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0) 동백두레교회/주일예배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예수가만난여자-간음한여인) 2017.10.29. 한스킴
요한복음 7:53-8:11 53[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제가 여러분에게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을 한 분만 말씀하시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솔로몬 왕이라고 말할 겁니다. 유명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두 여자가 젊은 왕 앞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매춘부였고, 한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 다 아들을 낳았는데,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두 여자는 모두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DNA감식도 없는데, 어떻게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왕이 판결을 내립니다. 칼을 가져와서 아이를 둘로 쪼개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되면 두 여자는 공평하게 아이의 반쪽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왕이 이렇게 판결을 하자, 두 여자가 즉각적인 반응을 합니다. 한 여자는 현명한 판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여자는 상대 여자에게 아이를 주어서라도 제발 아이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누가 진짜 엄마인지, 의문의 여지 없이 밝혀진 겁니다. 솔로몬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 유명한 판결은 열왕기상 3장16절부터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모두가 알고 있는 솔로몬의 명 판결이 생각나는 사건이 성전에서 벌어집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인기스타였습니다. 유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활동한지 2년뿐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3년 동안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신문도 방송도 인터넷도 없던 세상인데 어떻게 그렇게 단 기간 동안에 유대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생님이 되었을까요? (제가 사도요한의 역할을 제외 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랐습니다. 권위가 있으면서도 부드러웠습니다. 지식을 뽐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픈 서민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급 부상하자, 그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가 생깁니다. 기득권을 가졌던 세력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슈퍼스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금 행동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활동한지 2년 뿐이 되지 않았는데도 이런 상태라면 기득권층에게는 큰 위협입니다. 빨리 어떤 트집이라도 잡아 누명을 씌워 죽이기로 작정을 한 상태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부터 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들어주십시오.
그리고는 건방지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율법에서 모세는 약혼한 처녀가 다른 외간남자와 간음을 하면 돌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판결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방금 들으셨듯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먼저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올 필요 없이 모세의 율법대로 스스로 처리하면 됩니다. 그런데 굳이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온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겠죠?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의 음모보다 더 소름 끼치는 사실이 있습니다. 정말 쇼킹하도록 놀라운 것은 여자를 죽이겠다고 데려온 장소가 성전이라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자를 돌로 쳐 죽이겠다고, 손에 돌을 들고 온 겁니다. 상상이 되시죠?)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작전은 완벽 했습니다. 예수님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만일 ‘여자를 용서하라’ 이렇게 판결을 하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단임을 선언하는 꼴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이단이다’라고 말하고 군중들에게 떼어내고,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만일 '죽이라'고 하여서 그 자리에서 여자가 돌에 맞아 죽게 되면 일은 더 커집니다. 예수님은 위선자가 됩니다. 그 동안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을 돌보았던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위선이 됩니다. 이 역시 예수님을 군중과 떼어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군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예수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정말 완벽한 작전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바램 대로만 되면, 종교 기득권을 가진 무리들은 귀찮은 경쟁자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성경구절을 쓰고 있었다면 간음에 대한 모세의 율법을 쓰시지 않았을까요? 죄명을 쓰는 것은 판결하는 재판관들이 늘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요. 그런 상상이 가능하게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간음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 해석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 28절입니다.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네, 만일 예수님이 땅에다가 쓴 내용이 성경을 쓰셨다면 모세의 율법을 쓰고, 그 밑에 이렇게 해석을 하셨을 겁니다. 간음이란, 마음속으로만 음욕을 품었다고 해도 간음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보고 계속 판결을 내려달라고 다그쳤습니다. 예수님을 주시해서 보고 있었겠죠.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쓰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궁금해서 예수가 쓰는 글을 모두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쓰기를 다 마친 후에 판결을 내립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여자에게 먼저 돌을 던져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글을 쓰시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솔로몬의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도 예수님의 이 판결이 솔로몬의 판결처럼 명 판결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둘로 쪼개라” 이렇게 판결하면 즉각적인 반응이 엄마에게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여자를 죽이겠다고 몰려온 수많은 군중들이 있습니다. 그 속에 또라이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 또라이가 말이 끝나자 마자 돌을 던지기 시작하면, 군중심리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돌을 던질 것이 뻔합니다. 정말 위험한 판결이지요?
