(liberation)과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선언하며 다른 이들도 이 유일한 구원의 길로 초청하는 일을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이것이 종 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복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

 둘째로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에 반대하는 배타주의(exclusivism)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그 다양한 배타주의적 입장 중에서 어떤 태도가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가장 충실한 것인지를 물으면서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 비판에서는 다양한 배타주의가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도과연 우리가 어떤 사상을 우리 자신의 사상으로 가져야 하는 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에 반발하는 배타주의에는 크게 나누어서 (1) 바르트주의적 배타주의와 (2)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그리고 (3) 정통적 개혁주의적 배타주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주의적 배타주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면서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선택된 사람이고 인간 예수만이 버려진 인간이고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며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부정되고 다시 긍정된다고 하므로, (1)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만인 구원론적 정향의 결론에로 나아가든지아니면 (2)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긍정되나 그 구원에서 자기 스스로를 배제할 사람이 있고 그들은 어린양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에로 나아간다때로 뉴비긴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 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146). 그리고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대개 최종적 구원은 하나님의 대권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전혀 말할 수 없다는 말을 강조하여 말한다(인간 편에서의 불가지론). 뉴비긴의 비슷한 강조를 보라: "그러나 궁극적 결론은 홀로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판결을 내리는 종말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111, cf. 125, 286, 287, 290, 296); "이런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어떤 제한을 두거나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의 영역 밖에 있다고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고자 하는 어떤 유혹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146). 이 때 뉴비긴은 끝까지 예수를 주와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분들까지도 포함시켜서 생각하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뉴비긴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그것이 중심적 질문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단언"하면서 논의하고 있다 (285f.).

 그는 바르트와 크래머에게 동의하면서 "정말로 신중한 신학자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의 가능성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287). 그래서 뉴비긴은 자신의 입장을 규정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긍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적이다그러나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295).

 이에 비하면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나[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타락한 인간 중에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 구속을 믿은 이들은 구원함을 받고가기 스스로 이를 저버린 이들은 구원함으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제한 구원, limited salvation). 이를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라고 언급한 이유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내포주의를 주장하는 클락 피녹 등은 자신들의 내포주의가 알미니안적 해석에 충실한 것이라고 지나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정통적 개혁주의적 배타주의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궁극적으로 구원 받을 이를 위해 구속을 이루셨으므로(제한 구속, 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는 결코 무()로 돌아 갈 수 없고 반드시 효과를 내고야 만다는 것을 강조한다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반드시 유효한 결과를 내고야 만다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튼튼하고 믿을 만한 구속을 이루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타주의나 특정주의 입장을 주장한다고 해서 다 같은 사상이라고 하기 어렵고이런 크게 다른 배타주의적 입장 가운데서 과연 어떤 것이 성경에 일치하는 것인지를 잘 살펴서우리는 성경에 일치하는 일관성 있는 사상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이것이 이 문제를 다루는 우리들에게 최종적으로 부과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하고우리는 어디까지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나가려고 하는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묻는 이들에 반해서,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를 외치거나 논의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이 말을 해석하는 우리의 해석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각자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를 외치거나 논의하면서도 결국은 기독교의 온전한 진리성에 충실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나만을 위한 진리우리 집단만을 위한 진리마지막 까지는 그 진리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라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이다그 진리는 물론 나의 삶 가운데서 주체적으로 살아져야 하는 주체적 진리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글에 대한 주()------------------------------------------

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이 글은 Leslie Newbigin, The Gospel in a World of Religious Pluralism (London: SPCK, 1989), 허성식 역,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서울: IVP, 1998)에 대한 서평 중심의 논의로 쓰여진 것이다탁월한 번역에 감사를 드리고때때로 나타나는 번역과 음역의 문제는 본문 가운데서 논의하는 중에 시사될 것이다.

 

2 The Otherside of 1984: Questions to the Churches (Geneva: WCC, 1983), 이는 서정운 총장의 번역으로 {서구 기독교의 위기}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7)로 소개되었 다. 3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 (London: SPCK and Grand Rapids: Eerdmans,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