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1) 동백두레교회/주일예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2017.11.05. 한스킴
요한복음 8:27-36
27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28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
(1) 예수님과 서기관.바리새인의 차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가 탄로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 추종자들은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같은 때마다 매번 알 수 없는 이유로 실패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러시안룰렛이라는 고문을 아시나요? 총알 한발을 탄창에 넣고 사람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미친 짓입니다. 가장 무자비한 고문이지만, 효과 100%입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싸움이 러시안룰렛 같습니다. 예수님은 결국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게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매번 총을 당겨도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방아쇠를 당기면 끝난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방아쇠만 당기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해결되는데, 지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왜 당길 수 없었을까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초막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는 성전 전체를 밝히는 불기둥을 만들었습니다. 광야생활 동안 자기 조상들을 인도해 주었던 불기둥을 재현하는 겁니다. 성전이 빛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그 빛이 가득한 뜰, 헌금함 앞에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무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더 없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싫은 사람의 이야기는 귀 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행하시는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했습니다. 소외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함께 있어주고, 함께 이야기를 하시고, 가르치시고, 그들의 병도 고쳐주었습니다. 그 선한 은혜를 사탄의 짓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최소한의 상식도 없는 거죠? 무엇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자기들이 받아야 할 존경의 자리를 예수님이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내가 저 존경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싫은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올바르지 못한 신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들을 높이는 신학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과 서기관들은 같은 일을 합니다. 마가복음 1장 22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더라”
서기관도 예수님과 같이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가르친 그대로 말했습니다. 임의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선포되므로 권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일하는 아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아들을 하나님은 기뻐했습니다. 항상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면 서기관들은 어땠을까요? 성경을 이야기 했지만, 그 성경을 자신들이 높아지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율법으로 백성들을 가르쳤고요. 모세의 율법에 더하여서 자기들이 만든, 지키기도 불가능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모두 지키므로 ‘경건한 사람이다’ 라고 스스로 높아졌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높아지지 않고 설교하는 목사가 더 높아지고, 칭송 받고, 신격화 된다면. 그 목사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서기관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하는 목사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런데요, 그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정말 대견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 서기관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보니,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그 대견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는 제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를 전하는 성령이 있기 때문인데요.) 그런 이유로 진리를 전하고 있는, 그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됩니다. 뭔가 의심해야 할 단어 하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입니다.
죄와 죽음의 속박을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 자유를 얻게 되면 세상이 나를 속박하여도, 병이 나를 속박하고 있어도.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얻게 될 그 자유를 알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나를 속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말 쉬운 구원 공식을 우리에게 전해준 겁니다. 우리는 이 말이 믿어집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너무 쉽게 알아지는데요.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믿어지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최적화 된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내 말을 배우겠다고 나아오면, 너희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자연스럽게 알고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너희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받게 된다.” 이렇게 공식처럼 믿어집니다. 주입식 교육 덕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라고 주입식 교육으로 토대가 잘 만들어진 민족입니다.
우리는 잘 이해하고 믿어지는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유대인들은 특이한 것을 찾아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에서 무엇을 찾아내는 줄 아십니까? ‘자유’라는 말에서 ‘속박’이라는 의미를 찾아냅니다.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자유라는 단어에서 속박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론하고,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질문을 받아서 그 질문을 주제로 다시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끼는 문장들 중 많은 부분이 사실은 회당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가르칠 때 질문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고작 한다는 것이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야. 선생님이 말합니다. ‘자 질문해봐, 이해 안 되는 것 있어?’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죠? 뭐라고 하죠? ‘없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질문이 없도록 가르치는 선생님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지 않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질문을 하지 않아야 끝나고, 빨리 끝나야 쉬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잘난척 질문하는 친구가 제일 얄미웠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냥 선생님의 가르침을 흡수하는데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도록 교육 받은 민족입니다.(?)
여러분, 자유라는 말에는 너희가 전에는 속박 속에 있었던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은 아직도 죄의 종이다' 그런 의미를 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렇게 항의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노예 된 적이 없었는데, 왜 자유를 준다고 거짓을 말합니까?”
사실 이 말도 거짓이지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에굽의 노예로 400년 동안 살지 않았습니까? 또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으로 이스라엘과 유대가 멸망하여서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 70년 동안 종으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야 말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시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 어두운 역사를 들추어내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인격적인 부분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죄를 모두 들추지 않으세요. 성령님도 동일하게 일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4-36)
34절에서 36절까지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이겁니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누구냐? 라는 질문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가장’ ‘제일’ 중요합니다. 저랑 같이 살고 있는 아들의 표현에 의하면, ‘대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 추종자들에게 한결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나는 그 아들이며.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하고, 아버지가 하라고 허락한 말을 한다고 전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그들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 속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종입니다. 종 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의 종입니다.
마귀는요, 거짓을 생산하는 근원입니다. 세상에도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 속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낍니다. 진실과 진리 앞에서 가장 큰 불편을 느낍니다.
왜요? 마귀의 자식들, 마귀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종, 마귀의 아들이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겠다.’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진실일까요? 진실일 수 없지요. 거짓의 근원이 말하는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그런데요. 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 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아들의 이름은 진리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까? 진실만, 진리만, 정의만, 이야기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삶 자제가 진실입니다. 정의였습니다.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신 예수님은 종인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을 한마디로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게 말합니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누구냐?”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종은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기간이 되면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죠. 아들이 아버지의 권한으로 그 집에 영원히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종에게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의 어떤 모습도 털어 버려야 합니다. 죄의 종이었던 모습을 털어 버려야 합니다.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두 손을 모으시고, 생각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제자인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이 예수님 제자의 모습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은혜 안에서 살게 됩니다.
죄는 우리에게 마귀의 종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마귀의 종, 죄의 종에게는 결코 자유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는 기도를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나올 때까지 기도하시겠습니다.
1. 톰라이트, 『모든사람을위한 요한복음』 (서울: IVP 2011) pp167-75
2. 이필찬, 『진리가자유케하리라.요한복음』 (서울:엔크리스토 2009) pp453-73
3. 브르스밀른, 『BST주석, 요한복음』 (서울:한국기독학생출판 2009) pp165-75
'그런기독교는없습니다1 > 요한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23)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9:1-41 (0) | 2018.05.02 |
---|---|
요한복음(22) 하나님은 왜 고난을 허락하실까?(1) 요9:1-3 (0) | 2018.04.26 |
요한복음(20)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요7:53-8:11 (0) | 2018.04.23 |
요한복음(19) 거짓제자,참제자. 요6:35-46 (0) | 2018.04.20 |
요한복음(18) 아버지의 뜻. 요6:35-46 (0) | 2018.04.14 |