그런데요. 우리가 중동의 관습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위험한 판결이라고 느껴집니다. 사실 이 판결은 정말 현명하고 지혜롭고 완벽한 판결입니다. 여인을 살리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숨겨진 의미가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입니다. 모여있는 군중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구약성경인 ‘토라’를 듣고 자랐습니다. 여자를 정죄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있습니다.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먼저 돌을 던져야 하는 사람일 겁니다. 여인의 죽음에 대하여 먼저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판결하였지요?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돌을 던지는 증인은 죄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야 공의가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죄 지은 자들이 죄 지은 다른 자들을 정죄하는 사회는 악의 소굴입니다. 그런 짓은 사실 마귀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땅에 쓰신 성경이 간음에 대한 모세의 율법에 대한 해석이었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더 망설여 집니다. 율법에 대하여 이해를 하고 있다면 더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겁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
“야, 저 여자 정말 예쁜데.” “저런 여자가 내 아내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여자와 살면 소원이 없겠다.” "저 여자를 만지고 싶다." 전부 간음한 겁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솔로몬의 판결보다 더 기가 막힌 판결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돌을 먼저 던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자를 정죄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왔습니다. 선량한 의도가 아니었지요. 그것은 그들의 명백한 죄입니다. 여인의 죄와 똑같은 죄가 자기들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들켜버렸다. 예수님은 벌써 우리들의 죄 된 마음을 다 알고 있네...’
사람들이 일제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보았을 겁니다. 차마 먼저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가지고 왔던 돌을 ‘툭’하고 떨어트리고 돌아섭니다.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다음 기회에 예수를 잡아야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돌을 떨어트리고 돌아서자, 연쇄적으로 돌이 사람들의 손에서 떨어집니다. “투두두두둑.”
어른부터 시작된 양심의 가책이 점차 연쇄작용을 일으킨 겁니다. 젊은이들까지 모두 돌을 던지고 다 성전을 빠져나갑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한 사람들이 어디로 갔느냐? 누가 너를 정죄하였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렇다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여러분, 예수님이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일까요? 우리가 그렇게만 이해를 하면 하나님 말씀을 절반만 이해 하는 것이 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여인에게 내려지는 은혜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가장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 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금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여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정죄하고 심판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정죄하여 심판만 할 뿐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는 시대가 왔습니다.
두 번째로, 지금 예수님과 여인이 서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제가 이 교회 안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들어 달라고 부탁 드렸습니다. 성전은 심판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죄를 정죄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성전은 정죄된 죄를 용서하는 장소입니다. 성전은 은혜가 넘쳐 흐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참 성전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 말이 아직은 간음한 여인에게만 선포하는 것으로 들리시지요?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비록 네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를 저 질렀을지라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겠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나는 네가 그렇게 하였으면 좋겠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시는 핵심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가능한 이유가 오늘 여인에게 말씀하신 이 은혜의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 선포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 모두에게,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선포된 은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어떤 이적이나 표적을 다 합친 다고 해도,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이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제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두 손을 모으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실패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성전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교회 안으로 끌고왔습니다. 그리고는 정죄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전은 실패한 사람을 죽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실패한 사람을 정죄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모인 곳을 우리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인 여러분은 실패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나를 모욕하고, 욕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향하여 같이 욕하지 마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요?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교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구원이 나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기뻐하시고, 감사하시고,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셔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는 겁니다. 간음한 여인처럼 실패한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겁니다. 오늘 나를 돌아보고 다시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이 나오 실 때까지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1. 톰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 (서울: IVP 2011) pp157-62
2. 이필찬, 『진리가자유케하리라.요한복음』 (서울:엔크리스토 2009) pp397-417
3. 브르스밀른, 『BST주석, 요한복음』 (서울:한국기독학생출판 2009) pp161-5
설교자 메모:
구약 성경에서 간음을 이야기 할 때, 대부분은 남녀의 관계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신약의 이야기라고 착각을 하는데, 사실은 구약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간음이라고 말하고 해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중적으로 판단을 하여야 한다. 여자에 대한 간음이 아니라 신부의 간음에 대하여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여자로 묘사한다.(이스라엘 이라는 단어는 여성형이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이스라엘은 신부이다. 그런데 결혼할 신부가 간음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간음을 하였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겼다. 그것이 간음이다.
이 시대의 하나님 신부는 누구인가? 바로 교회이다. 성도 이다. 교회는 어떤 간음을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간음을 하는가? 그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싫어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경배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 만을 우상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교회가 교회 본연의 일을 행하지 않는 것, 목사가 우상이 되고,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사랑하는 것. 사실 그 모두가 교회의 간음이다. 성도의 간음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는 그 모든 것이 간음이 될 수 있다.
끔직한 경고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다행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1 > 요한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22) 하나님은 왜 고난을 허락하실까?(1) 요9:1-3 (0) | 2018.04.26 |
---|---|
요한복음(2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27-36 (0) | 2018.04.25 |
요한복음(19) 거짓제자,참제자. 요6:35-46 (0) | 2018.04.20 |
요한복음(18) 아버지의 뜻. 요6:35-46 (0) | 2018.04.14 |
요한복음(17) 하나님의 일. 요6:25-29 (0) | 2018.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